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나서 친구들과 소주 한잔(한병... 두병...)을 마셨다. 도저히 그냥 집으로 들어갈수 없게 만드는 쓸쓸함. 그 쓸쓸함을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 영화 속에서 다시 만났다. 일본 영화라 그런지 이번엔 소주가 아니라 정종을 냅다 들이켰다. 아 그 무어라 표현못할 지독한 상실감과 외로움. 가슴이 싸~아 하니 아려오는 고독감.

이 영화는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 사실을 모르고서 보더라도 하루키의 냄새가 지독히도 품어져나오니 금방 알아챌 것이다. 정말 너무나도 하루키적인 영화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아직도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미야자와 리에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영화를 보는 행복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잔잔한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영상은 자꾸만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시간은 그렇게 컷과 컷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 아름다운 시 한편을 보는듯한 감상에 젖어드는 것 같다.

토니 타키타니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토니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에게 이름을 묻고나선 항상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곤한다. 그래서 토니는 어려서부터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버지는 재즈 트럼본 연주자로 공연을 하는라 집을 비우니, 모든 것이 혼자다. 특히 혼자서 밥을 먹는 장면은 너무나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는 매끼 그렇게 혼자서 밥을 먹지만 그다지 쓸쓸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오호라, 토니도 그렇단다. 특별히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토니는 그림에 재주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들 속에 예술성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에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직 정확한 묘사만이 그의 그림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는 기계를 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밥벌이도 당연히 기계에 대한 그림으로 해결한다. 꽤 잘 나가는 일러스트가 된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일을 맡기려 온 에이코라는 여성에게 빠져든다. 사랑에. 그러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 것이였는지를 깨닫는다. 과거 자신의 삶은 감옥에 갇혀 산 것과 다를바 없다는, 고독은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이기에... 토니는 15살이라는 나이차를 극복하고 에이코와 결혼한다. 눈앞에 있는 행복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결혼 초기 굉장히 초조했으나 이내 행복이라는 일상을 즐기게 된다.

에이코는 정말 완벽한 여자처럼 느껴진다. 딱 하나만 빼놓고. 바로 쇼핑중독증. 특히 옷에 대한 집착이 크다. 거의 매일 새 옷을 하나씩 사들여야만 한다. 토니의 집 방 한칸은 이 옷들로 가득찬다. 그리고 갑작스레 다가오는 교통사고. 731벌의 옷만 남기고 에이코는 떠난다. 옷들은 에이코의 그림자처럼 다가와 점점 희미해져간다.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토니는 에이코와 똑같은 신체치수를 지닌 여자를 구한다고 신문에 공고한다. 에이코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발견한다. 그 여자에게 에이코의 옷을 입어달라고 요구한다. 여자는 그 옷들로 가득찬 방에서 조용히 흐느낀다. 토니는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며 채용을 취소한다. 그리고 옷들도 다 팔아버린다. 몇 개월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퓸인 재즈음반이 그 방에 들어가 있다 이내 다 팔아치운다. 그리고 관련된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은 빈방, 토니는 <혼자서> 옆으로 드러누워있다.

아~ 그 상실감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그곳에서 얼핏 나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나의 가슴 한 켠은 차디찬 겨울이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토니.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정말 울고있진 않을 것이다. 울지마라, 부디.

한 모임에서 에이코와 사귀었다던 남자를 만난다. 에이코의 이상한 성격을 감당하기 힘들었지 않았는냐는 질문에 에이코에 대한 것은 이제 모두 잊어버렸다고 답한다. 하지만 에이코를 그렇게 욕하지 말라고,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고 소리친다. 아, 다 잊어버렸단다.

술을 마시던 친구는 그게 가능하단다. 자기도 실연의 아픔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경험이 있단다. 마음의 벽을 쌓아두면 기억의 통로가 막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 애써 슬퍼하지 않으려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자기 <봄날은 간다>가 떠오른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던 그들이.

