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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즈음 책이든 영화든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영웅담은 예전과 같은 우상적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고뇌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인간적 고뇌마저도 결국 영웅의 밑거름이 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우상보다 더한 우러름을 자아내게 만들곤 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런 경향은 평전이라는 장르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면서 일어난 현상이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추측해본다.
칼의 노래도 이런 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위인전에서 읽히던 완전무결함에서 벗어나 매순간 고뇌의 장면이 책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순신의 고뇌는 삶의 무내용에 있다. 그에게 있어 삶이 무의미한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인 김훈이 이순신으로 분하여 토로하는 심정이다. 따라서 소설은 1인칭으로 줄곧 쓰여져 있으며, 이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자신이 살아서 전쟁을 끝마치더라도, 임금은 바다가 만들어놓은 영웅에 대해 겁을 집어먹고 목을 자를 수밖에 없다. 조정은 이미 당파싸움으로 명징한 눈을 잃은지 오래다. 임금의 칼에 죽는 다는 것은 이순신에게 있어 절대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전쟁 도중 불려가 문초를 당했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그건 죽기보다 싫은 그 무엇일게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가여이 여기는 백성들을 전쟁의 상황에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쟁 중에 적의 칼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 승리를 확신한 마지막 전투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그에게 있어 자연사다. 그래야지만 그는 의미없고 내용없는 세상을 마음편히 떠날 수 있으리라.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죽지 못하고,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음에도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인간의 고뇌가 느껴진다.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장면에서, 백성을 지켜내기 위해 피난 온 백성들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서, 굶주리고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하기 위해 자신의 꼬박꼬박 세끼니를 채워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내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이 책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이, 결국 몸으로, 다시 몸과 하나되는 칼이라는 무기로 드러나, 울부짖는 슬픈 노래였다. 그러나 실은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책의 말미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사료에 기록된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다. 이순신 주변에 있던 인물들은 이순신이 조정에 불려가 문초를 당할 때, 애써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궁 앞에서 땅에 이마를 찧으며 임금께 호소하고, 그가 힘들게 이동하는 그 과정을 쫓아 힘이 되어준다. 곧 죽음에 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며, 그와 연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 인물들은 이순신만큼이나 꿋꿋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끈끈한 관계로 만들어줬을까? 칼의 노래를 통해서는 이런 인간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엿볼 수 없다. 다만 다시 한번 그가 영웅임을 실감할 뿐이다.
사족 : 대통령이 휴가기간 중 읽던 책이라면서 관심이 집중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대통령과 그 수반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김훈이 후배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386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다시 12척 정신의 무모함을 걱정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겁나는게 있었다. 제발 그들이 이 책을 읽고나서 바로 잊어버리기를 원했던 것.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정신.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이순신이 헤쳐나갔던 어려움과 똑같다고 상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무모한 도전도 위험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전체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위험해 보인다. 희생은 누구에게도 강요되서는 안된다. 피난민들을 배에 태우지 못하고 떠나는 이순신의 심정으로 난파된 경제라는 배에서 떨어져나가 가난의, 실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백성을 저버리고, 결국엔 전쟁에 승리해 그들을 구원하리라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 전쟁의 승리과정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한다. 죽기를 각오해도 그들은 살 수 없다. 개개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개개인의 죽음은 바로 나이며, 나의 가족이며, 나의 친구이며, 나의 동지다. 그저 한낱 개인일수도 있지만 그 개인에겐 바로 그 자체가 전 우주다. 개인의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우주와 우주가 무너진 속에서 바다는 작다. 이순신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 시대에 거대했다. 그러나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