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역습 - 우리는 문명을 얻은 대신 무엇을 잃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언 지음, 한진영 옮김 / 반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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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허르 브레흐만의 책 [휴먼카인드]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아니 적어도 이기적이며 악하지는 않다는 증거를 들이댄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한 가지 드는 의문! 왜 이렇게 선한 인간들이 모여사는 지금, 현대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는 것일까? 인간이 이기적이다는 전제하에 굴러가고 있는 자본주의 탓인가? 전제를 잘못 세웠으니, 그 과정과 결과 또한 잘 될리가 없을테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라이언은 책 [문명의 역습]에서 인간이 잘못된 길로 접어든 것은 농업이 생겨나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수렵채집으로 살고 있던 인간은 남녀노소가 모두 평등했고, 무리로부터 언제나 벗어나 새로운 무리에 합류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며,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농업이 생겨나면서 권력, 계급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불평등이 생겨나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우리는 승부가 없는 지속적인 게임에서 이겨야만 하는, 그래서 끝을 맺어야 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농업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온화한 기후 덕에 풍부한 식량을 얻을 수 있어 인구가 증가하게 됐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줄어든 식량 탓으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선택이 농업이었다는 가설. 하지만 초기엔 언제고 다시 수렵채집으로 돌아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못한 채 농업이라는 늪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브라이언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이 열기구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해 줄을 잡았다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결국 떨어져 죽은 사건처럼 말이다. 얼른 줄을 놓아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놓지 못한채 열기구와 함께 공중으로 떠오르듯 인류도 농업을 시작하고 나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농업은 축적을 낳았고, 이는 불평등의 씨앗이 되었다. 힘겨운 농업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노예를 얻기 위한 전쟁 등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문명의 역습]은 문명 이후의 인간의 삶이 발전했다는 생각은 오해이며, 오히려 수렵채집 시대의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렸다는 것을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수렵채집 시대로 회귀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저자인 크리스토퍼 라이언이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을 가져온다면 우리의 삶이 보다 행복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보고 있다. 


저자는 "자연분만, 가축의 방목과 인도적 도축, 유기농 채소와 과일, 평등한 기업조직, 공유경제, 남녀이분법을 벗어난 다양한 성, 유연한 인간관계, 성소수자들의 권리,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집과 개인경제, 대체의학, 환각제를 이용한 심리치료, 이 모든 유행의 뿌리는 고대인들이 영위하던 삶이다"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수직적인 기업구조를 동료 진보주의 네트워크와 수평적인 조직으로 전환하고,  각 지역에서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며, 전쟁 비용으로 쓸 돈을 모아 전 세계적 차원의 기본소득제를 실시하고, 자녀 갖지 않기를 장려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수렵채집 시대의 삶의 양식에는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이를 위한 몇 가지 제안은 몽상가처럼 느껴진다. 전 세계적 합의라는 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가기 때문이다. 


[휴먼카인드]와 [문명의 역습]을 통해 생각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기 보다는 사회 환경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안이 우리를 불평등으로 몰아갔고, 불만이 우리를 폭주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위기로 언제 굶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생기면서 농사를 통해 축적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수렵채집 시대 인류는 저장을 하지 않았으며, 혹여 누군가 저장을 했다 하더라도 1년이 지나갈 즈음 축제를 통해 모두 소진해버렸다. 축적을 행한 이를 영웅시하지 않음으로써 축적에 대한 욕망이 억제되었다. 하지만 기후 변화가 가져온 불안이 이런 소진의 시대를 끝내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겪는 기후변화 또한 우리의 불안을 자극해 더욱 불평등의 격차를 키워가는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이런 불안으로 비롯된 축적은 계급을 낳았고, 점차 불만을 불러왔으리라. 누군가의 축적은 누군가의 가난을 의미했다.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모두 불만투성이게 되었을 것이다. 보다 더 가지지 못했다는 불만은 상대를 누르고 더 많이 차지해야하는 경쟁으로 치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만은 무한경쟁으로 우리를 내몰고, 그 경쟁이 발전을 가져온 양 보이지만, 불만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기에, 우리는 경쟁이라는 끝없는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었다고 여겨진다. 


