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머리가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얼룩무늬 토끼에게로 향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어두운 달빛이지만 토끼를 덥고 있는 털들이 솜이불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여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올랐지만, 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까 걱정되어 고개만 끄덕거렸다. 늑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마타는 어디 있지?]
[몰라요] 

토끼는 상체를 들어 올려 두 발을 모은 채 고개를 저었다. 

[왜 몰라? 넌 그 마타와 연결 되었을꺼 아니야?] 

대장 늑대의 왼쪽에 앉아있던 원숭이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버림 받았어] 

토끼의 마지못해 말하는 듯 한 대꾸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주 작고 보잘것 없는 모습이야. 싸움은 하지도 못해. 위급할 때 마타를 도울 수 없다면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지. 그 마타가 날 거부한 건 당연한 거야] 

토끼는 상체를 바닥으로 내린 후, 빠르게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시큼하고 텁텁한 슬픔이 쏟아지는 물처럼 내 머리와 가슴으로 들어오자 나는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가지 말고 이리와. 네가 필요해] 

먼 곳 어디선가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떼로 날아갔다.  

[제가..정말 도움이 되요?]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지만 희망을 품은 목소리가 들렸다. 

[응. 너의 경험과 생각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네가 날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곁으로 와줘]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토끼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뭇잎들이 떨어지는 궤적을 쫒아 눈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뱀파이어의 청각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바짝 날을 세우자, 토끼가 조금씩 광장을 둘러싼 어둠을 거쳐 내게로 접근하는 게 들렸다. 마침내 내 앞에 당도하자 토끼는 상체를 세웠다. 나는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어떤 냄새가 손 안에 있을지 상상이 안 되지만, 토끼는 킁킁거리며 나의 체취를 빨아들였다. 

[좋은 마타같아요]
[단지 냄새로만?] 

내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본능으로요. 동물들의 감각은 뱀파이어만큼 강하고 정확해요] 

토끼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주먹 하나의 거리만 남았다.  

[난 뱀파이어지만 동시에 마타야. 물론 어느 쪽이 더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뱀파이어 쪽인 거 같은데요] 

토끼가 앞발로 송곳니를 가리켰다. 그 제스처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광장을 둘러싼 두려움과 어색함이 왠지 누그러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설혹 그것이 내 착각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웃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편해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주바다 2010-11-3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월의 끝에서 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그 누군가..다른 영혼과 마음이 닿아있다면..그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될듯하네요..상처받기를 두려워한다면 그 위로조차 짐이 되겠지만..

최현진 2010-11-30 17:32   좋아요 0 | URL
여주인공이 새로운 삶을 선택했던 건..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인데 그걸 이제야 하나씩 깨달아가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소설이 아닌 실제도 그렇죠..어떤 계기..어떤 상황..그런 것들로요.
 

 

 

 

[나는 대장이다]
[프릭스들도 집단생활을 해?] 

혹시라도 그가 나를 헤칠까 걱정이 되는지, 고양이로 변한 프릭스가 우리 사이로 들어와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고양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읊조렸다.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모여 있다] 

그가 늑대 특유의 무시무시한 울음 소리를 공중으로 내뱉었다.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광장을 둘러싼 나무들 속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너희들끼리 생활해? 내가 알기론 마타가 있어야 변신이 가능하던데]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딱딱하고 거친 음성은 그들이 여전히 나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곳에 왔어. 너희들과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너희들”이라고 말할 때 강조하듯 천천히 전달했다. 대장뿐만 아니라 무리의 다른 이들도 보고 싶다는 의미를 이해하길 바랬는데,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길고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광장 주변의 숲이 샤샤샥 움직이며 흔들렸다. 나무들의 검은 그림자 속에서 한 마리씩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그들은 얼핏 봐도 10여 마리는 넘는 숫자였고, 작게는 토끼부터 크게는 늑대까지 각양각색이 모여 집단을 이룬 상태였다. 그들은 광장의 반대편에서 늑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겁을 먹은 듯했다. 

