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대략 48시간 정도의 냉각기를 가졌습니다.  

바스타님의 반론을 불러 일으킨 제 글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또한 바스타님의 첫 번째 반론 역시 다시 한번 거리를 두고- 아니 미심쩍은 마음은 있지만 반론을 지지하는 입장의 애정을 가진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제가 건너뛰며 읽었던 부분도 있었고, 제가 반비판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서 형식적 공감 밖에 드러내지 못한 부분 중에서 고개를 정말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처음 뵙는 분의 실명 비판에서 느껴지는 불유쾌함같은 것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 알러지 반응을 불러 일으킬 만큼 예의에 어긋난 글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 전체에 공감의 내용이 훨씬 많음에도 유독 마지막 두 문단에 대해 집중적으로 길게 대응한 것부터가 제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여기에는 세계관의 차이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다름으로 충돌도 하고 적대도 하게 됩니다. 저와 바스타님 역시 어떤 부분에서 분명히 다른 이념이나 대응방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어디까지는 함께 갈 수 있지만 어느 선에서는 헤어져야 하는 지점도 생기리라 봅니다. 제 세계관과 바스타님의 그것도 그런 운명의 도상에 있을 겁니다. 그런면에서 기본적으로 바스타님이 가진 세계관과 그에 따른 진정성이라는 부분을 제가 좀 더 긍정적으로 수용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쿨링오프과정에서 이야기 과정을 조망하면서 한편으로 들었던 생각은 바스타님의 진정성이란 것을 제가 토론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몇 가지 취약점들을- 대개의 모든 이념형이나 주장들은 그런 것을 반드시 갖게 됩니다- 부각하고 언어적으로 포획해서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바스타님이 전체적으로 취하시는 스탠스가 대중들의 운신을 폭을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점은 사실 이 사안을 둘러싼 '철학적' 입장이지 이번 사건에 대한 건은 아닙니다. 제가 바스타님이 '정의'의 문제를 거론하시면서 이 문제를 '철학적 함의'로 넘기셨다고 했는데 다시 재독해보니 '철학적 함의'에 하이라이트를 치고 그것을 더욱 확대한 것은 저 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의'라는 것에 대한 입장에 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거론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제가 사건을 텍스트화하지 말라고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분의 페이퍼에 제 글이 인용되는 것을 보고 경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스타님과의 이야기 과정 속에서는 제가 사건을 텍스트화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스타님은 제게 좋은 경험을 일깨워 주신 셈입니다. 앞으로도 스스로 경계할 수 있을 경험으로 기억될 듯 합니다. 

