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 좋아하세요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이승원 사진
arte(아르테) 2015년 05월 10일
부디 헤세를 ‘허세’로 잘못 보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헤세는 소설, 시, 동화 거기에 수채화를 그린 헤르만 헤세예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도 헤르만 헤세 이름 알고 소설 몇권 봤지만 다른 건 잘 모릅니다. 시와 동화도 쓴 건 언제 알았는지 모르겠고, 그림(수채화)까지 그렸다는 건 한두해 전에 안 듯합니다. 그러고서 헤세가 그림도 그렸구나 했습니다. 헤세를 좋아하는 사람은 벌써 알고 있었을 텐데. 헤세가 그림을 그린 건 우울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림 그리는 게 우울증인 사람한테 다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면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그리는 일에만 집중하겠지요. 저는 그림은 안 될 듯합니다. 우을증이 더 심해질지도. 왜냐하면 그림 잘 못 그리니까요. 헤세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와 상관없이 그리는 일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저도 아주 어렸을 때는 아무렇게나 그림 그렸을지도 모를 텐데, 언제부터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제가 그린 그림 남한테 보이기 싫었고 글짓기 시간에 쓴 글도 남한테 보이기 싫었습니다. 지금은 글 못 써도 여러 사람이 보게 하는군요. 글이라고 말하기 조금 어렵지만. 제가 그림보다 글로 나타내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네요. 그래도 그림, 글 다 잘하는 사람 보면 부럽습니다. 헤세도 그렇군요.
저는 아주 좋아하는 작가도 책도 없습니다. 좋게 여겨서 그때그때 보는 건 있지만. 글에는 관심 가져도 작가한테는 그리 관심을 가지지 않는군요. 정여울은 헤세를 좋아해서 책을 여러 번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책도 썼군요. 정여울은 헤세가 나고 자란 독일 남부 칼프와 헤세가 40년 동안 살다 죽은 스위스 몬타뇰라에 갔습니다. 두 곳 다 조용한 곳입니다. 칼프와 몬타뇰라에는 헤세의 흔적이 남아있군요. 나치 시절에는 독일에서 헤세 책을 낼 수 없었는데, 지금은 독일 사람이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사람이라 합니다. 헤세는 자신이 정확하게 어느 나라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더군요. 누군가는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살면 자신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힘들어하는데, 헤세는 민족과 나라에서 자유로웠군요. 그래도 독일에 서운함을 느꼈겠지요. 헤세는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습니다. 이것을 안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군요. 《싯다르타》가 그냥 쓰인 소설이 아니군요. 몬타뇰라에서 세번째 아내 니논과 살 때는 헤세보다 니논이 여기저기 다녔다고 하네요. 그때 헤세는 첫번째 아내 마음을 조금 알았을 것 같습니다.
헤세는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 편지를 쓰면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큰돈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군요. 헤세 소설을 읽고 헤세한테 편지를 쓰면 답장을 썼다고 합니다. 지금 작가 가운데 헤세처럼 하는 사람 얼마나 될까요. 지금은 보통 사람도 편지 잘 쓰지 않는군요. 저는 아직 씁니다(이 말을 또 하다니,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헤세는 식구들한테도 편지를 썼다고 하네요. 헤세가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좋아한 것은 뜰 가꾸기예요. 자연과 함께 하는 게 마음을 좋게 해주었겠지요. 넓은 뜰을 가꾸고 동화책 그림 그린 타샤 튜더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우리나라 사람은 뜰을 가꾸고 텃밭을 일굴 듯합니다. 어쩌면 헤세가 가꾼 뜰에도 열매 맺는 나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헤세가 뜰에 씨 뿌리고 과일과 채소를 거두어들이기도 했군요. 헤세는 한때 포도 농사로 먹고 살기도 했습니다. 제가 뜰 가꾸기라고 했는데 헤세가 한 건 농사였네요. 땅에 마음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또 다른 기쁨이었겠습니다. 글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군요.
앞에서 헤세가 쓴 소설 몇권 봤다고 했는데 오래전에 봐서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무엇무엇을 봤는지도.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저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봤네요) 《싯다르타》는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본 것 같기도 합니다. 헤세가 쓴 동화도 봤네요. 전에는 몰랐는데 정여울이 쓴 글을 보니 헤세가 쓴 소설 공통점이 있더군요(어쩌면 이건 예전에 알았을지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만나서 친구가 되는. 두 사람이지만 그건 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한테는 여러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세가 만들어낸 인물은 한쪽으로 치우친 듯합니다.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하더군요. 두 사람 관계는 영혼의 동반자예요. 한쪽으로 치우친 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 균형을 잡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것을 이룬 적도 있지만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헤세는 융이 말한 것을 소설에 나타내려 했답니다. 융을 알면 헤세가 쓴 글 좀더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소설 이야기를 보면서 소설에 나온 것 같은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는 일이 실제 있을까 했습니다. 한 사람을 둘로 나눈 것 같지만 있겠지요, 지음이라는 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혼의 동반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헤세는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파고든 듯합니다. 저도 저를 알기 위해 애써야겠습니다.
