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도 현실은 다르지 않느냐고. 물론 다르다. 그러니 선택이랄 수밖에. 난 적어도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새장 밖은 불확실하여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백전백패의 무모함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새장 밖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새장 밖의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새장 안에서는 도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 한비야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새장 안에선 얼마나 평안한가? 누군가 시간이 되면 먹이를 가져다 줄 것이며, 맹수로부터의 접근은 일체 불가능한 곳. 그래서 평화롭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곳. 비록 날개짓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파란 창공을 날지 못하지만 애시당초 그것을, 또 그곳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은 망상일 뿐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소리친다. 새장 밖으로 나와보라고. 그곳이 때론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야만의 땅일지언정 한번 크게 날아보라고. 두려움에 떨었던 바로 그곳이 진정한 행복이 숨쉬는 곳이라고.

그러나 어찌하랴. 새장 속의 새들은 당장 눈 앞의 먹이가 걱정이다. 그냥 주어진 일만, 그러니까 잠시 노래를 불러준다거나 살짝 뛰어다니는 것만 잘하면 착착 주어지는 먹이를, 새장 밖에선 과연 어떻게 구할수 있단 말인가? 걱정이 태산이다. 무척 두렵다. 가슴이 뛰는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걱정은 하지 않는 삶을 저버리고, 궂이 열어젖힐 필요도 없는 열려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야만 할까?

새장 속에 갖힌 새들에게 한비야는 말한다. 새장 밖의 삶이 괴로워 혼자 감당하기에는 억울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에 겨워 말한다. 충만한 행복과 견딜수 없는 열정을 말한다. 분명 불확실하고 무모하고 백전백패의 가능성이 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니라고... 그러니 인생에 한번쯤이라도 가슴이 뛰는 삶을 위해 새장 밖으로 뛰쳐 나오라고 말이다.

그래, 나가긴 나가고 싶은데... 글쎄, 난 무엇에 가슴이 뛰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새장 속의 먹이가 열정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나 보다. 망각으로 빠져들게 했나보다. 새장 밖으로 뛰어나가기 전 먼저 내 가슴부터 점검해야 하려나, 아니면 일단 밖으로 뛰어나가면 가슴 뛰는 옛 기억을 되찾을수 있으려나? 한비야를 만나봐야겠다.(물론 책으로뿐이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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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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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난감했던 것은 이 책의 장르를 무엇이라고 해야할지였다. 문화인류학적 에세이가 가장 근접할듯 여겨지지만 글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고, 또한 테무진에 대한 인물평전같은 느낌을 지울수도 없었다. 게다가 책의 전체 줄거리를 꿰뚫을만한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마드적 인생 행로, 즉 유목의 삶에 대한 찬양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몽골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설득력에 동의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목이나 농경이라는 구분보다는 칭기스 칸의 권력에 대한 동경으로 정복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에도 쉽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실제 칭기스 칸의 행로를 쫓아가면서 체득하게된 현실감을 책에 그대로 살려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으로 국경을 확대해갈 수 있었던 이유들과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던 원인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참 흥미롭다. 마치 전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듯한 느낌을 주듯이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나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느낀다.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전술과 정보전에 대한 선견, 그리고 상대방을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획득하는 심리전 등은 마치 그가 현대의 전투를 치러내고 있는듯이 여겨질 정도다. 또한 중국의 왕조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보급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전략에 혀를 내두를수밖에 없다. 먹어야 힘을 내고 싸울텐데 그 먹는 것을 농경이 아닌 유목민적 특성으로 극복해나가는 장면은 정말 기발하다. 정복지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 얻어가면서 전진하는 모습. 농경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농경지를 파괴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땅을 짓밞음으로써 초원을 생성하고, 그 초원을 바탕으로 양식을 얻어가는 모습은, 문명의 차이가 가져다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렇게 멈추어 서지 않는 삶은 정복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저 문물의 유통만을 통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통치의 방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칭기스 칸이 세계를 정복해 가는 과정 중 어떻게에 대한 하나의 해답일뿐이다. 그 어떻게의 매력만으로도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는 갑자기 라는 질문을 떠올려본다.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 (172쪽)는 그야말로 변명이다. 다른 국가를 침범하기 위한 구실일뿐인 것이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154쪽)는 병사 개개인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명분일련지도 모른다.

