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음에 남아 있잖아요] 

내 말에는 어떤 가시도 돗혀있지 않지만, 스승님은 내 얼굴을 잠시 살피셨다. 무엇을 찾는 걸까? 나는 이 순간 어떤 얼굴로 스승님을 대하고 있는지 거울을 보고 싶다. 

[너 질투하냐?]
[네? 그게 아니라..]
[다왔다. 내리자] 

내가 반론을 막 제기하려는데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스승님은 조수석으로 다가와 문을 열어주시며 내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내리도록 손을 잡았다.  

[숄을 가져가야할까요? 뭔가 좀 부족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차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모든 게 낮설고 처음 같아 백은 어떻게 들어야할지, 어느 발부터 내밀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정쩡한 포즈로 숄을 꺼낼까말까 망설이는데 스승님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자신의 몸 쪽으로 잡아다녔다. 살짝 그의 몸에 내 가슴이 닿을만큼 가까워지자 그는 나머지 손으로 문을 밀어 닫았다. 숨을 들이킬 때, 그가 바른 에프터쉐이브의 향이 함께 들어와 침을 꿀꺽 삼켰다.  

[넌 매우 아름다워. 숄 같은 건 잊어버려] 

귀에 속삭이듯 들어오는 말에 전율같은 소름이 발끝부터 밀려들었다.  

[오랜만이군] 

귀에 기분 나쁘게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다. 우리차 너머에는 나보다 훨씬  아름다운 미녀를 꿰어찬 40대의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쇠가 갈리는 느낌을 동반하고 있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청신경이 쨍쨍 울렀다. 스승님이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남자는 미녀와 함께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의 낮선 눈이 나를 훑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취향이 바뀐거 같군] 

그는 내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살짝 입술을 댔다. 허리에 감은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의 인사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낮선 뱀파어의 눈은 나를 먹이감으로 보는 것처럼 붉은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그는 잠시 동안 내 눈을 바라보다가 스승님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그레고리, 늦겠어요] 

금발의 미녀가 속삭였다.  

[모두 변하기 마련이니까. 만나서 반가웠어] 

스승님은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차갑고 간단하게 말한 뒤 나를 이끌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그레고리..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누구에요?]
[과거에 좀 알았던 인물] 

굳어진 얼굴 표정으로 보아 더 물어봤자 마음에 들게 대답할 것 같지 않아 작게 한숨을 쉬고 발길을 재촉했다. 주차장은 건물 옆에 붙어 있는데 차를 100대 넘게 주차시킬 수 있을 만큼 커서 깜짝 놀랐다. 실재로도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벌써 83대였다. 주차장이 이정도 규모면 다른 곳은 더 굉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쯤 걸어가자 경계선 위에 마련되있는 문에 눈같이 흰 백합과 커다란 카라들로 장식된 아치가 서 있었다. 밤이건만 그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향기는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어떻게 꼬이고 엉켜 멋진 모습을 보이는 건지 눈으로 따라가다보니 바닥의 경계선 지점이 튀어 올라와 있는 걸 미처 보지 못해 발을 찧을뻔 했다. 

[고맙습니다] 

내 발에 불상사가 생길 찰나에 나를 끌어당겨주신 스승님께 웅얼웅얼 인사를 하면서 몸을 떼고 아치를 붙잡았다. 발끝을 덮고 있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경계선을 넘어 풀밭 위에 올라섰다. 스승님이 내민 손을 잡고 풀밭을 걸어가면서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길목마다 서 있는 고전적인 등불이 옅은 주황색으로 빛나며 코를 중심으로 음영을 만들어주니 미술시간에 본 그리스 인물 조각같다. 손으로 내 코를 슬쩍 건드려보았다. 확인해볼 것 없이 상당히 낮고 뭉특하다. 뱀파이어가 되고자 결심했을 때 가장 원했던 게 바로 오똑한 코를 갖게 되는 일이었는데 결국 똑같은 외모이고 보니 스승님을 올려다볼 때면 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 왔다] 

스승님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며 나를 내려다보셨다. 눈이 마주치자 창피함이 수면으로 떠올라 입술을 뽀족하게 말았다. 그런 내 모습에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우리 뒤에서 출입문으로 들어가고자 기다리는 다른 커플들 때문에 결국 입을 열지 않으셨다. 

[와...] 

