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tella.K > 음식으로 道닦는 일본요리사, 나카히가시 히사오

지난 14일자 주말매거진에 일본의 유명 요리사 나카히가시 히사오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썼습니다.

 

                       * 나카히가시씨

 

200자 원고지로 14장을 썼는데, 지면 사정으로 9매로 줄여야 했습니다. 기사를 '쳐 내는 일'(신문사에서는 원고 줄이는 작업을 이렇게 부릅니다)은 흔하고 또 흔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쉬웠습니다.

 

"풀과 동물은 인간에게 먹히려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패스트푸드와 대량생산식품에 밀려 진짜 맛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진짜 맛을 보여주는 '키즈 셰프'(Kids' Chef) 프로그램을 작년 말부터 진행 중이다" 등, 그의 말들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사를 줄이려니 키즈 셰프 프로그램과 관련된 부분을 모두 쳐내야 했습니다. 문장을 매끄럽게 이어주고 풍부하게 해주던 각종 수식어들도 걷어내야 했구요.

 

그래서 여기 한풀이 하듯 기사 원문을 구름에클럽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구름에

 

 

나카히가시 히사오(中東久雄·53)씨를 찾아갔을 때, 그는 채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는 두릅 하나를 눈높이로 들어 한참을 쳐다봤다. 이어 한무더기 쌓인 돗나물 잎을 하나 떼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눈까지 치켜뜨고 정신을 집중해 씹는 것이었다.

 

              *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한 무

 

나카히가시씨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식당 ‘소우지키나카히가시(草喰なかひがし)’의 주인이자 요리사다. ‘풀을 씹어 먹는 나카히가시’라는 뜻이다. 넓이가 5평 남짓에 좌석은 12개에 불과하지만 6개월 전 예약해야 겨우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내로라 하는 일본 정계와 재계, 문화계 인사들은 모두 이곳을 방문했다고 할 정도다. NHK방송은 1년 내내 나카히가시씨를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나카히가시씨는 오는 3월 자신의 요리세계를 선보이는 행사에 쓸 한국 봄채소들을 맛보기 위해 지난 5일~6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가 만든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은 ‘재료가 지닌 생명력이 먹는 사람 속에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들과 산에서 자라는 식물과 동물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잡아먹히려고 태어났나요? 하지만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영양과 기운을 섭취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음식 재료들을 바라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룬다. 이런 마음으로 만든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약이 아닌가. 나카히가시씨는 “내 음식을 먹으면 ‘맛을 떠나 건강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 몸이 좋아졌다는 손님들도 있다”고 했다. 언젠가 그가 우연히 가부키 공연 팜플렛을 보니 식당 상호와 똑같이 ‘소우지키(草喰)’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 알고보니 옛날에는 이 단어가 ‘약 파는 사람’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 두릅 튀김

 

나카히가시씨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생산된 채소와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는게 가장 몸에 좋다”고 믿고 있다. 서로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다. “한국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다”고 하자, 나카히가시씨는 “예전부터 깊이 공감해온 말”이라고 했다. “신토불이란 본래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땅과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나는 생명은 하나’라는 의미죠. 그런데 작년 한국에 와 가락동시장에 갔더니 ‘신토불이’라고 적힌 종이상자가 널려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일본에서는 그렇게 알려진 말이 아니거든요.”

 

가락동시장에서 나카히가시씨는 흙이 그대로 묻은 무를 보고 더욱 감동했다. “일본 채소가게에 가 보면 모든 채소가 똑같은 크기에, 깨끗하게 씻어서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에 담겨 있죠. 자연에서 격리된 죽은 채소에요. 가락동에서 흙 묻히고 나뒹구는 무를 보면서 ‘저건 틀림없이 맛이 있는 무’라고 확신했죠. 자연과 연결돼 기운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한국 채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모듬 야채튀김

 

그는 요리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재료에게 ‘어떻게 요리하면 되겠니’라고 물어보면 답이 와요. 재료를 쳐다보고 맛보다 보면 요리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는 뜻이죠. 한번은 길을 가다 버려진 콩깍지를 봤어요. 뭔가 내게 말을 하려는 것 같아 콩깍지를 헤쳐보니 콩 몇 알이 남아 있었어요. 주방으로 가져다 콩들이 말해주는대로 요리했더니 맛있는 음식이 됐어요.”

