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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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첫발부터 삑걱거리기 시작한 이들은 그 삐걱거림을 체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체념의 시간은 그들의 성장과 함께 희망의 빛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고로 원전했던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있어 장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다.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며 인정한다는 것, 체념만으론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해버린 상태를 어찌 쉽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잠수복과 나비는 바로 이렇게 갑작스런 사고로 <로크드 인 신드롬>상태에 걸린, 잘 나가던 여성잡지 <엘르> 편집장의 메모들로 이루어졌다. 로크드 인 신드롬이란 일종의 식물인간 상태로 보면 될 것이다. 성공적 사회생활을 이끌어 가던 중년의 남자가 갑작스레 자신의 육체가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로 몰리게 된 이후(그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열쇠를 잃어버린 잠수복을 입은 상태라고 표현했다)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새롭게 다가온다.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에서 교탁위에 올라선 학생들에게 교실이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온 것처럼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대충 챙겨먹고 직장에 나가 일을 하던 과정이 기계처럼 느껴졌었는데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모두 행복의 순간으로 비쳐진다. 햇살, 바람, 소리... 바깥에 비록 나갈 순 없으나 살아있는 정신으로 그는 상상의 날개를 편다.(그는 이순간을 자유로운 나비의 훨훨거림으로 표현했다) 스쳐지나가던 보잘것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드러내보인다.

게다가 평상시 아무 불편없이 지내던 것들, 무심코 툭 내뱉던 말 한마디등이 실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장벽이 되어 나타나는 가도 실감하게 된다. 마치 자동차 운전자 입장에서 보행자 입장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의 장점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한번 뒤돌아보게 만든다는데 있다.

캥거루는 벽을 넘었습니다.
동물원의 벽을,
하나님 맙소사, 벽이 어찌나 높던지요.
하나님 맙소사, 세상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P172)

자신의 장애를 나쁜 번호를 뽑은 돌연변이로 바라보다 낙엽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 그의 삶에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코가 시큼해진다. 그리고 바라본 하늘은 왜 그리도 가슴시리도록 파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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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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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외쳤다. 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말살에 대해 저항하며 인간본성, 즉 자연의 회복을 주창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소로우는 <월든>이라는 책을 통해서 직접 자연속으로 들어가 실험적 삶을 꾸렸다. 이제 다시 20세기 자연주의자 니어링 부부를 이 책 <조화로운 삶>에서 만나게 된다. 왜 이들은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삶을 택한 것일까?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 지라도, 버몬트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다시 한번 실천할 생각이 있다. 그때는 단순히 우리 두사람이 먹고 사는 일뿐 아니라 사회가 두루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려고 애써 보리라. (P.214)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제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착취와 억압의 삶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과정에서 그리고 욕구의 대상인 물건들을 사는 과정에서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 해도 그 속엔 이미 모순이 담겨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달콤한 모순을 쉽게 벗어날 순 없다.

그 사람들은 문명이 주는 흥분, 분주함. 매혹, 편의 시설, 마취제 없이는 살 수 없었다. (P.208)

끊임없는 욕구에 대한 자극에 우리는 이미 포로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당장 탈옥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당장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현실에 얽매이게 만든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이 순간에 있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실용서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기에 과감히 행동으로 옮길 용기를 북돋워 준다. 다만 이 책이 미국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우리가 당면한 문제와 조금은 다르다는 점에서 아쉽긴 하다. 또한 앞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 이러한 모험이 공동체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인적 실험에 그치고 있는 안타까움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월든>을 읽었을 때보다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긴 하지만 여전히 도시의 삶에 길들여진 나의 육체를 자연으로 돌리기엔 용기가 부족함을 느끼며 자기 변명을 끊임없이 늘여놓는다. 하지만 머리로 알되 몸으로 알지 못하는 나를 한탄하면서도 아직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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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문학앨범 - 진창 속의 낙원 웅진문학앨범 8
황지우 외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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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지배하는 모더니티의 사회가 아니라 파쇼가 지배하는 끔찍한 모더니티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로써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일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불일치하고 동일한 기의를 다른 기표로 표현해야만 하는 사회,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하나로 밀어붙여도 모든 것이 용서 아니 묵인되어지는 사회 그 속에서 시인은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소통이 비록 메아리에 그칠 수도 있다는 공포심마저도 사람들과 통(通)하는 과정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 통한다는 것은 주관을 떨쳐내고 간주관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이는 객관의 확보로 이어진다. 황지우는 비록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하더라도 개인적 인상을 그리더라도 그것이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통정(通情)을 획득함으로써 객관성을 얻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시를 발표했고 사람들은 그 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시가 비록 몽상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여도 그 역시 잠든 사이 꿈꾸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깨어있음으로 해서 획득하는 몽상이기에 우리의 의지가 살아있는 곳이다. 그 의지를 바탕으로 삶은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으며 그 한걸음 한걸음이 뒤에 길을 남긴 것이렸다.
인문학이 쇠퇴하는 시기, 순수문학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그 발길 닿는 곳에 길이 생기니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쉼없이 따라올 것임을 기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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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과 조지 그리폰 북스 12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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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

판타지 소설을 이제서야 조금씩 접하는 입장에선 그 책의 장점이 무엇인지, 매력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내는 것조차 힘에 버겁다. 그저 재미있게 읽어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 한편엔 이 소설이 도대체 이 장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보다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조금 차지하고 있다.

<드래곤과 조지>라는 책은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 얼치기 독자인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재미로만 읽히는 책이었다. 정말 가볍게 손에 들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 톨킨의 <반지전쟁>이 보여준 공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장르소설이었다.

나에게 있어선 무협지라는 것도 <영웅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즉 <영웅문>을 독파한 이후 <영웅문>의 틀을 벗어난 그 어떤 괜찮은 무협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은하영웅전설>을 보고나서 SF 소설을 다 읽어버렸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반지전쟁>이 보여준 환상적인 인물들과 모험, 갈등과 그 해결의 방식은 그대로 <드래곤과 조지>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이 말은 그만큼 이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미이지 비난의 뜻은 전혀 없다. 다만 항상 새로움을 구하는 독자의 입장에선 무엇인가 새로운 요소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용과 기사, 말하는 늑대(재패니메에션 원령공주가 생각난다), 신궁에 가까운 궁사 등 그 상상의 매력은 쉽게 떨쳐내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실토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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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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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것이 왜 옳고 그른 것이 왜 그른지를.
나는 알고 있다.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하여 진정으로 나는 알게 된다. 실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음을.

행동하지 않는 앎도 앎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강준만 교수는 진정한 앎을 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많은 오해를 불러 올 것임을 알면서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은 앎이 가져다 주는 용기다. 그러나 진정 알지 못하는 자는 아는 척할뿐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침묵도 대항의 수단임을 자기변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척함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국민의 사기극은 바로 이런 척하며 사는 꾸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준만 교수는 그런 척함으로부터의 결별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론개혁의 성패는 수구신문들의 방해공작보다는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이기심 자제를 해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49)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팩트마저 자신의 마음대로 왜곡해서 나타나게 되는(책 속의 조선일보 기사, 사설 등등) 일련의 사건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대부분이 갖게 되는 족벌신문들의 볼록렌즈나 오목렌즈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한 인식은 사실 그대로의 세상바라보기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행할 자세를 지니고 기꺼이 행할 의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방향이 애시당초 틀어져 있다면 이 또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세상을 바로보는 평면 거울인 셈이다. 문제는 외꾸눈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 두 눈을 가질 수 있는냐인데 그 것마저도 그런 의사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나에게로 눈을 돌리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아에 대한 성찰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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