촌스러워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키의 두 배쯤 되는 출입문을 지나자 내 삶에서 본 중 제일 큰 홀과 마주쳤다. 천장도 그 위용이 엄청났다. 출입문을 3개 이상 쌓아올려도 닿지 못할 높이에 반원형의 천장이 덮혀 있는데, 빼곡히 물방울 샹들리에가 긴 줄에 매달려 있어 살짝 살짝 흔들리며 반짝거린다. 벽면에는 이 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알 수 없게 그리스풍 조각들이 부조로 웅장하게 세겨져있어 하나하나 신경써서 보려면 아마 목이 빠질 것이다. 과연 정부 관료의 칵테일 파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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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맘때는 내가 어떤 결정을 할 필요가 없이 먹으랄 때 먹고, 공부하랄 때 책만 파면되니 책임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스스로 결정하고 내 행동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한다. 토끼였던 에스더를 두 번째로 내 영향력 아래에 두고보니, 그 책임이라는 말이 묵직하게 가슴에 자리를 잡아버려 그녀가 집단에서 쫏겨날 경우의 거취 문제가 내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와!] 

창문가에 앉아 내가 조금씩 파티에 갈 준비를 하는 걸 지켜본 프릭스들이 감탄한다. 뭐, 나도 꾸미면 그렇게까지 못난이는 아니니까 그런 반응에 내심 기분이 나아졌다. 

[조금 더 아이세도우를 바를까? 어때?] 

말 없이 방글거리는 에스더에게 물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해요. 제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마타님이에요. 숄만 하나 가져가시면 딱이에요] 

혼자 준비하던 걸 그녀가 하나하나 코치해줘 오히려 빨리 준비가 끝났다. 그들은 뱀파이어의 파티가 매우 궁금한지 따라가고 싶은 눈치지만, 그곳에 누가 올지 알 수 없어 모른척했다. 하지만 나도 속으로는 들뜬 기분이었다. 스승님과 함께 산 이래로 정부 관료가 주최하는 칵테일 파티는 가본 적이 없어 무지 궁금하다.  

[나 그만 내려갈게]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백과 숄을 들고 문을 열었다. 그들의 작은 목소리가 재미있게 놀다오라고   응원을 보내왔다. 

 


[제가 실수하면 어떻하죠?]
[내가 옆에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BMW를 운전하는 스승님 옆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우리는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청력이 있어서 그 역시 숨 소리 정도의 크기로 대답했다. 

[그 여자분과 가지 그러셨어요?]
[누구?]
[주민자치센터의 안내양말이에요]
[아...제이]
[그 여자분 이름이 제이에요? 이름을 알 정도면 아주 친하신가봐요?]
[음..뭐..그럭저럭] 

대답이 애매해 기분이 나빠졌다.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산데다가 상당히 매력적이니 친한 여자가 있겠지만, 특히나 그렇게 섹시함을 온 몸에서 폴폴 풍기는 이성이 옆에 있다면 곤란하다.  

[왜 그여자분과 같이 안갔어요?]
[제이가 다른 사람과 가니까]
[역시..그런 거였군요]
[농담이야. 처음부터 너와 갈 생각이었어] 

나를 힐끔 쳐다보는 표정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그 어처구니없는 말 한 마디에 가슴이 곤두박질치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게 화가났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자와 내가 비교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걱정이 앞섰다. 

[제이는 그냥 친구야. 아주 오래되서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그런 사이] 

내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앞만 바라보자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신다.  

[손님방에 묶었던 분은요? 그분도 친구였나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질문이 끝날 무렵, 핸들을 죈 스승님의 손에 힘이 들어가 손 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1분 정도 정적이 흐른 후, 아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파티장까지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온다. 스승님의 운전 솜씨야 매우 훌륭해 조수석이 불편하지는 않지만, 차 안의 묵직한 공기가 나를 눌러 빨리 내리고 싶었다. 손님방의 여자에 대해 말을 꺼내지 말껄..하는 후회가 머리 속에서 맴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모두 과거다. 지나간건 신경쓰지 말아라. 써니는..다시 볼 일 없는 여자야] 

써니..태양처럼 눈부신 여자일까? 지금도 기억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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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스더에요. 들어가도 되나요?] 

10여분 쯤 후에, 열린 창문가에서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 색으로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라고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저녁이 되자마자 왔었는데 안 계셔서..다시 왔어요]
[아..그랬구나] 

수줍은 듯 침대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은 에스더는 빨간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방해하는 건 아니죠?]
[전혀 아니야. 와줘서 굉장히 기뻐] 

토끼였을 때보다 더 하얗고 탐스런 피부가 붉게 물들며 고개를 숙이는 게 귀여워 살짝 껴안았다.  