 

나카히가시씨가 주방에서 두릅을 쳐다보고 돗나물을 맛본 것은 처음 만난 한국의 풀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었다. 그는 일본에는 없다는 돗나물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그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풀들이라 산에서 자란 것과 같은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살짝 데쳐 드레싱을 곁들이겠다”고 말했다. “봄동(가을 추수가 끝난 밭에 씨를 뿌려 겨울에 나는 배추)은 물에 데쳐 유부와 같이 먹으면 좋겠다” “두릅은 튀김이 어울리겠다” 채소들이 들려준 자기 요리법이 이어졌다.

 

나카히가시씨는 “일본 사람들은 원래 채소를 날로 먹지 않는다”며 한국인들이 생 채소를 먹는 습관에도 큰 호감을 보였다. “한국사람들이 맵고 짜게 먹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날밤이나 날고구마처럼 익히지 않은 채소를 많이 먹어서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인 것 같네요.”

 

그는 무에 묻어 있는 흙을 툭툭 털어 칼로 잘라 맛을 보더니 “달고 맛있어서 날로 먹어도 좋겠지만, 나라면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인체는 1%가 염분이기 때문에 수치상으로만 보면 음식에 1%의 소금을 첨가했을 때 인체와 염분 농도가 같아져 가장 맛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을 존중하는 나의 조리법은 요즘 유행하는 ‘웰빙’ 혹은 ‘슬로우 푸드’와도 통하는게 있다”며 “하지만 나의 요리법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30여년전 여관을 운영하며 요리도 했던 내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누구나 나처럼 음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작년 11월 ‘키즈 셰프(Kids’ Chef)’를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방문해 좋은 재료를 써서 정성껏 만든 먹을거리를 어린이들에게 맛보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유년기 형성되는 입맛이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그는 “지금 입맛을 되돌려놓지 않으면 패스트푸드와 대량 생산식품에 밀려 진짜 맛을 영원히 잃어버릴 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성윤기자 gourmet@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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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요즈음 책이든 영화든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그 영웅담은 예전과 같은 우상적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고뇌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들의 인간적 고뇌마저도 결국 영웅의 밑거름이 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우상보다 더한 우러름을 자아내게 만들곤 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이런 경향은 평전이라는 장르가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면서 일어난 현상이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추측해본다.

칼의 노래도 이런 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위인전에서 읽히던 완전무결함에서 벗어나 매순간 고뇌의 장면이 책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순신의 고뇌는 삶의 무내용에 있다.  그에게 있어 삶이 무의미한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인 김훈이 이순신으로 분하여 토로하는 심정이다. 따라서 소설은 1인칭으로 줄곧 쓰여져 있으며, 이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자신이 살아서 전쟁을 끝마치더라도, 임금은 바다가 만들어놓은 영웅에 대해 겁을 집어먹고 목을 자를 수밖에 없다. 조정은 이미 당파싸움으로 명징한 눈을 잃은지 오래다. 임금의 칼에 죽는 다는 것은 이순신에게 있어 절대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전쟁 도중 불려가 문초를 당했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그건 죽기보다 싫은 그 무엇일게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랑하는, 가여이 여기는 백성들을 전쟁의 상황에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전쟁 중에 적의 칼에 죽음을 당해야 한다. 승리를 확신한 마지막 전투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그에게 있어 자연사다. 그래야지만 그는 의미없고 내용없는 세상을 마음편히 떠날 수 있으리라.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죽지 못하고, 꼭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음에도 죽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인간의 고뇌가 느껴진다. 아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장면에서, 백성을 지켜내기 위해 피난 온 백성들을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서, 굶주리고 백성들의 목숨을 담보하기 위해 자신의 꼬박꼬박 세끼니를 채워야만 하는 현실에서, 이내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이 책은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이, 결국 몸으로, 다시 몸과 하나되는 칼이라는 무기로 드러나, 울부짖는 슬픈 노래였다. 그러나 실은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책의 말미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사료에 기록된 주변 인물들에 대한 평가다. 이순신 주변에 있던 인물들은 이순신이 조정에 불려가 문초를 당할 때, 애써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궁 앞에서 땅에 이마를 찧으며 임금께 호소하고, 그가 힘들게 이동하는 그 과정을 쫓아 힘이 되어준다. 곧 죽음에 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며, 그와 연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 인물들은 이순신만큼이나 꿋꿋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끈끈한 관계로 만들어줬을까? 칼의 노래를 통해서는 이런 인간관계의 촘촘한 그물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엿볼 수 없다. 다만 다시 한번 그가 영웅임을 실감할 뿐이다.