제가 '알라딘 불매운동'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사실 그 결과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개인적 반항이 아니라 조직적 운동이 된다는 것은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고루하지만-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촛불 과정에서 다중적 운동과 그 결과를 대하는 참여자들의 태도에 비판적이었던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됩니다. 최소한 그 운동이 흐지부지 된 것에 대해 누군가 무릎을 끓는 사람이 하나쯤 나와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자찬연이 사실 씁슬했기 때문입니다. 행여 불매운동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감 같은 것을 저는 지금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궁극적으로는 '비관/낙관' 사이에서 운동의 낙천성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  한결 같이 운동을 낙관하고 긍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철인형 운동가는 아닙니다. -운동 초기에 생기는 비관적 전망은 개인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람시가 말하는 '의지의 낙관주의' 에 대해 저는 믿는 편입니다. 물론 더 요구하는 분들은 '의지의 낙관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이미 과학이 되어야한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을 좀 거리를 두고 보면서 의외로 제가 발견한 사실도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에게 요구해버린'도덕주의 딜레마'라는 겁니다. 어떤 일에 종사하시고 어떤 사업장에 계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 사기업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회사도 비정규직들이 꽤 있습니다. 주로 젊은 친구들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건 '밥 잘 사주기' '퇴근 빨리 시켜주기' ' 시간 외 싸인 쉽게 해주기' 정도입니다. 가끔 경영팀에서 시간 외를 가지고 어필하는데 대충 '진짜로 애들 일 많아요' 하면 더 확인 못합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존재에 대해 제가 저희 회사 전체에 어필하지는 못합니다. 전 정치라는 것에 '도덕'의개입에 대해 좀 부정적입니다. 물론 '도덕' 외에 무었이 있느냐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지만 오히려 그 '도덕'이 한국사회에서 보수적 가치의 옹호로 악용되기 때문에 정치에 '도덕'의 이름을 사용하는데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도덕'의 이름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는 겁니다. 즉  내가 다니는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별말 못하며서 다른 회사- 알라딘-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하는 식의 '도덕주의 딜레마' 말입니다. 물론 공기업이나 사회단체, 비영리 기업들에 계시는 분은 이런 '도덕주의'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습니다만 대개 회사원이거나 노동자들이라면 모두 한번 쯤은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썼던 페이퍼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더군요.) 이게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도덕주의의 딜레마인데 거기에 걸쳐있던 거지요. 실제로 저는 노조에서 레닌이 펼쳤다는 '외입론'을 주장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회사 노조와 노조원들이 눈치보기나 경직됨으로 인해 문제를 돌파할 수 없을때 외부의 유사 단체를 통해 압력을 넣고 노조를 추동하자는 방식 말입니다. 노조는 마지 못해 움직이는 척 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활동 공간을 넓혀가는 거지요. 사실 제안은 여러번 하지만 사실 작동된적은 거의 없습니다. 어쨋거나 논쟁을 재독해 하는 과정에서 저를 잡고 있던 도덕주의딜레마를 보게 된 것 역시 발견일 수 있겠습니다. 논쟁 과정이 제 쪽의 흥분과 과장 속에 매끄럽지 못했지만 이런 것들을 추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바스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야기 과정 속에 본질과 관련없이 상호 간에 찔러댄 서툰 창질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바스타님의 여러가지 비판과 주장들 중 부차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을 삭제해 내고 행동의 측면에서,그리고 사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런 말이 남습니다. '당신은 어쨋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좋다. 거기까진..그렇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제가 rosa님께 남긴 댓글에도 '알라딘 반대'가 아니라'잠정적 유보상태' 임을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스타님의 아드리아네의 실은 알라딘 전체에도 이 문제를 재점화하는데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또한 유보라는 미적쩍한 상태로 그냥 잊고 지나가던 제 말과 기억에도 점화하신셈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운동의 한 방식이지만 최선책인지, 더 효과적인 방식은 없는지 고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이 땅에 함께 사는 노동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제가 남긴 페이퍼의 글들이 그 분들께 어떤 서운함을 남겼다면 부족한 글의 헛점으로 여기며 사과드립니다.  

 이 시점 부터 알라딘 불매운동에 개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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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가 한나라당 경선에 나왔을 때, 보수적인 한나라당 내에서도 '저 사람은 안된다.' 라는 말이 있었다. 정파가 양파와 쪽파처럼 달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쉬운 말로 '털면 털릴게 너무 많다' 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쨋거나 추운 겨울, 허겁지겁 그가 푸른 집의 열쇠를 받았다. 

모든 문(게이트)는 푸른 집의 커다란 대문 안으로 쏙이 갯벌 속으로 몸을 숨기 듯 쏘옥하고 들어갔다.  

MB가 집권 연장의 개헌을 하지 않는다면 - 만약 그런 개헌을 한다면, 연장하려다 집안 연장통도 못챙기고 하야 해야 할테지만- 몇 년 후에는 푸른 집 앞에서 열쇠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로 새벽 잠을 설쳐야 할 것이다.  또한 붓꽃을 좋아한다는 이병헌과 멍때리는 미녀 김태희가 총질을 해대던 광화문에는 촛불 파는 아주머니들이 한참 대목을 맞을 것이다. 

MB의 식솔들 중 몇 명이 같은 유니폼을 입을지 예측해 보는 것도 스포츠 토토만큼이나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그 분도 등번호 대신 숫자 적힌 유니폼을 입지는 않으라는 보장도 없다.  

왜냐하면.....그는 문(게이트)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문제는 언제, 어느 문부터 열리는가에 있다.  

