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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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것이 왜 옳고 그른 것이 왜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하여 진정으로 나는 알게 된다. 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음을.

행동하지 않는 앎도 앎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강준만 교수는 진정한 앎을 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많은 오해를 불러 올 것임을 알면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앎이 가져다 주는 용기다. 그러나 진정 알지 못하는 자는 아는 척할뿐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침묵도 대항의 수단임을 자기변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척함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국민의 사기극은 바로 이런 척하며 사는 꾸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준만 교수는 그런 척함으로부터의 결별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론개혁의 성패는 수구신문들의 방해공작보다는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이기심 자제를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49)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팩트마저 자신의 마음대로 왜곡해서 나타나게 되는(책 속의 조선일보 기사, 사설 등등) 일련의 사건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대부분이 갖게 되는 족벌신문들의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한 인식은 사실 그대로의 세상바라보기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행할 자세를 지니고 기꺼이 행할 의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방향이 애시당초 틀어져 있다면 이 또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세상을 바로보는 평면 거울인 셈이다. 문제는 외꾸눈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 두 눈을 가질 수 있는냐인데 그 것마저도 그런 의사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나에게로 눈을 돌리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아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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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아이 -상 영원의 아이
텐도 아라타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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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 쇼이치로, 료헤이라는 3명의 아이.아동학대 속에서 자신을 두터운 껍질에 감춰버려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다. 하지만 이 세명의 아이는 서로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마음을 열음로써 세상으로 나선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상처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이들에겐 어릴 적 학대가 악몽처럼 등장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끊임없는 악순환. 소설은 아동학대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눈물샘을 자극하며 보여준다. 게다가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해 마지막 반전을 가져옴으로써 읽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특히 이 소설이 주는 생각할 거리는 아동학대라는 사회적 이슈이외에도 홀로서기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근대적 교육, 특히 서구적 교육을 받아오면서 개인을 강조하고 그 개인의 독립성을 요구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독립성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음을 깨우쳐야 할 때가 온것은 아닐까

혼자서만 너무 애를 쓰면, 자신은 물론이고,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거야.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는 것만이 어른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거야. 사람을 믿고, 맡기고 또 다른사람의 어려움을 받아들여주는 것도 사람에게는 좋은 성장의 기회가 되는 게 아닐까? 천천히라도 좋아. 자신의 마음을 열어봐, 어때 다른 삶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어리광이라도 한번 피워보라고. 그걸 자신에게 허락해 보면 어떨까 (3권 P160)

사실 홀로서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그것을 시도해본 사람은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러나 알아서 척척척, 혼자서도 잘해요를 강요당해온 우리에게 있어선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광에 불과했다. 그리고 어른은 어리광을 절대 피워선 안되는 것이지 않은가? 이렇게 혼자서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견뎌내기 위해선 우린 거짓 웃음과 태연함을 가장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선의의 거짓말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홀로서기는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들이 얼마나 타인의 가슴에 시퍼런 멍을 남기는 줄은 알지 못한다. 나의 선의의 행동이 때론 타인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거짓말이나 비밀로 자신을 감싸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일도 있으니까요.물론, 그런 일도 있겠지.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러나 거짓말을 하고, 또 비밀을 오래 숨기고 있다보면,거기에 길들여져 버리지 않을까. 길들여지면 아주 간단한 진실을 말하는 경우에도, 두려워서 거짓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어.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크게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는 거야.(3권 P350)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기댈 수 있다는 것. 그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산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삶의 가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니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삶, 어찌보면 나의 등을 살며시 받쳐주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삶일련지도. 이 시간 비록 비틀거리더라도 누군가에게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인다. 순간이며 영원한 삶의 행복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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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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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을 읽을 때 그 상징체계를 파악하는 것 만큼 재미난 일도 없을 것이다. 줄거리나 문체가 가져다주는 것 이상의 쏠쏠한 재미가 그 속에 감추어져 있으니까.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미장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화는 점차 읽혀지는 기쁨을 가져다 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영화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책을 들여다 볼 때도 이런 숨은의미찾기의 기쁨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나 영웅적 인물의 등장과 소멸로 역사는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엔 거대한 흐름이 있게 마련이며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 그 흐름이 일순 바뀌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 흐름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바뀌는 것이며 그 터닝포인트에서의 사건이나 인물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채는 것 만큼 역사읽기의 즐거움 또한 없을 것이다.
이 책 호메로스에서 돈 키포테까지는 바로 이런 감추어진 역사읽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고등학교때 세계사라는 과목이 선택사항이라 책 한권 읽지 않았음을 후회하게 만드는 이 책은 역사적 사건 이면의 도도한 흐름을 살며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바로크시대나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암흑의 시대라는 중세가 결코 캄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재미있다.