[내가 무서워?]
[넌 뱀파이어다.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아..] 

그제야 삼차신경통이 멈추고 송곳니가 솟아올랐음을 알았다. 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능력이 없는 뱀파이어라고 해도 피를 갈구하는 건 똑같으니 달빛에 간간히 송곳니가 들어날 때면 그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당연했다. 

[나는 너희를 해치지 않아] 

내 앞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를 들어 올려 감싸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가볍게 뽀뽀를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옅은 달빛에 비친 두려움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늑대는 몇 걸음 뒤로 가 그들과 나 사이에 자리 잡았다. 앞발을 쭉 뻗어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편하게 자리를 잡자, 다른 이들도 따라했다. 지금 이 광장의 모습은 언젠가 책에서 본 고대 로마의 회의 장소 같아졌다. 발언자가 청중을 바라보며 중앙에 있고, 나머지는 둥글게 포진하여 원의 형태로 기다리며 수군거린다. 단지 청중들이 프릭스들이다보니 그들의 수군거림이 내 머리 속에 직접 전달되어 머리가 멍해진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나 말고 다른 마타를 만나본 적 있어?] 

내 말이 끝나자 그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높아졌다.  

[난 마타를 본 게 처음이에요]
[또 다른 마타가 있었어?] 

파도처럼 밀려갔다 헤일처럼 다가와 나를 한 번씩 건드리고 가는 소리들은 다른 마타라는 존재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당황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가 알아요] 

가늘고 높은 소프라노의 음성이 소음 속에서 똑똑히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더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내 옆으로 돌아온 프릭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너무 시끄러워. 한꺼번에 떠들어]
[그들이 여기 있구나]
[너,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가고 있었던 거야?] 

나는 머리를 지압하듯이 꾹꾹 누르며 말했다. 프릭스는 앞발 한 개를 들어보였다. 

[이 숲 어디 쯤 있겠지 하고 온 거야. 그들이 널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의 대화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전파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내가 들어야할 부분을 찾아내고 가려내는 건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와 겨우 몇 마디 나눈 게 다인데 이제는 오른쪽 이가 들썩거렸다.   

[더는 못가. 내 앞으로 나오라고 해줘] 

광장을 둘러싼 나무들 중 하나에 기대앉았다. 무거운 머리를 단단한 나무에 붙인 후, 프릭스에게 부르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광장 중앙으로 걸어가 소리를 크게 내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그는 쉬지 않고 불렀다. 야옹 거리는 소리가 다지만, 작게, 크게, 길게, 짧게 변형하며 끊임없이 광장 구석구석에 다다를 수 있도록 고개를 돌렸다.  

광장은 넝쿨들이 서로를 의지해 나무와 나무를 연결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빛은 그들의 작은 틈을 뚫고 들어와 바닥에 점을 수십 개, 수 만개씩 그리며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밝음을 만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걸어오던 길목처럼 회색의 숲이라는 말에 걸맞게 여전히 어두웠다. 빛도 이기지 못하는 어둠. 그것이 이 숲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프릭스들은 이런 칙칙하고 외로운 곳에 모여 있을까? 나의 프릭스처럼 함께 살지 않고..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를 “나의 프릭스”로 취급한다는 걸 깨닫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음 안에 마치 방이 여러 개 있어서 그도 사랑하고, 스승님도 사랑하고 있다는..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시작된 웃음은 다른 프릭스를 부르는 그의 소리에 맞춰 메아리쳤다. 그가 소리를 멈추지 않은 채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여전히 웃느라 그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내 머리 속으로 그들의 질문이 들어와 손을 흔들자, 프릭스가 야옹 소리를 멈췄다. 나는 그제야 웃음을 누구러트렸다.   

[마타가 왔어. 너희 모습을 보여줘] 

그의 말이 끝나자 조용하던 광장에 여러 가지 잡음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나무를 건드리며 부르르 떠는 소리, 자박자박 밟는 소리, 서로의 몸이 부딪혀 만들어지는 소리 등이 귓가에 뱅그르르 돌았다. 하나, 둘, 셋..나는 눈을 감고 그들의 무리를 느껴보려 했지만, 광장을 가득 채운 소음들이 점점 커져 손으로 귀를 막았다.  

