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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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특히 '엘리베이터에~'는 계속되는 우연이 어떻게 맞물려 황당함을 가져오는지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피뢰침'의 경우는 죽음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경험에서 살아남음으로써 무엇인가 남다른 삶으로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집단을 통해 일상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우리는 일상을 탈출하는 꿈을 꾼다. 복권과 같은 일확천금의 기회를 기다려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지금과 같이 성실하게 살다보면 언젠가 볕들날이 있을거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즉 양적 변화의 축적이 질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법칙이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리라 마음 한구석에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네 일상은 그 일상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은 이런 일상의 그물망을 보여준다. 결코 부서지지도 넘어서지도 못하는 견고한 일상의 벽은 그래서 수많은 우연들이 자신들에게 닥치더라도 여전히 그대로다.

혹시나 지금 일어난 이 일이, 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삶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야말로 질적 변화는 양적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질적 변화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질적 변화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저 양적인 축적에만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은 오늘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을, 덧없이 계속 쌓아가고 있기만을 반복하고 있음을 소설은 웃음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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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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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서재응은 마이너에서 5년을 고생했다. 박찬호나 김병현은 이미 메이저로 갈 사람들이지만 마치 통과의례처럼 마이너를 거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생각한다.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가는 길은 누구나에게 열려있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수많은 마이너 선수들중 과연 몇명이 메이저로의 진입이 가능했던 것일까? 우리는 메이저의 화려함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은희경의 소설은 4명의 동창생이 숙제를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그것도 한자리에 모여 있는 바람에 다들 숙제를 해오지 않았을 거라는 오해로 안심하다가 봉변을 당한다-으로 어느 순간 묶이더니 평생을 같이하는 죽마고우로서의 삶을 살게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미 숙제를 하지않았다는 비주류라는 낙인을 가슴에 새겨둔채 평생을 그 낙인을 지우려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을 얽어매고 있는 마이너라는 계급성은 벗어나지 못한다.

메어저로의 도약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남미국가와의 공연계획은 그야말로 메이저라 할 수 있는 방송국에 의해 무참히 깨져버린다. 메이저가 버티고 서 있는 한 마이너는 도저히 도약을 꿈꿀 수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방에 메이저로 진입하기 위해 고시에 목매달고 있지 않은가? 또는 땅 투기라도 해서 경제적으로 메이저로 진입을 꿈꾸기도 한다. 계급이 없는 자유국가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계급에 묶여 있으며 그 진입의 통로 또한 지극히 제한적임을 소설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다른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한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메이저를 꿈꾸는지를? 마이너의 고달픔과 메이저의 달콤함이 주는 극도의 차이가 사람들의 탈출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녁형 인간에 다시 아침형 인간까지 살아서라도, 자신의 몸을 완전히 소진해서라도 탈출해야만 하는 그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바로 이곳임을 생각하니 서글픔이 든다. 메이저도 마이너도 살기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계급이 존재하더라도 차이는 있데 차별이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그저 헛된 몽상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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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풍경 - 빛샘 한국 대표 문학 30
박태원 지음 / 빛샘(Vitsaem)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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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에선 10억 재테크가 인기다. 1억 종잣돈을 모아 10억을 벌어보겠다며 갖가지 묘책을 찾는라 분주하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에서 평생을 살아가며 필요한 돈이 어느정도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20억 정도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10억을 만들어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의 절반밖에는 못 모으는 꼴이 되는데...

어찌됐든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고민은 바로 돈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돈이라는 문제가 결코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던가 보다. 천변풍경이라는 이 소설속의 배경은 1930년대의 청계천 주변 민중들의 삶인데, 이들의 고민이 현재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30년대는 일제치하였음에도 소설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들이밀듯이 지켜보고 있다. 시시콜콜한 개인의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우리가 언뜻 선입관을 가질법한 국가의 독립과 같은 문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라는 것이 꼭 개인 자체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돈의 문제 등을 드러냄으로써 당시에도 이미 자본주의적 폐단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들이 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능동적이지 못하고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결론이 결코 해피엔딩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충고를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8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사람들은 무던히도 돈을 모으려 애쓴다. 정작 그 돈을 무엇을 위해 모으려 하는지 잊어먹은채 말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이젠 그것이 뜯겨져 원래의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경제적 이익을 볼 것인가에만 매몰되어 있는 개인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민중들에게도 웰빙의 삶은 가능한가?라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역사가 진행되가면서도 먹고사는 것이라는 근본적 문제는 어찌 이다지도 커다란 벽으로 남아 있는가? 청계천이 이런 문제를 쓸어가버렸으면 좋겠다. 진정 그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때 우리의 이웃들은 웰빙을 생각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진정 역사는 진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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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물
스티브 마이어로비츠 지음, 정지민 옮김 / 아름다운사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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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똑똑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자동차와 공장의 매연으로 공기를 더럽히고 나서는 청정기를 가지고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겠다고 하는 것이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듬뿍 뿌려놓고서 농약성분을 없앤다는(물론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말이긴 하지만) 세제를 찾는 꼴이나, 가축을 대량생산하고 공장의 하수를 함부로 버려 물을 오염시켜놓고는 정수기를 찾는 모습을 볼라치면 정말 도무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라는 모습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물대신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청량음료를 마시고, 커피나 녹차, 코코아 등을 마시면서 그나마 다행인것은 건강음료라 해서 과일쥬스 등을 마시지만 이것이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우리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라는 생각때문일까? 아니면 이왕 죽는것 맛있는 거나 먹고 죽자는 생각인가? 길어야 100년 인생 뭘 그리 따지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맛있는 거 먹고 아프면 다시 약 사먹고 나으면 되고 그래도 안 나으면 수술하면 되는 거고??? 하기야 그렇게 사는 것도 행복할지 그 누가 말겠는가?

