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떠나는 남자
로랑 그라프 지음, 양영란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은 돌아옴을 전제로한 떠남이다. 휴가란 여행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잠시 벗어나 있는 것. 그것은 나를 둘러싼 현실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나라는 이미지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라는 허상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특징지어지므로 그 관계를 벗어나게 되면 그 허상또한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과감히 그 고정된 나라는 상을 탈출할수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쉬어갈뿐인 것이다. 또는 나는 그대로인채 다른 사람들이나 환경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조금이나마 변화시켜줄 뿐이다.  

여기 <매일 떠나는 남자>라는 소설 속 주인공은 이런 휴가가 아닌 완전한 떠남을 바라는 남자다. 어디로 떠날지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날마다 떠날 것을 바란다. 지금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으로도 떠날 수 있도록 풍토병 예방 주사를 꼼꼼히 맞기도 하고, 여행지 카탈로그를 집안에 가득 쌓아놓기도 한다. 여행용 가방을 하나 사두고 그 안에 차곡차곡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사서 채워놓기 시작한다. 반면 자신의 집에는 언제든지 마음껏 떠날 수 있도록 점점 비우기를 시도한다.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이나 증오심을 품으려 하지 않고 어떤 일에건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한다. 이것은 완전히 떠나는 것을 방해할 사슬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이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일도 없는 그저 마음이 편안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그의 정신은 떠나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남자, 끝내 40년 동안 떠나는 계획만 세우고 떠나지 못했다. 20년 넘게 살던 원룸의 전세집도 주인이 바뀌면서 할 수 없이 옮겨야 할 처지에 빠졌을 때 비로소 호텔로 옮긴다. 그러나 그 호텔이란 것도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계속 거주하는 장소다.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 후 다음에 어디서 볼 것인가 물어본다면 그는 지금 이 호텔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임을 말한다. 결국 죽을 때까지 설문조사서 발표된 프랑스에서 가장 우울한 곳 캉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 이후 그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삶의 행보와 달리 느닷없이 나타난 아들 덕에 달로, 우주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번역자는 이 남자가 비록 실제론 떠나지 못했지만 나날의 삶이 떠남과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난 반대로 결국 떠나지 못하는 현대인의 비애를 이 남자가 대변하고 있는듯이 보여진다. 가지고 싶지 않아도 갖게 만드는 이 사회는 훌훌 털어버릴 수 없도록 만든다. 남기고 가버리면 될 것이지만 쉽지 않다. 모아놓은 시간과 열정이 그를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물함에 사표를 항상 써두고 떠날 준비를 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남자는 이 시대 셀러리맨과 닮아 있다. 그저 여행가방에 여행물품을 하나 둘 쌓아두는 것 이외에는 실제로 방 밖을 나서지 못하는 삶의 굴레.

도대체 사람들은 왜 떠나고 싶어할까? 그 욕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난 완벽한 떠남의 근저에는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혹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수 있다면 이라는 몽상과도 맞닿아 있는듯이 보여진다. 지금의 내가 꼭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의 나가 아닌 다른 나로서의 삶을 꿈꾸어 본다는 것은 왠지모를 해방감을 준다. 내가 놓여진 지금 이 곳에서 그런 변신을 시도할 수도 있지만 왠만해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꿈을 꾼다. 떠나는 꿈을. 그리고 그 꿈은 하루하루 매일 매일 떠나는 나를 보여준다. 그래서 나의 방안에도 여행가고 싶은 곳에 대한 정보가 적힌 쪽지들이 이쪽 저쪽에서 뒹글고 있다.  가끔씩 컴퓨터 앞에서 아름다운 그곳을 찾아 인터넷 여행을 떠난다. 나도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떠나는 남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게 못되고 경우없는 놈이 그토록 강하다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지만, 그놈은 어쨌든 강한 놈이었다.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물린 다리는 땅을 디딜 수 없이 힘이 빠졌고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허청거렸으나, 그 욱신욱신 쑤셔대는 고통은 모조리 나의 것이었다.(182~183쪽)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야 하고, 견뎌내지 못하다라도 견뎌내는 일인 것이다. 못된 놈이 강하고, 세상이 쑤셔대는 날카로움에 온 몸이 쑤셔대는 것.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내 몸으로 간직한다는 것이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개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상살이다. 뭐, 그렇다고 인간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가득찬 그런 소설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의 신산함을 개의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개는 절대 애완견이 될 수 없다.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살아가는 애완견마냥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므로, 당연히 소설 속 개는 땅을 밟고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는 개여야만 한다. 우리네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듯. 애완견마냥 발에 헝겊떼기를 감싸안고 살아갈 수 없는 우리네 삶이기 때문에.

