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이 후진 대접을 받아온 까닭은 후미진 틈바구니까지 스며드는 소미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짐승, 아니, 아니 그래서 여자감각으로 치부하여, 앞에서는 아득히 경원하지만, 뒤에서는 드잡이판 벌이는 가부장 제국 압제·수탈 대상이 다름 아닌 후각이다.

 

후각 복권은 그 어떤 반제국주의 혁명보다 근원·급진적이다. 냄새를 맡는 사건은 대체, 얼마나 반-문명이며, -교양이며, -품위며, -인간인가 말이다. 큼큼대다니. 그러나 그래서 큼큼대라. 큼큼대야 생명 근원에는 냄새가 있다는 진리를 깨친다. 그 냄새가, 바로, 녹색 냄새다.

 

반제국주의 녹색 냄새는 비리꼬리하다.

 

반제국주의 녹색 냄새를 맡아 들이는비리꼬리 후각 감각은, 그러면 어디서 날까? 스스로 냄새 장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맡아도 들이지 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 후각은 공명이며 공감이다. 자신이 근원적으로 비리꼬리하지 않으면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녹색 후각을 지닌 인간은 반제국주의 녹색 체취를 풍긴다. 반제국주의 녹색 체취 풍기는 인간은 자신을 소미심심 생태계로 유지한다. 소미심심 생태계로 유지되는 인간에게서만 후각은 진정한 해방을 맞는다.

 

후각 해방을 위해 코를 우뚝 깃발로 세운다. 코는 대체 인간에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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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문명에서는 의학도 상식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근원적 경계 사건이 혀와 미주알(항문)서 일어난다. 비대칭 대칭 원리는 그러니까 여기부터다. 혀 감각은 증강된 상태로 작동한다. 미주알 감각은 감약된 상태로 작동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소화·흡수가 끝나면 싸는 행동은 자연이자 당위다. 먹을 때는 주의해서 조금 먹어야 한다. 쌀 때는 놓아버리듯 한껏 많이 싸야 한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는 최소한으로 한다. 밖으로 나가는 바는 최대한으로 한다.

 

주의해서 조금 먹는 까닭은 인간이 먹는 음식 대부분이 생명체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그러니까 죽여야 살 수 있기에 그 생명에 절대적 감사를 표해야 한다. 반대로 그 생명체가 자신을 지키려 품은 방어 물질은 삼가야만 산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먹는 일은 다만 죽이는 일이 아니고 공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먹는 음식 전부가 내 일부를 이루지는 않는다. 일부는 내 몸 바깥에서 나와 공생한다. 먹는 일은 결국 생식, 그러니까 성() 행동이다. 거룩한 일이다.

 

먹는 대상은 도구가 아니다. 함께 생명을 향유하고 삶을 영위하는 또 다른 주체다. 다른 주체이므로 한껏 높인 객체로 대우해야 한다. 함부로 잔혹하게 다루고 부리면 안 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에 대한 예의를 특히 깍듯이 지켜야만 한다.

 

놓아버리듯 한껏 많이 싸는 까닭은 함부로 많이 먹는 일이 나쁜 이상으로 움츠려 조금 싸는 일이 대단히 나쁘기 때문이다. 극명한 예를 들어 대비한다. 40일 먹지 않으면 영적 세계가 열리지만, 40일 싸지 않으면 영 못 돌아올 세계가 열린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싸는 일은 다만 내버리는 일이 아니고 공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싸는 똥 전부가 폐기물이 되지는 않는다. 일부는 나와 다른 생명에 들어가 공생한다. 싸는 일도 결국 생식, 그러니까 성() 행동이다. 거룩한 일이다.

 

이 비대칭 대칭은 근원적 인간 윤리를 제시해준다. 남에게서 받는 일은 너무 많다고 여겨 최소한으로 하라. 남에게 주는 일은 너무 적다고 여겨 최대한으로 하라. 황금률은 공자, 세존, 기독 말씀 이전부터 인간 몸에 더 야물게 깃들어 있었다.

 

궁극에 닿는다. 근원적 인간 윤리는 산 인간 사이에서 빚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죽인 존재, 죽임당함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에 터 하여 구성되었다. 이 진실 품은 혀와 미주알에서 우주와 생명이 발원했다. 여기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지성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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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재 너머 상도동 들머리에서 과꽃을 본다. 꽃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꽃을 향한 중심 시선 때문에 미처 사람을 보지 못한 탓에 가볍게 놀란다. 80대 여성 한 분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꽃 보는 내게 건네는 아침 인사다. "꽃이 벌써 피었네요." 나도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꽃이 벌써 피었네요."


바로 다음 순간 질문 하나가 솟아 오른다. "내가 꽃에 눈길을 주지 않고 여느 행인처럼 서로 본 듯 못 본 듯 마주쳤다면 그가 과연 인사를 건넸을까?" 아니다. 내가 꽃을 보고 있으니 꽃에 관심 두는 '꽃 사람'이 반가워 소정 없이 인사를 건넨 거다. 여기까지는 어제 나가 주는 답이다. 이제 나는 이렇게 답한다. "꽃이 건넨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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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필드(W. G. Penfield)의 호문쿨루스(homunculus)에 따르면 가히 촉각 중추라 할 만한 신체 부위는 손과 입술(과 혀를 포함한 입 주위)이다. 그중 단연 손이다.

