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해(2013년) 이 책을 알게 되고 언젠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올해 보게 되었다. 읽기 전에도 내가 이 책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말 그대로 글자만 읽고 뜻을 다 알지는 못했다.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 모터사이클 책이 있는 곳에 꽂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10년에 교고쿠 나쓰히코의 《철서의 우리》를 보았다. 거기에 선禪에 대한 게 조금 나온다. 추젠지 아키히코(작가 이름에는 여름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 이름에는 가을이 들어있구나, 이제야 알았다)가 선禪에 대한 말을 길게 했다. 그것 때문에 선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때도 제대로 몰랐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더 모른다. 그래도 예전에 써둔 것을 보고 그렇구나 했다. 선禪은 말로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그게 끝이 아니고 그 뒤에도 수행을 해야 한다고. 여기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질Quality은 정의할 수 없다고. 질과 가치는 같은 말이라 할 수 있을까.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말도 있으니까.

 

이 소설(소설 같지 않은 제목이지만 소설이다, 철학도 담겨 있다)은 아버지와 아들이 여름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떠나 몬태나 주의 보즈먼을 거쳐 캘리포니아 주의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이야기다. 두 사람과 친구 부부도 함께 간다. 하지만 친구 부부는 몬태나 주까지만 가고 먼저 돌아간다. 처음에 ‘나’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면 차를 타고 다닐 때와는 다르게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모터사이클도 그렇게 느린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차보다는 여러가지를 보고 느낄 수 있겠지. 어쩌면 질을 여기에서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면서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한다. 이 사람은 몇 해 전에 정신병 때문에 병원에서 전기충격치료를 받고 기억이 없어졌다. 아들과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면서 기억을 조금씩 찾는다. 그런 자신을 ‘나’는 고대 희랍 수사학자와 같은 이름인 파이드로스라고 한다. 파이드로스의 이야기는 ‘나’의 지난날 이야기다. 파이드로스의 생각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내가 철학을 잘 모르기도 해서 말이다. 파이드로스는 과학, 서양철학,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과학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철학에서 찾으려 했다.

 

파이드로스는 세계는 정신과 물질 그리고 질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질은 정신의 한 부분도 물질의 한 부분과 관계없는 제3의 실체라 했다. 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룬 게 질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잘 모르겠다. 이것은 감정과 이성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정신의 느낌과 기계공학의 생각이라고 했으니). 수행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가지를 마음을 다해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게 여기에서는 모터사이클 관리겠지. 모터사이클을 관리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비사가 ‘나’의 모터사이클 상태를 나쁘게 만든 일은 조금 웃기기도 했다. 정비사는 모터사이클을 보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까닭을 ‘나’는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 때문이라고 했다. 제대로 안 보고 빨리빨리 일을 해버리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좀더 많이. 이것은 1970년대 일만은 아니다. 지금은 그게 더 하다. 그래서 이 책을 오랫동안 사람들이 찾는 거겠지. 나는 지난해 알고 올해 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번이라도 본 것을 좋게 여기고 싶다.

 

질Quality은 정신과 물질에서 정신(영혼)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질이 좋은 물건에 둘러싸여 살아도 마음이 비어 있으면 그것은 질 좋은 삶이 아닐 테니 말이다. 어떤 것을 보다가 생각났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를 낫게 하는 일보다 병원 안의 권력에만 마음을 두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권력에는 물질도 따라온다). 어떤 게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다르다. 그것을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정신이 아닌 물질을 좇으면 어느 순간 덧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런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인가.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사람은 여러가지를 공부한 듯하다. 그래서 얻은 게 많았다. 책을 다 볼 때쯤 나는 철학을 언젠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했다. 어쩐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깊이 알지 못할 것 같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나온 아들 크리스는 1979년 11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흑인한테 죽임 당했다고 한다. 아주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크리스가 열한살일 때 모습이 책 속에 있어서 다행이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선禪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곳은 ‘후기’인 듯하다. 그것은 선禪이라기보다 이어짐일지도 모르겠다. 피어시그는 크리스가 자신의 딸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불교의 느낌이 드는 생각이다.

 

파이드로스의 생각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질, 가치를 생각하고 살아가야겠다. 책을 보는 일도 그런 일 가운데 하나겠지.