[이젠 혼자 변신하는 구나]
[아니에요. 아까는 토끼였는데..갑자기 이렇게 되버렸어요]
[그래? 언제쯤?]
[음음..2시간 전인가..그 쯤이요] 

아마 내가 도로에서 사라저버린 과거와 대면하고 있을 때인 것 같다. 나의 격한 감정이 프릭스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틀림없다.  

[고양이도 변했겠다]
[네. 우리 둘이 이야기 하고 있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는 어디있어?]
[대장에게 할 말이 있다고 남았어요] 

앞으로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위험한 상황에 부딛혔을 때 프릭스들이 나 때문에 갑자기 사람으로 변한다면 죽음 앞에서 무방비 상태가 될테니까. 내가 마타로서의 삶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들은 내 책임이고 한편으로 내 식구이다. 스승님과 아줌마처럼. 

[대장님이 화가 났어요]
[왜?]
[제가 회의를 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해서요]
[넌 선택할 자격이 있잖아]
[우리는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고, 지금도 전 그 곳에 속해있어요.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활동 이외에는 회의를 거쳐 결정해야 하는데, 제가 규율을 어겼으니까요. 대장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한거에요] 

[그가 하지 말라고 했니?] 

에스더가 내 뜻을 받아들이기 전에 뒤돌아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 특별히 들려오는 반대의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자리가 워낙 시끄러워 정확히 기억하는 게 아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어요. 그건 유보라는 뜻이에요]
[유보라..넌 왜 회의를 하지 않고 바로 결정했어?]
[절 믿어주시는 걸 느껴서요]
[나는 니가 생각하는 것 만큼 강하거나 능력이 대단하지 않아. 대장은 그걸 안 거지] 

에스더의 따뜻한 손이 내 손 위에 올라왔다. 그녀의 눈은 이 이상더 커질 수 없다고 할 만큼 동그랗게 떠진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녀팬이 스타를 바라보는 열망 어린 눈이었다.  

[대장님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마타님이 이 만큼을 살아오실 동안에 마주치셨을 위험한 순간들을 모두 이겨내신 걸 보면 누구보다 강해요. 게다가 뱀파이어의 피도 흐르니 불멸이잖아요] 

불멸.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생명. 뱀파이어가 아닌 모든 생물들은 우리를 그렇게 안다. 사실과 진실은 다를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나 내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서약한 종이에는 뱀파이어의 진실에 대해 다른 종에게 알려서는 안된다고 했었다. 그것을 깨면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종족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눈은 열광적으로 믿고 있다고 말하니 서약서가 없더라도 굳이 진실을 말해 그녀를 기운 빠지게 하고 싶지 않다.  

[설마 너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건 아니지?]
[될 수 있다면..토끼보다는 백배 좋죠] 

그녀의 미소는 농담반 진담반이라고 알려주지만, 마음 한 구석은 자신의 나약하고 유한한 목숨이 가슴 아픈 듯하다.  

[혹시 집단에서 쫏겨나는 거 아니니?]
[글쎄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제가 처음이니까요]
[그래, 어떻게 결론 나는지 꼭 알려줘] 

나는 스승님이 가져다 둔 파카글라스를 침대 옆 탁자에서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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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피부가 나보다 더 좋은데..말이 안되잖아요]
[이정도면 나도 많이 늙은 거야] 

새벽이 아침으로 바뀌어가는 걸 몸이 아는지 점점 눈이 무거워졌다.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꾹 눌러가며 몽롱한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스승님은 내가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셨다. 

[가족들이 그리우세요?]
[응. 뱀파이어가 되었어도 인간이었을 때를 완전히 잊는 건 아니니까. 난 아직도 어머니의 부드러운 입술을 기억하는 걸]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머릿속에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며 웃던 얼굴과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의 부드러운 손길도. 스승님의 어깨가 베게 같아서일까, 눈 앞에 붉고 검은 장막이 서서히 떠오르며 참고 참았던 졸음이 다가왔다.  

