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갔다 오기 전과 후에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깨우쳐 준것이 <어퓨 굿 맨>이었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군대 그 자체에 대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내 몸 속에 잠재해 있는 폭력을 일깨운다. <어 퓨 굿 맨>이 폭력에 대한 동의를 가져왔다면 <용서받지 못한 자>는 폭력에 대한 체념과 저항을 함께 일깨운다. 지금까지 나온 어떤 군대에 관한 영화보다도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한민국 예비군들 몸 속에 숨어있는 폭력의 씨앗을 보여준다.

 태정은 군기반장이다. 나름대로 군대 생활을 잘 해왔다고 생각한 그에게 부사수로 승영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들뻘(아버지와 아들은 군대에서 또 다른 의미로 쓰인다)도 안되는 그가 중학교 동창인 관계로 태정의 말년 군 생활이 조금 꼬인다. 그러나 태정은 승영을 최대한 감싸주려 하고- 하지만 또 그 뒤에선 승영의 고참들에게 얼차려를 가하며, 제대로 가르치라고 호통친다 - 승영은 태정의 보호아래 자신의 의지를 꺾이지 않고 군생활을 해나간다. 불합리한 명령에 따르지않고,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군대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내가 고참이 되면 다 바꾸겠다며 버텨낸다. 시간이 흘러, 태정은 제대를 하고, 승영 밑으로 지훈이라는 부사수가 들어온다. 지훈은 조금 어리버리하다. 승영은 지훈으로 인해 군생활이 힘들어지고, 태정 또한 이미 자신을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점차 변해간다. 바로 군대 생활 잘 한다는 모범 군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고참들에게 장교들 물품을 선물하기도 하고, 마음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도 하면서. 고참들은 승영에게 지훈을 잘 가르치라고 훈계한다. 승영은 지훈때문에 힘든 자신의 처지와, 물리적 폭력에 서툰 개인적 특성 사이에서 점차 지훈에게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지훈은 승영에게 의지하고자 하나, 점차 변해가는 그로부터 아무것도 위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라, 극도의 참담함을 느끼다 결국 군화끈으로 목을 맨다. 승영은 혼란에 싸이고, 휴가인지 탈영인지 모르겠지만, 밖에서 태정을 만나 위로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태정은 승영이 아직도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모습에 짜증이 난다.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밝히진 않으려 한다.

영화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군대 생활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다만 주위에 자살한 부대원이 흔한 것은 아니니까 그 충격의 정도가 다르다고 하겠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의 특성이라는 것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라지만, 불합리한 명령은 거부할 권리 또한 주어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거부는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자신을 굽히는 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를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난, 고참이 되면 다르겠다는 생각은, 본전 생각이 나서 (내가 당한 것이 있는데 라는 생각말이다) 쉽게 바꾸지 못한다. 즉, 고참이 되는 순간 그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고 있는 자기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군대니까 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승영의 말이 고참이 되는 순간 무너진 것과 똑같다. 군대는 개개인의 힘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군대 참 좋아졌어 라고 다들 말하지만, 그리고 나 또한 고참이 되면서 많이 바꾸었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폭력은 어느 새 몸에 깊이 각인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군에서 나오는 순간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몸 어는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뛰쳐나온다.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신의 피를 모두 쏟아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피 속에 감추어진 폭력의 씨앗을 뱉어내고 싶다고... 아마 온 몸이 다 마르도록 피를 쏟아야만 할 것이다. 폭력의 구조는 그렇게 여전히 나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영혼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참혹하고도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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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첫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하고, 여자는 현재의 사랑에 전념한다고 그러던데... 이 영화는 이런 속설과는 달리 여자에게도 첫 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환희며 통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또 하나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김정은이 첫 사랑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자 역을 맡고 있는데, 그저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혼란스러운 미스터리적 요소가 있다.(나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르겠으니, 미스터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스터리로 장르가 탈바꿈 되어 다가온 것일지도) 과거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어 현재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인물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영화는 그것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을 맺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차분히 영화를 한번 더듬어 보도록 하겠다.

