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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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대신 접속이 중심이 되는 시대, 이성 대신 감성이, 역사 대신 찰나로 삶의 축이 이동된다는 저자의 말엔 동감이다. 특히 이렇게 사이버 공간에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지켜볼땐 정말로 접속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한다. 최근의 자동차 광고나 정수기 광고에서 보듯 상품을 사는 것보다는 리스로 변화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소유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상품의 소유보다는 체험을, 즉 깨끗한 물에 대한 체험이 중요하기에 정수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정수기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요, 그 과정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과 받는 쪽은 체험을 상품화시켜 관계를 지속한다는 그의 전망은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적 흐름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하더라고 저자가 책에서 직접 말하듯 인구의 20%만이 이 경험을 만끽할 뿐 나머지 80%는 생계유지를 위해 아직도 접속보다는 소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접속권의 유무가 미래의 문제가 될 것이라는 측면도 실은 접속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힘, 즉 화폐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그와 유사한 숫자의 힘을 가지고 있는냐, 즉 소유하고 있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즉 세상이 접속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밑바탕은 여전히 소유의 문제가 남아있을수밖에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작가가 우려하고 있는 것과 같이 문화의 상품화로 인한 다양성의 상실 등은 접속의 시대든 소유의 시대든 상관없이 목격되어지고 있고 예견되어질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작가의 말처럼 소유가 아닌 체험의 상품화가 이런 문화의 상품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적 생태적  문화적 환경 모두가 각기 다를진데 시간과 공간이 무너진 접속의 시대에선 이것이 모두 무시되어지고 오직 한가지 유형만이 살아남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누군가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맥도날드와 콜라라는 먹거리를 먹을 수 있어 안심하고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이 생각에 아연실색했다. 인도를 가서 카레를 먹고, 프랑스에 가서 달팽이 요리를 먹고, 한국에 와서는 김치를 먹고, 일본에서는 스시를 먹고... 이래야 여행을 갖다 온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지역적 먹거리는 분명 위험을 다분히 내포한다. 중국의 향료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여행내내 쫄쫄 굶었다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맥도날드가 좋은 음식일수도 있겠다. 또한 자신과 맞지 않는 음식에 몸이 아파 여행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먹거리라는 모험마저도 포기한채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건물들을 구경한다면 도대체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접속의 시대가 시공간을 초월하고 사람들간의 차별을 없애주는 장점이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엇을 접속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누가 지니고 있으며, 누가 접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권리 또한 누구에게 주어지는 가도 큰 문제다. 광장과 같은 공공의 장소가 사라진 자리를 대형 상점의 거리가 대신하면서 발생하는 개인의 소유권과 공공권의 문제 등은 접속의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분명 접속이 대세이며 문화가 상품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충족감을 줄 수 있게 만드려면 사람간의 직접적인 접속이 필요하며 상품자체로 고갈되어지지 않는 문화 또한 계속 양산되어져야 할 토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겐 메마른 감성과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기 위해 다양한 오프라인의 동호회와 지역사회의 잔치가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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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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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이 세상을 변화시켜 온 중요한 일부분임은 사실이다.  특히 산업혁명과 같은 대변혁은 증기기관의 발명이라는 하나의 기술적 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농사기술의 발전과 그 도구들의 발명으로 노동력이 대체됨으로써 1차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2차산업으로 이동하게 된다. 물론 이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2차산업이라는 분야는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이런 거대한 물결은 또다시 2차 산업의 3차 산업으로의 이동을 촉진했고 이제 21세기를 맞이해서 다시 한번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즉 서비스 분야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력이 대체되고 또한 1,2 차 산업에서 계속되는 기술의 발전은 점차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그럼으로 인하여 실업자들이 대폭 증가하게 되고 3차 산업의 기술화로 인해 정보산업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간의 수입격차가 벌어져 빈부격차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는 순간 4차산업이라는 분야가 이러한 노동력을 흡수해야 하겠지만 아직 이런 분야의 태동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체되어진 노동은 어떻게 될까?

