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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평점 :
나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해나 개즈비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책 표지는 강렬했다. 제목 역시 명령형 아닌가, <차이에서 배워라>. 다 읽은 후 다시 이 표지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이 저자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영어 원제는 Ten Steps to Nanette이다. 이 책은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애매한 문장을 쓰도록 하는 이 책은 자서전이라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나 개즈비는 어려서부터 참 많이도 다쳤다. 정원말뚝으로 박아놓은, 끝이 뾰족한 나무에 목이 뚫리질 않나, 자전거 타다가 운동도 못하게 되고 (심지어 차에 부딪쳐 바꾼 자전거가 5대) 오징어 튀김 먹다가 목에 걸려 죽을 뻔 하고... 진짜 이 가족이 나에겐 한국인의 드라마 ‘육남매’ 저리가라였다. 육체적인 상처 외에도 더 무겁고 정신적인 고통도 많았다. 성추행, 강간, 자폐, ADHD, 경계성 인격장애, 커밍아웃, 끊임없는 자살충동... 이런 자신을 묘사하면서 해나는 웃음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웃고 울며 아니, 울고 웃으며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쯤, 나는 해나 개즈비, 이 언니를 “비극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생의 긍정이다”<비극의 탄생, 니체>라는 문장이 뼛속까지 새겨져 있는 인물로 정의하기 이르렀다.
해나 개즈비는 1장 에필로그-나의 쇼, 나네트에서 “SNL은 짐스런 동료”라고 생각하는, “페스티벌 코미디언”이다. “농담위에 농담을 쌓아 조립하는 게 아니라, 관련이 있는 소재들을 모아 주제가 있는 한 시간짜리 쇼를 구성해 관객을 나의 주제로 안내”하는 “스토리텔링형의 긴 콘텐츠 코미디”(p.40)를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는 요즘 코미디 즉, “농담이 들린 그 방에만 살아 있지 않고 (...)누군가의 무대에서, 혹은 어디에서든 말한 모든 것이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p.42)마녀사냥을 하게 되는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나네트를 쓰기 전 나는 웃음이라는 미명 아래 편견과 비방을 거리낌 없이 전시하고 옹호하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코미디언에게 지쳐 있었다”(p.44)라고 밝힌다. 이 부분까지만 읽었을 때 <차이에서 배워라>라는 제목처럼 남을 깎아내리는 코미디가 아니라 더 상급 유머가 나오는 코미디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줄로만 알았다.
‘2장 탄생신화’에서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등장한다. 엄마와 아빠, 5남매이다. 난 2장에서 정말 제대로 빵 터졌다. 아빠의 성격을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아, 이 부분 써도 되나, 완전 스포인데... “한번은 오빠가 도끼를 갖고 놀다 엄지손가락을 잘렸는데, 아빠가 말했다. “아무래도 아빠 차로 병원에 가야겠네. 넌 히치하이킹은 어려울 거 아니냐.”” (pp.73-74) 이 부분부터 난 완전 해나 개즈비가 되어 읽기 시작했다. ‘3장 성장기’에서는 학교 이야기 포함해서, 그리고 그녀가 미술사에 꽂히는 이야기까지 전개된다. ‘4장은 방랑의 세월’인데 이 3장과 4장 사이에 ‘인터미션’이 있다. 한 쪽짜리 검은색 페이지가 다이다. 그녀가 이 시간 얼마나 암흑기였는지 알 수 있는 단쪽이었다. 그럼에도 그 3장과 4장 사이의 시간동안 그녀가 느낀 고통이 느껴지는 페이지였다. “어떤 한 사람이 겪은 불행을 세세하게 들추어야만 연민과 공감을 보내는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재미와 이해를 상호교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p.300) 나 역시 120퍼센트 공감한다.
4장은 해나 개즈비가 코미디를 시작하는 내용이, ‘5장 롤러코스터를 타다’는 “장담하건대 나는 뚱보 농담으로 웃길 자신이 있다는 사람들보다 100배는 더 웃길 수 있다.(...) 뚱보 농담은 내 주식이었다”라며 자신의 코미디 소재를 밝힌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걸로 웃기도 뒤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주식이란 기본적으로 수치심을 잔뜩 넣은 샌드위치이며, 수치심은 그다지 영양가 높고 조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다.”(p.342)라고 자신에게 읊조리듯 써놓은 이 문장이 그녀가 고통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보여주는 듯했다.
6~8장에서는 그녀가 자폐, ADHD 진단, 코카인과의 짧은 밀회, 퀴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고, 경계성 인격장애 진단에 자궁근종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것들을 다 끄집어내놓는다. 그리고 8장 말, 엄마에게 커밍아웃한지 15년 후, 엄마로부터 “내가 제일 후회하는 게 뭔 줄 아니?(...)내가 너를 이성애자로 키운 거야”(pp.474-475)라는 고백을 듣는다. 그 앞에 그녀를 괴롭히던 갖가지 병들을 왜 그렇게 나열하나 했다. 엄마의 고백으로 그녀의 모든 상처들이 한 번에 아무는 것 같았다. 이것이 해나 개즈비의 글쓰기였다.
9~10장은 해나의 코미디 창작물 나네트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다. 이 부분은 지금 현재 해나 개즈비가 레즈비언출신 코미디언으로서의 당당한 소신을 그녀답게 써내려간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왜 한국어로 이 책 제목이 “차이에서 배워라”인지도 알 것 같은 장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해나는 성소수자지만 같은 여성으로서 응원하게 된다. 이런 부분이 그녀의 매력이자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난 성소수자가 아니지만 내가 아는 성소수자들-하리수씨, 홍석천씨 만큼 삶을 열렬히 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해나 개즈비 역시 그랬다. 그들의 정체성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해나 개즈비에게는 레즈비언 보다 코미디언이라는 정체성이 더 중요해보인다. 그래서 나네트가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며 성공한 지금, 나는 그녀에게 “액체가 분필에 스며들 듯 자연스럽게”(p.130)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p.s.
1. 나도 “찻잔이 찻잔 받침에 들어맞는 소리”( p.505)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2. 난 서평을 쓰고 싶었는데 이 언니 덕후일기를 쓰네
3. 난 옛날부터 쪼매난 이쁜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이제 이 뚱뚱한 백인언니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