김정은은 친구와 함께 사설학원을 운영하는 강사다. 어느날 학생 중에 하나가 눈에 띤다.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사랑했던 아이와 이름도 똑같고 생김새도 똑같다. 그리고 갑자기 회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이 나타난다. 김정은과 이름이 같은 여학생이 고등학교 시절 처음 사랑했던 아이가 바로 학원의 학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와 똑같이 생긴 아이와 마주친다. 화를 내고 영정을 부수고 난리를 치는소녀,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이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여자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아이는 따로 있다. 그 아이는 현재 김은정과 동거하고 있는 남자와 이름이 같다. 동거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냥 집을 함께 나눠 쓰고만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다. (누군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라고도 보던데)

김정은은 고등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위에선 불온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어느날 외국에 나가 있던 그녀의 첫사랑이 돌아온다.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지만 그 만남은 그다지 기쁘지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남자. 다군다나 첫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지금의 학생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첫 사랑보다는 지금의 사랑에 빠져있던 여자, 힘들지만 행복하다. 그러다 동거남과 고등학생, 첫사랑 남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녀를 잘 알고 배려할 줄 아는 동거남,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는 남자, 자신의 감정을 빼앗아간 학생. 이들의 묘한 만남은 사랑니에 아파하는 김정은의 모습 속에서 아릇한 아픔과 함께 은은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소녀와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학생의 병원신. 현재 김정은의 배에 남아있는 흉터와 똑같은 자리에 맹장 수술을 한 그녀의 상처를 동거남과 이름이 같은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  

음,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더 헷갈릴듯 싶다. 그냥 내 마음대로 해석해보면 현재에 개입하고 있는 학원생과 소녀, 그리고 그 소녀 옆의 학생은 모두 과거의 인물들이다. 지금 현재 동거남이며, 외국에서 돌아온 첫 사랑들의 과거가 현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여전히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과거는 실은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소식때문일지도 모른다.(영화 속에선 중간에 그 소식을 알게 되는 것으로 처리되지만) 그리고 돌아온 첫사랑과의 첫 만남의 섭섭함이 사라지고, 집에서 추억을 되씹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같은 두 남자의 접촉으로 가능해진다.

첫사랑은 언제든지 현재로 재생되는,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아픔이자, 성장통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것 같다. 마치 사랑니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사랑니가 아직까지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아픔은 모두 가짜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하나씩 들춰보고 싶은 추억의 장면일뿐이지만, 잃어버려서 안타까움이 더한 것일뿐, 뭔가 더 특별한 어떤 것은 아닌것 같다. 무엇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 오래 각인되는 것처럼,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게 만든것은 아닐까. 가슴까지 아파해본 첫사랑의 경험이 없으니, 현실 속에서 언제까지나 재등장하며,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위력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처음이 주는 강렬함과 그 깊이만큼 가득한 아픔을 영화를 통해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추억이란 조금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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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1-0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이 영화 봤어요. 뭐랄까, 환타지를 집어 넣은걸까. 하고 봤더랬지요.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뭘 말하는걸까요? 정우와의 추억이 마지막에 나온 이유가 뭘까 한참을 생각했더랬어요.

하루살이 2006-01-0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타지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 마지막 장면때문에, 아! 모든게 다 과거였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답니다. 과거는 항상 끊임없이 현재에 끼어들어오지 않나요? 특히 술 먹을때면^^ 과거는 그래서 그냥 과거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6-01-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니는 났지만 아프지는 않았어요. 뽑을 필요도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사랑은 너무 아픕니다.

하루살이 2006-01-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으니... 아프락사스 님의 사랑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지난 토요일이었던가, 일요일이었던가. 카톨릭 신학대학교의 학과일정이 TV를 통해서 드러났다. 15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된 신학생들의 삶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영원과 하루>라는 제목으로 KBS 스페셜로 방송됐는데,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 30세 이전의 학생들에게 입학이 허용되고, 같은 해에 입학하면 군대를 같이 가거나, 그 기간동안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전체가 함께 같은 일정을 가도록 짜여져 있는 그들의 모습이 한편으로 숨이 막힐듯하다. 하지만 이런 하나됨이 남다른 일체감을 주리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불필요한 생각일듯 싶지만, 이것이 카톨릭 조직이라는 곳에서 권력싸움의 밑바탕이 되지않을까 불손한 상상을 해본다.