사족 : 대통령이 휴가기간 중 읽던 책이라면서 관심이 집중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대통령과 그 수반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김훈이 후배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386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다시 12척 정신의 무모함을 걱정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겁나는게 있었다. 제발 그들이 이 책을 읽고나서 바로 잊어버리기를 원했던 것.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정신.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이순신이 헤쳐나갔던 어려움과 똑같다고 상정하지 말았으면 한다. 무모한 도전도 위험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전체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위험해 보인다. 희생은 누구에게도 강요되서는 안된다. 피난민들을 배에 태우지 못하고 떠나는 이순신의 심정으로 난파된 경제라는 배에서 떨어져나가 가난의, 실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백성을 저버리고, 결국엔 전쟁에 승리해 그들을 구원하리라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 전쟁의 승리과정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직면한다. 죽기를 각오해도 그들은 살 수 없다. 개개인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이 전쟁에서 이기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개개인의 죽음은 바로 나이며, 나의 가족이며, 나의 친구이며, 나의 동지다. 그저 한낱 개인일수도 있지만 그 개인에겐 바로 그 자체가 전 우주다. 개인의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우주와 우주가 무너진 속에서 바다는 작다. 이순신은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 시대에 거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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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전 그냥 할일없이(하릴없이?) 드러누워 TV 리모콘을 눌러댑니다.  어디에다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화면은 제 마음마냥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손을 놓은 것이 프라이드라는 격투기장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격투기는 보지않고 그냥 돌려버렸는데 오늘은 왠지 그냥 놓아두고 봅니다. 몸 속에 잠자고 있던 피가 들끓었던 탓이었을까요? 피가 터지는 그 장면들이 너무 재미있더군요. 시간 가는줄 모르고 계속 봅니다. 미들급의 최강자, 더 이상 같은 체급에서 상대가 없는 절대 강자가 헤비급과 맞붙습니다. 헤비급의 펀치는 그야말로 스쳐도 다운이더군요. 누워 있는 상대를 향해 발길질을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맙니다. 다행히도 쓰러져있던 미들급 선수는 잽싸게 피했습니다. 만약에 그 발길질이 제대로 들어갔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격투기의 매력은 아무래도 한 순간의 장면 때문입니다. 아무리 핀치에 몰리더라도 딱 한방의 필살기가 적중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뒤바뀌어버립니다.  마치 야구의 9회 역전 만루포처럼 말이죠. 럭키펀치 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것은 정말 땀이 가져다 준 실력입니다. 상대방을 넉다운 시키는 펀치는 그야말로 찰나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찰나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만들어줍니다. 찰나를 위해 그 찰나를 연습합니다. 반복되는 찰나는 영원같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영원을 집어삼켜서야 찰나는 빛을 발합니다. 주먹이든 발이든 칼이든, 무예의 절정은 바로 그 찰나를 위해서입니다. (올림픽 때 문대성의 발차기도 바로 그 찰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찰나에 온 마음을 뺏긴다는 것입니다. 찰나가 발하는 빛에 눈이 멀것 같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말을 잃습니다. 이런 찰나는 무도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닐테지요. 악기의 소리가, 물감의 색감이, 빛의 아름다움 등등이 모두 자신만의 어떤 찰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찰나를 위한 영원같은 반복. 사람들은 그 지겨움에 치를 떱니다. 치를 떠는 순간 찰나는 도망갑니다. 도망가는 찰나를 잡는 것은 오직 시간뿐입니다. 저도 찰나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랄 그 찰나를 위해서, 영원을 가두어두렵니다. 치를 떠는 고통을 감내하고, 기필코 찰나를 얻고자 합니다. 부디 찬란히 빛날 찰나를...