수렵채집 시대의 행복한 인류란 결국 불안과 불만이 없는 인류였지 않았을까. 불안과 불만이 없는 삶이란 결국 축적이 없는 무소유의 삶일 수밖에 없다. 두 책을 통해 결국 우리의 불행은 '부'로부터 또는 '부'를 바라보면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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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가 끝났다. 직장 내 애환을 담은 이 드라마는 신입사원의 적응기가 아니라 N년차 직장인의 생존기였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한 직장인들의 눈물겨운 사투기였다. 


드라마의 결말은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환상을 담아냈다. 결국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내 사업을 차려서 멋지게 성공함으로써 나를 쫓아낸 직장에 복수하는 짜릿한 상상말이다. 드라마니까,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쾌감을 준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해피엔딩이 결코 해피하게 보이지 않는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주인공은 그렇게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미쳐야 미친다고 했지만, 주인공이 코피 쏟아가며 야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분투를 넘어, 자신의 사업을 차리고 나서도 그는 일에 매진한다. 집에 홀어머니와 어린 딸아이가 있는데도 말이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일에 매달리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일이 즐거워서? 하루종일 매달리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이 전부인 것일까. 


자기사업, 쫓겨난 회사에 대한 통쾌한 복수, 성공...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꿈구는 이것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근면, 성실, 자기 희생을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지만, 정녕 그 덕목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버트란트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을 썼다. 말 그대로 게으름을 피우라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충분히 갖는 삶에 대한 찬양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여가는 왜 우리로부터 도망갔는지, '미치지 말고'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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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월화드라마 [너는 나의 봄]이 끝났다. 김혜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그 탓인지 시청률이 그만큼 나오지는 못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드라마였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담은 멜로적 측면과 살인 사건을 다룬 형사물의 냄새를 잘 버무려, 세상은 살 만하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것은 어릴적 상처다. 마지막회 전인 15화에서 피투성이가 된 발로 길을 걷는 세 명의 아이 이야기를 전했다.

그 아이들이 서로 다른 어른을 만났는데 한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신발을 벗어 주었고, 또 한 아이는 남을 위해 더는 자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숨겨졌지만, 다른 아이는 신발이나 위로 대신 비난이나 학대를 받았다. 세상에는 발이 없는 아이도 있는데 너는 신발이 없다고 징징댄다고. 그날의 일은 세 명의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주인공인 주영도는 엄마의 신을 신었던 아이와 형에게 신을 벗어주지 못했던 아이는 타인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마음으로 힘겨울 수 있겠지만 끝내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건 죄책감일 뿐 죄가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한 아이는 아무도 약한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좌절이 분노가 되는 발화의 순간이 올 수 있다.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생겨나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트라우마는 어른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동안 갑자기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갉아먹어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 극단적으론 목숨마저 앗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반대로 타인에게 화살을 돌릴지도 모른다. 이런 불행을 막아주는 것은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다시 마주치되, 그를 응원해줄 사람이 곁에 있어, 함께 극복해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따듯한 말 한마디를 건네받았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칼날을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아름다운 세상은 분노를 유발하는 현실에서 잔잔한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이럴 때면 항상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오 헨리의 단편 [마녀의 빵]이다. 누군가의 선의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섬뜩하다. 다만 우리는 재앙이라는 결과만을 보지않고 선의라는 그 의도를 보는 마음도 함께 가졌다는 것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그 누구라도 [너는 나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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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몰입 - 나를 넘어서는 힘
짐 퀵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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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매너리즘에 빠지곤 한다. 몸과 마음에 힘이 빠진다. 이럴 땐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읽다보면 뻔하다고 느껴지는데, 그 뻔한 것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기계발서는 이런 나에게 자극을 준다. 자동차 시동을 걸 때 점화플러그가 작동해야 앞으로 나아가듯, 점화플러그의 불꽃을 튀게 해주는 것이다. 


