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부-기시감이라는 것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예측은 아니다. 그저 막연히 현재의 일을 과거에 겪었던 그 무엇인냥 생각케 만드는 느낌일뿐. 이런 느낌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겪어본 일일 것이다. 나의 경우는 꿈 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친 파란 대문의 집을, 실제로 친구 집을 방문하다 똑같은 대문을 본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느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기억되는 그 장소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기시감과는 좀 거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외에 두세번 정도 막연한 느낌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기시감을 근거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재는 최첨단의 커뮤니케이션 매체인 디지털카메라와 휴대폰, GPS, CC TV 다. 그런데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기시감도, 소재가 되는 매체들도 모두 조금씩 뒤틀려 있다.

여자 주인공 서유진의 기시감은 이미 기시감 차원을 넘어 거의 신들린 예시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 그날 하루는 정말 이상한 하루였는지 그녀는 모든 상황들을 다 겪어본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조금씩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어김없이 그녀에게 닥친다. 그렇다면 이것을 기시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의 선무당 수준이 아닌가? 사건을 미리 알고 있으니 예방도 가능하다. 예시는 그냥 예시일뿐 그것이 운명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감독은 이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그녀가 느낀 것의 정체가 기시감인지 예시인지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는 첨단 매체들은 어떨까? 아무대나 들이대는 디지털 카메라의 위력, 그리고 집안을 나온 순간부터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CCTV로 볼 수 있는 상황들. 그런데 이런 상황들의 위험성은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어브 스테이트]에서 이미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을 풀어가는 열쇠가 되는 사진의 원본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요즘같은 디지털 시대에 과연 원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복사나 또는 위조된 것과 원본이란 것이 그 차이성을 지닐 수 있을까? 원본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의 삶의 단편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점이 아날로그화 되어 있는 모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분명 매체가 변하면 삶도 변하기 마련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것이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면 말이다. 메시지가 변해가는데 삶이 고정되어 있을 리는 없다. 마음대로 퍼가는 글, 2차 3 차로 옮겨지다 보면 도대체 그 원저자를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옮겨가는 도중에 글은 또 다른 색을 입는다. 디카가 내뿜는 위력이 또 얼마인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디카는 과거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 숨겨진 것들을 자꾸만 밖으로 공공의 공간으로 들추어낸다. 아마 이런 들추어낸다는 의미에서 감독은 진범을 찾는 소재로서 첨단 매체들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억측해본다.

아무튼 영화를 끌어가는 중요한 두 소재인 첨단 매체와 기시감이라는 것이 정말로 서로 동떨어진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속에서 하나로 묶여지도록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의 삶의 한 풍면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영화는 참신했지만, 그것들이 보여주는 것이 잘 짜여지지 않고 무엇인가(some) 성겨있다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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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슈운지의 [러브레터]가 편지를 매개로 지나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세상의...]는 소니 워크맨을 통해서 옛 사랑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 하는 퀸카 아키와 무엇이 매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고등학생 쇼쿠의 사랑이야기인 [세상의...]는 많은 부분 [러브레터]와 닮아 있다. 단, 멜로 영화가 으례 가지고 있는 백혈병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이 조금 식상하긴 하다. 그래도 10년 전의 진한 감흥을 느꼈던 그 청춘의 시기가 지나고, 조금은 무뎌진 감정을 가지고 영화를 바라봤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썩 괜찮은 작품인듯 싶다. 특히 워크맨을 계기로 보다 가까워지고, 또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육성을 녹음해 리츠코라는 어린아이를 메신저로 사랑의 마음을 주고 받는다는 설정은 참 좋다. 게다가 메신저가 단순히 메신저로 끝나지 않고, 또한 리츠코라는 현재의 인물이 왜 다리를 절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결국 한꺼번에 해결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 안타까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다들 너무나도 착해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꿈 속을 거니는듯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 상상해보는 슬픔의 물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먼저 떠난다면 남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 영화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이 남는 자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그 영원성에 얽매이지 말고, 남아 있는자도 떠나는 자도 모두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남겨진 모든 것들을 정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의 완성임을 영화는 말한다. 한편의 순정만화를 보는듯한 영화. 현실과 거리를 조금 두고 잠을 깨기 바로 전 순수했다라고 착각하며 어린 시절의 달콤한 꿈을 꾸는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볼만한 영화이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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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만 잠깐 5분정도 보다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보고 말았네요...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거라고는...

태풍이야기가...계속 나왔다는 것...

주인공이지 싶은 여자가 다리를 절었다는 것..



다시 얼른 보고 싶어요...!

