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의 포스트로부터

A young ladys adventure, 1921 - Paul Klee - WikiArt.org



자신을 위해 써라 - 자유롭게 쓰기를 활용하여 생각의 흐름을 탐사하고, 뭔가를 결정하고, 우울함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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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깜빡이'는 웹진 비유 2022년 발표작. https://www.sfac.or.kr/literature/epi/A0000/epiView.do?epiSeq=856 (전문)

사진: UnsplashSandra Seitamaa



가까이서 보면 대책 없다 싶은 동생이, 화면 속 인물처럼 멀리서 다가오면…… 정처 없다…… 쟤는 왜 가엾게…… 어디 딱 붙은 데가 없이…… 마음도 육신도…… 그런데 육신이란 말은…… 어쩐지 욕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 들어 혜진이 급격히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혜영은 절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이 혜진과 세상을 이어줄 유일한 밧줄인 걸 아니까. 그런데도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육신…… 육신…… 그 말이 자꾸 입안을 맴돌았고, 니 육신…… 내 육신…… 하면 왜 더 심한 욕 같은가…… 그런 생각만 들었다.


엄마 진짜 귀신같지 않냐?
혜진이 말했고 혜영은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짜 귀신같은 게, 내가 언제 약간 행복해지고 내가 언제 약간 기분좋아지는지를 딱 노리고 있다가, 딱 재 뿌리는 시점을 엄마는 귀신같이 아는 것 같아.
엄마가 무슨…… 뭘 그렇게 노리고 뿌리고…… 그러다 혜영은 쿡 웃었다. 그럴 만큼 남의 일에 부지런한 분 아니야.
그러니까 귀신같다는 거지. 의도가 없는데도 딱 그렇게 하니까. - 깜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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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사랑에 대하여'에서 안나는 요양을 위해 크림(크리미아)으로 떠난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두 남녀가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지역.


크림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2k0616a



By Tiia Monto, CC BY-SA 3.0, 위키미디어커먼즈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삶에는 늦든 빠르든 끝이 오기 마련이죠. 우리에게도 이별할 시간이 왔습니다. 루가노비치가 서부 러시아의 어느 현 재판소장에 임명됐기 때문이었죠. 그들은 가구와 말, 별장까지 모두 팔았어요. 별장에 마지막으로 다녀오는 길에 모두가 초록빛 지붕과 정원을 돌아보며 슬퍼했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그녀와 진짜로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8월 말쯤에 안나 알렉세예브나는 요양하기 위해 의사가 추천해준 크림 지역으로 먼저 떠나고, 며칠 뒤에는 루가노비치가 아이들을 데리고 서부의 부임지로 떠날 예정이었어요.

우리는 안나 알렉세예브나를 배웅하러 기차역으로 나갔어요.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라탔어요. 그런데 열차 출발을 알리는 세 번째 벨이 울리기 1분 전에 그녀가 잊고 가져가지 않은 상자를 발견했어요. 난 그 상자를 선반에 얹어주려고 얼른 기차 안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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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대하여'(1898)는 그의 유명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부인)'(1899)과 쌍둥이 같다. 둘 다 여주인공의 이름이 안나.



Lady in Moscow, 1912 - Wassily Kandinsky - WikiArt.org


체호프 단편집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 표지는 칸딘스키의 그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세요?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의 눈, 내게 내미는 작고 우아한 손, 그녀의 실내복, 그녀의 방식으로 손질된 머리, 목소리, 발걸음에서, 난 늘 내 인생에서 새롭고 특별하고 매우 중요한 그 무엇이라는 인상을 똑같이 받곤 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각자 생각에 잠겨 조용히 침묵하기도 하고, 그녀가 피아노를 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집에 없을 때도 안에 들어가 유모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와 놀거나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안나 알렉세예브나가 돌아오면 현관까지 마중 나가서 그녀가 사 온 물건 꾸러미들을 받아 들고 엄청 행복하고 진지한 소년처럼 그녀를 따라가곤 했죠.

안나 알렉세예브나와 나는 가끔 같이 극장에 가곤 했는데, 갈 땐 늘 걸어서 갔고, 극장에서는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았어요. 그녀가 말없이 건네주는 작은 쌍안경을 받아들 때마다 그녀가 내 사람인 듯 친근하게 느껴졌고,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공연한 오해를 살까 봐 극장에서 나오면 곧바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낯선 사람들처럼 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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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단편 '다산성'(1966)으로부터


[네이버 지식백과] 김승옥 [金承鈺]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3266&cid=41708&categoryId=41737




사진: UnsplashHimanshu Gangwar



"오늘 낮엔 무얼 하셨어요?"

나는 값을 받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옆집 마당 위에 고추잠자리떼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 집 마당에 코스모스가 많이 있잖아요? 그 위를 잠자리떼들이 마치 공중에 가만히 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었어요."

그 여자는 얼굴을 빨갛게 하고 그러나 고개는 숙이지 않고 성우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요?

내가 물었다.

"별루 생각 없었어요. 내년엔 우리집 마당에도 코스모스를 심어야겠다는 생각 좀……"

"코스모스 정말 좋지요? 고향엘 가느라고 가끔 기차를 타면 철둑 양쪽으로 코스모스가 피어 있곤 했지요. 한때는 코스모스 라인이라구 해서, 라인이란 건 영어로 줄이란 말이잖아요? 전국 철로 양쪽에 코스모스를 심게 했다는데, 요즘은 기차를 타도 그게 없어졌어요. 가뭄에 콩 나기로 어느 시골 정거장에나 좀 심어져 있곤 하지요."


그 여자 얘기의 분위기에 맞추느라고 기껏 한 내 얘기는 그러나 마치 쇼펜하우어가 잉크병에 돈을 숨겨놓고 쓸 만큼 의심쟁이였다는 얘기를 하는 투가 되어버려서 나는 자기의 얘기에 화가 났다.

"코스모스도 좋지만 잠자리떼가 참……"

그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고추잠자리……"

고추잠자리에 대한 내 나름의 회상이 또 나올 판이었다. 나는 그 여자의 말에 감동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더 긴 소리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 다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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