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legy of Whiteness

  한강   차미혜 사진

  난다  2016년 05월 25일

 

 

 

 

 

 

 

 

 

 

 

 

 

 

하얀 개

 

 

 

집을 나가 왼쪽으로 꺾어서 잠깐 걸으면 오른쪽에 대중목욕탕이 있고 그 옆에는 집이 몇 채 있다. 대중목욕탕을 지나고 첫번째 집을 지나가면서 대문 밑으로 얼굴 내민 하얀 개를 보곤 했다. 개를 싫어하지 않지만 짖으면 무섭다. 그 하얀 개는 짖지 않았다. 그저 대문 밑으로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바깥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오랫동안 하얀 개를 보았는데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길을 지날 때만 잠깐 만난 개가 보이지 않아도 쓸쓸한데 오랫동안 함께 살던 개가 세상을 떠나면 더 슬프겠다.

 

 

 

 

 

하얀 밤

 

 

 

해가 지면 땅에는 어스름이 내리고 세상은 조금씩 어두워진다.

 

어느 저녁, 해가 졌는데도 창 밖이 캄캄하지 않고 밝았다. 아니 하얬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하얀 밤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하얀색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주 짧았던 건 아니지만, 조금 뒤 본래 밤으로 돌아왔다. 하얀 밤이었던 날, 세상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는 건 아닐까 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밤과 아침이지만, 가끔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도 가끔이겠지.

 

 

 

 

 

하얀 달

 

 

 

어릴 때 어두운 밤을 무서워했던가. 밤이 오는 걸 아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밤이 오면 자야 했으니까.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밤에 자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달빛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밤에 보름달이 뜨면 그 빛만으로도 밤길이 무섭지 않았다. 보름달이 떠서 밤길을 걸은 건 아니고, 밤길을 걷다 다른 날과 다르게 밝아서 ‘오늘은 보름달이 떴나보다’ 했다. 난 그 밤에 어딜 간 거지. 먼 곳에 간 게  아니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온 걸지도.

 

밝은 낮과 다르지만 보름달이 뜬 밤에는 모든 게 잘 보였다. 해는 사물에 빛을 쏘아 흩어지게 하지만, 달은 사물을 빛으로 감싼다. 달이 빛나는 건 해가 있기 때문이구나.

 

 

 

 

 

하얀 비둘기

 

 

 

자주 본 건 아니지만, 무슨 행사가 있을 때면 하얀 비둘기를 많이 날렸다. 하얀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지. 그 하얀 비둘기는 어디에 있던 걸까. 평소에 보는 비둘기는 거의 잿빛이다. 그런 비둘기는 공원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누군가는 아주 많은 비둘기를 하늘 쥐라고 했다. 살이 많이 찐 건 닭둘기라고 하던가. 하얀 비둘기는 잿빛 비둘기보다 드물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건지, 따로 하얀 비둘기만 모아서 기르고 행사를 치렀는지도.

 

마술사는 하얀 비둘기로 마술을 부린다.

 

오래전에는 비둘기를 이용해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전서구. 하루키는 1980년대에 전서구를 보았다니. 그게 그때도 있었나보다.

 

 

 

 

 

하얀 나비

 

 

 

사람이 죽으면 하얀 나비가 된다고 한다. 죽은 사람 혼이 살짝 하얀 나비 몸을 빌려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오는 걸지도.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하얀 나비를 죽은 사람 혼이라고 하는 걸 보니. 아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엄마 무덤에 날아온 하얀 나비를 엄마로 믿었다. 엄마 품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 아이는 하얀 나비를 보고 ‘엄마, 엄마’ 외치다 비탈에서 미끄러지고 정신을 잃었다. 아이는 꿈속에서 하얀 나비가 엄마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흰 눈 사이로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를 찾아다녔다. 여자와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편안했다. 남자는 그런 날이 오래오래 이어지리라 여겼다. 여자를 만난 겨울이 가고 많은 것이 깨어나는 봄이 왔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데, 그것과 반대로 여자는 시들어갔다. 얼마 뒤 그 날이 찾아왔다. 남자가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여자가 자주 앉던 흔들의자 밑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다.

 

남자는 물웅덩이가 공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물웅덩이가 모두 사라진 날 남자는 여자를 찾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여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그만두지 않았다.

 

겨울, 큰눈이 내려 길도 없는 산 속으로 남자는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산 속 깊은 곳에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산 속으로 걸으면서 찍은 발자국은 곧 흰 눈에 덮였다. 남자는 여자를 만났을까.