-----------


밤이 되어 눈이 자동적으로 떠지자마자 집을 나섰다. 밤바람이 쌀쌀할 것 같아 들고 온 망토 모양의 가디건을 단단히 고쳐 매고 길거리를 뛰어갔다. 내 기억으로 이 길을 1시간쯤 달리면 목적지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 이렇게 무작정 가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보지 않으면 살아가는 내내 후회할 것이다. 나는 영원한 세계 속에 있지만 그들은 곧 죽을 테니까.  

오래전에 졸업한 초등학교 앞에 도착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내가 걸어가는 길을 둘러보았다. 다국적 기업이 장악해버린 코비 편의점이 골목마다 있고, 각종 3D 게임을 할 수 있는 감각 휴게방이 24시간 영업 중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을 보자니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처럼 그들도 어딘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거나 나를 잊었을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내가 뱀파이어가 되던 그 순간부터 그들의 시간과 내 시간이 달라졌을 테니 무작정 그들을 보러가는 게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처음에 빠르게 달려가던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 이제는 유치원 아이들의 속도로 골목길을 걸어간다. 예상했던 대로 1000원짜리 만두 가게는 사라졌고, 내가 알던 조립식 주택들도 남은 게 없다. 넓어진 도로와 예쁜 정원을 가진 집들이 가득하고 경찰서와 주민자치센터가 들어섰다. 우리 집이 있던 골목도 사라졌다. 그 골목을 돌아가면 낡았지만 단아했던 2층집이 첫 번째로 있었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 옆에 있던 우리 집도 사라졌다. 나는 골목이 있었던 자리에 멍청히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후들거리다가 끝내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껌뻑거리며 입술을 축였다. 내가 기대한 것이 무엇이든 과거가 사라졌다. 스승님의 말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때가 마침내 온 것이다.  

후두둑. 눈물이 갑자기 떨어진다.  

[바보같이..] 

마음속으로는 이 보다 더한 욕이 떠오르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삶을 선택한 순간 나는 그들을 잊었건만, 이렇게 내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이 진짜로 없음을 체감하는 게 이상하게 고통스럽다. 머리로는 다 아는데, 울렁증이 생길 정도로 아프다. 아침을 굶어 뱉어낼 것도 없는 위가 계속 조여들었다. 바닥에 몸을 구부리고 누웠다. 아픈 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검고 커다란 형체들로 이루어진 도로 위의 집들을 눈에 담았다.

---------

[주말에 나와 함께 파티에 가야하니까 준비해라]
[파티요? 어떤 파티인데요? 누구 생일인가]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는데 스승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내가 어디에 갔다 왔는지 아무것도 물으시지 않는 게 고마워서 미소지었다.  

[정부 관료가 여는 칵테일 파티인데, 일 때문에 가는 거야.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자리니까 부탁한다] 

스승님은 여느 때처럼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시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옷이랑 구두 같은 거 사게 돈 주실 거죠?]
[카드로 해라]
[에이~현금 쓰면 덤으로 얻는 게 많은데..치이] 

입을 쭉 내밀고 징징거리자 스승님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건내주었다. 현금이든 카드든 알아서 쓰라는 의미다. 지갑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스승님의 말이 들렸다.

[돌아와서 고맙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아는 걸까? 물어보고 싶어도 문을 열고 나가는 뒷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 곧 방 안에는 나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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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과거의 일로 마음이 많이 아프고, 마타라는 존재를 미워할지도 모르지만, 니가 승낙한다면, 나는 너의 맹세를 듣고 싶어. 너와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는데..나에게 올래?] 

좀 전에 토끼의 고백을 들었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었다. 일전에 맹세를 받을 때, 나와 함께하게 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 용기를 내 제안했다. 내 말이 끝나자 광장 안은 무중력 상태처럼 변했다. 시간마저도 사라진 듯 얼어붙었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피부로 느꼈지만 토끼만 응시하며 반응을 기다렸다. 천년이 지난 듯 한 기분이 들 무렵, 토끼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격해지는 감정이 공기를 타고 다가와 부딪히자 내 몸도 조금씩 흔들렸다. 토끼는 뒤로 돌아 여전히 멍한 표정의 석고상들을 둘러보았다. 잠깐 머리를 들었던 늑대가 앞발에 고개를 묻었다. 토끼는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바르게 세웠다. 