칭기스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131쪽)가 어떻게보면 계속해서 확장을 해야만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련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아마 이런 관점에서 칭기스칸의 정복을 설명하려 든 것 같다. 즉 약탈 경제로 이루어진 유목적 삶은 유통의 확장을 통해서 문물이 교환되어질 때에만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일단 국경이 정해지고 정체되어지는 순간 몰락의 순간이 다가올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크로드와 중세 유럽의 변화 아랍권의 몰락 등도 이러한 유통을 확장시킨 몽골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정복의 형태는 테무진 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칭기스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135쪽)라는 작가의 설명이 내게 있어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여겨졌다. 세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싶었던 욕구는 제국의 초기시절, 형제를 죽이면서 몽골을 통일시켰던 모습 속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칭기스칸이 후손들에게 절제를 강조했듯, 그 자신은 물질에 대한 어떤 소유욕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는듯이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냐, 없는냐가 보다 큰 관건이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그 순수한 통제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권력욕이야말로, 물질적 풍요를 위해 땅을 넓혀왔던 기존의 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통제라는 것 또한 그저 흐름에 대한 통제일뿐 문화나 언어, 종교에 대한 어떤 구속이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제국과는 또다른 양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물질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 물질적 생산의 토대를 착취하는 현재의 제국들이나, 종교적 박해를 가하는, 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피를 원하는 그런 국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듯이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노자가 말하는 소민과국의 유토피아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제국이라도 분명 착취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몽골이 특히 칭기스칸이 보여주는 인종, 언어, 문화, 종교에 대한 편견없는 자세는 지극히 놀랍다. 착취와 편견없이도 자유로운 교환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는 표본으로서 칭기스칸이 이끌었던 몽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것 같다.

사족: 제국을 확장하면서 활약하는 사절단의 대부분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과연 사절단으로 누가 뽑혀 갔을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자신이 팔아치운 노예들로 인해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책 곳곳에 숨겨진 재미들은 이것 말고도 상당하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장밋빛마냥 그려져 있는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몽골은 칭기스칸은 위대했다라는 생각을 전제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한 점 허물없는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게 만든다. 위에서도 썼듯이 절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욕은 전혀 통제할 수 없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질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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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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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첫 느낌은 어렵다는 것이다. 동화적 양식을 띠고 있고, 무한한 상상력을 지닌 이야기 덕분에 감탄하면서도,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아 난감하게 만든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세상은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시간에 따라 구성되어진 곳이 아닐수 있다는 것. 즉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음, 그렇게 말하면 안되겠다. 세상은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사람의 수만큼 많은 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무한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조금 작지만 괜찮아>와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교외의 집>에서 살펴볼 수 있을듯 싶다. 자동차 속에 그 자동차가 정차할 차고가 있다는 발상이나, 보이는 무한의 점을 향해 자신도 무한의 시간을 여행해야 한다는 것, 집안은 아무 것도 없이 바로 문과 문이 통하는 공간 등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무한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무한의 공간을 통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다른 단편 <미스라임의 동굴> 이나 <자유의 감옥>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길잡이의 전설>등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로 비쳐진다. 자유의 감옥이라는 표제 그대로 이야기의 촛점을 맞추어 읽다보면 마치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는듯한 착각에 빠져드는듯 싶다. 선택의 순간에 주어지는 무한한 자유가 주는 두려움과 불확실로 인한 공포로 인해 차라리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또는 누군가의 명령에만 그대로 따라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면 말이다.

현실이 괴로워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 탈출의 경로를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그를 더욱 괴롭힌다. 그래서 미스라임의 동굴 속의 그림자는 빛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바로 문 앞에서 돌아서며, 자유의 감옥 속의 주인공은 결코 미래의 어떤 문도 열어젖히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가 막스 무토는 실제로 자신이 목표로 세웠던 것을 잊어버리고, 점차 눈 앞의 사태에만 매몰되어져 간다. 길잡이는 끝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합으로써 꿈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유 앞에서 주춤하는 이들 주인공들이 모두 비참하다거나 불행해보이지는 않는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불쌍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네 마음 속에서 동경해온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면,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을거야.

<미스라임의 동굴> 의 레프요탄 박사의 말이다. 레프요탄은 과연 현실의 고통을 없애주는 정치가인지, 아니면 진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가짜 세상속에서 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독재자인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다. 따라서 위의 말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즉, 훨씬 자유로운 몸이 실제론 자신을 구속하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읽어나가는 어려움이다.