추억은 누구에게는 기억으로, 누구에겐가는 망각으로 남겨지는가 보다.

외로움을 알아버린 한 사내의 치유되지 않을 상실감이 이내 나를 술의 바다에 빠뜨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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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10-0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타키타니,,, 흠...거 심상치 않은 작품일듯...
하루살이 님은 잔뜩 흔들어놓다뉘...

하루살이 2005-10-0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쓰려... 후유증이 크답니다^^

icaru 2005-10-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영화 봐버렸다지요........ 아!!
알고 읽으니.... 다시 보입니다... 퍼갈께요~
그러고 보니..... 거의 1년 동안 하루살이님이 달고 계셨던 이미지 간판을 토니 타키타니로 바꾸셨군요~ 흠...발견!!

하루살이 2005-10-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 사람들에게 하루키 좋아하느냐고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좋아한다면 꼭 보라고 주접좀 떨었죠. 욕먹을 각오하고서. 그런데 이카루 님께서도 괜찮게 보셨다면 다행입니다. 휴~ 살았다. *^ㅇ^* 아마 당분간 간판은 안바뀌겠죠.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엔...

icaru 2005-10-3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와 쇼자부로(?토니 아빠)역을 한 사람이 맡고, 에이코와 또 다른 여자(신체 싸이즈가 같은) 역을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면서요... 전혀 눈치 못챘다 아닙니까...동일 인물이 맡았다는 거..

하루살이 2005-10-3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 친구와 둘다 1인 2역이지 하면서 극장밖을 나오던 생각이 나네요.^^
 
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 소설이나 서스펜스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장르는 대략 3가지로 흘러가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첫째는 사건이 일어난 후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 종반부에 이르러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사람이 진범임이 드러났을 때 이야기는 극도의 쾌감을 전한다. 두번째는 범인을 미리 밝혀주고, 범인을 잡고자 하는 주인공과 아슬아슬한 추격전. 과연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으며,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지가 흥미진진하다. 세째는 범인이나 또는 추격자의 트릭.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또는 범인을 어떻게 유인해서 잡아들이는지에 대한 방법 그 자체가 흥미를 끌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소설 <백야행>은 이 세가지 부류로 구분하기에는 어려울듯 싶다. 물론 소설의 종반부에야 범인을 확실히 밝힌다는 점에서 첫번째로 볼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관심있게 책을 읽는다면 아마 첫 살인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범인을 예상할 수 있다. 소설을 읽어가면서 혹시나 결말 부분에 어떤 반전이 숨어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지만 그건 그냥 기대로 묻어두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두번째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범인을 드러내놓고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은 하지만 정작 본격적인 추격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군다나 새로운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첫번째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세번째 분류에 속해 기상천외한 어떤 트릭을 숨기고 있는냐 하면, 실제로 책을 읽어가면서 범죄의 방법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비껴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 도대체 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는단 말인가? 솔직히 범인도 이미 알아챘고, 기발한 방법이 동원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으론 책을 읽는 동력이 조금 모자라다. 그래서 중반부의 후반부터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않다. 그럼에도 책의 결말을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도대체 왜 이 사건은 발생한 것인가? 라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 바로 왜라는 측면에 이 소설의 재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오사카의 한 동네. 전당포 가게 주인이 짓다 만 건물의 내부에서 시체로 발견되어진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후 근처 아파트에 살던 주부 한 명이 자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이유로 죽는 일이 발생한다. 두 사건은 연결된듯 하지만 그 고리를 찾을 순 없고 결국 유야무야된다. 시간은 흘러 전당포 가게 주인의 아들과 주부의 딸이 초등교 5년에서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또 고등학생이 되고... 이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선 이상하게도 계속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첫번째 사건이 발생한 후 19년간의 행적을 담아낸 소설은 마침내 범인을 밝히고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를 이야기한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 사건의 발단은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로리타 컴플렉스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유아에 대한 성의 집착이나,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선 자식도 팔아먹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없는 엄마 등등.