그 때쯤 되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를 보호해주기 보다는 그를 밟고,내지는 그와 선을 긋고 당선되려고 할 것이다. 그에겐 친구가 없다.  

지금이야 경찰도, 검찰도, 재판부도, 여당도 모두 문을 틀어막느라 서로 엉덩이를 바짝 들이밀고 있지만 조만간 하나 둘 새로운 반장 밑에 줄서기 위해서 자리를 떠야 한다. 

야당에서는 특검하자...뭐 하자 나오고...여당은 결국 그를 버리지 않으면 차기 노려보기 힘들게 된다. 이미 정파 갈등이 있는 한나라당의 정치의리가 그를 지켜줄리 만무하다.   

참으로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만....기다리면 곧 개봉박두한다.  

지난 토요일, 회사에 안나오면 신문보기 힘든 날이다. 주말에 일을 해야 해서 회사에 나왔다가 신문을 봤다. 잊고 있던 도곡동이 다시 나오더라...다 기억해 두면 나중에 도움된다.  

 2년만에 다시 불거진 ‘도곡동 땅’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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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런 토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입장의 재반복 내지는 오독에 대한 해명 등이 전부일텐데, 상대의 글을 읽고 또 생각하고 쓰고 하면 제법 시간을 뺏깁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자니 목 안에 걸린 말들이 툭툭치고 올라 와서 불편하게 하고, 앉아서 글을 쓰자니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잃게 되니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대개는 이런 토론에 긴 글이나 댓글을 쓰고 나서는 "에이,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이야!" 라고 혼자 책상을 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 적은 기업 알라딘이지 않나요? 왜 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네요." (Bašta님 댓글중)

만약 님께서 이렇게 처음부터 겸허하게 이야기한다면 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알라딘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로자님이나 게스츠레님의 주장 등에는 분명히 행동의 근거가 있고 그 분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여러번 말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글을 쓰고 나서 추신의 형태로 로자님의 글을 인용한 것은 그런 예의의 표현입니다. 상대적으로 로자님보다는 제 노출 빈도가 높기 때문에 저로서는 이례적으로 블로그 주소를 기입하면서 로자님의 글로 이어지게 만들었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포지티브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네거티브에 대한 사전적 경계 때문입니다. 첫번째,  로자님 텍스트는 자체로-문득 지나가기 쉽지만- 여러가지 이견의 불확실성 속에 가치 혼돈을 가칠때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종종 이것을 알랭 바디우가 말한 '사건의 충실성' 이라는 개념으로 말합니다. 로자님의 방식이 그런 개념의 한 예가 됩니다. 

쉽게 말해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래도 나는 어깨를 걸고 함께 눕고 싶다.' (브라보!)  로자님은 핵심은 이겁니다. 그리고 이건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고, 객관과 이론으로 가장된 상황을 돌파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님께서도 궁극적으로 이 말을 하고 싶으신 거로 보입니다. 제 댓글에 대한 재댓글에서 님은 

" 이 모든 걸 떠나서, 사라진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김종호씨를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뭔가 행동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로자님의 말과 같은 내용이고 제가 이것이 부질없다거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제 첫번째 페이퍼에 남겼습니다. 

제가 남긴 첫번째 페이퍼에 추신을 단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어떤 알라디너 한분이-이 분은 주로 수학적 객관성을 좋아하시는 분인데- 제 글을' 자본주의 사회의 기회비용'의 예로 올렸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이 문제가 훨씬 더 구조적인 것이고, 또한 현재 상황에서 알라딘의 과실을 일방적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알라딘-김종호씨의 각 주장 외에 다른 정보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결과 원청업체로서의 책임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그것이 비록 알라딘 단독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향적인 결과와 자세를 요구한다고 했던겁니다. '알라딘 불매운동' 이라는 방법론적인 접근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자본주의 기회비용'으로 인용되는 측면에서 저는 어떤 원칙적 경계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에 대한 추천 중에는 분명히 '기계론적 합리'에 대한 동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신 성격의 글을 통해 이를 경계한겁니다.  

