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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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모리교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이자 모리교수인 제자 미츠. 미츠는 어느 날 TV를 통해 모리교수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뵙는다. 이 책은 이 둘의 만남과 강의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이책은 한마디로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런 그의 삶의 아포리즘은 다음과 같은 옛 강의 내용에서 강렬하게 전달된다.

눈을 감고 자신의 짝을 믿으며 뒤로 넘어지는 행위. 대부분의 학생은 쉽게 뒤로 넘어가지 못한다. 눈을 뜨고 주춤거리며 뒤로 넘어가려다 돌아서버리거나 엉거주춤 발로 버틴다. 그러던 중 한 학생이 지긋이 눈은 감은 상태에서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그녀의 짝은 그녀가 땅에 부딪히기 전에 머리를 잡아 일으켜 준다. 모리 교수는 바로 이 순간이 삶의 진실된 순간임을 강의한다. 남을 온전히 믿고 그에게 의존할 수 있는 삶.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이 되고 사랑이 될 수 있는 삶. 돈과 명예, 권력을 쫓는 행위에선 절대 만족이란 있을 수 없으며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리 교수의 가르침 또한 헛된 메아리가 될 공산이 크다. 절대적 자아만을 가르쳐 온 현대의 교육. 즉 자아의 정체성이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관계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세뇌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남을 온전히 믿는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미 현대인들은 관계라는 루비콘 강을 건너버리고 독립된 개체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땅으로부터의 탈출은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겠지만 어디 그런 사랑도 쉬운 세상이던가?

타인의 존재, 그리고 나의 존재라는 것이 아니 모든 만물이 서로 관계의 그물망속에 얽혀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리고 사랑만이 그들을 온전히 하나되게 할 수 있다고 말해줘도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세상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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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3
장정일 지음 / 하늘연못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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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서 소설이란 그 주인공들의 변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작가는 이번엔 소설가란 악을 다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문학이 의사소통이라면 진정한 의사소통은 악과의 대화를 포기해서 안 된다. 진정한 작가는 문학에게만 유일하게 허여된 그 능력과 특권을 자랑스럽고 고통스레 받아들인다. 악과 의사소통하는 문학, 그것은 이미 유죄이다. 사드나 보들레르가 그랬듯이 문학의 유죄성을 벗겨 줄 것은 시간밖에 없다. (P234)

아마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책이 가져다 준 고통이 그에게 계속해서 작가의 변을 늘어놓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적 요인에 따라 그는 지금 자신이 다루고 있는 것은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기에 대한 도전은 이 시대의 악일 수밖에 없지만 시대적 악이란 것은 그 시대가 변하면 오히려 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절대 악이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선구자적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진정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이 가지는 의사소통의 힘은 그 내용에 있지만은 않음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즉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는냐 하는 형식의 문제도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택한 포르노라는 형식은 이 시대가 그것을 용납치 않기에 선택한 하나의 방편일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지금까지 소설이나 그 밖의 책을 읽어오면서 그 내용에 온갖 나의 주파수를 맞춰왔지만 형식은 항상 뒷전이었던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내용은 결코 형식과 동떨어져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케됐다. 포장이 중요해져버린 시대에 가감히 그 포장을 포기하고자 했던 나의 책읽기 습관이 도리어 독이 되어버린 것임을 실감하며 뒤늦게나마 장르라는 것에 대해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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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2 - 1994.11 - 1995.11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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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작가는 소설가란 소설속 인물의 변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은근히 주장했다. 주인공들의 변화가 없는 소설이란 아무래도 석고와 같이 무생물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작가의 관점은 책을 읽는 곳곳에 드러난다. 특히 밀란쿤데라의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일기장은 그러한 영향이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쿤데라는 신앙과 진보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있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신앙이란 종교요 진보란 크레물린을 상징한다. 이 둘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식한다는 것을 전제로 인간의 향상성을 믿는다. 인간에게 향상성이 없다면 절망과 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쿤데라는 향상성 대신 우매와 우연, 절제없는 욕망, 고상하게 위장된 허영 따위가 바로 인간의 총체라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쿤데라가 염인론자가 아닌 것은 인문주의적 요양과 성찰에 힘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장정일은 보고 있다.

즉 장정일은 변화, 전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소설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변화의 긍정적 방향이라는 향상성도 일견 소설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쿤데라에게 있어서 그런 진보, 향상성은 거짓인 것이다. 그러기에 쿤데라를 헐뜯을만도 하겠는데 그게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 바로 그의 인문주의적 힘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사회라는 것과 소설이라는 것 모두 변화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변화라는 것이 꼭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 않을까 그의 독서일기장을 훔쳐보며 질시의 눈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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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1 - 여명편 은하영웅전설 1
다나카 요시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서울문화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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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영웅전설 1> 2001년 1월 15일

SF 삼국지

SF소설이라는 게 대부분 재미만을 추구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마광수 교수가 말하는 하수도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 재미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재미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재미라는 것이 그야말로 유치한 구성과 설정에 있다면 정말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재고해 봄직하다.