원래 자신에게는 모성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야에코는 생각하고 있었다. 료지를 낳은 것도 아이를 원해서였던 것이 아니라 낙태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스케와 결혼한 것도 이것으로 일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답답하고 따분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내와 엄마가 아닌 늘 여자이고 싶었다.(하권 257쪽)

상처받은 자가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받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남에게 주고 마는 세상의 섭리가 무서워진다. 그것이 섭리가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의 행태라면 좋을 것을... 세상은 가끔 낮이 찾아오지 않는 끝없는 백야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 백야를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해할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함께 서려있는, 조금은 허탈한 추리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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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최근 TV에서 본 광고 중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다. 아마 샴푸 광고인듯 싶은데, 검은 머리의 모델과 금발 모델의 뒷모습이 먼저 비쳐진다. 그리고 머리를 묶는데 금발은 포크로 흑발은 젓가락을 이용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신체적 특성이 다르듯 그에 맞춰 다른 성분의 샴푸를 써야 한다는 내용인데, 그 차이를 음식문화로 표현하는 것이 상큼했다. 신토불이의 감성은 이런 곳에서도 통하는가 보다.

죽비소리라는 이 책  또한 이런 신토불이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명상집이나 금언집의 대부분이 서구의 것이거나 또는 중국의 것이기에 뜻깊은 시도로 보여진다. 저자는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글 소중한 한마디 한마디를 평소에 기록해두었다가 한권의 책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명상집이라는 것이 <으례 그렇듯이> , 종교의 절대 명령이 서로 비슷한 것처럼, 그 언어가 다를지라도 사상, 생각은 굉장히 비슷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호흡을 느끼면서 접하는 글들은 왠지모를 친근함을 준다. 그렇다고 그 친근함으로 말미암아 선조들이 남긴 교훈이 결코 쉽게 넘길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다.

특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일깨우는 장章은 그야말로 잠자고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따끔한 죽비를 내리치는 것과 같다. 여현광의 물욕이라는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 김유신의 애마에 얽힌 사연과 언뜻 비슷해보인다. 여인을 찾아 길을 나선 밤, 문을 두드려도 아무 기척은 없고, 홀로 기다리다 연못을 바라보니 일렁이는 자신의 그림자. 언뜻 스쳐지나가는 참회. 내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위해 서 있는가? 이내 자신의 마음 속에 가득찬 욕심을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꼿꼿한 선비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과연 모든 욕은 끊겨야만 하는 대상일까 의구심이 스며든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이 있다.

1.생리적욕구
2.안전의욕구
3.사랑과 소속의 욕구
4.승인과 존경의 욕구
5.자기실현의 욕구

현광이 버리고 갔던 것은 생리적 욕구였을까? 아니면 사랑과 소속의 욕구였을까? 어쨋든 현광이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열중했다면 그것은 승인과 존경의 욕구이거나 자기실현의 욕구때문이었으리라 본다. 그리고 이런 욕구들은 앞의 생리, 안전, 사랑, 소속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어졌을때 가능한 것이리라. 즉, 현광은 이미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욕망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너무 무례한 생각인가?

아니면, 옛 선비들이 말하는 욕구의 절제라는 것은 앞의 욕구를 뛰어넘어 바로 자기실현의 욕구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그런데 현광의 그런 자세에 감동을 받는 나는 왜 그런가? 아마도 현실이 구질구질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리적 욕구도 안전의 욕구도 소속의 욕구도 언제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것에 게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으로부터 남모를 동경을 품고 있는 것일까? 꿋꿋해지자라고 손을 꽉 움켜쥐어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책이 책 속에서 말하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을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을 읽고 나서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끄는 책, 또는 그런 삶을 향한 태도와 자세를 갖도록 만드는 책이 아니라면, 그 책은 이미 죽어 있다는 글을 통해 책을 선정하는 기준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소일거리, 재미거리로 읽는 책은 다른 성질의 것이기에 논외로 치고서 말이다. 책을 읽고 나서도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는 공자의 말씀이 다시 와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죽비에 잠깐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잠이 들련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이 들 무렵 가끔씩 책을 펼쳐 나를 깨우는 죽비소리를 청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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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5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0-0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비 품귀 현상일어나겠군요.ㅋㅋ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해도 현실은 다르지 않느냐고. 물론 다르다. 그러니 선택이랄 수밖에. 난 적어도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새장 밖은 불확실하여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며 백전백패의 무모함뿐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새장 밖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새장 밖의 충만한 행복에 대해 말해주고 싶다.