 

 

 

희선

 

 

 

 

☆―

 

무엇을 말할 것인가와 무엇을 먼저 말할 것인가를 같은 때 한꺼번에 생각하려고 하면, 일이 너무 어려워진다. 그러니 이 둘을 따로 떼어놓아라. 먼저 네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어떤 차례로든 상관없으니 열거해놓아라. 그리고 뒤에 가서 적당한 차례를 생각하도록 해라.  (49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往復書簡 (文庫)
미나토 가나에 지음 / 幻冬舍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복서간

 

 

 

편지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 ‘왕복서간’이 처음은 아닐 겁니다. 옛날 사람들 작가, 화가, 음악가 같은 사람이 누군가와 나눈 편지를 모아서 내는 책도 있지만, 이것은 소설과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 소설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도록 쓰지만 편지는 그것을 받는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쓰죠. 그래도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보는 게 아주 재미없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옛날 사람이 쓴 편지에는 답장이 함께 실려 있지 않아서 그것을 받은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 쓴 편지만 책으로 나오잖아요. 그런 편지글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편지를 쓴 사람 마음뿐입니다. 소설에서는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른 소설도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니 소설이라고 해서 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군요. 편지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왕복서간’에서는 제목 그대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있었던 일을 알 수 있어요.

 

미나토 가나에 소설은 《고백》을 가장 처음 만나보았습니다. 충격스러운 소설이라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그때 그냥 본 듯합니다. 이런 소설을 본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거든요. 그 소설을 보며, 사람들이 자기 처지만을 내세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뒤에 본 것에도 그런 점이 보이더군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마 조금씩 바뀌었을 텐데 제가 그것을 바로 느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것은 본 지 좀 됐으니 내버려두겠습니다. 제가 작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기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정말 편지로는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얼굴 보고 말하는 것보다는 글로 말할 때 더 솔직해지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리고 말로는 할 수 없는 것도 글로는 쓸 수 있지요. 하지만 더 솔직해진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긴 자기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사는 사람은 없겠습니다. 시간이 흘러서는 지난날 어땠는지 말하게 될까요. <10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는 고등학생 때 일을 말하더군요.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자신이 생각하는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실제와는 다르게 안 좋게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더 좋게 볼 때가 많은 듯합니다. 아니, 여기에는 두가지가 다 나왔군요.

 

고등학생 일 때는 그 안에서만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나오고 본래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면 세계가 좀더 넓어지겠지요. 그렇다고 학생일 때가 안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그때만 할 수 있는 게 있겠지요. 방송부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 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조금 잘못 안 것도 있지만. 시간이 흘러서 편지로 이야기를 해서 그때 그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도 지금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요. 방송부 친구들에서 아주 안 좋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잠시 힘든 일이 있었던 사람은 있지만. 그게 사고일까 사건일까를 알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알려고 하는 겁니다’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군요. 뒤에 나오는 <이십년 뒤의 숙제> <십오년 뒤의 보충수업>도 처음 받은 인상과는 다르게 끝나는군요. 편지를 쓰는 게 한가지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십년 뒤의 숙제>에서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분이 한 제자한테 이십년 전에 사고를 겪은 아이 여섯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자는 여섯 사람을 만난 일을 선생님한테 편지로 알려줍니다. 같은 사고를 겪어도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 생각이 다르기도 하더군요. 같은 곳에 있어도 다르게 기억하기도 하지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사고라 해도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듯합니다. 사고가 없었다면 그날 일은 좋은 추억이 되었을 텐데요. 누군가는 그날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일 때문에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좋은 일만 기억하면 좋을 테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여섯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기도 했겠지만, 그 일로 아직도 괴로워하는 아이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한테 편지를 쓴 겁니다. 사고 때문에 가장 괴로웠던 사람은 선생님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선생님은 그때 남편과 배 속 아이까지 잃었거든요. 그래도 선생님은 남편과 살았던 추억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십오년 뒤의 보충수업>은 처음에는 연애편지처럼 보이더군요. 두 사람은 중학생 때부터 사귀었고, 사귄 지 거의 열다섯해가 되었답니다. 나가타 준이치가 국제자원봉사대에 지원해서 두해 동안 먼 나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먼 나라에 가도 전자편지는 쓸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마리코는 준이치한테 가고 오는 데 오래 걸리는 편지를 씁니다. 고모와 고모부가 사귈 때 쓴 편지를 마리코가 부러워했거든요.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이 중학생 때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그동안 두 사람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거든요. 마리코는 그때 기억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준이치와 편지를 나누다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준이치는 마리코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그때 저는 그게 진짜인가 했습니다. 마리코가 다시 편지를 써서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 소설 ‘n을 위하여’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벌써 일어나버린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겠지요. 소설은 그런 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 싶군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막아주는. 모든 일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막을 수 있는 것도 있지요. 이렇게 말을 했지만 마지막 이야기도 좋게 끝납니다.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희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4-03-0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편지'하면 일단 '펜으로 글을 쓰는 것', 이 생각부터 나거든요. 요새는 그런 경우가 잘 없지만, 예전에 컴퓨터를 쓸 수 없어서 펜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쉽게 고칠 수가 없으니까 문장을 미리 머리 속으로 여러번 생각해보면서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보면 컴퓨터라는 게 참 글을 쓰는 행위를 많이 바꿔놓은 것 같아요. 분명히 편리하기도 하지만, 문장을 확실히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요새는 정말 펜으로 문장을 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 뿐이겠지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씨를 보기 좋게 쓰려고, 혹은 맞는 문장을 쓰려고 공을 들이는 행위..그런 것들도 편지의 총체일텐데, 그런 총체를 맛본지도 상당히 오래전 일인 것 같습니다.