이제 님이 남기신 페이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님께서는 페이퍼를 통해 '알라딘 불매운동의 재점화'를 의도하셨으나 점점 갈 수록 '자기현시'와의 경계 속에서 그 방향이 흐릿해졌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던 부분은 '사건'이라는 측면에 대한 해석이었다면 님은 이 문제를 더 큰 철학적 개념들과 연계시켰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한정시켰던 범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특히 님은 '자본주의=기업=악' 이라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지배계급과 자본의 음모로 첨절된 이 매트릭스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해방은 이런 '거짓된 세계'를 척결하고 단숨에 다른 사회로 가는 것입니다. 님의 근본주의적 방법론은 엥겔스식의 사적 유물론이 따르고 있는 속류 사회주의식 접근입니다. (제가 누차 강조하지만 '함께 연대를 해줍시다' 라는 돌파를 위한 연대의 손길을 요구하는 식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건 긴 글이 필요한 것도 아닐뿐 더러 님의 첫번째 페이퍼는 그런 의도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 '정의의 문제'까지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 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계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명쾌하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설령 '사회 정의'란 것이 명쾌하더라도 '사회정의'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합니다. 저는 그래서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100% 신뢰하진 않습니다.  님처럼 '정의'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경우 지속적으로 '부정의'라는 배제 영역을 만들게 됩니다. '정의/부정의'의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것인데 그 결과 '방법론적 차이' 마저도 '부정의'의 이름으로 갈아치우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정의'의 이름으로는 '부정의한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님이 말씀하신 '반자본주의적 근본주의' 까지 개입된다면 스스로의 연대의 공간을 엄청나게 축소시키게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모든 상표의 진짜 이름은 착취이고 불의입니다. 그러나 Aladdin이라는 환상과 신의 이름은 그 착취와 불의를 말끔히 표백시키고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자,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시겠습니까?"  

제가 희화한 한 부분은 있지잠 이 논리로 가면 '알라딘의 동화책 구매자들이 모두 불법과 착취의  지원자 또는 숨은 배양자' 가 됩니다. 그러니 알라딘의 엄마 아빠들이 불편해지겠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데리다와 알라딘 불매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님은 제가 알라딘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시고 반론을 통해 '알라딘 불매운동의 재점화'를 꾀하셨습니다.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전술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첫번째 제가 알라딘에 가진 파급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일단 매체력으로 봐서도 그렇습니다. 최소 하루 1000명쯤 찾는 로쟈님이나 300명 이상 쯤 되는 바람구두님의 서재에서 이 문제를 터트렸어야 더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왜 당신들은 가만히 있느냐?" 고 말이지요.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고 귀찮을 정도로 댓글을 달면 훨씬 큰 파급효과가 발생하고 '재점화'라는 목적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겝니다. 

어쨋거나 파워블로거를 이용해서 하려던 작업은 '재점화를 통한 연대'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알라딘 불매운동'이지요.  

불매운동은 알라딘처럼 작고 개인화되어 있는 사이트에서 생각나면 한번씩 쓸 수 있는 투쟁전술이 아닙니다.  직접행동의 중요성은 알지만 아무때나 직접행동을 위한 대중이 모일 수 있고, 모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중의 미묘함을 알지 못하는 전술적 오류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라디너들이 가진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님이 먼저 하셔야 했던 작업은 '불매운동하자. ...** ...뭐야 너희들' 이 아닙니다. 먼저 한겨레 같은데 실린 비정규직 특집 기사로 비정규직에 대한 연민 또는 연대를 불러올 수 있는 이데올로그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합니다. 또한 김종호씨의 일에 대해 좀더 구체적 정보를 수집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셨지요. 전술적인 양 하시지만 전혀 전술적이지도 또한 실천적이지도 않습니다. 일종의 '유사 실천'입니다. 또한 전술의 다양성 문제에 있어서도 불매운동이라는 방식만이 유일한 방책으로 밀로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훨씬 쉽지만 더 대중적 공감을 얻어 알라딘을 압박할 수 있는 방식도 있을겝니다.  그리고 연대의 구체성도 없습니다. 저희 노조에서도 지노위를 이용해 회사를 압박하곤 합니다. 지노위 가면 좀 귀찮아집니다. 조사 받으러 오라가라. 하여간 결과적으로 지노위도 카드인셈인데....불매운동을 하자면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해서 단기간에 알라딘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정도는 발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알라딘이 지노위가 부담스럽다면 이 중재 시점까지 압박을 하자는 둥...그게 전술입니다.

