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걷기를 꺼낸 까닭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걷기는 인간이 우주 운동을 체현하는 방식이다. 걷기로서 인간은 걷기로써 인간이며 우주다. 이 인간됨을 제국 백색문명이 망가뜨렸다. 망가진 인간됨을 복원한다는 뜻을 지니고, 걷기를 마음에 두는 일에서 반제국주의까지 이야기를 펼쳐보았다. 꼭 한 가지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가짜 걷기 이야기다.

 

규칙적 운동 장소 하면 대뜸 헬스클럽을 떠올리는 현상은 오늘날 도시인에게 자연스럽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러닝머신은 단연 총아다. 총아 태생은 어둠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러닝머신, 그러니까 트레드밀은 19세기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순치하기 위해 만든 징벌기구였으니 말이다.

 

아무 제재 없이 걷기만 하면 되는 이 기구가 어떻게 징벌의 공포를 몰고 올 수 있는가? 죄수들이 두려워한 까닭은 가혹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 반복 동작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 반복 동작 지속이 형벌 본질을 지닌다는 사실을 놓고, 리베카 솔닛은 시시포스 신화를 거론한다. 여기에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단순 반복 동작을 자진해서 한다는 데 있다. 물론 목적은 건강이다. , 이 목적이라면 당시 교도소 측에서도 똑같이 지녔던 바다. 비대칭 대칭을 이루는 또 다른 교도소 목적 하나는 무엇인가. 죄수들 정신을 순응적으로 만들기 위함, 바로 그거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알아서 제국 백색문명에 순응하려고 트레드밀 위를 달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뿔싸!

 

그렇다. 트레드밀 위에서 몸을 튼튼히 하는 행위는 마음을 제국 백색문명 충직한 노예로 만들려는 목적 때문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이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걷기다. 이는 반우주적 운동이다. 이 순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당장 그만두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트레드밀 위 걷기는 엄밀히 말해서 가짜 걷기다. 앞으로 나아가는 환상이 있을 뿐, 제자리 걷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앞으로 나아갈 때 쓰는 근육과 다른 근육을 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실제 앞으로 나아갈 때 마주하는 시공간적 변화가 거세되어 있다. 가상적 조건을 설치하는 짓은 더욱더 큰 속임수일 따름이다. 중독 메커니즘이다. 인간을 포기하고 알량한 몸 이득을 위해 땀 흘릴 일, 결코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한다. 이런 제자리 걷기를 반복하면 소뇌 감수성이 손상된다!

 

백색 가짜 걷기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녹색 진짜 걷기를 곧바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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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관악산 중앙계곡으로 향한다. 일명 수영장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계곡 아래 서울대 수영장이 있었다. 물을 그 계곡에서 끌어왔음에 틀림없다. 진입로 계단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인적이 끊어져 오히려 없어진 상태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게다가 출입을 금하며 위반 시 벌금을 낼 수도 있다는 경고판을 보니 살짝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깊숙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한눈에 보아도 작은 계곡이다. 물은 이미 말라버린 상태다. 조금 더 들어가자 물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을 통제하려 쌓은 석축이 무너져내린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다. 물길에 그런 식으로 손댄 석축이 여러 군데 보인다. 인간이 편의에 따라 변형시킨 숲 풍경을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 숲에서 인간은 길, 그것도 최소한을 내야만 한다. 오늘은 능선까지 가지 않는다. 제의 공간으로 삼을만한 곳을 찾은 다음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올라올 때 처음 물소리를 들은 곳에 이르러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돌기 위해서다. 물론 방향만 그럴 뿐 지도에도 없는 소로를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다행히 전파천문대가 나오고 포장도로를 따라가니 저수지 계곡 입구가 나온다. 계곡 입구부터 술판 벌이는 사람들 왁자한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히 지나쳐 소음이 사라질 무렵에 이르자 물 흐르는 널따란 바위가 나온다.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다.



 

물속에 발을 담가 체내에 쌓인 정전기를 흘려보낸 뒤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이번에도 다시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돈다. 마침 그 길은 한번 가본 길이다. 관악사 운동장 뒤로 난 관악 지리계곡으로 들어간다. 폭포에 이르러보니 이끼 위로 졸졸거리며 소량 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 너머에서 저수지 계곡보다 더 큰 소음이 들려온다. 마침 일정에 따른 이동 시각이 돼서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로 일단 낙점해 놓고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관악산 북쪽 계곡 셋을 순례한 까닭은 내가 숲에 드나드는 목적과 부합하는 지성소가 있다면 찾아보기 위해서다. 낙성대 입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으며 아니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다. 다음 주쯤 내가 들고 나기로 정한 13, 14번째 마지막 계곡까지 가본 뒤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관악산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숲이 건네는 말을 다 듣고서야 갈 길을 알 수 있으리라.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백악산으로 향한다. 백악산은 내게 상수다.