희선 2014-03-04 23:19   좋아요 0 | URL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볼테르(이름만 압니다^^)는 평생 쓴 편지가 4만통 정도 된다는군요 누구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썼을까요(이 말 방송에도 나왔습니다) 저는 여전히 씁니다 잠시 손으로 무언가를 거의 안 쓸 때도 있었는데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쓰게 된 것은 편지예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별로 없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한테 편지를 썼는데, 말로 해도 되는 것을 편지에 쓰려고 말 안 했습니다 좀 우습죠 제가 편지를 쓰는 것은 말을 잘 못해서기도 합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본 것은 아닌데, 예전 사람들은 편지를 자주 주고받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많지는 않아도 저도 몇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습니다(자랑^^) 맥거핀 님하고는 다른 말을 했네요 ‘맞아 맞아 나도 그래’ 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데...^^

예전에 잠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아주 싫어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사람도 이름만 아는)이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인터넷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니 어쩌면 에밀리 디킨슨은 혼자여도 그렇게 외로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어제 인터넷 연결이 안 돼서 컴퓨터를 쓰지 못했는데, 제가 컴퓨터 쓰는 게 인터넷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컴퓨터를 켜도 할 게 없더군요 음악을 들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오래 보고 있던 책을 많이 봤습니다^^


희선
 
노엘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아직 이야기를 지어본 적 없는 사람은 지어봐라. 뭐든지 상관없으니까 지어봐. 그러면 단단해질 수 있어. 언젠가 힘든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 고.

 

“이야기 세계로 달아나라는 뜻인가 싶었지. 선생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줄 알았어. 그래서 그때는 그런 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슬퍼졌지. 이야기가 현실을 구원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자 선생님은 마치 게이스케 생각에 대답하듯이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야기 세계로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야. 이야기 속에서 다정함과 단단함 같은 여러가지를 보고, 알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지은 이야기도 물론 괜찮아. 하지만 알고 싶은 것을 알려면 스스로 지어보는 편이 나아. 혹시 알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른다 해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지은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이 바라는 곳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253~254쪽)

 

 

