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 '나의 인생'을 완독했다. 오래 전부터 관심 있었던 책이다. 토마스 만, 브레히트, 카네티 등 독일어권 작가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뭐니뭐니 해도 이 사람의 인생여정 자체가 대단하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소개한 이자크 디네센(카렌 블릭센)의 글이 떠오른다.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참을 수 있다." (제5장 행위) 그리고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제2차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독일인들의 존재와 행동이 끔찍하다. 




그의 또 다른 책 '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도 재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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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박완서의 단편 '창밖은 봄'을 읽어야겠다고 계획했었는데 5월이 다 가도록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래도 어떻게 기억이 나 찾아 읽었다. '엄마의 말뚝' 수록작. 다가올 겨울에 읽어도 좋았을 듯하다.


Girl Seated on a Pier - Philip Wilson Steer - WikiArt.org


'박완서의 말'에 나오기를 고 피천득 작가가 박완서 작가의 글이 좋다며 이 소설 '창밖은 봄' 여주인공 길례를 언급한다.

요컨대 그들은 서로 깊이 좋아하고 있었고,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약점으로 상대방을 욕 주거나 폐 끼치게 할 수 없다는 순정에 철저했다.

상대방의 약점으로 자기의 약점을 비기게 할 수 있을 만큼만 약았더라도 그들의 결합은 훨씬 수월했을 것을.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순정 때문에 누가 보아도 만만하고 구질구질한 그들이었지만, 저희들끼리의 눈엔 서로 상대가 귀한 보석처럼 소중하고 빛나 보였던 것이다.

바람이 났으면 국으로 바람난 행세를 할 것이지,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같잖은 것 같으니라고…….

자고 깨면 춥고, 자고 깨면 여전히 춥건만 설마 내일은 풀리겠지, 설마 겨울 다음엔 봄 안 올까, 하는 끈질긴 낙천성만이 그들의 것이었다.

밖에선 여전히 혹한이 계속됐다. 천심도 삼한사온이란 자비로운 질서를 망각하고 한 달이 넘게 영하 15도의 강추위를 고집하고 있었다. 거지 빨래한다고 예로부터 일컬어지는 눈 오는 날조차 없었다.

강추위는 한 달을 넘고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신문의 만화란에선 삼한사온을, 석 달 춥고 넉 달 따뜻하기로 새롭게 풀이했다. 이런 방정맞은 말장난은 뜨뜻한 구들목에서 자고 난 사람들이나 읽고 좋아할 것이지 신문을 보지 않는 정 씨나 길례하곤 상관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는 또 시내 곳곳에서 수도관이 동파되어 물난리를 겪고 있단 보도와 함께 수도국에선 쇄도하는 고장 신고의 반의 반도 나와봐 주지 못할 뿐더러, 기껏 나와봤댔자, 한다는 소리가 봄을 기다리는 하느님 같은 소리가 고작이라는 비꼬는 기사도 났다.

추위가 석 달째로 접어들었다. 아무도 겨울 다음엔 봄이라는 걸 믿으려 들지 않았다.

수도관은 사방에서 매일매일 얼어 터지고, 수도국만이 봄에의 믿음으로 겨우겨우 그 체면을 유지하려 들었다. - 창밖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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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5월31일(금)에 계획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변경되는 바람에 차라리 잘 된 일이기는 했으나 하루가 붕 뜬 감이 없지 않았다. 


달이 바뀌고 주말이 오면서 계획에 없던 책들이 밀고 들어왔다. 크게 보면 독서계획에 있긴 했지만 꼭 지금 읽을 생각은 없었던 책들이라고 정정해야겠다. 불청객이 아니니까 환영한다.


'파리의 오렐리아'(뒤라스) 오디오북을 들으며 전율했다. 잊지만 않으면 나중에 또 듣고 싶다. 텍스트를 찾아 읽었다. '고통'(유효숙 역) 수록작. '원미동 시인'(양귀자) 오디오북도 듣고 글로 읽는다. 이 참에 양귀자 작가의 단편들을 좀 읽어볼까나.


[네이버 지식백과] 원미동시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088&cid=41708&categoryId=41737






Deformed city with writings, 1979 - Florin Maxa - WikiArt.org



사진: UnsplashAndrea Tummons


'뒤라스의 글쓰기'도 참고하자.

남들은 나를 일곱 살짜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저 그만한 계집아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나는 결코 그저 그만한 어린아이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게 건방지다면 하다못해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나 동네 사람들의 속마음 정도는 두루 알아맞힐 수 있는 눈치만큼은 환하니까. - 원미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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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심리학 -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러 미술관에 간다'(윤현희 지음)로부터


Women Admiring a Child, 1897 - Mary Cassatt - WikiArt.org


Mother and Child Reading, 1913 - Mary Cassatt - WikiArt.org


여성적 공간 / 메리 카사트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508&cid=58859&categoryId=58859





그림에 인생을 바친 메리 카사트는 성공한 화가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정경으로 가득한 그녀의 작품들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가정생활의 소소한 단면들을 담아내 따뜻함이 가득한 메리 카사트의 후기 작품들은 양육자로서 여성의 공간과 모성의 경험에 대한 헌사로 읽힌다. - 미국적인 독립성, 페미니즘의 향기 : 메리 카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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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6-01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처럼 다정하고 행복해보이는 그림이네요.
서곡님, 오늘부터 6월입니다.
좋은 일들 가득하고 건강한 한 달 되시면 좋겠어요.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서곡 2024-06-01 21:5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오늘 유월의 첫 날 잘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색감이 따뜻하고 화사해서 좋습니다 안녕히 주무시길요!!!
 


지금까지 내가 읽은 권여선 작가의 저서(공저 제외)는 데뷔작인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1996)’, 산문집 ‘오늘 뭐 먹지?(2018)’,그리고 단편소설집 ‘분홍리본의 시절(2007)’, ‘내 정원의 붉은 열매(2010)’, ‘안녕 주정뱅이(2016)’들이다. 저자의 일곱 번째 소설집인 ‘각각의 계절’은 나로서는 내가 읽은 이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인 셈.


이 책은 작년 50인의 소설가 중 12인이 택하여 “올해의 소설”로 선정되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31128045400005 좀 있으면 등단 30년차가 될 권여선 작가는 어쩌면 이 시대의 박완서가 될 수도 있겠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권여선 작가의 책들을 띄엄띄엄 읽어온 가운데,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가 이 책 ‘각각의 계절’을 읽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첫 수록작 ‘사슴벌레식 문답’(김승옥문학상 대상작)은 자살, 정치적 조직사건과 배신이란 비극과 참극이 가로지른다. 친구의 자살이란 소재는 권여선 작가 본인이 대학생 시절 겪은 실화를 어쩔 수 없이 연상시킨다.


마지막 수록작 '기억의 왈츠'(김유정문학상 수상작)는 여성 화자가 술에 취해 진상짓을 하는 대목이 압권인데 - 일견 멀쩡해 보이는 그녀의 남친도 실은 진상 과로서, 엄청난 분량의 일기장을 보내 여친에게 읽으라고 압박을 가한다 - 철 이른 수박을 사 달라고 사람들 앞에서 철철 우는 장면은, '안녕 주정뱅이' 수록작 '이모'에서 호감을 가진 남자의 손바닥을 담뱃불로 지져 버리던 모습만큼 강렬하진 않아도, 못지 않게 인상적이다.


아, 새로운 '봄밤'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 사슴벌레식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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