데리다를 이야기하지요. 앞서 말했듯이 제가 문제를 다룬 것은 '사건' 차원에서 였는데 님은 이문제를 '철학' 차원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현시'로 가버리는데요...제가 데리다를 잘 몰라도 인용하신 그 문장은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런 '연대를 위한 보통어'를 강조했는지는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푸코를 인용했는데 그거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돌리셨는데 그 차이까지 설명하지요.  

아...제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언표와 투쟁속에서 님처럼 반드시 '정의'의 옷을 입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싸움에 화용론적으로 '정의'를 거는 것은 백분 이해합니다만 '정의'나 '도덕' 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지 않고 싸우는 방식이 훨씬 더 다차원적이고 상상력 충만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웃자고 비유하자면 님은 '정의'로 제단된 옷을 입고 전장에서 제대로 칼을 뽑아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고 저는 야만인처럼 옷입지 않고 어디서나 사방에서 부딪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시 갑시다. 먼저 님의 글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재점화-연대) 즉 저라는 루트를 통해서 '연대'를 구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글은 제게 반론을 펴는 형식을 취하지만 오히려 그 외의 타자들의 연대를 위한 것입니다. 

또, 님의 말씀처럼 제 입장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아마 알라딘마을 메인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말하자면, 저로서는 전략상 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ㅡ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일단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런 전략상의 필요와 '연대'라는 목적이라면 그 대상들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이 전술입니다. 님이 연대해야 하는 대상 들 중에서 데리다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몇 없습니다.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 정의'를 말하였던 것도 90년대 맥락적 읽기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후쿠야마의 '종언'과 미국 패권의 일방성 속에서 나온 텍스트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70년대 데리다가 주창했던 '해체'의 함수 속에 다시 브랜딩 될 수 있는 '정의'입니다. 즉 '정의'의 안과 밖은 없는가?  제가 이해한다면 데리다의 '정의'는 님께서 주장하시는 식의 '고정된' 정의 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동하는 정의' 여야하고 경계선에 서 있어야 하는 정의입니다. 

먼저 제 페이퍼와 님의 페이퍼를 비교하면 제 페이퍼는 연대를 위한 목적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 님은 연대를 위한 목적의식이 있지요. 처음부터 저보다는 더 대중 연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인데, 님이 연대를 신경쓰셨다면 연대를 위해 전술적 소통표현방식이 있었어야 합니다.  

 (인용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만.) 제가 푸코를 인용했다는 구절은 딱 하나입니다. "권력은 모든 곳에 있다" .... 

이 한 줄과 데리다의 한 문단은 분량적으로도 텍스트 내용의 심오함과 읽기의 번거로움 측면에서도 '연대를 위한 전술' 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푸코를 이해했다고 데리다를 이해할 거라는 것도 님의 착각이지요. (제가 오래전에 어떤 진보적 여성분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서 그의 영혼도 아름다울 거라 생각하는 것의 오류 대해 쓴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렇다면 '타자적 관계 속에'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란 무엇입니까? 발마스님의 글(<해체라는 정치>)에 따라 데리다를 끌어오면, '법과 폭력 모두 동일한 원-폭력의 뿌리에서 유래 했'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정의로 제시하려는 대항폭력의 주장'이나 '필연적인 혁명'은 '도착적 수행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데리다는 '결국 법과 폭력의 역사적 상대성', '기존의 법을 주재하고 있는 폭력의 변증법', '도착적 수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필연적 혁명'을 '넘어 해방적인 힘, 궁극적인 정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느냐고 발마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존적 폭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법정초적 폭력'은 '역사의 완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도착의 가능성'이 '수행'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이 도착적 수행성을 열어 두'고, '이 도착적 수행성 내부에서 이 도착의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가능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길'임과 동시에 '해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정치의, 더 나아가 인간 실존의 고유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고 발마스님은 말합니다. '혁명을 일반화하기'인 것이겠죠.  