물론 이런 혼돈은 개인적인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금 내가 혼란스럽게 책을 읽어나간 것은 현실의 내가 혼란한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며, 이런 혼란한 세상 하나를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게 뭐 어쨌다는겨'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꿈을 꾸는 것이 행복한 그런 세상 또한 나는 가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자유의 감옥>에 나오는 인샬라처럼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고 현실 속에서 눈이 먼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꿈이 구속이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꿈이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는 세상의 문을 향해 다가가 마침내 그 문을 열어 젖힐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바로 이 희망도 또는 반대로 절망도 이 책 <자유의 감옥>에선 독자들 스스로가 선택해서 취하는 책이 펼쳐놓은 천차만별의 세상일련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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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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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하고 엄청난 피해가 일자 미국은 아우성이다. 늑장대응이라는 비난과 함께 인종차별 문제까지 들고 일어났다.  게다가 허리케인 5등급의 리타가 다시 멕시코만을 위협하자, 이번엔 지구온난화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던 부시를 질타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 색깔을 띠고 있는 공격성 비판으로 보이긴 하지만 일견 무시못할 부분이기도 하다. 온난화로 인해 허리케인의 강도가 거세어지고 있다는 분석은 아마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문제와는 별도로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면, 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른 문명의 문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듯 싶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낙관 속에 빠져 있다. 배가 터지게 먹고나서 소화제 먹으면 된다는 식의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반면 온난화에 대한 논의에선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자는 식의 해결책이 나오고 있다. 즉 배터지기 전에 조금 덜 먹어보자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구가 따뜻해지면 지구의  온도를 떨어뜨릴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보자는 방식이 아니고서 말이다.  문명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인간의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자는 생각은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조금 비켜간 겸손한 방식일지도 모른다.(물론 여기에도 선진국이 후진국에 대한 오염수출산업이라는 경제논리가 숨어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책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바로 이런 근거없는 과학적 낙관론을 기반으로 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돋보인다.

갑자기 돌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지금 이 순간, 이 돌은 서구과학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결정체가 된다. 계산, 증오, 희망, 공포,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떤 공감보다도 강한 것- 돈을 바라는 욕망.

그러고 보니 이 책이 마치 문명비판서처럼 느껴질련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시계에 의해 자신의 삶을 지탱해간다. 거기에 약간의 변화만 주면 거의 언제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또한 '스밀라...' 는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다.

한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자살로 생각하지만 주인공 스밀라는 절대 자살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것은 옥상 위에 남겨진 아이의 발자국 모양새를 보고서 판단한 것이다. 스밀라는 그린란드인으로서 눈과 얼음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 스밀라는 왜 아이가 죽었는지 알아보려 한다.

소설은 아이의 죽음을 발단으로 그 뒤에 감추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지는지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155센티미터의 스밀라가 톡톡 내뱉는 말이나 갑작스런 행동들 하나하나는 그녀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든다.

자신에게 잉여가 있을 때나 사랑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초적인 본능들, 굶주림, 잠, 안전에 대한 요구로 환원되고 나면, 사랑은 사라지고 만다.

라고 이야기하는 스밀라는 그러나 그 밑바탕에 한없는 애정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소년의 죽음으로 치부할 수 있건만 그녀가 그토록 그 죽음의 원인을 캐고자 했던건 아무래도 소년을 사랑했기 ‹š문이리라. 때론 냉소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한듯 보이지만, 그녀는 삶을, 자유를 사랑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현대인의 외로운 사람들을 그대로 비쳐주는 것 같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사람들, 하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한없는 따뜻함. 스밀라는 바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자,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체온이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건의 얼개와 그것을 풀어가는 캐릭터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흥미롭기 때문이다. 