새장 안에서는 도지히 느낄 수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싶다.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오늘도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그 일은 무엇인가?

--- 한비야의 <지도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새장 안에선 얼마나 평안한가? 누군가 시간이 되면 먹이를 가져다 줄 것이며, 맹수로부터의 접근은 일체 불가능한 곳. 그래서 평화롭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곳. 비록 날개짓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파란 창공을 날지 못하지만 애시당초 그것을, 또 그곳을 알지 못했으니 그저 그것은 망상일 뿐일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소리친다. 새장 밖으로 나와보라고. 그곳이 때론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야만의 땅일지언정 한번 크게 날아보라고. 두려움에 떨었던 바로 그곳이 진정한 행복이 숨쉬는 곳이라고.

그러나 어찌하랴. 새장 속의 새들은 당장 눈 앞의 먹이가 걱정이다. 그냥 주어진 일만, 그러니까 잠시 노래를 불러준다거나 살짝 뛰어다니는 것만 잘하면 착착 주어지는 먹이를, 새장 밖에선 과연 어떻게 구할수 있단 말인가? 걱정이 태산이다. 무척 두렵다. 가슴이 뛰는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걱정은 하지 않는 삶을 저버리고, 궂이 열어젖힐 필요도 없는 열려진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서야만 할까?

새장 속에 갖힌 새들에게 한비야는 말한다. 새장 밖의 삶이 괴로워 혼자 감당하기에는 억울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에 겨워 말한다. 충만한 행복과 견딜수 없는 열정을 말한다. 분명 불확실하고 무모하고 백전백패의 가능성이 있지만 꼭 그것만이 아니라고... 그러니 인생에 한번쯤이라도 가슴이 뛰는 삶을 위해 새장 밖으로 뛰쳐 나오라고 말이다.

그래, 나가긴 나가고 싶은데... 글쎄, 난 무엇에 가슴이 뛰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새장 속의 먹이가 열정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나 보다. 망각으로 빠져들게 했나보다. 새장 밖으로 뛰어나가기 전 먼저 내 가슴부터 점검해야 하려나, 아니면 일단 밖으로 뛰어나가면 가슴 뛰는 옛 기억을 되찾을수 있으려나? 한비야를 만나봐야겠다.(물론 책으로뿐이겠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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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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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난감했던 것은 이 책의 장르를 무엇이라고 해야할지였다. 문화인류학적 에세이가 가장 근접할듯 여겨지지만 글은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고, 또한 테무진에 대한 인물평전같은 느낌을 지울수도 없었다. 게다가 책의 전체 줄거리를 꿰뚫을만한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마드적 인생 행로, 즉 유목의 삶에 대한 찬양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몽골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주하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설득력에 동의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유목이나 농경이라는 구분보다는 칭기스 칸의 권력에 대한 동경으로 정복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다.