반면 사전지식이 전혀없는 고대 로마사나 서양사에 대한 뒷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웠다. 즉 이면에 나타나는 즐거움을 그 표면을 알고 있을때 가능한 것이며 그 표면에 대한 지식없이 이면만을 본다는 것은 소가 뒷걸음치다 개구리를 잡아놓고서 마치 개구리 잡는 법을 알고 있는듯이 뽐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서가 딱딱함을 벗고서 말랑말랑 부드러운 속살을 보여줄 수 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썩 괜찮은 메뉴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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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1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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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사서독>을 보면 동사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저 사막 너머, 산 너머에 뭐가 있을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만 실은 별거 없다고. 그러나 그도 마지막엔 그 너머로 발길을 돌리며 영화는 끝은 맺는다. 이 때의 너머란 그저 망각을 위한 발걸음일 뿐이다. 반면 그 너머엔 더 높은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속 홍칠이가 그렇다. 그리고 배가본드 라는 이 만화 속 주인공 다케조(미야모토 무사시)가 그렇다.

자신의 스승은 산이라고 말하며 검술을 익혀가는 무사시의 삶은 오직 정상만을 향해 오르는 산악인을 생각케한다.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아야지만 그 산을 정복했다고 여기는 사람들. 무사시도 그런 사람이다. 검술에 있어 최고봉에 오르지 않는 한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기는 무사.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른 일본 만화가 보여주 듯, 그리고 작가의 전작이 보여주듯, 점차 더 강한 상대를 만나면서 자신 위에 더 많은 실력가들을 체험하면서 몸으로 배워간다. 그리고 아마 정상에 설 것이다. 만화는 그가 정상에 서는 순간 끝날 것이다.

작가가 말하듯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이건 단지 흥미만을 위해 쓰여진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뒤에 감춰진 진실을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다.

죽음 앞에서 찾아오는 공포, 천재와 노력가의 차이 등등 단순히 재미로만 넘기기엔 아까운 장면이 곳곳에 숨겨있다. 그리고 무사시의 스승이 자연이기에 그런 것인지 작가가 그려내는 자연은 숨막힐 정도의 아름다운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쓱쓱 그어대는 빗줄기나 우람하게 자란 나무들과 숲들, 원경으로 비쳐지는 마을 들은 작가가 얼마나 이 그림에 공을 들였는지 가히 짐작케한다.

마치 무사시가 최고의 무사를 꿈꾸듯 자신 또한 최고의 만화작가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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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0-01-1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가본드1 부터 흥미진진하게 즐겨 보다가....계속 나오니까...지쳐서 그만 구입하게 된 베가본드! 지금도 계속 나오지요....명탐정 코난이 10년 넘게 나오는 것처럼요...우리나라 만화가들도 좀 끈질기게 작품을 내면 좋은데요. (신일숙씨인가...아라비안 나이트가 5권까지만 나오고 연재 중단)
 
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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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바나>에 대한 생각은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온 전쟁영화였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 마냥 전쟁이 싫었다. 아바나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크면서 귀에 들려오는 쿠바에 대한 이야기들. 하지만 이것 또한 카스트로라는 독재자(독재자라는 단어엔 이미 부정적 뉘앙스가 풍기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공산주의국가일 뿐이었다.

반공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결코 친근하게 다가올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어는 순간 한국의 수호천사였던 미국이 결코 우방이 아님을,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것이 반공교육 속의 유치한 빨간 도깨비, 늑대의 나라가 아님을 정말 어느 순간 느닷없이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보게 되면서 몇 해전 그토록 사람을 열광시켰던 체 게바라라는 인물을 보게 된다. 물론 영화는 쿠바의 음악인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영화 속 쿠바 풍경 곳곳에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 속엔 베레모를 쓰고 있는 그가 지키고 서 있던 것이었다. 호기심은 그 때 일었다. 그가 죽은지 30년 이상이나 된 지금에서도 그는 쿠바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는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 궁금증과 함께 그에 대해 한번쯤 알아보아야 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찾아들게 됐다.

체는 그야말로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듯 그 시대의 완벽한 인간 그 자체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 자신에 대한 완벽한 절제, 끊임없는 혁명에의 열정 등등.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못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가 되겠다는 생각 또한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체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와 같은 치열한 삶을 살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속도전에 휘말려 자신의 그림자조차도 둘러보지 못한 세상에서 거꾸로 느림에 대한 찬양이 일고 자신을 둘러보는 종교적 소양이 반대급부로 득세하는 이 때 결코 속도의 노예도 되지 않고 게으름의 깊은 잠에도 빠지지 않는 정열적 삶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미 성인이 되기를 메시아가 되기를 포기한 나의 삶에 있어서 혁명가는 멀고 먼 이상향일 따름이다. 하기야 책 속에선 가슴에 이루지 못할 꿈을 간직하고 살라고 했으니 비록 이루진 못한다 하더라도 포기는 말아야 할련지도 모른다.

아무튼 체의 개인적 삶에 있어서 그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향한 혁명의 수단인 저항적 폭력은 아직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혼란스런 부분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구조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 새 인간형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찬성하며 자본주의의 물질적 자극을 통한 생산성이 가져오는 욕망의 부추김에 대한 거부도 찬성한다. 그러나 테러와는 다른 혁명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른 뺨을 맞았을 때 과연 왼 뺨을 내밀 것인지 상대방의 강압적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알 지 못한다. 다만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그가, 자신의 육체적 고통마저도 이겨내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가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에 아직도 살아남아 있음에 대한 그 이유만을 어렴풋이 알게 됐을 따름이다. 희미한 안개를 조금씩 걷어내는 한줄기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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