가족과 친구들의 우려, 걱정 속에서 들어간 신학대학교의 삶이 그들이 무엇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드는 것 같았다. 동년배들이 느끼는 생각, 욕구와 동떨어진 삶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지 차분히 보여주는 속에서, 나 또한 명상에 잠긴다. 특히 그들이 대답하기를 꺼려했던 이성과의 관계를 큰 의미의 사랑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넘어, 과연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겨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 학생들의 이야기였다. 프로그램 속에서도 탈락율이 35%에 이른다고 알려주고 있지만, 무엇이 이들에게 그토록 단단했던 신념을 깨뜨리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데는 다소 소홀한듯 싶다.

다만 졸업반, 성직자의 길을 택하기전 휴학한 학생의 입을 빌려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엿볼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함으로써 이루려고 하는것, 그것으로 가느 것에 일말에 후회가 없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 그것은 단지 신학도로서만의 문제는 아닐듯 싶다.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꿈을 향해 걸어가는 길. 그것에 대한 믿음 역시 이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지금 내가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휴학생의 고민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하여,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TV가 보여준 65%의 신학도들보다 35%의 탈락자들이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지 정말 궁금했다.

믿음, 그리고 흔들림, 선택, 그리고 후회.

삶은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한발 한발 내딛는 내 발자국만이, 비록 비틀거리고, 주춤댈지라도, 온화하기만을 바랄뿐이다. 질질 끌려가지않고, 더디더라도 힘차게 내 딛어지기만을 바랄뿐이다. 무지개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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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5-12-2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셔요?
저도 이 프로그램 봤어요. 서류상 심정상 천주교 신자로서 35%에 든 사람들도, 65%에 들었으면서도 나중에 탈락해버리는 사람들도 보아왔지요. 점점 사제지망생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도, 역시 주위에서 한다고 하면 잘 생각해보라고 일단 말려보고 싶어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일생을 걸 무엇을 발견했다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어느 신학생이 '남들이 다 하는 일 못하기도 하지만, 남들이 못하는 일을 하는 기쁨'을 얘기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런 확신과 정열, 실천력이 있다는 게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답니다.

하루살이 2006-01-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제 지망생이 줄어드는 걱정보다는 진정한 사제가 줄어들고 있지 않는가가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확신과 정열, 실천력을 죽는 날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정말 존경스러워할만한 일이겠죠. 님께서도 새해에는 그런 정열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그대를 위한 촛불이 되리라 - 무식한 영웅의 생활 속 음양 이야기
이상문 지음 / 정신세계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밥따로 물따로 음양식사법을 주장한 저자의 에세이 집이다. 못다한 이야기들을 써내려간 책이라 건강과 관련한 직접적인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이미 저자의 전작들을 읽고 그의 주장을 실천해본 사람들이 저자를 보다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밥따로 물따로에서 중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실천사항은 1일 2식에 밥과 물을 따로 먹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에 국이나 찌개없이 밥을 먹고 낮에는 물 한모금 밥한술 뜨지 않으며, 물은 오직 저녁을 먹은 후 2시간 후에만 먹으라는 처방은 굉장히 간단하고 쉬워보이지만 또한 실천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은 방법이다. (물론 중병이지도 않고, 사회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나로서는 점심을 굶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건강지키기를 위한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1일 3식에 밥과 물을 따로 먹는 방법 정도로 한번 실천해 보리라 마음은 먹어 보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굉장히 어렵다.) 왜 밥과 물을 따로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 고체 음식은 양의 성격을 띠고 있어 낮에, 물은 음이라 저녁에 먹어야 한다는 설명이나, 기타 신체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상식과는 조금 떨어져 있어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영적인 이야기나, 외계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건강에 대한 실천적 요소를 뛰어넘어 영적인 문제로 접근하다보면, 결국 종교적 색채를 띠고, 점차 사이비화 되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으나, 저자 또한 이것을 감지하고, 몸에 대한 것만을 이야기하려 한다는 점에서 안도의 숨을 내쉰다. 또한 세상은 상식으로만 이해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상식이라는 것도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몸소 실천해보고 그 변화를 체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본다. 실천 방법이 경제적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고, 희귀한 행동을 요하는 것도 아니니, 몸의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도전은 밥 한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철저한 감식(소식이 아니다)방법에 따라서 오랜 세월(7년) 동안 차근히 몸에 변화를 주는 방법으로서 최종적으로는 3일에 1끼 정도(물론 목표는 안 먹고도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로 거뜬히 생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실제로 일간신문에도 소개되어진 사람들의 실례로 이렇게 살아가는게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게 된다.