그리고 데리다의 '폭력론'과 '도착적 수행성'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곳에 남긴 폭력관련된 글들에 그 의미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도착적 수행성의 개념은 지젝의 '레닌'에서도 발견됩니다. 

대략 정리하겠습니다.  

전 사실 알라딘 이상으로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동안 '알라딘 불매'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불매'도 아니고 정치적 행위도 아닙니다. 실제로 알라딘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알라딘 불매운동 한다.' 라고 선언하는 것 이상 이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까 오히려 그냥 '나도 알라딘 불매선언 해요.' 라고 하고 서재 대문에 두 줄 써 놓고, 그냥 저냥 잊고 지내는게 더 깔끔한 일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마지막으로 신영복 선생이 했다는 '우산을 함께 벗자'는 대략 20년전쯤 본 글인데...맞습니다. 님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가 당시에 '우산을 벗고 비를 맞자' 를 이해한 방식은 그렇습니다. '운동이 결코 시혜여서는 안된다.' 는 것. 그 글이 생각하게 해준 것입니다.  우산을 함께 나누어쓰면 비를 맞지 않지만 그것은 우산을 가진 자의 시혜인 셈이고 그건 다시 주인-노예의 관계를 만듭니다. 신영복 선생의 그 글을 저는 당시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기업 알라딘과 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그런거 아니야?  아니면 말고'는 이야기하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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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개그한다. ㅎㅎㅎ  

에라이 ..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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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주말까지 계속 일이다. 개미처럼 쉬지도 않고...ㅜㅜ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는 말에 조건반사처럼 튀어 나온 아내의 입이 숲 속 요정의 삼각모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죽순처럼 자라는 것 같고 내 집 아이는 작은 관상어처럼 더디 자라는 것 같다. 원래 남의 떡이 커보이고 남의 논에 모는 햇빛과 물만 먹고 저절로 다 잘 자란지 알기 때문이다. 하여간 내년 봄이 되면 예찬이랑 둘이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예찬아, 봄이 되면 아빠랑 둘이서 여행가자"  

"안돼. 싫어" 

"왜?" 

"엄마랑 재원이도 같이 가야해" 

"^^ 엄마랑 재원이랑 가는 것도 가고 아빠랑 둘이서도 가고 그럼 좋겠지?" 

"그래. 그러자" 

 ... ... 아들과 놀기가 제일 재밌다. 

 

알라딘이 지루하니, 재미없니 하는 말들이 있다. 나? 나도 별로 재미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속닥한 분위기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냉랭함으로 바뀌었다. 속닥함을 나누던 사람들의 이름 몇 개가 떠오른다. 또 입에서 불을 뿜어내던 변사들도 어느 순간 다들 조용하다. 젊은 사자들의 이름도 몇 개 떠오른다.  

그냥 나는 예의 시니컬한 상태로 꾸준하다. 올해들어 과거에 비해 리뷰를 적게 쓰고 있고, 댓글을 잘 남기지 않을 뿐... 

나같은 인간들이 늘어나서 그런 건지 무엇때문인지 알라딘의 대면대면함에 대한 회한과 비판의 페이퍼가 간혹 올라온다. 서재 2.0의 구조적 문제 또는 폐쇄적인 사이트의 운영방식, 토론의 부재등이 거론 되었다.  