 

피부접촉 가운데 대부분을 손으로 한다. 닿기(대기), 만지기, 쥐기, 쓰다듬기, 다독이기, 도닥이기, 문지르기, 비비기, 잡기, 닦기, 씻기, 두드리기, 때리기, 긁기, 간질이기, 누르기, 받치기(받들기), 주무르기, 접기, 펴기, 벌리기, 찌르기, 짜기, 조르기···.

 

여기서 생사가 나뉘고, 애증이 교차한다. 여기서 성장과 퇴행이 엇갈리고, 상처와 치유가 자맥질한다. 여기서 웃음과 울음 쌍곡선이 그려지고, 이별과 상봉 운명이 결정된다. 여기서 한 생이 시작되고 한 생이 끝난다. 여기서 문명이 일어나고 문명이 스러진다. 여기서 지구가 안식하고 지구가 요동친다.

 

제국 백색 손은 소외와 격리를 극단화한다. 제국 백색 손은 기술과 돈을 극대화한다. 하여, 죽음과 증오, 퇴행과 상처, 울음과 이별이 비즈니스 전략으로 둔갑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더 이상 손으로 진단하고 치료하지 않는다.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이 모든 짓을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에게 아픈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고장 난 기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손 의학이다. 손으로 진단하고 손으로 치료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코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입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귀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눈도 손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에서는 약도 손이다. 의자와 환자가 서로 마주 닿고(대고), 만지고, 쥐고, 쓰다듬고, 다독이고, 도닥이고, 문지르고, 비비고, 잡고, 닦고, 씻고, 두드리고, 긁고, 간질이고, 누르고, 받치고(받들고), 주무르고, 접고, 펴고, 벌리고, 찌르고, 짜면서 생명을 지켜간다.

 

나는 신학 하다가 40대 중반에 의학으로 돌아섰다. 입 쓰는 사람에서 손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이 손 쓰는 사람을 근원에서 요청하는 의학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다. 치료하는 손을 기다리는 생명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제국주의 기계와 화학합성물질이 일으킨 살상으로 신음하는 숲도 간절하고 화급하게 겸손한 인간 손을 기다린다. 참회와 감사와 흠숭을 실천할 손, 그 두 손을 모으고 나는 오늘도 숲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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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백색의학이 감각을 하찮게, 감정을 열등하게 여겨 뒷전 취급하는 동안, 제국 자본은 그 감각·감정을 수탈 거점으로 삼아 잔혹하게 파고들었다. 심리학자들을 매수하여 거대하고 치밀한 저인망 마케팅을 짰다. 이른바 터치 비즈니스’, ‘터치 산업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감각·감정에 병든 사람 증상이나 완화해 터치 비즈니스, 터치 산업 먹잇감이 되게 함으로써, 제국 자본에 부역하는 꼴을 자초하고 말았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감각·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여, 어떻게 삶에서 건강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발현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촉각 문제를 생각한다.

 

다시 말한다. 촉각은 모든 감각의 모체다. 아니 촉각이 바로 엄마다. 닿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 실제로 제이차세계대전 때 엄마 잃은 아기들이 피부접촉을 통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일찍 죽음에 이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 슬프고 참혹한 사실에서 배우지 않는다. 여전히 아이들은 피부접촉 결핍에 시달린다.

 

산업 출산 문명 자체가 피부접촉을 가로막는다. 엄마 아닌 낯선 타인들이 장갑 끼고 받아내는 분만실 풍경을 떠올려보라. 더욱이 무통분만을 목적으로 제왕절개수술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것은 아기와 엄마 사이 원초적 피부접촉을 제거한다. 출산 뒤 곧 엄마 품과 격리하는 신생아실 시스템, 조산아 인큐베이터 양육 시스템 또한 마찬가지다. 이후 양육 과정에서도 피부접촉을 소외시키는 거대한 격리사회 속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돈벌이와 조기교육에 혈안이 된 부모는 아이를 전천후 피부접촉 결핍 상태로 유도한다. 결국 아이는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중독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과도한 시각 자극에 노출되면서 공격 성향이 증폭된다. 아이들 폭력 문제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 아이가 자라 어른 되는 법이다. 이렇게 어른이 되면 무슨 수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겠나.

 

현재 어른에게도 접촉 결핍은 심각한 문제다. 시각 독재(tyrannis visifica) 편재 상태다. 거의 모든 일상과 업무가 TV와 컴퓨터 모니터로 이루어지는 전자 산업 시대에서 피부접촉은 유기된 지 오래다. 어른 또한 중독성 향락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틈을 터치 자본이 밀고 들어온다.

 

피부 감각은 언어나 감정이 일으키는 감각보다 10배 강력하다. 제국주의 백색 문명이 촉각을 매몰차게 버렸다가 다시 일으켜 착취 대상으로 삼은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촉각을 복권해야 한다는 요청 앞에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우선 자기 진단·치료 행위부터 곡진하게 점검한다. 터치 의학이 명실상부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성찰한다. 그 뒤 치밀하고 집요하게 제국주의 백색의학과 맞선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의 거대한 노터치 의료를 무너뜨린다. 다른 길은 없다.

 

나는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내 딸 생애 최초 시간을 산업 출산 시스템에 빼앗겼다. 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르게 내 딸 생후 1년여, 특히 아내 출산휴가가 끝난 뒤 기간에 거의 100% 내 손으로 키웠다. 영국 런던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 피부접촉이 아기 정서발달은 물론 성장 후 사회 적응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 손을 통해 어머니 이외 바깥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나는 내 딸과 보낸 그 1년여를 팡이실이 신 축복이라 여긴다. 오늘 내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감수성, 그 녹색 촉각이 거기서 발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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