 

사족 : 우리네 삶도 오직 한 찰나를 위해서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찰나란 죽음 직전에 맞는 그 순간일까요? 빛나는 찰나를 위해 우리는 죽음의 연습을 영겁의 시간동안 해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어떤 찰나가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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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12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멋진 글입니다... 찰나....얼마나 짧은 순간이던가요... 부디 찬란히 빛날 찰나를...



추천 열번 할 수 있음 열번 하고 싶지만...아쉽게도 한번 뿐...

하루살이 2005-01-1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너무 너무 황송. 님도 아름다운 찰나를 선물로 가지세요^^
 

쭉정이가 드러나는데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ㅡ김훈<현의 노래>중 137쪽

 

쭉정이는 벼가 익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피라면 다 자라기 전에 뽑혀나가겠지만 쭉정이는 무르익을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제 모습을 밝힙니다. 아마 쭉정이 편에서는 자신의 수명을 다할 수 있는 방편이겠지만, 거두어야 하는 입장에선 헛힘만 쓰게 되는 꼴이죠.

세상 살면서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는 것은 위기가 닥쳤을 때라고도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는 거죠. 평안했을 때에야 누구나 곁에 있을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지 않음으로써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더욱이 정말로 쭉정이 때문에 괴로운 것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조금은 잘 하는 것 같은데, 정말로 남들보다 잘 하는가? 라는 판단을 미리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이런 깨달음은 항상 시간이, 세월이 흘러서야 문득 찾아옵니다. 그래서 참으로 허망하게도 아무련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한겨울 땅을 갈고, 봄에 씨를 뿌려, 땡볕을 받아가며 살아온 세월이 가져다 준 것이 쭉정이뿐이라니. 참으로 허망합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땅을 갈고 있는 것이 이삭이 될지 쭉정이가 될지 지금 당장 알 수 없다는 것. 허망하지만 그래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봅니다. 사는게 아니라 살아가야만 하는가 봅니다. 비록 쭉정이를 맺더라도 말이죠. 다만 오늘도 잠자기 전 빌어봅니다. 제발 알찬 열매를 맺는 꿈이라도 꾸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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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1-12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땅을 갈고 있는 것이 이삭이 될지 쭉정이가 될지 지금 당장 알 수 없다는 것...

이 말에 전적으로 기대어 보고 싶네요,,

하루살이 2005-01-1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년을 기원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2] 예고편에선 법보다 앞서는 돈을 얼핏 볼 수 있다. 현실에선 어떤가? 법을 쫓아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힘없이 쓰러져간다. 그것이 돈이 부족해서인지, 권력이 부족해서인지, 완력이 부족해서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을 뭉퉁그려 힘이라 표현하고 싶다. 힘이 없으면 쓰러진다. 그냥 픽하고 고꾸라진다.

약자의 편에 서 있기를 바라는 법은 공평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아직도 힘에 대한 짝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절실히 느끼는 그 힘에 대한 동경. 약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구멍을 죄어 오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 차라리 우리의 목을 쳐라. 살려두고자 한다면 우리가 살아갈 힘도 같이 주라. 그러나 외면당한다. 그래도 끝끝내 버티고 서 있는 것은 지렁이의 꿈틀거림이다. 잡초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살아남는다면 그곳엔 새 태양이 떠오를 것인가? 그래서 죽는다면 그대로 끝일 것인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억울해서 꼭 살아야겠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니, 너도 한번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아라.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느껴봐라. 세상은 어찌하여 그토록 무심한가? 힘 있는 자의 어리숙한 자기변명에 많은 이들의 꿈이 사그러든다. 삶이 쪼그란든다. 그래 어쩌자고 그대들은 그토록 대담한가?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 이상이 되지 못하더라도 힘없는 자들이여, 제발 뭉칠지어라. 하나 더하기 열이 비록 둘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자. 하나만으로 못한 그 무엇을 둘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발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그 목에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뜨거운 피를 한바가지 토해내도록 목청을 돋구어라. 입으로 토하라. 부디 스스로 목을 내놓진 말자.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는 도마뱀이 되지는 말자.

나약한 자의 푸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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