주인공 보리는 진돗개다. 그는 댐공사로 수몰되는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에 찌들려 살아가는 어촌마을로 옮겨진다. 그렇다.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의 과거 이야기이다. 하지만 결코 과거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찢어진 가난은 여전히 우리의 고향에 존재하고, 우리네 삶은 여전히 신산스러우므로. 보리의 바람은 사람이 눈치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개의 마음으로 개의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개의 마음을 헤아리는 눈치 말이다. 개를 헤아리지 않더라도 사람들끼리라도 눈치를 잘 살피라고 말이다. 제멋대로 막가는 사람이 잘난 사람 대접받고 소신 있다 칭찬받는 개수작 부리지 않는 세상이기를,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부러운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콧구멍의 힘만으로 살아가지를 못해. 나는 좀더 자라서 그걸 알았어.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42쪽)

사람들은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 부대낌이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고, 슬프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행로다. 그 행로에 항상 눈치를 보아가며 서로를 따듯하게 대해줄 힘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는 약한 존재다. 그래서 발바닥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굳은 살이 바로 살아가는 힘이 된다. 굳은 살이 박히지 않는 개는, 아니, 사람은 조그만 진흙에도, 빙판에도 거꾸러진다. 굳은 살은 비바람을, 눈보라를 이겨내는 힘이다. 삶의 상처다. 그리고 행복이다.

보리는 주인 아저씨의 죽음으로 모두 이사 가야 하는 주인집에 따라가지 못한다. 아파트는 진돗개가 살 곳이 못된다. 앞으로 보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 정처없고 예견할 수 없는 보리의 삶이 바로 나의 행로다. 그의 상처가 바로 나의 상처이지만 서로 핥아줄 혀를 지닌 동반자가 있으므로(있을 터이니) 삶은 아름다울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지나면 꽃은 필 것이다. 개는 그 꽃밭의 향기를 맡으며 힘차게 뛰놀것이다. 개의 굳은 발바닥을 찬양하며... 또 닥쳐올 스산함을 견뎌내야만 할 그 굳은 발바닥을... 사라지지 않을 그 스산함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마시멜로 이야기>는 성공을 향한 책이다. 그 성공이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날마다 똑같은 일상을 지겨워하며, 꿈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을듯 싶다. 고백하건데, 난 이 책을 읽고나서 제일 먼저 책상에 쌓인 먼지부터 닦았다. 과연 나의 이 행동이 얼마나 지속될련지 알 순 없지만 분명 자극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더군다나 달력에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크게 써 놓았다. 지금 그래, 바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어도 달력을 보는 그 순간만큼이라도 나를 돌이켜보라고...