[나의 주인, 나의 목숨. 당신은 내 영혼의 마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내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토끼가 말을 마친 후 내 앞으로 다가와 손등에 코를 문질렀다. 그러자 나 역시도 뭔지 모를 격한 감정이 발끝부터 밀려와 덥석 안아버렸다. 부드러운 털에 코를 박자마자 토끼가 사람으로 변했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지닌 여자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아름답고 눈부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 감촉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손 안에서 춤을 추며 부드럽게 움직였고, 그 아래엔 길고 하얀 속눈썹과 동그란 눈이 촉촉한 눈물에 젖어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게다가 어린 시절에 잠시 가져봤던 바비 인형의 향수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참 아이러니 한 건, 이 순간 그녀의 피가 먹고 싶어졌다. 내 송곳니가 간질간질해지며 그녀의 가늘고 어여쁜 목이 확대되어 보인다. 입술이 본능을 따라 조금씩 벌어졌다.  

[드시고 싶으세요?] 

그녀의 눈이 내 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알았구나]
[뱀파이어니까 당연하죠. 드셔도 되요]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척 아플걸 알면서도 나를 위해 희생을 하겠다는 그 마음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책임감도 솟아올랐다. 나를 허기지게 만드는 본능을 잊기 위해 간신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광장 반대편에 모여 있는 프릭스들이 우리의 대화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좀 있으면 해가 뜰 거야. 집으로 돌아가야되] 

고양이 상태의 프릭스가 생각을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토끼를 향해 말했다. 

[저녁 때 우리 집으로 와]
[네] 

간단하게 대답한 그녀는 다시 토끼로 변해 내 품을 벗어났다. 그만 돌아가라는 표시로 손을 흔들자, 웅성거리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힐끔거리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마타이기 전에 뱀파이어야. 너희들을 갑자기 해칠 수도 있고, 피를 빨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최대한 노력해서 너희들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옅은 주황색이 섞인 미세한 새벽빛이 바닥에 조금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다시 앞장을 서 회색의 숲속 길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몇 발자국 걸었을 때,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에스더에요]

-----------


[너는 관계를 두려워 해]
[내가?]
[너의 곁에 있은 후로 단 한 번도 니가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듣지 못했어] 

가디건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숲길을 되돌아올 동안에 프릭스는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예리함에 놀라며, 조용히 경청했다. 

[너의 스승님, 아줌마 그리고 나, 아니 이 세상의 너를 뺀 모든 생물들은 모습만 있을 뿐, 의미가 없어. 아까 네가 한 말이 진심이 되려면 마음을 열어야되]
[이름이..그렇게 중요해?]
[꼭 이름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네가 안아준 토끼도 에스더라는 자신만의 이름을 너에게 말했잖아. 니가 그걸 부르지 않으면 에스더는 저 숲 어딘가 있는 수많은 토끼들과 똑같아져] 

집에 도착해 안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 그는 나를 남겨두고 다시 숲으로 돌아갔다. 창문으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사람이었을 때, 소중한 이들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쩌면 그건 형제들 사이에 흔히 생길 수 있는 일들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그 기억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혹시라도 또다시 상처 받지 않을까... 


-------------

뱀파이어들은 보통 새벽빛이 올라올 무렵에는 잠자리에 든다. 계속 깨어 있다 보면 체력 소모가 엄청나 정작 밤이 되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몇몇의 뱀파이어들만이 낮에도 밤처럼 빛을 피해 돌아다니는데, 내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지친 나와는 다르게 스승님은 활기찬 모습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건너편에 앉아 말없이 바라보았다. 프릭스의 말처럼, 나는 단 한 번도 스승님의 진짜 이름을 볼러본 적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슨 할 말 있니?] 

핸드폰을 탁자에 놓으며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의 눈이 엄마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요. 그냥..옆에 있으려고요] 

스승님은 탁자를 돌아와 옆 자리에 앉았다. 크고 강한 팔로 부드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스승님은 가족이 있었나요?]
[가족?]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있었지]
[누구누구요?]
[부모님과 동생 둘 셋 정도..아니 더 있었나?]
[에이..몇 십명도 아니고 겨우 두세 명을 정확히 모르다니..] 

농담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승님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그는 진심으로 아픈 척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는 남자들이 정식 부인 이외에 다른 부인을 여럿 두는 게 당연했거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형제만 스무 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어]
[와~고대 이집트에서 살기라도 하신거에요?] 

대답은 없지만 표정이 상당히 진지했다. 순간 진짜 이집트에 살았던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승님은 몇 천 년도 더 된 뱀파이어일 것이다. 나는 그의 팔을 살짝 꼬집어보았다.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한 도토리묵 같은 게 너무 완벽해 정말 그만큼을 살았나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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