밥 한끼.

인류학 속에 등장하는 원주민들의 풍토 속에서도 잔치에서 먹는 것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행위나, 좀더 친숙해지기 위한 행동 중에 음식은 필수다. 굶는 것의 서러움, 배부름이 주는 안위. 식욕은 그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은 먹어대기 시작했고, 현대인에게 비만은 무엇보다도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질병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밥따로 물따로의 실천은 일체의 간식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식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욕망의 제한을 그 전제로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네 삶이 이토록 강퍅하고,  서로 물고 뜯는 이유는 보다 더 많이 먹고자 하는 이유 ‹š문이지 않은가 싶다.(극도록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만약 우리가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평화로울수 있으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련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감식은 세상의 평화를 향한 촛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아주 간단하게 생각되어지면서도 아주 어려운 실천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으나, 이 방법 또한 간단하고,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점에서, 욕망의 억제를 통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점에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듯 하다. 내 몸의 간단한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물론 이 책이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욕망의 통제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한번쯤 내 몸에 대해 돌이켜보도록 하자. 정신과 육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몸은 그야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중한 자산일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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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석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남극인지 북극인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끌어당긴다. 운명이란 바로 이런 맹목적 끌어당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자가 있다. 욱하는 성격이지만 쾌활하다. 조금 우울증도 있는 것 같고, 상당히 예측하기 힘든 캐릭터다. 조엘이라는 남자가 있다. 누군가에게 먼저 접근하는게 힘든 소심한 남자다. 이 둘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어느새 사랑에 빠진다.

어느날 조엘은 갑자기 일탈을 행한다. 출근 기차를 타지않고 무작정 바다로 간다.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지만 이 뜻밖의 행동은 클레멘타인과의 만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이 첫번째 만남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의 과거가 잊혀지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뜻밖의 만남을 통해 키워간 사랑,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주 다툰다. 그리고 그 다툼에 욱해 클레멘타인은 사랑했던 연인의 기억만을 지워주는 치료를 받는다. 조엘은 자신을 모른채 하는 클레멘타인에 당황해하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되고 혼자만 괴로워할 수 없게된 조엘 또한 이 치료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기억이 지워져가는 순간, 아무리 이별의 상처가 크더라도 꼭 간직하고픈 따뜻했던 사랑의 기억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망가는 조엘. 그의 아픈 과거로 클레멘타인과 함께 망각의 전파를 피해 도망다닌다. 하지만 끝내 사랑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 그것으로 모든 사랑은 끝이 난걸까?

사랑은 지운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잊혀진다고 정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끌림은 마치 자석의 반대극마냥 운명처럼 다가온다. 인연의 끈은 가위로 잘라낸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뇌 속에 잊혀진 기억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온 몸으로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사랑에 대한 대상은 결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실험을 담당한 교수와 직원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사랑 때문에 괴로운 현실도 그 사랑을 잊는 괴로움보다 더 클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물을 준다고 해서, 또 듣고싶은 말을 한다고 해서 마음을 뺏기지는 않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그녀를 사랑하게된 직원이 조엘의 노트를 보고 그녀에게 조엘처럼 대하지만 끝내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 이상의 것을 사랑은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사랑이 잊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조수, 기억을 지우는 교수와 직원의 사랑 등등 여러갈래 얽혀진 사랑의 미로는 몽환적인 화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의 교차, 기억과 실제의 반복은 사랑의 전제조건인 인연을 설명해주는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시나리오가 훌륭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것을 화면으로 묘사해내는 감독의 탁월한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끌림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처절한 사랑에 대한 기억 지키기를 통해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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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다시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