이 책은 조지아라는 40대의 성공한 회장이 자신의 운전사 찰리에게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조지아가 어렸을적, 4살때 참가했던 한 실험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실험자가 마시멜로를 하나 준다. 그리고 15분간 먹지않고 참으면 하나를 더 주겠다고 약속한 뒤 자리를 뜬다. 조지아는 유혹을 이겨내고 마시멜로를 하나 더 얻어낸다. 실험에 참가했던 아이들을 10년후 다시 추적해본뒤, 그들의 학업성적이나, 집중도, 아이들과의 관계 등을 조사해봤다. 그랬더니,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었던 아이들에 비해 유혹을 이겨내고 마시멜로를 2개 얻었던 아이들이 모든 방면에서 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 실험 속에 다 드러나있다. 지금 당장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준비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인내심을 발휘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자에게만이 성공은 찾아온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광고가 있고 그것에 대한 패러디로 아버지는 망하셨지, 인생을 즐기다가 있다. 그야말로 이 마시멜로 이야기를 제대로 드러내주는 카피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신의 평생동안 마시멜로를 즐길 수만 있다면 당장 눈앞의 마시멜로를 집어 먹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구가 가장 드높을때 그 욕구를 충족한다면 그 가치가 제일 높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마시멜로는 당신의 인생에서 날마다 당신 앞에 놓여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실은 이런 이야기에 딴죽을 걸고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마시멜로야 상관없긴 하지만 그들이 갖는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그 마시멜로는 눈앞의 마시멜로를 먹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돌아가야 할 미래의 마시멜로를 다 가져가버려서 생긴 것은 아닐까? 또 세상은 이미 마시멜로를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바닥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마음껏 즐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 마시멜로로 또다른 마시멜로를 쉽게 얻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마시멜로는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쪽은 높은 산을 이루고 다른 한쪽은 깊은 계곡에 빠져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본다. 그러니 점점 더 계곡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마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아 산의 정상을 쉽게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련지.... (책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가젤과 사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자에게 잡혀먹지 않기 위해서 아침부터 가젤은 뛰어야 한다. 사자보다 느리면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사자 또한 아침부터 뛰어야 한다. 가젤보다 느리면 자신은 굶어 죽어야 하니까. 아침부터 뛰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그러니 모두 다 아침부터 뛰어라. ㅡ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라. 가젤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이 세상은 태어나면서 사자와 가젤로 구분지어 놓았다는 것을) 그래서 산 정상의 흙을 조금 퍼다 늪같은 계곡에 쏟아부어 애시당초 불평등한 관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해 누구나 보다 쉽게 정상에 올라설 수 있도록 하면, 그래서 평원사이에 조그만 언덕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은 없을까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런 상상의 세계, 그러니까 그런 나의 꿈이 실은 내가 나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러니 궂이 이 책에 딴죽만 걸 필요는 없을듯싶다.) 뭐, 내가 세상을 바꿔 새로운 세상을 만들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원대한 꿈을 꿀 정도의 포부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무엇인가를 해볼수 있지 않을까 라는 꿈 말이다. 그래서 나의 이 꿈을 수억개의 마시멜로로 생각한다면, 지금의 마시멜로를 집어먹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불연듯 든 것이다. 그래서 생각컨대 내가 아직 꿈을 잃지않았다면, 그리고 그 꿈을 그래도 한번쯤 이뤄볼 수 있을것이라고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꿈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서, 끊임없이 유혹을 이겨내며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날마다 반성하면서 말이다. 인생의 제2막을 꿈꾸며 마시멜로를 다신 한번 음미해보아야겠다. 꿈은 그저 꿈이라는 체념과 한탄에서 벗어날 용기를 이 책을 통하여 조금은 얻은것 같은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다치바나의 기행문이라니 귀가 솔깃하다. 실은 귀가 솔깃한게 아니라 눈이 반짝였다가 맞는 말이려나? 제목도 범상치 않다. 사색기행이라... 여행은 만사를 잊게 만드는 알코올과 같은 힘과 더불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주는 창조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서 드러난 다치바나의 여행은 모든걸 잊고 떠나겠다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다치바나의 여행은 휴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오히려 탐사에 가깝다.

그가 말하는 여행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자.

여행은 결국 만남이다. 만남은 본질적으로 계산이라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만남을 기대한다면 일정일랑 짜지말고 되어가는대로 몸을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26쪽)

여행의 패턴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여행의 본질은 발견에 있다. 일상성이라는 패턴을 벗어났을때 내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데 있다. (79쪽)

이렇게 그의 말을 써놓고 보니, 다치바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이건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다. 만남이라는 것도 그 목적의식에서 벗어나있지 않고,  그가 여행에서 발견한 것 또한 이미 작정을 하고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수확이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만남들이 우연히 전개되기도 하고, 꾸며진 일정표대로 움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잘 짜여진 여행계획표를 들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의 탁월한 취재능력에 있다고 보겠다. 그저 눈요기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묻고 탐구하는 일상의 자세가 여전히 여행지에서도 발휘된 탓에 그의 여행기는 르뽀처럼 보여진다.

특히 유럽 반핵 무전여행이나 팔레스타인, 뉴욕에 대한 글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지금이야 원하는 정보를 인터넷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손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겠지만, 다치바나가 여행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인상을 준다. 뉴욕의 경우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미래 예측이 현재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더군다나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 뒤에 감춰진 차별의 벽(시오니즘과 유태인, 팔레스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이슬람, 기독교간의,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간의 )을 들춰내는 그의 날카로운 눈은 그야말로 그가 말하는 새로운 발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여행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프랑스 여행이었다. 최상급의 포도주를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모두 느껴볼 수 있는 행운, 유럽의 치즈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최상의 사치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로 표현될때 느낌은 비로소 인식이 된다. ... 맛있다 좋다 시시하다라고 하는 것은 와인을 마시는 행위가 생리적 행위에 머물뿐 문화적 행위로 승화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할만큼 문화적 승화라는 최고의 특권을 누린 것이다. 이런 여행은 아무나 어느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가 말하는 패턴화되고 계산화된 만남이라는 여행의 본질과 먼 계획을 세우더라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부러움 말고 무엇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가 느낀 문화적 풍요로움을 글로서 조금 맛보는 것으로 만족, 아니 억울해하고 싶다.