하루살이 2005-01-1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풍과 다리 절뚝거리는 것은 영화 끝까지 중요한 소재로 작용한답니다.^^
 
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일본 호러소설 대상 수상작인 이 책은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보험금을 노린 자해와 살인 등이 소재로 쓰여지고 있는데 그 묘사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소름이 돋는다. 사건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인물의 캐릭터가 너무 어두울 뿐만 아니라 쫓고 쫓기는 순간들이 숨막히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몇가지 이론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데 먼저 이 이론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크게 구분하지 않고 정성결여자, 반사회성 인격장애, 사이코파스, 배덕증후군 등을 뭉뚱그려 설명하면;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향,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남을 속이는 것, 충동적인 것, 불끈 화를 내며 폭력을 휘두르는 것, 위험에 대해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 무책임한 것,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결여되어 있는 것 등등이 해당된다.

19세기 이탈리아 의학자 롬브로소는 선천적 범죄자설을 주창했다. 모든 범죄자의 3분의 1을 선천적 범죄자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인류 진화에 역행하여 선조로 회귀하는 사람인 반면, 사이코 파스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한 인간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생물의 r전략과 K전략' r전략이라는 것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애지중지하면서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최근의 배금사상, 사고력과 상산력의 쇠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결여로 비롯된 손해보험 청구금액의 절반은 사기라고 보고, 생명보험 분야에도 머지않아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바로 이 생명보험 분야의 이런 현상을 무당과부거미(교미를 끝낸 후 암컷은 수컷을 잡아먹는다)를 묘사하듯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복지제도의 향상과 환경오염, 그리고 먹거리의 불안전성이 아이를 많이 낳도록 유도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서 어떤 모성이나 부성애를 느끼지 않은채 방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즉 사회제도에 무임승차해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가는 전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아이도, 사랑하는 사람도(물론 사랑의 감정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순전히 이용하기 위해서, 그러고 보면 우리의 결혼제도라는 것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위한 전술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련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저 한낱 이용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도덕을 상실한 이런 사람들은 바로 현대의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해가는 새로운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변이가 점차 확장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정말 무서운 발상이다.  우리의 경우 출생률의 하락이 보여주듯 저자의 상상이 딱 들어맞는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를 낳아 화장실에 버리는 유기 사건이나, 돈으로 인해 친구나 지인을 살해하는 경우,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해하거나 공갈 협박 꾀병을 앓는 사기단의 등장 등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시못할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무엇이란 바로 검은 집에서 말하는 무임승차를 꾀하는 변이 사이코스파의 그림자로 얼핏 비쳐지는 것 같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의 결정(여기엔 낙태 등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경제적 여건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이고 보면 살인아나 폭행이라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 않을뿐이지 우리 모두 사회에 무임승차하고 싶어하지는 않는지 곰곰히 되돌아보게 만든다. 도덕의 상실. 바로 검은 집을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머지않은 미래의 모습일지 누가 알겠는가? 

'선의로 가득 찬 길도 지옥으로 통하는 일이 있다'

우리가 좀 더 잘 살기 위한 복지제도의 예상치 못한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관적 견해가 이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정말로 우리 사회가 이런 병폐를 드러낸다면(정말로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그 대안은 무엇일까? 작가가 주인공과 그 애인을 통해 조그마한 희망을 내비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왠지 마음은 무겁다. 사람이, 인간이 얼마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주위에서 매스컴을 통해 자주 보아왔기에... 그리고 나 자신을 한발자국 떨어져 보면 결코 100% 도덕적이라고 보장할 수 없기에 말이다.

유혹은 항상 양심보다 강렬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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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중 제일 재미있게 본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입니다. 나이를 먹고서도 절대 늙지 않는 감독의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리고 3년 만에 내놓은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녀가 마녀의 저주로 할머니로 변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모험담이라고 짧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센과 치히로 보다는 다소 웃음이 준 것 같습니다. 대신 마법은 보다 풍성해졌고요. 음악은 역시 짱입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정말 만화와 똑같이 환상입니다. 심금을 울리죠.

주인공 소피라는 소녀와 함께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구성하는 것은 하울이라는 미소년 마법사입니다. 어렸을 적 캐서피(?)라고 했던가, 악마의 불씨를 삼키고 심장을 내놓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심장을 내놓는 것이 양심을 판다거나 악마로의 변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전쟁에 대한 반대, 사랑의 아름다움, 나이 먹는다는 것의 의미 등등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계속해서 추구해 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보다는 소피가 하울에게 심장을 돌려주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울은 심장을 받은 후 그 무게에 힘겨워합니다. 마음은 그만큼 무거웠던 것이죠.