일단은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나누어 갖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리프킨은 이부분에서 대량의 실업자와 빈부격차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깊어져 혁명과 같은 분노로 표현되어지거나, 많은 사람들이 나머지 노동시간을 나눠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레저시간 또는 여유시간의 확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방면으로의 길을 내비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후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그 방법으로서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라는 새로운 분야를 제시한다.

사회적 경제라는 것은 지금의 시민단체나 자원봉사와 같은 자발적 집단의 생성과 이들의 경제적 활동을 이야기하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기존의 노동자들이 이분야에서 일을 했을때 세금 감면등이 주어지고, 정부나 기업체에서 이런 분야를 만들어 새로운 노동력을 흡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한 재원은 부가가치세를 통해서 많은 부를 창출한 사람들로부터 거둔 세금을 실업자들에게 주는 방법과 기업체에 주어졌던 세금감면 정책을 철회하고 이 분야로 돌리는 등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이 사회적 경제라는 것이 비록 4차산업이 되지는 못하지만 분명 새로운 분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리프킨이 제시한대로만 이 세계가 움직여준다면 분명 미래는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지금의 현실을 직시해보더라도 실업자의 증가와 빈부의 격차라는 현상은 분명 들어맞고 있으며 시민단체나 자원봉사집단 또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나눠갖는다거나 빈부격차의 해소에 대한 방법은 도대체가 희망이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노동시간을 실업자와 나눠갖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다운쉬프트 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노동시간의 단축은 환영할지 모르나 수입이 주는 것은 쉽게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필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그것에 맞는 생활방식의 변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유행하고 있는 웰빙과 다운쉬프트에 대한 참다운 뜻을 알고 그것에 맞는 삶으로의 이동도 한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변화마저도 소비패턴속으로 흡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혜자는 몇명의 소수에게로 돌아가 그들만이 풍족한 삶을 영위한다. 진정 우리가 필요한 것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가 이익을 얻기위해 취한 행동이 결국 모두를 공멸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적게 벌고 적게 일하고 많이 놀 수 있는 세상, 소비의 유혹을 떨쳤을때 가능하다. 모든 것을 자본의 속성으로 몰고가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유토피아의 꿈을 이룰 수 있을것인가?

 

진짜로 놀 줄 아는 인간이 되자. 시간에 잠식되지 말고 돈에 잠식되지 말고 진짜로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참다운 놀이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 되자. 논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 기계가 대체해버린 노동을 맘껏 유용하자. 그러기 위해선 남을 위해 사는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경제로의 진입. 그것을 통한 대동제. 유토피아는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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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0-0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어....만만치 않은 책으로 보이는군요... 사실...저도 읽을려고 사놓았답니다만...
곧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불끈!!

icaru 2004-10-0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제가...이이의 소유의 종말을 읽고, 썼던 리뷰의 제목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란 단어를 넣어 붙였었는데...님도 그러네요..헐...!! 이런 일치는...음...ㅋㅋ

하루살이 2004-10-0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다음 책으로 소유의 종말을 읽으려고 준비중인데. 정말 ... 음...
 
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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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읽는다면 그 속엔 항상 정답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를 내고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책읽기는 그래서 중압감을 가져온다. 정답을 찾아 읽는 책은 그렇기에 따분하며 읽는 것도 어렵다. 특히 사상서나 철학서는 계통 등을 따져가며 그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문학이 아닌 이런 책들은 한치의 오독도 허용할듯 싶지 않다. 그래서 때론 마치 참고서 마냥 누군가가 원전을 읽고나서 가볍게 해석해주는 책들을 읽어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책과 만나다> 라는 이 책은 마치 그런 참고서의 모양을 띠고 있다. 그러나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저자들은 결코 정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책을 읽고 나서 자신들 나름대로 소화해낸 것들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다. 독자가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이야 큰 문제는 아닐것 같다. 무엇보다도 책에서 어떤 모습을 발췌해냈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이 있는지, 관심이 있다면 그 책을 한번 읽어보고 저자와는 다른 색깔의 소화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지가 중요할 듯 싶다.