그의 여행이 문화적, 정치적 발견이나 충격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인도 경험이나,  개기일식 체험은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수 있는 감성적 충격을 전해온다. 아마도 이런 급진적 체험은 자연의 경이를 통해서 느끼는 경우가 많을것 같다. 인간 또는 자신이라는 존재의 초라함을 발견하거나, 생명의 신성성을 경험한다는 것은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극대치가 아닐까 싶다. 개기일식 여행에서 소개된 사람들처럼 인생의 모든 목표가 개기일식 사냥으로 변해버릴 정도의 강렬한 만남, 그런 만남이 기다려진다. 또한 무인도의 경험같은 새로운 삶의 방식도 체험해보고 싶다. 

나그네의 발걸음이 아닌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래서 여행은 충격으로 또는 사색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임을 다치바나를 통해서 깨우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11-03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살이 2005-11-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술술 읽히거든요, 다치바나 책의 이상한 특징 중의 하나같아요.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가끔 그들의 강박관념을 엿보게 된다. 내가 심심해서 보는 영화들이라는 선입관이 강한 탓일까? 재미있으면 됐지 또 뭘 바라나?라는 심리를 그대로 제작쪽으로 돌리면, 재미있게 만들면 됐지 무얼 집어넣으려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리버티는 2002년 [폰 부스]라는 영화와 무척 닮아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채, 목숨을 저당잡히고, 상대방이 시키는대로만 해야 하는 처지의 긴박감. 한정된 공간만을 비추는 속에서 지루함을 잃지 않은채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기억나긴 하지만 <폰부스>에서는 저격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리버티>의 경우는 저격자도 대상자도 모두 다 드러낸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따라서 이야기의 집중은 무엇이 이런 무자비한 상황에 직면하도록 저격자를 이끌었는가에 있다. 무슨 이유 때문에로 이야기가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무척 잘 만들어진 것 같다.

자신의 딸이 학교 총기 사건으로 죽게 된 전직 CIA요원. 복수심에 불타 복수를 하면 그만일 터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단순한 복수로 끝내지 않고 보다 고귀한 무엇인가를 덧씌워야 한다. 물론 그것이 사건의 원인을 타당하게 밝혀내고 그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세상에 변화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가 이 곳에 메스를 들이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은 그래서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곳에 덫이 있다라고 말하며 경고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덫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작용하며 얼마만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 방식. 그저 덫이 놓여있는 곴까지의 풍경을 그려대다 갑작스레 덫을 이야기하면서 이야기의 충격을 크게 만드는 것이 할리우드식 표현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한대도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런데도 궂이 도덕적 포장을 하려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리버티의 주인공의 근본적 욕망은 복수심에 있었을 터이다. 직접적인 가해자를 대상으로 했어야 했겠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고 복수를 행하기에는 왠지 쉽지않다. 개별적 존재자로서 마주쳤을때 복수의 칼날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그 이유에 대한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전체 사회로 퍼져 나간다. 물론 실제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사건들도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눈덩이 자체에 대한 이야기 없이 느닷없이 발생한 눈사람만을 이야기하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근거 없는 음모 정도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정말로 진중하게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재미로 희석되어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러니 <볼링 포 콜롬바인>같은 영화가 사라지지 않고 꼭 계속해서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 방식이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더이상의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만 하지 않았으면 싶다. 단순히 이런 식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 부추기지 않았으면 싶다. 지극히 개인적으론 그냥 대놓고 복수를 행하는 타란티노처럼 스크린 속에서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할리우드는 할리우드로, 마이클 무어는 마이클 무어식 대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icaru 2005-11-0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버티는 안 봤지만... 볼링 포 콜럼바인, 폰 부스는 봤어요..
세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엮일 수 있군요~

하루살이 2005-11-0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갖다 붙히기 선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