 

 

 

희선

 

 

 

 

☆―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짖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진눈깨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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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페 디엠

  호라티우스   김남우 옮김

  민음사  2016년 05월 19일

 

 

 

 

 

 

 

 

 

 

 

 

 

오래전부터 사람은 글을 썼습니다. 언제부턴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글을 쓰기 전에는 그림을 그렸군요. 문자도 사람이 발명한 거네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살 때는 기록을 해야겠다 생각하지 않았겠지요(그때 그림을 그린 걸까요). 한곳에 머물고 농사를 짓고 살게 된 것을 농업혁명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책 많이 못 보았는데 조금 본 게 도움이 되는군요. 잘 알지 못해도 새로 아는 건 기억해두면 나중에 아는 척할 수 있겠습니다. 요새 소설만 죽 만났는데, 다른 쪽 책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잠시 다른 말로 샜습니다. 전 기원전 사람이 쓴 글은 거의 못 봤습니다. 그때 글이 지금까지 제대로 남았는지 그것도 모르겠네요. 다는 아니더라도 남아서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거겠지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생각나는군요. 이런저런 전쟁 때문에 책이 타버린 일도 떠오르는군요. 타버린 것도 있지만 일부러 태운 것도 많겠지요.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움직인 걸까요. 이것도 조금 쓸데없는 말이네요.

 

이 책 제목 많이 들어본 말이지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한 말입니다. 영화도 보고 책도 보았는데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말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겨라)’은 잊지 않았어요. 이 말했을 때 호라티우스 이야기도 했는지. 키팅 선생님은 시 이야기도 하잖아요. 그 말을 듣고 몇몇 아이가 밤에 모여 시를 읽지요. 그때 읽은 것도 오래전 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 영화 나온 지 오래됐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 비슷하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랑 지금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보면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더군요. 예전보다 지금 더 안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심하게 괴롭히는 아이도 있잖아요. ‘오늘을 즐겨라’ 하는 말은 학생한테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군요. 지금을 사는 사람 모두한테 해야 하지요. 많은 사람이 나중에 잘살려고 지금을 힘들게 살기도 하잖아요. 그렇다고 흥청망청 살라는 말은 아니예요. 알지요.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고 힘껏 살라는 거겠지요. 오늘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이거 알아도 늘 잘 지내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이 잠깐이라도 있다면 괜찮겠지요.

 

 

 

힘겨운 일에도 평상심을 굳게

지키고, 감당치못할 즐거움은

좋다만 하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

절제하라. 필멸의 델리우스!

 

<Ⅱ3 힘겨운 일에도 평삼심을>에서, 87쪽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 달아나듯

세월은 흘러 지나가고, 신께 빌어도

닥쳐 올 주름과 노년, 막을 수 없는

죽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Ⅱ14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에서, 110쪽

 

 

 

옛날 사람이 먹고 살려고 한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호라티우스는 가난해서 시를 썼다고 하네요. 시가 돈이 되었다는 말일까요. 옮긴이는 가난을 돈이 없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마음(정신)을 나타내는 걸지도. 이런 시는 서정시일까요. 호라티우스는 시에는 역사와 신화에 나오는 사람이 나옵니다. 제가 그걸 잘 알면 좋겠지만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 시는 더 상상해서 읽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만 잇는 건 아니예요. 호라티우스 자신의 이야기나 친구 이야기도 조금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때는 사람이 더 빨리 죽었군요. 오래 산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닐 테지만. ‘오늘을 즐겨라’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겠네요. 호라티우스는 검소하게 사는 걸 좋아한 것 같습니다. 가진 게 없다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시 쓰는 일을 해서 괜찮았겠지요.

 

지금 세상은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런 세상을 따라잡기 힘드네요. 아니 꼭 따라잡지 않아도 괜찮군요. 한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훨씬 좋을 듯합니다. 알아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잠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생각하는 것도 좋고, 잠시 멈춰서서 스쳐지나는 사람을 보거나 나무 위에 잠시 앉았다 가는 바람을 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파란하늘을 떠다니는 흰구름을 보는 것도 좋겠지요. 시를 만나는 게 그런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내일은 없다

 

 

 

오늘은 저축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언젠가’ ‘다음에’가 아닌

지금 하자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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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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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2013)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가 일본에서 나온 해와 같은 해에 한국에도 나왔다. 조금 차이 날지 모르겠지만 거의 같은 때 나왔다.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말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난 기사는 못 봤는데 돈을 많이 주고 한국말로 옮겼다고 들었다. 인센가. 이 책도 일본에서 나오고 한해가 지나지 않았다. 기회가 오면 한번 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구나. 다른 일은 별로 잘되지 않지만, 책을 만나는 건 가끔 뜻대로 된다. 이것도 가끔이고 우연이다. 이런 일은 나만 겪는 게 아니다. 누구나 우연히 자신이 바라는 일 일어나기도 할 거다. 하루키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은행에 갚아야 할 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 길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주웠다. 신기하게도 은행에 갚아야 하는 돈과 같았다. 그 말 다른 데서 본 것 같다. 그것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이야기도 한번쯤 본 것 같았다. 이걸 읽고 느낀 건, 그동안 내가 하루키 산문을 많이 만났나보다다. 하루키 글 아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자주 만난 건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건가, 그럴지도. 처음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처음 만난 일본 작가가 하루키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지도.