아주 많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2013년은 이제 지난해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다 보고 나서도 떠오른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입니다. 열한 달 남짓 차이가 나지만 책이 나온 때도 비슷하답니다. 2012년 12월, 2013년 11월. 둘 다 성탄절을 앞두고 나왔군요. 그렇다고 그때만 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 보든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어쩐지 성탄절에 기적이 더 잘 일어날 것 같지요. 책뿐 아니라 영화도 그런 게 많으니까요. 구두쇠 스크루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도 성탄절에 일어난 기적을 말하는 거잖아요. 예전에 저도 그런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못 썼습니다. 생각만 하고 쓰려고 하지는 않았거든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씨앗인데 제가 잘 기르지 못했나봅니다. 어딘가에서 말라비틀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못 봤는데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세계가 나오는 책이 있다고 하더군요.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별 뜻 없이 말한 겁니다. 쓰지 못하고 내버려둔 이야기가 사람을 원망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어서요. 그렇다 해도 제가 그냥 내버려둔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앞에서 왜 이야기에 대한 말을 할까 하셨지요. 이 책에는 노엘이라는 제목 말고도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런 것을 액자소설이라고 배웠지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쓰다니 힘들 것 같습니다. 하나가 아니고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바깥 이야기와 어울려야 하고. 이야기 자체에 빠져서 볼 때도 있고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 더 생각하는 것은 이 책 이야기를 어떻게 쓰지 예요. 줄거리 써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해서. 하지만 쓰다보면 줄거리를 쓰지 않을 때도 있더군요. 그러면 ‘그래서 어떤 이야기인데’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자주 그러지는 않아요. 줄거리가 아닌 다른 할 말이 많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중편소설 세 편이 담겨 있습니다. 책을 보면서 이야기에는 힘이 있을까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책을 보고 무엇인가 많이 달라진 경험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저와는 다르게 어떤 책을 보고 마음이 많이 달라진 분도 있겠지요. 여기에 나오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사람은 이야기를 써서 아픔과 외로움을 잊습니다. 또 한사람은 이야기를 보고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바로 잡습니다. 마지막 한사람은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남기는 게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이야기를 보고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군요. 그래도 거기에 나온 사람은 자식은 없지만 결혼도 했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아내가 먼저 떠나서 마음이 약해진 거겠지요. 마지막 사람한테도 보람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은 이야기와 말 때문에 힘을 얻고 달라진 사람이 있었거든요. 사실 이것은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세 편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인데 이어져 있기도 합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생각날 만하죠. 루돌프 사슴코 노래로 이야기를 쓰다니,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도 예전에 노래로 이야기를 쓴 적 있거든요. 노랫말을 그대로 쓴 것도 있고(이것은 없어졌습니다), 제목으로 쓰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주 달랐습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게이스케가 루돌프 사슴코 다음 이야기도 썼는데, 거기에서 산타 할아버지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아이들한테 주는 게 물건이 아니고 다른 것(빛으로 보이는)이어서 멋지게 보였습니다. 마지막에 나온 반딧불이와 장수풍뎅이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마지막 사람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이 사람은 자신이 이야기에 담아둔 마음을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본래 그런 거긴 해요. 자기가 어떤 이야기를 써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려요. 혼자 남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중에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생각도 듭니다. 자신이 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누군가한테 아주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믿어라 하는. 아니,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는 것도 좋지만 먼저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앞으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면 어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조금 쓸쓸하군요. 죽었을 때를 생각하기보다 살아있을 때 무엇인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게 남게 되는 거겠지요. 아무도 저를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아쉬워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게 그런 것이기도 하니까요. 순간일지라도 이야기는 사람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주기도 합니다. 세상에 따듯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우리가 모르는 일도 알게 해줍니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야기 세계로 달아날 때가 더 많았지만요. 그럴 때도 있는 거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좀더 잘 알려면 자신이 이야기를 지어야 하는군요. 두번째 이야기에 나온 리코는 책을 보다가 그것을 버스에 놓고 내려서 자신이 다음 이야기를 지어요. 하지만 좀 잘못 흐릅니다. 아직 어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본래 보던 책을 찾게 되어 괜찮아집니다. 다른 사람이 쓴 이야기는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갔을 때 그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겠군요.

 

이야기가 가진 힘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아주 잠깐 위로 받고 현실로 돌아와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야기가 없어지면 살아가는 게 심심할 것 같습니다. 오래전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심심해서였겠군요. 처음은 그랬을 겁니다. 그러다 이야기에 여러가지를 담게 된 것이겠지요. 미치오 슈스케가 들려주는 따듯한 이야기 한번 만나보세요.

 

 

 

 

*이제 어떤 말은 쓰지 말자고 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씁니다. 써버리고 왜 썼지 해요. 이제는 정말 그만 쓰고 싶습니다. 책을 보고 그것을 쓰면서는 그 안에 투덜거림 같은 것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쓰고 지운 적도 있지만 그대로 두었던 적이 더 많습니다. 그런 것은 일기에나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좀 넓게 보려고 합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저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요. 우물 안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자 아주 작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겠지요. 하늘은 아주 넓고 어디까지고 펼쳐져 있습니다. 생각도 그렇게 펼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자기 자신을 잘 봐야 하지만 바깥도 잘 봐야 하겠지요.

 

 

 

 

 

+이야기도 아니고 그저 그렇지만...

