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마을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후배는 선비의 낙향이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고향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심정일 뿐이다. 35살이 넘어가는데도 실패만 되풀이하는 도시의 삶에 지친 어느 날, 꿈속에서 어린 시절을 본 후 갑작스럽게 결정하고 움직였다. 지렁이보다도 굼뜬 내가 이렇게 과감한 결단을 몇 번이나 해보았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토리묵 장수가 지나갈 테니 출출하면 기다려보시게]

  저녁 해가 질 무렵이 되서야 동네 산책을 마치고 천천히 돌아오는데 옆집 청산 할매가 한마디 하셨다. 

[그런 장수는 겨울에 다니지 않나요?]
[여긴 계절 안 따져]

  청산 할매는 10남매를 낳았다. 그 중 5명만이 살아남아 장성한 후 모두 도시로 보내 이제는 혼자 사신다. 연세가 80이 넘고 허리가 호미처럼 굽었는데도 열심히 밭농사를 지으신다. 지금도 고추가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두꺼운 철사를 묶어주시던 참이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얼굴이 빨간 게 술 한잔 한 것 같은데..]

  눈썰미도 좋으시다. 슬리퍼 끌리는 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리셨던 게 단데..나는 인사를 한 뒤 몇 걸음 더 걸어가 마당에 들어섰다. 본래 이 집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으로 된 재산이다. 시가로 천만 원도 안 되는 낡은 집이다보니 어느 형제도 들어와 살기를 마다하였다. 덕분에 몇 달 간 비어있어 방문을 연 순간 빈 집 냄새가 밀려왔다. 첫날은 오전 내내 쓸고 닦아 그럭저럭 내 몸 누일 방 한 칸을 정리하고 나서야 바닥에 푹 퍼졌던 일이 기억난다.    

  찬 물에 식은 밥을 말아 훌훌 떠 넣은 후 대청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다 져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문득 정말 도토리묵 장수가 올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은 5월이 다 되가는 봄인데 과연 누구에게 묵을 팔겠다고 무거운 짐을 지고 나타나겠냐 싶다. 할매 역시 웃으셨던게 기억난다. 농담이었구나..라고 결론을 지으며 배게로 삼기에 적당해 보이는 책을 들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한 때는 그렇게나 목매던 놈이 베게 신세라니..삶이란 참 알 수 없다.

[도토리묵~도토리묵~]

  시원한 바람에 나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묵이라는 단어를 다시 확인한 순간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묵 좀 봅시다!]

  나는 얼른 슬리퍼를 꿰어 차고 마당 밖으로 나갔다. 헐레벌떡 뛰어가면서 큰 소리로 부르니 산길로 들어서던 장수는 그제야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지만 생각보다 젊고 다부진 체격이다. 그는 가로, 세로 50센티 정도의 나무통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숙였던 뺨에 시원한 기운이 닿는다. 보기와는 달리 성능 좋은 냉장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드릴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을 꺼내 즉석에서 자른다. 통 안에는 도토리묵이 통째로 층층이 쌓여 작은 충격에도 탱글탱글 거리며 좌우로 흔들렸다.

[이런 밤에 묵을 파시다니 신기하네요]
[오늘은 산신제가 있어서 밤 장사를 나왔소. 대량으로 만드느라 오후 내내 애 좀 먹었지]
[직접 다 만드셨나요?]
[묵은 손으로 해야지 정성이 들어가는 법이요. 손님이 안 불렀으면 내 벌써 고개를 넘었을 것을..이러다 늦겠구먼..]

  그는 손목시계를 본 후 말을 멈추었다. 오른 손으로 반듯하게 잘린 도토리묵을 비닐에 담는다. 남은 왼손으로 내 손을 잡아끌더니 묵을 올려주었다. 아기의 뺨처럼 부드러운 감촉에 부셔질까봐 재빨리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정성이 들어간 것이니 버리지 말고 다 드시구려] 

  그는 내 윗옷 주머니에서 머리를 내 밀고 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쓱 뽑아 들고 가버렸다. 참으로 걸음도 잽싸다며 감탄을 하고 있다가 청산 할매랑 나누어 먹으려고 조심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집에 들러 쟁반에 받쳐갈 생각도 못한 채 그냥 걸어갔다. 두 손을 배 앞 쪽으로 모아 도토리묵을 고이 받치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내딛었다.