 

많은 사람이 알겠지만 하루키는 대학에 다니다 결혼하고 회사에 다니는 건 싫어서 재즈 카페를 했다. 이런 걸 보면 하루키는 마음먹으면 잘한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좋아하는 걸 해선가. 재즈 카페를 한 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그곳에 오는 사람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별로 안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키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는 것 같다. 사람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있겠다. 학교 다닐 때 큰일을 겪거나 부모한테 문제도 없었다. 하루키가 공부하는 걸 즐기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자랐다. 부모는 하루키한테 공부 잘해라 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은 듯하다. 하루키는 그런 말 들었겠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쓴다고 해서 뭔가 남다를 일을 겪는 건 아니다. 어떤 아픔을 가진 사람이 그걸 말하려 하기도 하지만. 작가는 자기 둘레를 잘 보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건 자신만 아는 것이기도 하고 남이 마음 쓰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지. 다 알지만 잊은 것도 말하겠다.

 

스물아홉에 하루키는 야구 경기장에서 소설을 써 봐야겠다 생각하고 만년필과 원고지를 샀다. 만년필이랑 원고지 없어도 글은 쓸 수 있는데. 거의 좋은 연장을 마련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 쓰기도 하는데, 하루키는 여섯달 동안 썼다. 처음 쓴 건 재미없었다고 한다. 난 안 되나, 하고 그만두지 않고 타자기를 꺼내서 영어로 조금씩 썼다.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문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도 자기 문체를 만들려고 영시나 영어 소설을 읽었다던데. 또 영어구나, 영어라는 것일 뿐이지 자신이 늘 쓰는 말이 아닌 것으로 썼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하루키 소설은 영어로 옮기기 쉽게 쓴다는 말은 일본 사람이 한 말이었다. 하루키가 일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었다. 이건 새롭게 알았다고 해야겠다. 하루키가 영어로 쓴 것을 일본말로 옮기고 고쳐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군조》 신인상을 받았다. 그때 하루키는 앞으로 자신이 잘되리라 생각했다. 이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거다. 신인상 받고 저런 말 했다면 욕 먹었겠지. 어쩌면 저렇게 생각해서 지금 하루키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면 그렇게 되려고 애쓰기도 한다. 《군조》 신인상을 받아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는 거다. 상을 못 받았다면 소설가로 살지 않았을 거다 했다. 그때가 하루키한테 나타난 갈림길일지도. 다음은 외국에서 살고 소설 쓴 거겠다. 그전에도 있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을 쓰려 한 때.

 

소설가는 오랫동안 소설을 써야 소설 쓰기를 말할 수 있을까, 몇번 써 보고도 말할 수 있을까. 그건 마음먹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닐지도. 자신이 어떻게 소설을 썼는지 하나하나 생각하다보면, 자신이 그렇게 썼구나 하는 걸 알겠지. 그건 좀 써 봐야 뒤돌아볼 수 있겠다. 하루키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런 글을 썼다.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정리했다고 해서 이게 끝은 아니다. 하루키는 지금도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을 써서 그런 걸까. 많은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이제와서 뭐 하나’ 한다.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할지도. 나이를 먹으면 많은 게 예전과 다를지 몰라도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난 아직도 철없는데). 난 하루키가 소설을 쓰려고 달리기를 한 거 잘했다 생각한다. 달리기를 할 때 기분은 앞으로도 모를 테지만. 난 걷기 쪽이다. 날마다 걷는 건 아니지만. 학교 다닐 때도 지금도 어디 가려고 걷는다. 단지 걸으려고 걸은 적은 별로 없다. 달리기는 못해도 날마다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걷는다고 이런저런 게 생각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걸으면 가끔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금은 예전보다 많은 것 같다. 소설 쓰기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거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수 없어서 괴로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고 싶을 때만 썼다. 다른 때는 영어를 일본말로 옮기거나 산문을 썼다. 언젠가도 산문을 보고 하루키 산문 재미있네 한 적 있는데, 이 책 볼 때도 그랬다. 하루키가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웃음이 좀 낫다. 내가 이상한가. 하루키는 친한 사람한테는 재미있는 면을 조금 보여줄지도. 글로만 그럴까. 난 글로만 말한다. 글 재미있게 못 쓰지만 실제 만나도 재미없다. 말 자체를 안 한다. 소설 쓰는 사람은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보다 자신이 쓰는 소설 속 사람 만나기를 좋아할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알아도 그것대로 쓰는 건 어렵다. 글쓰기도 사람마다 다르다.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걸 찾은 사람은 작가(소설가)가 되는 건지도. 하루키는 그걸 찾고 지금도 쓴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기도 한다. 하루키는 그런 게 있어서 좋겠다. 난 늘 자신없는데. 하루키 말하다 ‘난 어떤데’ 하는 말을 하다니. 책을 보면 자기 생각도 하지 않는가. 그런 건 자기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하는 것일지도. 사람은 다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될 수 없다. 남을 보면 자신을 알게 되기도 한다. 소설을 보는 것도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설까. 하루키 소설 조금 읽기는 했지만 잘 못 읽었다. 그런 거 다시 보기도 해야 할 텐데. 이 책을 봐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구나. 난 언제나 우연이 찾아오기를 바라니까. 이런 거 별로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난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조금 애쓰고 우연이 찾아오길. 나는 나다. 하루키가 아프지 않고 소설 오래 쓰기를 바란다.