그런 측면에서 <은하영웅전설>은 삼국지만한 가치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니 재패니메이션의 한 획을 긋는 에반게리온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은하제국과 동맹에서 각각 한명의 영웅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웅이 되는 과정이라든가 개인적 캐릭터의 차이는 단순한 대립차원을 넘어 여러가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웅이라는 것은 개인적 의지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구조적 압력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점(삼국지의 유비). 그리고 영웅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자랑스러워 하기도 하지만 괴로워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에반게리온의 신지) 영웅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또한 이런 캐릭터의 우수함 이외에도 우주로의 확정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보다 사실성을 높여주고 있다. 가령 자전, 공전 주기가 서로 다른 여러행성들간에 시간을 어떻게 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다시 한번 지구라는 공간에 위치한 인간의 사고 개념의 유한정성을 생각하게끔한다.

아직 2편까지 밖에 읽지 않았음에도 이 책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날 보고 있자니 과연 결말로 치닫는 과정에선 또 얼마나 책속으로 빠져들어갈지 상상이 간다.

<은하영웅전설 10> 2001년 3월 13일

민주공화정에 대한 찬가

이 소설은 많은 부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게 빚지고 있다. 독재자에게의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심리상태는 결코 우리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앞에 나서서 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런 생각, 고민없이 그저 주어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소설속의 얀 웬리라는 주인공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살기좋은 전제정치제도와 살기 어려운 우민정치로 이어지는 민주공화정 중 당신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갈등상황이다.

로엔그람 왕조의 패도정치가 그 썩은 내를 더해가면서 라인하르트라는 새로운 독재자와 얀 웬리라는 민주공화정 지지자의 두 정부로 우주는 나누어진다. 라인하르트는 전쟁에 있어 천재적 수완을 발휘하고 덧붙여 민심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반면 얀 웬리는 항상 인간적 고민에 둘러싸여 있는 고뇌하는 인간이지만 전략적 측면에선 라인하르트 못지않은 수완을 발휘해 명성을 얻는다. 특히 전쟁을 싫어하면서도 전쟁에 앞장서야하는 얀은 그야말로 모순속에 살아가는 인물로서 소설 속 주인공중 색다른 묘미를 준다. 우주는 라인하르트에 의해 평정되고 민주공화정의 싹은 얀의 희생으로 부활의 씨앗을 품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은 계속해서 민주공화정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정치제도라고 주장하지만 한편에선 우민정치로의 전락을 두려워하교, 또 진정한 지도자의 표상, 즉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독재자가 나온다면 그 정치를 무시할 수 없지 않는냐는 고민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에게 지루한 관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전투씬 만큼이나 절절하게 현재의 정치상황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의 힘을 가져다주고 있다.

오랜만에 접해보는 재패니메이션이 가져다 주는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체온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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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범우 한국 문예 신서 79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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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장정일의 독서량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거야? 책을 보고 있으면 평균 하루에 1권정도 읽어대는 그의 책에 대한 집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렇게 읽다보면 내가 언제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할 터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기억을 위해서라도 독서일기장은 꼭 필요할 터.

이런 독서일기장은 개인적 기억창고이지만 다이제스트를 원하는 작금의 세대에게는 그야말로 단시간에 수십권의 책을 읽을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의 글 중 이런 세태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으나 그 자신의 책이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고 있음은 알고 있는지.

아마도 그 자신 또한 이런 모순된 점을 인정하고 슬쩍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좋은 책이란 그 책을 읽음으로써 또 다른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자신의 책은 그런 좋은 책을 수십권이나 가르쳐주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책이냐고... 아무튼 이 일기장을 보면서 장정일이 갖고 있는 소설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건 행운이라고 볼 수 있겠다.

P128 소설이란 작중인물들의 존재이전이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 즉 주인공의 인생유전을 다루는게 문학이다는 생각은 많은 생각거리를 가져다 준다. 특히 구조에 의한 유전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를 통한 유전이 보다 좋은 소설이라고 말한 점은 전자가 학문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볼 때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어떤 문학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1993년과 1994년 사이의 장정일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는 재미를 가져다 준다.

무엇보다도 일기장 속에 드러난 여러 읽을거리중 나도 몇권 읽어야 되겠다고 추려놓은 책들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어느정도 평가되어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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