[할매, 묵 좀 드셔보세요]

  청산 할매는 주방에서 쟁반과 젓가락, 칼을 들고 왔다. 듬성듬성 자른 묵은 언뜻 보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블록 같다. 이 봄 밤에 먹는 묵 맛이 어떨까하는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나름대로 고소하네요]

  청산 할매도 묵을 입에 넣고는 그 맛을 음미하듯 오물오물 천천히 씹었다.   

[산신제가 뭔가요? 아까 묵 장수가 그 말을 하던데..]
[저 고개를 넘으면 사당이 하나 있어. 거기서 농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산신께 지내는 제사지]

  말씀 도중에 갑자기 수를 세듯 손가락을 꼽으신다.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나에게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런 날 늦게까지 집 밖에 있으면 귀신 만나]

  우리 집이 바로 옆이라 몇 걸음만 가면 되건만 배도 부르고 호기심이 생겨 나온 김에 산신제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잽싸게 가버리던 도토리묵 장수의 뒷모습을 기억해내며 한 밤의 산속 길을 걸어가자니 기분이 묘하다. 시골은 밤이면 칠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둡고 수 십, 수 만 가지의 소리들이 사방에서 다가온다. 인적이 없는 산길에 나만이 홀로 있다고 느끼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것은 비단 겁쟁이 여서가 아니라 우주처럼 크게 다가오는 자연 때문이다.   


  느릿느릿 천천히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가자니 작지만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의 음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음색이다.

[여긴 뭐 하러 왔소?]

  그 음을 따라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선 순간 말소리가 들렸다. 기척도 없이 옆에 서 있는 도토리묵 장수를 보고는 야단맞는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산신제 구경을 하려고..]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본 후 말없이 걸어갔다. 따라와도 좋다는 허락으로 생각하며 나는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확실히 그는 움직임이 빠르다. 이 끝없는 어둠에서 눈이 얼마나 좋으면 저리 성큼성큼 갈까 싶어 혹여 놓칠까 조바심을 치며 뛰다시피 걸었다.

[소리 내지 말고 보구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은 오면 큰일 나거든]

  그는 나무 밑을 가리키더니 곧바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를 찾는 걸 포기하고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양 팔로 감싼 뒤에 턱을 기댔다. 눈으로 건너편의 풍경을 쫓기 시작하면서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 뽀얀 느낌으로 사물이 보인다. 왠지 모르게 현실의 감각이 사라져간다.  

 
  건너편 위쪽으로는 빨강, 파랑, 노랑의 긴 끈들이 나뭇가지에 매여 늘어진 채로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는 저항하듯 간간히 자신의 몸을 털어 나뭇잎을 뿌린다. 그 앞에는 여러 가지 제사 음식들이 놓인 상이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뒤편에는 엄청나게 많은 묵이 쌓여 있어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이건 마치 묵 파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토리묵 장수의 가방에 정말 저 양이 다 들어있었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박여도 분명 4-5단 높이의 묵들이 여러 접시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면 탱글탱글 흔들렸다. 살짝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리다 다시 왼쪽으로 기우뚱.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균형을 잡으니 신기하다. 이런 종류의 상차림은 나에게나 놀라운 것인지, 건너편의 사람들은 묵을 처다 보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한 참을 구경하는데 화려하게 차려입은 무당이 정면으로 걸어왔다. 세 번의 합장 후에 무당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옆에서는 처음 보는 노인 양반이 초를 들고 나무 주변을 돈다. 바람이 내게로 불어와 아릿한 향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독경을 읊고 절을 하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였다. 사람이란 비슷한 말들을 계속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오는 법이다. 꾸벅꾸벅 졸다가 몸이 앞으로 수그러져 머리를 땅에 박았다. 다행이 풀이 가득하여 다치지는 않았지만 잠은 확실하게 깨버렸다. 얼른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아까 본 이들 대신 낡은 한복을 입은 아낙만이 게걸스럽게 묵을 먹고 있다.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입에 넣으니 보는 내가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든다. 하여 나도 모르게 일어나 다가갔다. 내 슬리퍼 소리가 조용한 산에 울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입에 묵을 넣는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빨리 먹는다. 나를 째려보는 기세가 더 다가갔다가는 화를 내지 싶다.

