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가 끝났다. 직장 내 애환을 담은 이 드라마는 신입사원의 적응기가 아니라 N년차 직장인의 생존기였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한 직장인들의 눈물겨운 사투기였다. 


드라마의 결말은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환상을 담아냈다. 결국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내 사업을 차려서 멋지게 성공함으로써 나를 쫓아낸 직장에 복수하는 짜릿한 상상말이다. 드라마니까,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쾌감을 준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해피엔딩이 결코 해피하게 보이지 않는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주인공은 그렇게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미쳐야 미친다고 했지만, 주인공이 코피 쏟아가며 야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를 넘어, 자신의 사업을 차리고 나서도 그는 일에 매진한다. 집에 홀어머니와 어린 딸아이가 있는데도 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일에 매달리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일이 즐거워서? 하루종일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이 전부인 것일까. 


자기사업, 쫓겨난 회사에 대한 통쾌한 복수, 성공...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꿈구는 이것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근면, 성실, 자기 희생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지만, 정녕 그 덕목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을 썼다. 말 그대로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충분히 갖는 삶에 대한 찬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여가는 왜 우리로부터 도망갔는지, '미치지 말고'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vN 월화드라마 [너는 나의 봄]이 끝났다. 김혜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그 탓인지 시청률이 그만큼 나오지는 못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드라마였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담은 멜로적 측면과 살인 사건을 다룬 형사물의 냄새를 잘 버무려, 세상은 살 만하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것은 어릴적 상처다. 마지막회 전인 15화에서 피투성이가 된 발로 길을 걷는 세 명의 아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 아이들이 서로 다른 어른을 만났는데 한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신발을 벗어 주었고, 또 한 아이는 남을 위해 더는 자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숨겨졌지만, 다른 아이는 신발이나 위로 대신 비난이나 학대를 받았다. 세상에는 발이 없는 아이도 있는데 너는 신발이 없다고 징징댄다고. 그날의 일은 세 명의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주인공인 주영도는 엄마의 신을 신었던 아이와 형에게 신을 벗어주지 못했던 아이는 타인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마음으로 힘겨울 수 있겠지만 끝내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건 죄책감일 뿐 죄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한 아이는 아무도 약한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좌절이 분노가 되는 발화의 순간이 올 수 있다.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트라우마는 어른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갉아먹어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 극단적으론 목숨마저 앗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타인에게 화살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런 불행을 막아주는 것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시 마주치되, 그를 응원해줄 사람이 곁에 있어, 함께 극복해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받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칼날을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아름다운 세상은 분노를 유발하는 현실에서 잔잔한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이럴 때면 항상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오 헨리의 단편 [마녀의 빵]이다. 누군가의 선의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섬뜩하다. 다만 우리는 재앙이라는 결과만을 보지않고 선의라는 그 의도를 보는 마음도 함께 가졌다는 것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그 누구라도 [너는 나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지막 몰입 - 나를 넘어서는 힘
짐 퀵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따금 매너리즘에 빠지곤 한다. 몸과 마음에 힘이 빠진다. 이럴 땐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읽다보면 뻔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뻔한 것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기계발서는 이런 나에게 자극을 준다.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점화플러그가 작동해야 앞으로 나아가듯, 점화플러그의 불꽃을 튀게 해주는 것이다. 


이책 <마지막 몰입>은 세계 유수의 기업과 뛰어난 경영자들이 두뇌 개발을 위한 코치로 부르는 짐 퀵이라는 사람이 쓴 잠재력 향상법이라 할 수 있다.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이 그렇듯 여러 책과 연구들을 통합해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잠재력을 극복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어떻게 집중하면서 뇌의 기능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실제 다른 자기계발서와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진 못하겠다. 다만 속독의 방법과 이름을 기억하는 법과 같은 기억력 향상법 등 실제 유용한 방법론이 담겨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짐 퀵이 말하는 두뇌향상법은 어떻게 보면 이미지화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방법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면 책을 읽는 것은 읽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낭송이 아니라(반면 고미숙은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에서 낭송을 중요시한다. 책을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한가, 뼈에 사무치는 것이 중요한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에 처방도 다르다) - 우리는 낭송하지 않을 때도 속으로 읽고 있다 - 글의 이미지를 그대로 머리에 집어넣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습을 통해 글읽기의 속도는 몇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 짐 퀵의 설명이다. 