☆―
살아있다는 것은 쓸쓸하다는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모두 다 혼자다. <안개 속에서> (33쪽)
진정한 나다움의 실체를 깨닫는 것, 그것이 개성화라면, 개성화의 절정은 자기 안에 잠자는 알 수 없는 힘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엄청난 힘을 깨닫는 일. 그리하여 아무도 함부로 자신을 상처주거나 자신의 영혼을 부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 일. 그 깨달음의 순간 개성화는 최고의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자기 안의 엄청난 힘을 깨달으면 어떻게, 어디에, 무엇을 위해 써야 할지 생각한다. 힘을 깨닫는 것만으로 개성화가 완성될 수 있다. (178쪽)
“나도 누구 도움을 받은 적 없어.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만일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떤 것도 네 진짜 모습을 찾아낼 수 없어.” (《데미안》에 나오는 말, 231쪽)
오래전 글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辺境・近境 (1998)
무라카미 하루키 김진욱 옮김
문학사상 2015년 03월 26일
이 책은 1999년에 나온 것을 다시 낸 것이다. 그때는 책이 어땠을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9년에도 우리나라 사람이 잘 알았을까.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어쩐지 1999년에는 모르고 2000년이 지나고 알았을 것 같다. 알고 나서 이런저런 책을 보았다. 그렇게 본 건 무라카미 하루키 글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었을지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보기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아서 책을 여러 권 사기도 했다. 도서관에 다니면서는 책 오면 빌려보았다. 잘 보고 다 본 건 아니다. 모르는데도 그냥 본 것 같다. 어느 때부턴가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잘 안 보게 되고 몇해가 지난 뒤 산문으로 다시 만났다. 어쩌면 소설 《1Q84》가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소설 나온 것을 알았을 때 여전히 소설을 쓰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 인터넷을 써서 많은 사람이 《1Q84》 이야기하는 걸 알았다. 오랜만에 한번 볼까 했을지도. 이렇게 생각하니 무라카미 안 지 오래되었구나. 우리나라 소설가 가운데서 오래 안 사람은 누굴까. 오래 알았다고 해도 지금까지 읽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주 좋아하는 작가가 없어서일까.
산문을 보고 무라카미 하루키 좀 재미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한 듯하다. 글을 재미있게 쓴다고 그 사람도 재미있는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열심히라고 할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산문을 조금 찾아보기도 했다. 그건 또 느낌이 달랐다. 달리기 하는 이야기와 다른 나라에서 살았던 이야기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 분위기와 비슷했다. 재미있게 본 건 ‘무라카미 라디오’다. 그건 여성잡지에 실린 글이어서였을까(여성잡지에 실린 글 맞던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와 어딘가에 다니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안 건 언제일까. 소설 보고 안 건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보고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글에서 본 적 있을 테니까. 그런 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꼭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좋아하지 않아도 조금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책(소설)을 봐도 작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도 생각해야겠다 생각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글속에 작가가 있는지 없는지. 아니 소설에서 작가를 보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 많이 드러난 게 있어도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일지도.
책이 나온 때(일본에서는 1998년에 나왔다)도 사람들이 쉽게 여기저기 다녔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하다 갑자기 자신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하고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그것을 글로 써서 책을 내기도 했다. 지금은 여행작가라는 것도 있던가. 이렇게 말하는 나는 여행기 잘 안 본다. 그것도 관심이 있어야 보는 거지. 어렸을 때 소풍가기 전날 들뜨기도 한 걸 보면 어딘가에 가는 거 아주 싫어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먼 곳에 가는 거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힘드니까. 벗어나고 싶은 일상도 없다. 좋아서 그런 건가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좋지 않다. 책을 보는 게 어디론가 떠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떠나고 싶은 일상이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건지도. 어딘가에 가려면 힘도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힘도 없구나.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 많은 사람이 떠나는 걸 좋아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여행기 보고 이런 말을 하다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는 여행은 소설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소설에 쓴 곳에 가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도 다른 곳에 다니면서 썼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기 쓰는 게 소설 쓰기에 도움 된다고 한다.
하루키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안에 여행기가 많았다. 그 말 보고 그걸 봐서 어딘가에 가는 걸 좋아하나 했다. 책을 보고 그곳에 간 듯한 느낌을 느끼기도 하지만, 실제 그곳에 가 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작가가 많이 사는 이스트햄프턴은 글쓰는 사람한테 성지라고 한다. 그곳에는 작가만 사는 게 아니다. 돈 많이 번 사람이 집을 사두고 쉬러 다녔다. 땅값이 비싸단다. 하루키는 사람이 없는 까마귀 섬에서 보내기도 했다(여기는 일본이다). 처음에는 며칠 지낼 생각이었는데 낚시도 헤엄도 칠 수 없고 밤에는 벌레가 엄청나게 나왔다. 겨우 하룻밤만 지냈다. 사람 없는 섬은 조용하고 좋을 것 같은데 그것은 그저 사람이 바라는 것일 뿐이구나. 사람이 없는 곳은 사람이 아닌 자연이 주인이다. 아니 사람이 주인인 곳은 어디에도 없겠다. 사람은 그저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하루키가 멕시코는 한달 동안이나 다녔는데 버스에서 노래를 엄청 크게 틀어둬서 본래 들으려 한 음악은 듣지 못했다. 멕시코에서는 물건이 자꾸 없어졌다. 일본 시코쿠의 가가와 현에서는 우동을 먹는 여행을 하고, 노몬한 전투가 있었던 곳에 가서는 일본을 생각했다. 그곳에는 전쟁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아메리카 땅은 차를 타고 가로질렀다. 그런 것도 다 하다니. 마지막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걷고 쓴 글이다. 니시노미야에서 고베 산노미야까지. 큰지진이 일어나고 두해가 지나 때였다. 자신이 살던 때와 바뀐 모습을 보고 아쉬워했다. 시간이 흐르면 바뀌기도 하지만 그곳은 지진 때문에 바뀐 것이었다.
떠나는 건 돌아오기 위해서다.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길 위에서 사는 사람.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한테 돌아오는 게 더 좋을 텐데. 책을 볼 때도 거기에 푹 빠져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다른 것보다 책속으로 떠났다 잘 돌아오고 싶다.
희선
☆―
그때그때 눈앞 모든 풍경에 나 자신을 몰입시키려 한다. 모든 것이 피부에 스며들게 한다. 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녹음기가 되고 카메라가 된다. (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