 

 

 

 

 

1

 

멋진 말로 시를 짓고 싶어

아니

멋진 말보다

솔직한 말이면 될지도

 

 

 

2

 

내 말로 네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고 싶어

꽁꽁 얼어버린 네 마음에 내 말은 더 이상 닿지 않는 걸까

그래도 언젠가는 녹을거야

네 마음에 봄이 찾아오길

 

 

 

3

 

말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상대 마음을 찌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로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면,

실패해버린 저주가 자신한테 돌아오듯이

언젠가 그 말은

똑같이, 아니 더 큰 아픔으로 당신한테 돌아올 겁니다

고운 말을 합시다

 

 

 

4

 

단 한마디면 됩니다

“미안해, 고마워”

 

 

 

희선

 

 

 

 

☆―

 

“아무리 싫은 일이 있어도 괜찮다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뭘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법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158쪽)

 

 

 

 

 

 

 

 

 

 

 

  ノエル : a story of stories (2012)

 

  일본에서 나온 책 겉에 그림은 여기에 나오는 것을 나타냈군요. 책을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보고 나서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여행 리포트
아리카와 히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기특하구나, 나를 생각하다니.”

 

고양이는 인간처럼 울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는 게 어떤 건지 그 느낌을 알 듯했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을 때, 떠오른 게 당신이었어.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어.

 

그렇지? 당신은 어떻게든 해줄 거지? 아파서 미치겠어.

 

너무 아파서 무서워. 나, 어떡하지?

 

“좋아, 좋아. 이제 괜찮아.”

 

남자는 폭신폭신한 수건을 깐 상자에 나를 담아 은색 왜건에 태웠다.  (13쪽)

 

 

아주 가끔 책 앞부분을 조금 보고도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고 그냥 느끼는 거다. 처음에 별일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했다. 중간이 넘고 확실하게 나온 것을 보고 그랬서였나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겁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책은 거의 혼자서 볼 테지만 둘레에 사람이 있을 때도 있겠지. 이 책은 혼자 있을 때 봐야 한다. 도서관이나 차 안, 전철에서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고, 웃음을 주는 이야기도 있다. 읽는 내내 눈물나게 하면 읽기 힘들잖아. 여기까지 쓰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앞으로 어떻게 쓰면 좋을지. 나나와 사토루.

 

나나는 본래 길고양이였다. 나나는 어느 맨션 주차장에 누군가 세워둔 은색 왜건 보닛 위에서 자는 것을 좋아했다. 은색 왜건 주인은 미야와키 사토루로 나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때는 이름은 없었고, 나중에 사토루가 나나라고 지었다. 나나는 사토루가 어렸을 때 기르던 고양이 하치와 닮았다. 사토루가 본래 고양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하치와 닮은 게 사토루 마음을 더 끌지 않았을까. 나나와 사토루는 나나가 다치고 함께 살게 된다. 사토루는 나나와 살기 위해 집을 옮겼다. 그리고 다섯해가 흘렀다. 사토루는 나나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어 나나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 은색 왜건을 타고 사토루와 나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러 다닌다. 사토루는 그동안 일 때문에 바빠서 나나와 함께 어디에 다니지 못했다. 처음으로 둘이 함께 어딘가에 가게 되었다. 도시에서 살면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다. 나나를 맡아줄 사람을 찾아서 다니는 게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둘이 함께 여기저기 다녀서 다행이고 사토루가 나나와 함께 돌아와서 다행이다. 사토루 혼자였다면 쓸쓸했을 것이다.

 

어릴 때 친구, 중학교,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러 다니는 사토루가 부러웠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친구가 거의 없다. 아주 없지는 않은가. 어릴 때 친구가 하나 있는데 옛날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어쩌면 친구도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자주 만나지도 않고 살아가는 것도 아주 다르기 때문이겠지.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사토루 친구들은 다 지금 사토루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다. 옛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것을 보면서 소설은 옛일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까지 많이 봐왔는데 이제서야 하는 느낌이다). 그 안에는 좋은 일도 있지만 아픈 일도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사토루는 어둡지 않다. 그래서 다들 사토루를 좋아했던가보다. 이런 사람 진짜 있을까. 사토루를 너무 착하게 그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나는 또 어떻고, 이런 고양이라면 함께 살고 싶기도 하다. 사토루가 어릴 때 기른 하치는 사람이 침울해보이면 위로해주었다고 한다(하치라는 개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나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고양이는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나나여서 암고양이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나는 수고양이다. 꼬리가 7자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나나(일본말로 7은 나나)라고 한 거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도 고양이 털을 보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모모는 조금 다르다. 그냥 고양이, 개라고 하는 것보다 이름을 지어주면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사토루는 어릴 때 함께 살았던 하치를 식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집에 보내고, 사토루가 중학교 수학여행 때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가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차비를 마련했는데, 하치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가 사토루한테 하치와 제대로 헤어지고 오라고 해서 사토루는 가는 김에 여기저기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사토루가 정이 많은 듯하다. 어릴 때 헤어진 고양이를 오래 잊지 못하다니 말이다. 하치는 사토루를 잊지 않았을까. 고양이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치도 사토루와 헤어지고 낯선 곳에 가게 되어서 슬펐을 것 같다. “얼굴에 얼룩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어서 하치(일본말로 8)였어. (17쪽)