그렇지만 이건 도무지 평등하지가 못하다. 맛있는 것은 아무나 먹을 수 있도록 값싸게 제공되지만 깨끗한 물, 공기, 흙은 돈이 있어야 접할 수 있으며 혹이나 값싼 음식들로 몸이 아파할 땐 돈이 있어야 치료를 받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물과 공기를, 인간인 이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상 평생을 이것들과 함께 살아야 하건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것들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희생의 댓가는 과연 평등했는가?

따라서 깨끗한 공기와 물은 그저 단순히 누군가의 건강을 지켜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의 치료를 넘어 사회와 인간제도에 대한 치료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 내용은 아픔의 원인이 물 흡수의 부족일 수 있는데 다른 데서 원인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과 이런 아픔을 치유하는데는 깨끗한 물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정수를 시켜서 우리가 물을 흡수해야할지, 그리고 지금의 수돗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의 단상들은 수돗물의 위험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대중적인 것들의 위험성, 그리고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또다른 경제적 지출을 행해야 한다는 것. 불평등한 세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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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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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과 늑대
아이를 잡아먹고 성질이 거친 야성의 동물.
사람을 해치는 늑대인간.
그리고 순록을 싹쓸이 해서 사냥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건 정말 늑대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작자는 캐나다 늑대 서식지를 찾아 홀로 늑대들을 지켜본다. 순록을 너무 많이 사냥하는 그들의 모습을 밝혀낼 것이라는 상부의 희망을 안고서.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일처제의 가족관계, 함부로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자족하는 사냥 등등 인간보다 나은 모습에 놀란다. 에스키모인들의 전설마냥 약하고 병에 걸린 순록을 잡아먹음으로써 강한 순록들만이 세상에 퍼지도록 돕는 생태계의 적자생존이라는 법칙에 충실한 늑대와는 반대로, 어떻게 인간의 개입으로 생태계가 망가지는지도 알게된다. 작자는 늑대와 에스키모인들 사이에서 좌충우돌 우스꽝스럽게 적응해가며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미지의 힘은 우리의 이성마저도 제압한다. 늑대가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는 한순간 미친듯이 날뛰며 그들을 다 쏴 죽이고 싶어한다. 본부로 귀환하기전 늑대굴을 조사하다 느닷없이 발견한 4개의 눈동자. 비행기를 피해 숨어든 어미와 어린 늑대. 작자는 그들을 관찰하며 키워 온 애정을 순식간에 망각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해를 간단하게 부인한다. 눈동자를 맞는 순간 찾아오는 두려움. 그것은 적나라한 공포심으로 물들어 급기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킨다. 얼마나 나약한 인간의 이성인가?

선입견 편견, 몰이해로 비롯된 이미지들이 늑대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이 있을까? 어느 순간에도 꿈쩍 않을 이성이란 불가능한 것인가? 사냥을 나가기전 늑대가 울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선 그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PS 절에 가면 삼신각이 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도사가 호랑이를 팔에 괴고 앉아 있다. 백두산 호랑이는 분명 백두대간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호랑이가 살았다는 것은 자연이 그만큼 살아있었다는 의미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의 동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생명체들이 모두 자신의 생명을 맘껏 누릴수 있었음을 상징한다. 호랑이가 사라진지 오래, 늑대도 사라졌다. 이젠 삼신각의 도사는 자신의 팔 아래 어떤 동물을 괴고 앉아 있을수 있을까? 산신령은 슬프다. 인간이 기원을 한대도 그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 잃어버린 세계를 우리는 이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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