[천천히 드세요..체하겠어요]

  처음에는 아랑곳 하지 않더니, 한 접시를 다 먹은 후에야 그녀는 내게 먹어보라는 듯이 다른 접시의 묵을 내밀었다. 과연 손을 씻었을까 싶을 정도로 검은 손가락 때문에 머뭇거리자 한 걸음 다가와 입에 불쑥 넣어주는 게 아닌가. 놀라 뱉지도 못하고 얼결에 삼켜버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매끈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조금 더 먹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아는 듯 더 내민다. 사실 한 번 먹는 게 어렵지 그 다음은 일도 아니다. 결국 그녀와 나는 새벽 닭 소리가 들릴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배가 올챙이처럼 붓자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오는 게 보인다. 그녀에게 나눠 먹어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방금 전까지도 내 옆에서 못 먹고 죽은 귀신처럼 허둥거리던 아낙이 사라졌다.

[이봐~뭘 하는 겐가?]

  청산 할매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몸이 무거워 머리만 간신히 돌렸더니 호미와 광주리를 든 할매는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묵을 하도 먹었더니..배불러서 못 움직이겠어요]
[사람 참..어제 먹은 묵이 얼마나 된다고.. 젊은 사람이 싱겁게..]
[아니에요. 제사상에 있던 걸 다 먹었어요]

  손짓을 하면서 쳐다보자니 내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여러 가지 색의 낡은 끈이 묶여 있는 나뭇는 이미 고사한 듯 가지를 전부 늘어뜨렸고, 봄이라면 한창이어야 할 나뭇잎도 없었다. 게다가 좀 전까지 보았던 제사상도, 음식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귀신에 홀렸나보네. 그러게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건만..]

  청산 할매는 느릿느릿 조금씩 걸어 내 곁을 떠나갔다. 모습이 고갯길 너머로 사라질 무렵에 한 마디 말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어제가 우리 어머니 제산데 좋아하는 묵도 못 해줘서 어쩌나. 먹으러 왔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에이 모르겠다..하는 기분으로 못 잔 잠이나 마저 자야지 하며 대청마루에 올라서는데 작은 쟁반에 담긴 도토리묵이 나를 반긴다. 불어오는 바람에 탱글탱글 흔들리며 인사하는 묵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떠오른다. 그 밤, 그 묵 맛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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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 2009-10-0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1편부터 봐보려구요.
 

"학마을에 낙향한 남자가 경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그리고 사랑"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학마을.
이곳은 소백산에 둘러쌓인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현재 주민이 10명이며,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만 남아 밭농사를 짓습니다.

학마을은 1년 내내 학이 머무는 마을이며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섞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봄 밤에 만나게 된 도토리묵 장수..
사람으로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너구리 아가씨 등

주인공인 권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마을에 돌아와 살게되면서 기억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하며
때때로는 기이하기 까지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이 글을 통해..
시골이 고향이신 분들은 향수 어린 느낌을..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분들은 아~그런 일들이 옛날엔 있었구나..하는 기분을..
느끼시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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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마을에 낙향한 남자가 경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들..그리고 사랑"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학마을.
이곳은 소백산에 둘러쌓인 작은 산골 마을입니다.

현재 주민이 10명이며,
모두 고령의 어르신들만 남아 밭농사를 짓습니다.

학마을은 1년 내내 학이 머무는 마을이며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섞여 살아가는 곳입니다.

어느 봄 밤에 만나게 된 도토리묵 장수..
사람으로 둔갑하여 돌아다니는 너구리 아가씨 등

주인공인 권선생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마을에 돌아와 살게되면서 기억보다 더 아름답고 신기하며
때때로는 기이하기 까지한 경험들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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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 고향이신 분들은 향수 어린 느낌을..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분들은 아~그런 일들이 옛날엔 있었구나..하는 기분을..
느끼시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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