먼저 알라딘은 포털적인 성격이 약할 수 밖에 없다. 소재의 한정성 때문이다. 책이라는 한정적인 대상을 주제로 모여든 사람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들, 또는 책에 별 관심 없는 사람들 중에 알라딘에 둥지를 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상황상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할 지라도 책에 대한 동경이나 향수 같은 것들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DNA는 다를지라도 '종이 책'이라는 '종' 안에서 모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책 읽는 사람은 또 다양한 관심과 다양한 취향을 같고 있기도 하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책-기계'들은 또다른 관심들과 통접한다. 나같은 경우는 책과 연결 된 이외에 음악과도 연결도 관심사다. 결국 책을 중심으로 여러 관심의 사람들이 모여들다보니 영화 이야기,음악 이야기,연극 이야기,과학 이야기,정치 이야기,육아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이 동시에 다루어진다. 하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책'이라는 것이 있다. 결국 '책' 이야기를 떠나면 굳이 알라딘일 필요가  없다. 다른 가상의 공간들은 충분히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딘은 인터넷 서점이고 그 서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는 존재론적으로 일정 정도 운신의 소재적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내 생각에 알라딘이 재미없는 것은 사람들이 소원해져서도 아니고, 소통이 없어서도 아니다. 물론 이견이 다툼이 뒤고 진흙탕에서 뒹글다가 서로 의가 상하는 경우도 있다. 토론은 소통을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늘상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토론으로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대립적 가치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이걸 정치학에서는 '적대'라고 한다. 그것들은 몇 마디 말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몇 줄의 논리 다툼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부질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냥 어떤 결절점이 생길 때까지 서로 견제하며 대치할 수 밖에 없다. 

알라딘의 문제는 콘텐츠다. 

알라딘의 블로그에는 이렇다할 콘텐츠가 없다. 책 이외는 말이다. 창작 블로그라는 곳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인기 창작 블로그의 제목만 보면 내 처지에서는 그다지 관심가는 대목이 없다. 대략 '연애백서' '남자가 여자를...' 뭐 이런 것들이 주류 아닌가 싶은데...  

콘텐츠의 입장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는 페이퍼들-나는 즐찾서재를 거의 없앴기때문에- 서재 대문에 올라오는 화제의 글을 중심으로 말하련다-은 새로 나온 책들을 바로 바로 업데이트 해주시는 로쟈님의 페이퍼나 책 디자인을 중심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주시는 하이드님의 페이퍼 정도다. 그 외에 보자면 화제의 글이 되지는 못하지만 몇 몇 분의 학술적인 글들도 간혹 바라보게 된다.   

콘텐츠 뷰어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심심한 사이트인 셈이다.  

알라딘이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결국 '전문'영역에 대한 콘텐츠의 장을 열어놓아야 한다. 중구난방의 창작 블로그 같은 것 보다는 '섹션화되고 정제된 형태의 콘텐츠 섹터' 말이다. 

예를 들자면 최근에 책을 낸 파란여우님께는 '귀농 일기'라는 형태의 무대를 하나 열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의 개인 블로그와 달리 운영되는 독자적 섹터이다.) '로쟈' 님의 경우도 인문학 섹터를 하나정도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예전에 가을산님은 '나무도장'을 잘 만드셨다. 내 기억에 내가 부러워하는 '바람구두의 도장'은 가을산님이 만들어 준 걸로 알고 있다. 가을산님께는 '나무도장 만들기' 라는 장을 만들어주여야 한다. 또 올 초에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았던 책이 네이버 블로거인 산타벨라의 화초키우기 책이었다. 알라딘에도 분명 화초 키우기 달인들이 있으실게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일종의 '웹진'같은 형태를 도모해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외에도 찾아보면 소소한 관심에서 전문적 영역까지 재미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가진 알라디너들이 꽤나 많을 것 같다. 사실 파워블로거 양산이라기 보다는 '개성과 관심에 엣지주기'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강제력도 필요하다. 편집자가 저자에게 원고를 요구하듯이 말이다. 그럼 보상도 있어야 한다. 원고료까지는 필요없을 것 같다. 그걸로 큰 돈 벌겠다는 알라디너도 별로 없을 듯 하니 말이다.대신 알라디너는 책 욕심 많고, 알라딘은 책이 많다. 그러니 원고료 삼아 책 몇 권 선물로 주는 걸로 입막음하면 어떨까?  

기획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다. 있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더하고 빼고 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것이다. 

 바람구두님은 '상업주의와 신규고객에 치중하는 만큼  기존 블로거들에도 관심을' 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나름대로 재독해 한다면 내게는 '기존 블로거들을 잘 이용하는 기획력'이라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알라딘의 블로거들만으로는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는 외부영입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개방된 형태의 다양한 콘텐츠 개발은 결국 '기존 블로거들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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