 

나나와 사토루의 여행을 따라가보길. 친구들이 보는 사토루를 만날 수 있다. 서로 몰랐던 친구들은 사토루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고 사토루와 나나 이야기를 나눈다. 재미있기도 하고 마음 아프기고 하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보고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거겠지. 동물이 사람한테 주는 위안도.

 

언젠가 나도 나나 같은 고양이를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생각하니 나나 같은 고양이는 안 되겠다. 나나는 사토루만의 고양이였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책에 나온 고양이를 보면 아주 좋은데 실제는 어떨지 알 수 없다. 아마 실제로도 좋을 거다. 다른 것보다 내가 잘 놀아주지 못해서 고양이가 쓸쓸해할 것 같아서 함께 살기 어렵겠다. 그냥 앞으로도 책으로만 만날까보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잃기는커녕 나나라는 이름과 사토루와 산 다섯 해를 얻었다.  (20쪽)

 

 

 

희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2-17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8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츠나구 - 죽은 자와 산 자의 고리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츠나구 :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창구.

 

 

사람이 살아가면서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이 아닌가 싶다. 오늘이 지나고 밤에 잠을 자면 어김없이 다음날이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늘 같은 날이지만 사실 오늘이라는 날은 늘 다른 날이다. 나도 내일은 언제나 오는 거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내일부터’ 한다. 어쩌면 그렇게 태평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아니 벌써 이렇게 된 거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이라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어떻게 하나. 오래전에는 내가 무엇이든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인가를 하기에 아주 늦은 때는 없다고 하지만, 이 말은 그저 자기 위안일 뿐이다. 때가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내버려두고, 지금부터라도 몇 해 뒤 내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생각하고 그렇게 되려고 애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 뒤에 내가 살아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냥 살아가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생각만으로 끝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나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역시 책을 보면 자신을 더 생각하는 듯하다.

 

아직 나는 죽은 사람 가운데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다(아주 가까운 사람이 죽지 않아 다행이다). 언젠가는 생길까.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나한테는 언제까지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조금 쓸쓸한 일일지도. 실제 우리는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사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신이 있으면 귀신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도 책 속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일을 바라서 지어낸 것이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책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사람도 만난다. 한동안 본 책들을 생각하니 죽은 사람이 나온 책은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 만나게 된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나 죽음을 자주 잊는다고. 사고나 사건으로 죽는 사람이 나오는 책은 볼 때도 있지만, 그 뒤는 알 수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그 뒤를 알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하지만 아주 모르는 채로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과 숫자 7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위화의 《제7일》은 읽지 못했지만, 아사다 지로의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은 보았다. 여기에서 7일은 죽은 사람이 이승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데서도 7일이 나온 것 같기도 한데. ‘츠나구’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주체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은 죽은 사람이 주체다. 갑자기 죽음을 맞은 사람이 이승에 오는 것이고, ‘츠나구’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거다. 주체가 누구건 서로 미련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츠나구’에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단 한번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더 쉽겠다. 살아있을 때 한번, 죽었을 때 한번. 살아있을 때는 죽은 사람 가운데서 한번 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죽은 뒤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세계는 다르다. 그러니 이런 규칙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경계란 확실히 있어야 하니까. ‘츠나구’에도 7이 나온다. 죽은 사람을 만나는 호텔방 번호 뒷자리가 모두 7이다. 그리고 거의 저녁 7시부터 만나고, 그 방에서는 달이 잘 보인다고 한다. 죽은 사람을 가장 오래 만날 수 있는 날은 보름달이 뜬 밤이다.