 

 

 

희선

 

 

 

 

☆―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 ‘자, 이제부터 뭘 써 볼까’ 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소설을 쓸 수 없어 고생했다는 경험도(고맙게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제 생각에는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 쓰는 뜻은 없습니다. 고역으로 소설을 쓴다는 생각에 저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57쪽)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125쪽)

 

 

외로운 일, 이라 하면 무척 범속한 말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욱이 긴 소설을 쓰는 경우에는 실제로 꽤 외로운 일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 하고 어깨를 토닥이고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한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물론 잘되면), 그것을 써내는 일 그 자체를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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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콩꽃이겠지 생각했는데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다. 내가 찾아본 말은 자주색콩이다. 이 말로 찾아보니 바로 자주제비울타리콩이 나왔다. 콩꽃보다 자주제비울타리콩이라 하는 게 낫겠지. 다음은 수세미다. 설거지 할 때 쓰는 수세미로 보이지 않지만 껍질을 벗기고 삶으면 수세미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먹을 수도 있겠지. 오이랑 비슷할 것 같았는데 껍질을 벗긴 수세미는 오이하고 아주 달랐다.

 

자주 다니던 길인데 그동안 못 본 게 많다. 왜 그렇게 못 봤을까. 얼마전부터 그 길을 지나가고 올 때 나뭇가지를 보았다. 어느 날 나뭇가지 끝에 열매처럼 보이는 게 열려서 그건 뭔가 했다. 며칠 지나고 그 길을 가니 꽃이 피어서 깜짝 놀랐다. 그건 열매가 아니고 꽃봉오리였다. 처음에는 무슨 꽃인지 몰랐다. 모르는 꽃이 아니었는데, 하긴 다른 건 나무에 핀 것을 봐서 그랬겠지. 그러다 배롱나무꽃이 아닐까 하고 다른 곳에서 배롱나무를 자세히 보았다. 그랬더니 나뭇잎이 같았다. 저것은 나뭇가지만 있지만 나무겠지. 커다란 나무로 자랄 수 있을지. 어쩐지 어려워 보인다. 어디선가 날아온 배롱나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 걸 텐데. 누군가 아직 작은 배롱나무가 더 커다랗게 자라도록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좋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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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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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도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이런저런 것이 떠올랐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고 중간이 지나고부터예요. 곧 고등학생이 되는 오가키 신이 엄마 심부름으로 간 은행에서 본 오래된 성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건, 며칠 전에 제가 생각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건 그림이 아니고 CD예요. 사람이 그림이나 책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아주 없지 않습니다. 그런 걸 생각할 수 있는 건 저만이 아니예요. 며칠전에 어딘가에 갔다 오다 길에 떨어진 CD를 봤어요. 멀어도 CD는 보였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뭔지 알 수 없었어요.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가서 보니 영어공부하는 거더군요. 다시 가던 길을 가다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했습니다. 우연히 길에서 주운 CD를 컴퓨터에 넣고 봤더니 그 세계속으로 들어간다는. CD에는 글이 있는 설정이고 그 글속 세계에 가는 걸로. 이 생각만으로 더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그건 제가 그런 거고 잘 쓰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여러가지 상상을 하고 끝까지 갈지도 모르겠네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영화 <시월애>와 <동감>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 이야기는 아니예요. 그런 것하고는 상관없습니다(넓은 사랑에 들어가겠네요). 앞에서 말한 영화 본 것 같기는 한데 다 생각나지는 않아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그리고 제목을 잊어버린 여러가지 것도. 미야베 미유키 책도 생각났어요. 《가모우 저택 사건》 《드림버스터》 《이코》(여기에서 《이코》는 그렇게 재미있게 못 봤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다른 게 생각났지만 똑같지 않습니다. 이건 당연한 거네요. 신이 은행에서 본 그림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지만 그림 잘 그리는 시로타 다마미한테 부탁하고 그림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했습니다. 왜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나올까 하겠네요. 그림속에 들어가는 방법은 거기에 그림을 그리는 거로 축적에 맞아야 합니다. 혼이 그림에 들어가는 거네요. 시로타는 그림은 작가의 영혼을 비추는 거고, 그림속에 들어가는 건 작가의 영혼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해요. 이건 그림만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성과 숲이 있는 그림속 세계는 누구 영혼속일까요.