스밀라는 이 소설을 통해 삶과 자유는 욕망의 크기를 줄여나갈때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로운 이들이여, 스밀라를 사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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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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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잠정중단되고 업무복귀가 이루어지던 다음날. 선배 한 분이 이 책을 선물했다. 나는 항상 선물을 받을 때면 책의 앞장에 아무말이라도 하나 써주라고 요구한다.(선물 받는 것만도 고마운데 참 뻔뻔스럽게도...) 선배는 정말로 쓰고 싶은 말은 책의 앞 표지에 쓰여져 있다고 했다. 그럼 다른 말이라도 써 달라고 했다. 그래서 쓰여진 말은 우보천리(牛步千里). 그리고 여기 책의 앞 장에 쓰여진 머리말을 옮겨본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아마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전해주고픈 글귀였는지 모르겠다. 또한 파업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좌절하지 않고 함께 지켜갔다는 동지애에서 비롯된 말이었는지도. 즉 위의 인용문 중 '글' 대신에 '행동'으로 대치했을때 지난 66일간의 지난한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건대 이번엔 책의 뒤표지에 쓰여진 글귀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비록 내가 지식인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대한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간 파업이라는 고통을 감수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책을 선물한 선배와 나와의 공통점은 파업이 결의되기전 회사를 떠나려했다는 것이다. 각자 인생의 계획대로 걸어나가기 위해서 결단의 순간이 왔다고 여긴 순간, 노조가 파업을 결정했다. 파업이 들어가기까지 3,4일간 고민의 시간이었다. 파업이 그냥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과감이 떠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임금의 문제가 아니라, 경영인의 비도덕성, 무능함을 사원들에게 전가하는 뻔뻔함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냥 떠나버리면 간단히 끝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업의 성격이 이러하니 차마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즉, 리영희 교수가 말하는 회피나 기권으로 얼버무리기는 싫었던 탓이리라. 그래서 선배와 함께 힘든 길을 선택했다. 내가 계획했던 인생의 행로가 다소 늦추어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 값진 일일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다시 업무복귀. 파업은 잠정 중단이다. 실패로 끝났거나 성공했다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중단은 또다른 문제다. 결정이 어느 쪽으로든 났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막막하다. 아마 그런 속내를 알고 있는 선배로서, 그리고 같은 고민을 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선물했을듯 싶기도 하다.

아, 부끄럽다. 리영희 선생은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때 북한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했다며 난리를 피울때 완전히 다른 의견을 내비친 기사 한꼭지를 읽으면서 알게됐다. 70,80년대 사상적 스승이었던 그 분의 책을 한권도 접하지 못하고, 사회 생활로 내처졌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리영희 선생의 삶은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의 표본이다. 말 그대로 사회와 권력집단이 심어준 우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이성으로서 맞선 치열한 삶이었다. 그의 글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고, 감추어진 공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기에, 커다란 힘을 갖는다. 아무리 그를 깎아내리려 하거나 글에 대해 비판하려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은 철저한 탐구에 있다. 단순히 어떤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장들이 허구임을 그들의 자료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그리고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의 흐름을 모두 통찰함으로써 이 나라 이 곳의 진실을 건네주려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의 글로 인해 옥고도 3차례나 치른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의지로 인해 형벌을 견뎌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권력의 폭압과 상황의 분기점에 직면했을때, 자신의 사상적 자기충실을 택해야 하는 것을 보고, 한때 내가 심취했던 사르트르의 이른바 "자유는 형벌이다" 라는 명제가 처음으로 실감나게 와닿더구만(389쪽)

자기 자신에게 규율을 가하고, 그 규율이 자기 삶에 의미 있는 규율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에 따름으로써 보다 승화된 삶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488쪽)

지금 나는 굉장히 괴롭다. 아직도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으며, 갈팡질팡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라는 것이 힘들게 만든다. 참으로 꼿꼿한 지식인의 삶의 표상을 읽어가면서도 나는 어떤 선택을 하여야만 하는지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더 우습다. 삶은 더욱 팍팍해지고, 내가 겨누고 있는 적의 모습은 희미하다. 직접적인 압박이 아니라 일상을 죄어오는 시련에 차라리 기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외부의 문제보다도 내부의 문제가 점차 불거져간다. 사람에 대한 희망의 한편에 절망의 씨앗도 커져간다.

대화라는 책이 재미있는 것 중 하나는 에피소드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적 김소월로부터 시작해서 고은, 조정래, 백낙청 등등, 그리고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 중에 수습으로 들어왔던 김대중 주필에 대한 단상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장일순 선생과의 관계 등등, 현재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알려지지 않은 젊을적 모습을 읽어가는 재미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지금 나의 주변인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 사람들 내부에 감추어진 욕망의 씨앗은 과연 무엇을 쥐고자 하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을 꿰뚫고 오직 자유를 향해, 그 본질적 삶을 채우기 위해, 진실만을 향했던 리영희 선생의 지난한 삶은 존경스럽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기 때문이다. 회피하고 얼버무리면 편안할 것을...

아~, 나는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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