400쪽이 넘어가는 분량에도 쉽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저자가 실제 칭기스 칸의 행로를 쫓아가면서 체득하게된 현실감을 책에 그대로 살려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으로 국경을 확대해갈 수 있었던 이유들과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던 원인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참 흥미롭다. 마치 전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듯한 느낌을 주듯이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나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느낀다.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전술과 정보전에 대한 선견, 그리고 상대방을 공포로 몰아넣음으로써 손쉽게 승리를 획득하는 심리전 등은 마치 그가 현대의 전투를 치러내고 있는듯이 여겨질 정도다. 또한 중국의 왕조들이 전쟁을 치르면서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보급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전략에 혀를 내두를수밖에 없다. 먹어야 힘을 내고 싸울텐데 그 먹는 것을 농경이 아닌 유목민적 특성으로 극복해나가는 장면은 정말 기발하다. 정복지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 얻어가면서 전진하는 모습. 농경민의 눈으로 바라보면 농경지를 파괴하고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땅을 짓밞음으로써 초원을 생성하고, 그 초원을 바탕으로 양식을 얻어가는 모습은, 문명의 차이가 가져다주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렇게 멈추어 서지 않는 삶은 정복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그저 문물의 유통만을 통제하고자 하는 새로운 통치의 방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칭기스 칸이 세계를 정복해 가는 과정 중 어떻게에 대한 하나의 해답일뿐이다. 그 어떻게의 매력만으로도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는 갑자기 라는 질문을 떠올려본다.

내가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니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을 달라. (172쪽)는 그야말로 변명이다. 다른 국가를 침범하기 위한 구실일뿐인 것이다.

몽골군은 전투에서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서 명예를 찾았다. (154쪽)는 병사 개개인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명분일련지도 모른다.

칭기스칸은 평화와 번영이 그 나름의 문제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았다(131쪽)가 어떻게보면 계속해서 확장을 해야만 할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련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아마 이런 관점에서 칭기스칸의 정복을 설명하려 든 것 같다. 즉 약탈 경제로 이루어진 유목적 삶은 유통의 확장을 통해서 문물이 교환되어질 때에만 그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일단 국경이 정해지고 정체되어지는 순간 몰락의 순간이 다가올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크로드와 중세 유럽의 변화 아랍권의 몰락 등도 이러한 유통을 확장시킨 몽골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참 재미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정복의 형태는 테무진 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칭기스칸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파괴했다(135쪽)라는 작가의 설명이 내게 있어서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여겨졌다. 세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싶었던 욕구는 제국의 초기시절, 형제를 죽이면서 몽골을 통일시켰던 모습 속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칭기스칸이 후손들에게 절제를 강조했듯, 그 자신은 물질에 대한 어떤 소유욕을 드러낸 적은 별로 없는듯이 여겨진다. 그에게 있어서는 오직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냐, 없는냐가 보다 큰 관건이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그 순수한 통제에 대한 집착이 가져온 권력욕이야말로, 물질적 풍요를 위해 땅을 넓혀왔던 기존의 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통제라는 것 또한 그저 흐름에 대한 통제일뿐 문화나 언어, 종교에 대한 어떤 구속이 없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제국과는 또다른 양태를 띠고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물질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 물질적 생산의 토대를 착취하는 현재의 제국들이나, 종교적 박해를 가하는, 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피를 원하는 그런 국가들에게 일침을 가하는듯이 보여진다.

개인적으로 노자가 말하는 소민과국의 유토피아를 동경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제국이라도 분명 착취의 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몽골이 특히 칭기스칸이 보여주는 인종, 언어, 문화, 종교에 대한 편견없는 자세는 지극히 놀랍다. 착취와 편견없이도 자유로운 교환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는 표본으로서 칭기스칸이 이끌었던 몽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것 같다.

사족: 제국을 확장하면서 활약하는 사절단의 대부분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과연 사절단으로 누가 뽑혀 갔을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자신이 팔아치운 노예들로 인해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책 곳곳에 숨겨진 재미들은 이것 말고도 상당하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장밋빛마냥 그려져 있는것 같아 아쉬운 부분이 있다. 몽골은 칭기스칸은 위대했다라는 생각을 전제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한 점 허물없는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게 만든다. 위에서도 썼듯이 절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욕은 전혀 통제할 수 없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어리석은 질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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