또한 이 책이 다른 책들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한번 추스려보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여진다. 우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것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쳤을 때 어찌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들. 책 속에선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눅눅히 스며들어 있다. 운명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들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아마도 그런 경향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실에 모여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운명을 거부하고 최선의 방법을 주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 하지만 이런 최선과 차선에 대한 제시는 운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어찌할 수 없을때 우리는 왜 어찌할 수 없는지 처음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듯 싶다.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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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7-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깃~!

하루살이 2004-07-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권이 넘는 책에 대한 이야기. 읽다보면 꼭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 몇권 생기게 됍니다. 행복해지는거죠.^^ 저같은 경우 가비오따스,미덕의 불운,인간의 양,한서이불과 논어병풍,마르탱게르의 귀향을 꼭 읽고 싶어지더군요.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世說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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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문체에 대하여, 그리고 그 글에 대하여 칭찬하는 글을 여기저기서 본다. 난 개인적으로 문체에 대한 감이, 또는 인식이 전혀 없어 아직 누가 어떤 문체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분별을 잘 못한다. 영화라면 또는 음악이라면 어느 정도 감독과 작곡가에 따라 어떤 색깔을 찾아내곤 하지만 영 글은 잼병이다. 그래도 문체는 잘 모르지만 "어 이거 굉장히 잘 썼는데" 따위의 어설픈 평을 감히 내뱉곤한다. 최근 읽었던 책중에선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라는 글이 기억 속에 남는다. 그리고 마침내 접하게 된 김훈의 이 책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정말 청산유수라는 느낌이다.

감정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그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작가의 생각대로 또는 마음대로 나의 생각과 마음이 같이 흘러간다. 정말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 강까지 이르는 마냥 기분도 생각도 푹 젖어버린다. 그러나 잠시 물에서 발을 떼 흙으로 나오는 순간 그 시냇물의 근원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게 된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신산스러움, 대학 졸업식장의 아수라장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정말 공감이 간다. 하지만 왜 밥법이가 고단해야지만 하는지, 졸업식장 행사에 졸업생은 없는지를 잠깐만 생각해보면 그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이 불편해진다. 즉 그의 청산유수같은 말은 저 산꼭대기로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중류에서 섞이는 다른 시냇물과 같은 것이다. 즉 그가 바라보는 생각의 근원과 내가 바라보는 생각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정말로 밥벌이는 고단해서는 안되지만 현재의  밥벌이가 고단하지 않는 자는 실은 고단한 밥벌이를 하는 사람에게서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며, 졸업식장에 졸업생이 없는 것은 학교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줬는지 학생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며, 스승이라고 느낄 수 있는 애정어린 교수를 또한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터이다.  즉 그의 감정과 논리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흘러가지만 난 현실이 현실이게 된 과정을 못내 인정할 수 없기에 그 물줄기의 근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정말 잘 쓰여진 것 만큼 위험의 수위도 커짐을 느낀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오히려 그 희생자들에게 가 있을 수도 있음을 상상하면 못내 그의 글의 날섬이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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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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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재의 <간판스타>가 희생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는 분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처럼 줌인과 줌아웃, 패닝으로 짜여진 만화의 한컷 한컷은 글보다도 훨씬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몽타쥬 기법과 같은 장면의 충돌없이도 서서히 감정을 격앙시키는 컷의 구성은 탁월하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나 사회적 제도, 역사의 흐름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러나 그것은 누구를 향해 폭발되어지는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판 어머니의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 원시인처럼 거친 근육으로 표현되어진 경쟁사회속의 타인들, 끌려가는 아버지때문에 또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들때문에 토악질을 해대야 하는 주인공,  가난하기에 왕따 당하는 딸을 위해 손을 꼭 쥐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어머니 등등. 주먹을 뻗어 닿는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되어 버린다. 가족과 동료를 향한 거침없는 분노. 실은 세상을 향한 분노여야 옳다. 그렇기에 한 컷 만화 속의 뒤틀어져버린 관계들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누가 우리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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