암기 또한 이미지화 작업이 필요하다. 암기는 반복을 거쳐 뇌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화를 통해 능동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암기는 수동적 흡수가 아니라 능동적 재배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책 내용을 참조- 


하지만 이런 구체적 방법론 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재밌는 일도 이유가 없으면 하지 않게 된다

는 것이다. 즉 동기부여가 없이는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 할 지라도 집중과 몰입이 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없다. 반대로 괴롭고 힘든 일일지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다. 즉 내가 행하는 일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답을 긍정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최상의 몰입으로 일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가끔 매너리즘이 찾아올 때는 자기계발서를 찾기보다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려나(아니, 그러고보면 이런 해답을 찾은 것은 이책 <마지막 몰입> 덕분이니 그래도 간혹 자기계발서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인간의 뇌나 심리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들을 통섭하는 책이 나온다면 말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선 최소 굶어 죽는 일은 없을까.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까.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직까지 뉴스엔 굶어 죽었다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굶어 죽는 이들이 있다. 영양실조로 인해 눈이 머는 아이들이 매년 700만명이 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 이렇게 굶어죽는 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을 비행기에 실어 떨어뜨려 주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할 땐 먹을게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급선무처럼 느껴지는데 말이다. 이렇게 먹을 것을 눈앞에 주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계속된 굶주림 이후 갑작스레 아무거나 먹는 것이 도리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긴 시간 단식을 한 이후 회복식을 하고 몸이 컨디션을 찾았을 때 일반적인 식사를 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의사와 같은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정상적인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먹는 방법을 가르치며 차근차근 몸이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세계는 이런 전문가와 식량을 굶주림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부패한 권력과 행정, 독점적 곡물기업, 세계적 금융세력 등으로 인해 극히 일부에서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무턱대고 지급되는 식량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은 위기를 극복하는 최소한의 긴급처방약처럼 보이지만 혹여 땜방식 처방으로 인한 독이 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주어져야 하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굶어죽지 않고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데 더 힘을 쏟는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지금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돈>은 분명 급한 불을 끄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돈은 가진자들에게 돌아가 생계의 위협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지원금이나 기본소득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돈만으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리고 새어나간 물은 결국 내를 거쳐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버릴 것이기에, 자생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갖추는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재난 시기 월세의 형태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실업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직업교육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등등 돈만 주면 해결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잠깐 목 마른 이에게 물을 주는 것은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현재의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이 잠깐 목 마른 상태라면 좋겠지만). 하지만 주위에 샘이 말라 목 마른 이들에겐 물을 주는 것과 함께 새로운 샘을 팔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이 도구와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지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평점 :
품절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 속에 나오는 감옥은 억압과 통제를 보여준다. 이 감옥은 학교, 회사, 병원 등의 모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이를 토대로 상과 벌을 주는 것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악하다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진 것이다. 또한 현재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동력을 돈이라 여기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을 전제로 한다. 즉 현재 인간이 일궈온 정치, 사회, 경제의 토대는 성악설인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밸리, 홉스, 루터, 칼뱅, 벤담, 니체, 프로이트를 넘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 되어버렸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범죄, 폭력이 이를 증명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성악설을 바탕으로 한 이런 감시와 통제는 오히려 냉소주의를 낳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초래했으며, 이기심을 자극하고 배제하며, 관료주의라는 악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이지도, 경쟁적이지도 않다면 즉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라면 현재 우리의 권력체계와 자본주의는 인간의 세상살이에 적합한 제도일까. 반대로 망치는 제도일까. 만약 인간이 이기적이지도 악하지도 않고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감시의 눈길은 사라지고, 통제를 위한 권력은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이책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인간이 결코 악한 존재가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많이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이 책의 부제 <감춰진 인간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라는 말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제도와 문명을 꿈꾸는 토대가 되고자 한다.   