[조금만 참아] 

프릭스의 따뜻한 앞 발이 내 다리에 닿으며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잠시 동안 최고조를 향해 올라가던 소리들이 드디어 조금씩 낮아지고 줄어들면서 마침내 고요해졌다. 귀에 올렸던 손을 살짝 떼고 확인해도 더 이상 소음은 없었다. 그저 약하게 노래하는 벌레들의 합창 정도다. 그 때 어둠 속에서 광장 중앙으로 회색 늑대가 걸어 나왔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하고 민첩하게 내 앞까지 와 멈쳤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마타인가?]  

그의 낮고 거친 음성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근처에 있어?]
[응. 숲으로 좀 들어가면..]
[안내해줘.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 

내 말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닥 내키지 않는 표정이지만, 내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말하자, 한숨을 쉬며 고양이로 변했다. 그는 창문을 넘어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는 몇 발 앞서가다가 나를 힐끔 돌아본 후, 집 뒤쪽으로 연결된 회색빛 숲 속으로 들어갔다. 봄이지만 밤의 숲은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종종 지나가 얇은 가디건 속으로 추위를 몰아넣었다. 팔을 비비며 그를 따라가자니 마타가 아니었다면 뱀파이어로서 부족하고 장애가 있다는 걸 이해받을 수 있는 변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이 약하고, 삼차신경통이 있으며, 피를 입으로 마셔야한다는 사실에 마침내 면죄부를 줄 근거가 생겼건만, 기분은 사형대에 끌려가는 죄수 같았다. 뱀파이어가 될 때는 내 의지가 있었으나, 그 이후로 모든 것들이 나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보는 일 없이 주어지고 당했으니 그렇다. 

[널 인형으로 취급하지 않을게, 약속할 수 있어] 

작고 약한 목소리로 앞서가는 프릭스에게 말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생각을 보내왔다.  

[괜찮아. 너를 마타로 받아들일 때,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기로 결심했어. 죽어야한다면..그것도 할 거야]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님에 대한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마음에 미묘한 무언가가 쌓이고 있다. 단순히 그가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려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와 있을 때는 내가 어른으로써 뭔가를 결정하고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사람을 놓고 저울질 하는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못났다. 고개가 바닥으로 수그려지며, 눈물이 조금씩 솟아올랐다. 

[그런 생각 하지 마] 

프릭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전히 앞서가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들을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미안. 마음을 열어놓고 있으면 너의 생각들이 쏟아져들어와]
[앞으로는 귀 좀 막아. 들어도 아는 척 하지마] 

나뭇잎을 발로 차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는 대답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회색빛 숲으로 들어온 이래, 빛은 손바닥만 한 점을 만드는 정도로만 바닥을 비쳐주었다. 커다란 나무들과 그들의 덩굴이 하늘을 얼기설기 엮어, 보름달의 정취도, 눈부신 빛도 숲을 이길 수 없었다. 그 안에는 밤에 움직이는 생물들의 기묘한 소리와 내가 밟은 나뭇잎들의 부셔지고 망가지는 울림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딘가 있을 을씨년스럽고, 싸늘한 공동묘지같아, 깊이 들어갈수록 발걸음이 느려졌다.  

[누구?]
[누구지?]
[넌 누구야?] 

탁 트인 광장에 들어섰을 때, 머릿속으로 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지러운 메아리들 때문인지, 삼차신경통이 더욱 거세져 눈 위쪽 부분을 망치로 두들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곧 해가 뜰 텐데..왜 여기 있니?]

예전 집에 비하면 정원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초라한 풀 밭 위에 앉아 있는데 스승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고개만 뒤로 젖혔다.