이책 <마지막 몰입>은 세계 유수의 기업과 뛰어난 경영자들이 두뇌 개발을 위한 코치로 부르는 짐 퀵이라는 사람이 쓴 잠재력 향상법이라 할 수 있다.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이 그렇듯 여러 책과 연구들을 통합해서 자기 안에 갇혀있는 잠재력을 극복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 시대에서 어떻게 집중하면서 뇌의 기능을 최대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실제 다른 자기계발서와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진 못하겠다. 다만 속독의 방법과 이름을 기억하는 법과 같은 기억력 향상법 등 실제 유용한 방법론이 담겨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짐 퀵이 말하는 두뇌향상법은 어떻게 보면 이미지화 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방법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면 책을 읽는 것은 읽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낭송이 아니라(반면 고미숙은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에서 낭송을 중요시한다. 책을 빨리 읽는 것이 중요한가, 뼈에 사무치는 것이 중요한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기에 처방도 다르다) - 우리는 낭송하지 않을 때도 속으로 읽고 있다 - 글의 이미지를 그대로 머리에 집어넣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습을 통해 글읽기의 속도는 몇 배로 늘어난다는 것이 짐 퀵의 설명이다. 


암기 또한 이미지화 작업이 필요하다. 암기는 반복을 거쳐 뇌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화를 통해 능동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암기는 수동적 흡수가 아니라 능동적 재배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책 내용을 참조- 


하지만 이런 구체적 방법론 보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재밌는 일도 이유가 없으면 하지 않게 된다

는 것이다. 즉 동기부여가 없이는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라 할 지라도 집중과 몰입이 되지 않아 지속적으로 행할 수 없다. 반대로 괴롭고 힘든 일일지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다. 즉 내가 행하는 일에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답을 긍정할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최상의 몰입으로 일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가끔 매너리즘이 찾아올 때는 자기계발서를 찾기보다는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려나(아니, 그러고보면 이런 해답을 찾은 것은 이책 <마지막 몰입> 덕분이니 그래도 간혹 자기계발서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인간의 뇌나 심리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들을 통섭하는 책이 나온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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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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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최소 굶어 죽는 일은 없을까.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볼 수 있을까.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아직까지 뉴스엔 굶어 죽었다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굶어 죽는 이들이 있다. 영양실조로 인해 눈이 머는 아이들이 매년 700만명이 넘기도 한다. 그런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 이렇게 굶어죽는 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을 비행기에 실어 떨어뜨려 주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할 땐 먹을게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급선무처럼 느껴지는데 말이다. 이렇게 먹을 것을 눈앞에 주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계속된 굶주림 이후 갑작스레 아무거나 먹는 것이 도리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긴 시간 단식을 한 이후 회복식을 하고 몸이 컨디션을 찾았을 때 일반적인 식사를 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의사와 같은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정상적인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먹는 방법을 가르치며 차근차근 몸이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세계는 이런 전문가와 식량을 굶주림의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줄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부패한 권력과 행정, 독점적 곡물기업, 세계적 금융세력 등으로 인해 극히 일부에서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무턱대고 지급되는 식량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재난지원금이나 기본소득은 위기를 극복하는 최소한의 긴급처방약처럼 보이지만 혹여 땜방식 처방으로 인한 독이 될 여지는 없는 것일까.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주어져야 하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굶어죽지 않고 자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데 더 힘을 쏟는게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지금 생계에 위협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돈>은 분명 급한 불을 끄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돈은 가진자들에게 돌아가 생계의 위협은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지원금이나 기본소득과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돈만으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것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리고 새어나간 물은 결국 내를 거쳐 강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버릴 것이기에, 자생할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을 갖추는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재난 시기 월세의 형태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실업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직업교육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등등 돈만 주면 해결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까. 잠깐 목 마른 이에게 물을 주는 것은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현재의 코로나19로 인한 재난이 잠깐 목 마른 상태라면 좋겠지만). 하지만 주위에 샘이 말라 목 마른 이들에겐 물을 주는 것과 함께 새로운 샘을 팔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이 도구와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풍성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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