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걸 조금 무섭게 여기던 시로타는 신과 함께 갑니다. 그곳에서 둘은 파쿠 씨를 만나요. 그림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니. 파쿠 씨는 만화가 어시스턴트로 신이 간 은행에서 성 그림을 봤답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카메라로 찍고, 사진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았더니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신기한 일이지요. 세사람한테 공통점은 없군요. 아니 시로타와 파쿠 씨는 좀 다를지도. 신은 남들 눈에 띄지 않지만 별 문제 없이 살았어요. 다른 행동은 거의 안 했는데 성 그림을 봤을 때는 좀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말해 본 적 없는 시로타한테 말했네요. 신은 시로타가 자기 반에서 여왕처럼 구는 아이와 여러 아이한테 괴롭힘 당해서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괴롭힘 당하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 자신까지 그런 일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알면서 모르는 척한 거네요. 다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라고 누군가한테 괴롭힘 당하는 사람을 쉽게 도울 수 있을지. 시로타가 힘들어한 건 그 일은 아니예요. 엄마가 사고로 죽고 아빠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아빠는 그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어요. 시로타는 그 집 사람과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것보다 새엄마가 시로타한테 마음을 쓰지 않은 걸지도. 시로타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았어요. 어느 때는 자신이 그린 그림속에 들어간 것 같았답니다. 파쿠 씨는 만화가 어시스턴트로 잘됐지만 본래 꿈은 만화가였어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한테 자기 이름으로 나온 만화책을 드리지 못한 걸 미안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부모는 자식이 돈을 많이 벌거나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 좋아하는 거 하고 사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생각 들지만 파쿠 씨 마음 아주 모르지 않습니다.

 

세사람이 들어간 그림속 성에는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그 여자아이는 십년 전에 자기 집에서 사라진 아이라고 파쿠 씨가 말했어요.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도 믿게 하지요.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건 우리가 책을 읽는 것과 같다고 하더군요. 미야베 미유키 책 《영웅의 서》도 있군요. 그 책은 제가 아직 못 봤습니다. 시로타와 파쿠 씨는 십년 전 여자아이를 구하면 지금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르지만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 좀 있네요. 또 다른 것도 말하네요.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다 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은 어떨까요. 시로타와 파쿠 씨 자신의 현실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힘든 여자아이를 돕고 싶은 마음도 컸을 거예요. 제 생각대로 됐습니다. 어떤 거냐 하면 여자아이는 바뀌고, 다른 일은 그대로겠지 했어요. 그것을 확인하니 놀랍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시로타와 파쿠 씨는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지난일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을 잘 살아야죠.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닐지라도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힘든 누군가를 돕기도 있네요.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닐지도. 시로타를 괴롭힌 아이는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로타가 부러워서였다는 거 하나는 알겠지만. 그 아이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했어요. 가진 게 아주 없지 않은데 그것보다 더 갖기를 바란 건지. 그 아이 집에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밖에 못하다니.

 

세상에는 바로잡을 수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한테도 마음을 써야 할 텐데 싶습니다. 생각만 그렇군요. 부모나 학교 선생님이 아이 마음을 알려 하기를 바랍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않고.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보고 인정해주면 더 기쁘잖아요. 가까운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더 잘 볼 때도 있군요. 왜 이런 말을 꺼낸 건지. 하나를 생각하면 다른 것도 떠오르고 마무리하기 힘들군요. 사람은 저마다 아픔이 있고 그것을 안고 살아간다고 해야겠네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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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0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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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3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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