[그냥요]
[복잡한 기분일 때는 다 잊어버리고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렴]

옆으로 다가와 내려다보고 계시는 스승님의 손을 살짝 잡았다. 여느 때처럼 차갑지만, 나와 같은 체온이라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제가 좋아하는 일? 뭐든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손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스승님은 잠시 비틀거리다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넓고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스승님의 손이 긴 머리카락들 사이로 들어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게 느껴져 눈을 감았다. 

[제가..마타래요]

스승님은 그 말을 듣기 전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쓰다듬었다. 강철같이 딱딱한 품인데도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알고 계셨죠?]

대답은 없지만 나는 되묻지 않았다.

[힘드니?]

몸으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도망갈까?]
[정말요?]
[니가 원하면..]
[그래도 프릭스와 마음이 연결되어 있어요. 어디에 있는지가 이젠 중요하지 않아요]
[나와 함께하면 너는 뱀파이어로써 강해질 수 있다. 네가 원하면 마타라는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을만큼]
[그게..무슨 뜻이에요?]

스승님의 손이 내 가슴 위에 부드럽게 닿았다. 그의 차가운 입술이 내 귀와 목을 간질였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는 손길에 이 행동들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스승님의 대답에 목 뒤가 서늘해졌다. 프릭스와 난, 마음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결된 운명이라 생각했는데 그 사슬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스승님의 여자가 된다는 건 프릭스의 맹세를 들은 것 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넌 특별하기 때문에 완전한 뱀파이어가 될 수 없었던 거니까 이젠 자신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스승님의 가슴을 때렸다. 통나무를 주먹으로 치는 느낌이라 과연 그가 아픔을 느낄까 싶었는데, 그는 슬픈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마타가 되고 싶다면 놓아줄 수 있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정말 모르세요?]

스승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내 깊은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사람처럼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의 미래를 내게 맞쳐달라고 할 순 없다]
[겁쟁이]
[그래, 나는 겁쟁이지]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햇살이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먼저 일어나 등을 돌렸다. 2층 창문에서 프릭스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올려다보지 않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

잠을 설친데다가 삼차신경통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주방 탁자에 엎드렸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줌마는 혈액이 담긴 잔을 내 앞에 내려놓고는, 할 말이 있는데 꺼내기가 거북한 사람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손님방에 묶으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마타였어요]
[정말요?]
 

나는 기절할 만큼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줌마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연히 들었어요]
[그 여자분..혹시 스승님과 연관된 분인가요?]
[그 부분은 직접 들으세요. 다만 그 분이 사라진 후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시는 걸 처음 봤어요]

그 말뜻을 이해하자 입 안의 침이 몽땅 사라졌다. 입술이 쩍쩍 갈라지는 듯 한 느낌이라 혀로 문질러보지만 덜덜거리는 자동차처럼 상태가 안 좋다. 지금 내가 놀란 게 또 다른 마타 때문인지, 아니면 스승님의 과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맞은 듯 한 느낌은 기분 나쁘다. 머리를 감싸 쥐면서 얼굴을 찡그리자 아줌마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만, 누구를 선택하시든 남는 분에 대해 죄책감은 가지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나는 그녀의 안쓰러운 표정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삼차신경통 때문에 밥 생각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을 나왔다. 내 방으로 올라가려다가 프릭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떠올라 그가 묶고 있는 손님방으로 걸어갔다.

[마타가 뭘 할 수 있니?]
[자세히는 몰라. 내가 아는 건 프릭스를 제어할 수 있다는 정도]
[제어?]
[맹세를 한 순간부터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일종의 인형이랄까. 네가 요청하는 걸 몸에 담아 행동하는 인형]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라고 하면 그것도 해?]
[너무 극단적인데..아마 하겠지. 그런 것도 가능한지 물어볼게]
[누구한데?]
[다른 프릭스들]
[아...]

그가 말했던 다른 프릭스들이 머릿속에서 기억났다. 그리고 스승님이 그들과 텔레파시가 가능하냐고 물어보신 것도. 아무래도 그들을 만나봐야 의문점이 완전히 풀릴 가능성이 생기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