 

갑자기 죽음을 맞은 탤런트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은 탤런트를 만나고 싶어한다. 장남으로 두해전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사고로 죽은 단짝 친구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일곱해 전에 사라져버린 약혼녀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츠나구를 만난다.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먼저 하는 사람은 고등학생 남자아이다. 처음에는 예전부터 그 일을 해온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나온다.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 아이가 이야기를 할 때는 또 달랐다.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츠나구’는 남자아이 할머니 친정 집안에서 사회공헌으로 하는 일이란다. 소문은 돈이 많이 든다고 나 있지만 실제로는 돈을 받지 않는다. 다른 네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마음이 풀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츠나구가 되어 사람들을 보고 남자아이가 한층 자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자아이한테도 다른 사람한테 쉽게 말할수 없는 일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상하게 죽은 일이다. 이 일은 할머니한테도 아픔이었는데 그게 풀렸다. 이렇게만 써두면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남자아이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산 사람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하기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이 앞으로도 잘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을까 싶다. 죽은 탤런트 미즈시로 사오리는 자신이 있는 곳은 캄캄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고로 죽은 고등학생 미소노 나쓰는 남자아이한테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거 많이 하라고 했다. 우리가 죽은 사람 마음을 실제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죽은 사람을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을 잘 살아가고, 살아있을 때 서로 마음을 써주는 게 좋겠다.

 

 

 

*그냥

 

이 책을 보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지난해 언젠가 한 생각이다. 아이가 사고로 죽고 귀신이 되는 거다. 엄마는 일 때문에 아주 바빠서 평소에 아이를 잘 돌봐주지 못했다. 아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이가 다니던 학교에 전학온 아이였다. 그 아이한테 귀신이 된 아이가 말을 해서 엄마와 만나고 마음을 풀고 저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생각만 하고 못 썼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과 비슷한 것 같은 생각이 나중에 들었다. ‘츠나구’와 비슷하게 한다면 ‘엄마의 본분’이라 하면 될까. 하지만 ‘츠나구’처럼 쓴다면 아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는 않겠다.

 

 

 

희선

 

 

 

 

☆―

 

“세상이 불공평한 건 당연한 거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불공평하지. 아무한테도 정당한 건 없어.”    (46~47쪽)

 

 

“제발 만나세요. 부탁입니다.”

 

그것이 비록 산 사람을 위한 행위일 뿐이라 해도, 남은 사람 또한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짊어질 의무가 있다. 흐르는 일상은 막을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잃어버린 사람을 살려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뒤에 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끝없이 이기적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설령 슬프고 뻔뻔한 사고방식이라 해도.  (41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4-02-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예전에 보았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생각이 나는군요. 그것도 죽음과 삶 사이에 있는 일종의 중간지대를 배경으로(림보라고 하나요?) 한 이야기였는데, 사후에서의 나머지 시간들을 어떤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은 특별히 몸이 안 좋지 않는한 죽음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보는 경우가 없습니다만, 아주 가끔 매우 가깝게 다가온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친구의 장례식에 간다거나 하는...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 장례식이란 결국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조금 마음이 불편해지고는 하지요.

상당히 특이한 느낌의 소설일 듯 합니다.

희선 2014-02-09 01:38   좋아요 0 | URL
잠깐 찾아보니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떤 기억을 가지고 갈 것인지 생각하지 못한 것 같군요 어쩐지 저도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쓰바키 야마 과장의 7일간>에서도 이 세상과 저세상 사이에 있는 곳에 먼저 가더군요 <원더풀 라이프> 영화 본 적 없는데 내용은 어디에선가 들어본 것 같은 것은 왜인지 모르겠네요^^

영화 이야기를 보고 생각난 게 있는데 제목이 뭐지 하면서 찾아봤습니다 사실 내용도 가물가물합니다 지난해 본 드라마로 <주마등주식회사>라고 합니다 소개에 나온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기록한 영상을 볼 수 있는 '주마등 주식회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자신의 삶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니, 재미있기도 하지만 조금 무섭기도 하죠 끝은 거의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비밀을 알게 되기도 하거든요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차례가 있지만 가는 것은 차례가 없다고 하잖아요 누구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음을 더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례식도 그렇죠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요 어쩌면 그것은 죽은 사람과 제대로 헤어지려는 의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잊지는 않겠지만요 이런 생각해본 적 없는데...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살아있을 때와 똑같아요 한번 만난다고 해서 미련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고도 하더군요 맞는 말이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