저자는 <휴먼카인드>를 통해 인간이 이기적이고 악하다는 증거로 거론되는 소설 <파리대왕>, 이스터섬의 수수께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 방관자 효과 등이 오해, 곡해, 조작, 의도된 것들임을 다양한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반면 인간은 유전적으로 가장 우호적인 자가 생존해왔으며, 친화와 유대감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달리 눈썹을 갖고 있는 것은 감정의 노출을 통해 공감하고자 하는 것이며, 공감을 동반하는 모방을 통해 사회적 학습능력을 키워옴으로써 현 인류의 문명을 가능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인간의 특성을 호모 퍼피(강아지)라 칭한다.  


하지만 이런 공감의 능력은 진화의 역설에 부딪히기도 한다. 우리가 수렵, 채집의 시기 몸에 지방을 쌓아 굶주림에 대비하도록 진화해 온 것이 현재 패스트푸드를 비롯한 풍족한 식사로 인해 비만을 불러왔다. 공감의 능력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떨어지며 이로 인해 차이에는 민감해진다. 문명의 발달로 집단이 커지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도는 떨어지고, 차이가 차별로 되는 부조화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차별이라는 부조화는 인류가 농업을 통해 사유재산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무장한 선지자와 군대가 등장하는 등의 계층구조가 나타나면서 권력의 심화는 커져간다. 폭력의 위협과 강제력으로 대항하는 게 힘들고, 그들은 인간이 악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심음으로써 억압과 통제를 자연스럽게 만들어갔다. 호모퍼피라는 우리의 집단본능이 오작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에 접어들면서 뉴스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진다. 뉴스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이한 것이 대상이 되며, 폭력과 잔인함, 이기적 성향과 끝없는 경쟁에서의 승리 등은 뉴스의 좋은 표적이 된다. 이런 정보에 노출되면 될 수록 우리의 잘못된 믿음은 더욱 힘을 얻는다. 가짜약의 효과인 플라시보처럼 잘못된 정보가 힘을 발휘하는 노시보가 우리를 감싸는 것이다. 믿는대로 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 부정적 모습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골렘효과를 낳는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이 이기적, 탐욕적이며 투쟁을 일삼지만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 공산주의를 거의 매일 경험한다. 식탁에 있는 소금을 옆 테이블에 건네주면서 돈을 받지는 않는다. 자신의 아이를 키우면서 돈을 받지도 않는다. 공원과 해변에서 자신의 몫을 따지며 돈을 걷으면 폭력배라 여긴다. 즉 일상 속에서 공유의 가치는 빈번하게 접할 수 있다. 


<휴먼카인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관리자와 보너스가 없는 기업, 참여 예산을 집행하는 포르투알레그리 지자체, 교도관과 범죄자가 함께 식사를 하며 여가를 즐기는 노르웨이 교도소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 사회를 재편성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접촉 가설을 통해 더욱 힘을 얻는다. 


현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약탈과 전쟁, 폭력과 억압 등은 잦은 접촉을 통해 우리가 같은 인류임을 느낌으로써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 우리는 타인을 모방하며 발전해왔고,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성장해왔다. 자주 만나고, 친절하게 대하면 친숙해진다. 이 친숙함은 폭력과 억압, 약탈, 무한경쟁을 막는 저지선이 되어 줄 것이다. 

아참, 그러기 위해선 뉴스를 멀리하고, 공감을 누그러뜨리는 대신(공감은 차별과 쌍을 이룬다) 연민을 훈련하라는 것이 저자의 충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