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첫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전념한다고 그러던데... 이 영화는 이런 속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첫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환희며 통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또 하나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은이 첫 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자 역을 맡고 있는데, 그저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다.(나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르겠으니, 미스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로 장르가 탈바꿈 되어 다가온 것일지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어 현재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그것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을 맺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차분히 영화를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은 친구와 함께 사설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다. 어느날 학생 중에 하나가 눈에 띤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아이와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그리고 갑자기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이 나타난다.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랑했던 아이가 바로 학원의 학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친다. 화를 내고 영정을 부수고 난리를 치는소녀,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이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아이는 따로 있다. 그 아이는 현재 김은정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이름이 같다. 동거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냥 집을 함께 나눠 쓰고만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다. (누군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고도 보던데)
김정은은 고등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에선 불온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느날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온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그 만남은 그다지 기쁘지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남자. 다군다나 첫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학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첫 사랑보다는 지금의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다 동거남과 고등학생, 첫사랑 남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녀를 잘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동거남,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빼앗아간 학생. 이들의 묘한 만남은 사랑니에 아파하는 김정은의 모습 속에서 아릇한 아픔과 함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소녀와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학생의 병원신. 현재 김정은의 배에 남아있는 흉터와 똑같은 자리에 맹장 수술을 한 그녀의 상처를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
음,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더 헷갈릴듯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보면 현재에 개입하고 있는 학원생과 소녀, 그리고 그 소녀 옆의 학생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지금 현재 동거남이며, 외국에서 돌아온 첫 사랑들의 과거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는 실은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소식때문일지도 모른다.(영화 속에선 중간에 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그리고 돌아온 첫사랑과의 첫 만남의 섭섭함이 사라지고, 집에서 추억을 되씹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같은 두 남자의 접촉으로 가능해진다.
첫사랑은 언제든지 현재로 재생되는,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아픔이자, 성장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것 같다. 마치 사랑니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니가 아직까지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아픔은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하나씩 들춰보고 싶은 추억의 장면일뿐이지만, 잃어버려서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뿐, 뭔가 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닌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오래 각인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것은 아닐까. 가슴까지 아파해본 첫사랑의 경험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언제까지나 재등장하며,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위력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처음이 주는 강렬함과 그 깊이만큼 가득한 아픔을 영화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이란 조금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