하지만 그 무게말고 하울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요? 하울은 마음을 받기 전에도 착했습니다. 마음을 줄 상대가 없을 뿐이었지만요. 실은 그런 것 같습니다. 꼭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세상에 온정을 베푸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냥 무감각하게 착할 수도 있습니다. 하울처럼 말이지요. 사랑이 그의 눈을 뜨게 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꼬마아이의 모습을 보면 하울이 과거에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무거워진 마음은 어떻습니까? 심장이라는 마음을 전해받은 하울은 그 전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또는 달라질까요? 혼자 상상해봅니다. 때론 그 마음이 무거워 힘에 겨워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마음이 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을겁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껍질을 벗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좋은 건지, 행복을 줄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거워진 만큼 분명 삶의 깊이도 깊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깊이 가라앉듯 말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더라도 불처럼 그렇게 환하고 크게 번질테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어두운 삶을 환히 밝혀줄 수 있을테니까요. 비록 그 모습이 추할지 아름다울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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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 대한 느낌은 정말 십인십색인가봐요~ 님은 하울의 마음에 뽀인트를!!

잘 읽고 갑니다!!!

하루살이 2004-12-3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 넘게 사랑해 온 감독의 작품. 알고보니 어렸을 적 코난부터. 그럼 20년도 훨씬 넘게 애정을 갖었던 것이죠. 정말 놀라웠죠. 나우시카 라퓨타 토토로 키키 붉은 돼지 ... 잊어버릴 수 없는 캐릭터들. 그래서 이제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집착하려 합니다. 때론 이것이 영화를 즐기는데 방해가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언제나 실망시키는 법은 없었으니까요
 
약속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이 추리소설 같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사필귀정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은 삶이라니. 1+1=2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의 삶은 단순하지만 명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우리네 인생이 그러던가? 느닷없이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 때문에 또는 우연한 만남 때문에 모든 것이 뒤엉켜 버리기 일쑤다. 잠깐 한발자국만 떨어져 바라보면 그런 삶이 재미있을련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무미건조한 일상보다는 파란만장한 삶의 모습이나 환상, 모험들을 쫓아 나서는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괴로울 뿐이다. 거의 미쳐버릴만큼. 거의 손아귀에 잡을 만큼 쫓아간 그 무엇이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듯이 우연은 그렇게 순간 불어와서 우리네 인생을 날려버린다.

소설은 천재적인 한 경감의 몰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천재성이 결국 인생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미치광이로 고꾸라지는 비참함만 드러낸다. 빨간 치마를 입은 어린 소녀의 연쇄적인 죽음. 경감은 그 패턴을 이해하고, 함정을 만든다. 기어코 걸려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 덫. 하지만 경감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거기엔 누구도 예상못한 우연한 사건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범인을 잡겠다는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누가 되었든. 아~  알고보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이 책 속에선 약속 말고도 <사고>라는 단편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사고>또한 우리의 사고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고를 일으키는 재미를 준다. 세일즈 맨의 자동차가 멈춰 서버리자 그는 하루를 인근 마을에서 보내기로 한다. 젊은 여자를 생각하며 모험심에 가득차 마을로 향하지만 여관은 이미 만원이다. 그래서 향한 곳이 민박(?). 주인은 은퇴한 판사. 집에 찾아온 친구들은 검사,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이들과 재미삼아 재판을 받는다. 자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살았다며 자신하는 주인공. 포도주 한 두 잔이 창자 속을 파고들면서 호기가 발동한다. 자기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일즈계의 규칙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좋은 차도 얻고 승진도 했다. 물론 이런 초고속 승진은 상사의 죽음으로 생각보다 일찍 다가왔지만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검사의 추긍으로 점차 상사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세일즈맨의 고도의 책략으로 발생한 살인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세일즈맨은 끝끝내 자신의 순결을 주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행동들이 과연 순수했는지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세일즈계의 도리를 다한 삶 그것 자체가 이미 문제를 발생할 여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무결하다고 주장해도 그가 걷고 있는 길 자체가 이미 피로 이루어진 길이라면 그의 온 몸은 이미 피투성이일 뿐인 것이다.

세일즈맨의 심리적 변화를 쫓아가는 것은 흥미롭지만 섬뜩하다. 지금 내가 무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길이 이미 누군가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진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도덕적인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현대의 이런 경쟁사회 속에선 말할 필요조차 없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음흉한 웃음이 내 가슴 속에서 몰래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양분은 무죄다. 그러나 그 열매는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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