청와대 전망대에서 늘 하는 제의를 마친 뒤 다른 시선으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산 숲에 오는 까닭 하나를 홀연 깨달은 덕분이다. 산 숲에 서면 국적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숲을 밀어내고 육중하게 들어찬 전경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 점령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절멸적인지 맹렬하게 실감할 수 있다. 거대한 부역 백색 도시를 통째로 직시할수록 내 우울증은 한층 건강하게 깊어진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오늘 숲 걷기는 다시없는 축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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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 둠에서 걸어보기까지

 

인간이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라는 진실을 아는 일만으로 생기는 의미란 없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는 일. 주의를 기울이는 일. 유심히 대하는 일. 그리고 상상하는 일.

 

상상은 사랑 기미다. 사랑 기미는 엄두 낼 수 있게 한다. 엄두 내어 걷기 시작하면 사랑은 몸에 시시각각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사랑은 상상을 무한히 갈래지게 한다. 무한히 갈래진 상상 속에서 걷기 탱맑은 느낌이 소소하게 미미하게 돋아난다.

 

느낌은 몸 움직임, 그 놀림에 마음을 맡기는 상태다. 걸을 때 솟아나는 몸 느낌, 정서 변화를 그저 감각으로 마주한다. 가벼운 근육통, 숨참, 촉촉한 땀, 싱그러운 바람이 일으키는 피부 감각, 상쾌함,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 망아, 평화로움들.

 

알아차림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의식하는 일이다. 무심코 잡념에 휘감겨 걷지 않고 유심히 걷는다. 몸 움직임, 진행 방향, 주위 조건과 맞닥뜨림 전체를 주의 깊게 살핀다. 해석·평가, 의미 챙기기는 하지 않는다.

 

뜻 가름은 걷기를 내 삶에 정색하고 다시 들이기로 하는 다짐이다. 어떻게 얼마나 걸을까, 나름과 깜냥으로 결 세우기다. 걷기가 이미 자연 문제에서 역사 문제로 바뀌었다는 각성을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어본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삶 그 자체든 살아 있는 날까지 걸어가 보는 거다. 십인십색 걷기에서 참다운 도가 일어나 인간이 우주에 여한 없이 배어들 수만 있다면야. 걷기는 태고 미래로서 인류 존망 열쇠를 쥐고 있다.


 

2. 역동 균형에서 일렁고요까지

 

걷기는 역동 균형을 잡아야 하는, 잡아가는 전체 몸 사건이다. 골격과 그에 연결된 근육에 각기 필요한 동작이 상호 팡이실이를 이루면서 중력을 견디고 장력을 조절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찰나마다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을 지닌다. 균형을 잡으려면 상하, 좌우, 전후 전방위 유기적인 협동이 필요하다. 내부적으로도 신경-혈관-()막계 정보 교환도 긴밀해야 한다. 그 정보에 따른 에너지 분배도 적확해야 한다.

 

제대로 걷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걷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걷기는 생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전제임과 동시에 생명이 흔들릴 때 바로잡는 치유다. 제국 백색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제대로 걷지 않기 때문에 생명 제반 균형이 무너져 있다. 걸으면 균형이 복원된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함은 물론이다. 어찌 걸으면 제대로 걷는가?

 

무엇보다 기본적이고 근원적으로 중요한 점은 자신이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깨어서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리지 않으면 타성적으로 걷게 된다. 현대인 대부분은 타성적 걷기에 중독돼 있다. 이 중독은 걸어야 하는데 걷지 않아서 생긴 질병이다. 알아차리고 걸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결과가 나타난다. 잘 안되면 정색하고 수행해야 한다.

 

타성 보행보다 보폭이 적절하게 커진다. 발 사이가 적절하게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넓고 여성은 지나치게 좁은 경향이 있다.) 발끝 각도가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벌어지고 여성은 지나치게 오므려진 경향이 있다.) 팔을 크게 흔든다. 어깨도 유연하게 전후로 회전시킨다.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운다. 시선은 정면 또는 살짝 위를 본다. 숨이 깊고 길어진다. 걸음마다 새로운 탄성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몸 외부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호흡, 순환, 면역, 내분비, 신경(·우뇌, 자율, ), 원시정보 체계 균형이 회복된다. 걷기 자체 역동 균형이 몸 모든 결과 겹에 퍼져 전천후 역동 균형 장이 형성된다. 우주 운동이 체현된다. 인간중심으로 말하면 건강한 몸놀림이다. 건강한 몸놀림으로서 걷기는 우리 생명을 구름에 달 가듯 흐르게 한다.

구름에 달 가듯 흐르는 걷기에 각별한 돋을새김 하나를 한다. 미토콘드리아에 헌정하기로서 걷기다. 운동과 선동일여(禪動一如)니 수승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 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세포 안에 존재하는 세포소기관이다. 세포 내 발전소라 보면 된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으로 보면 외부 생명체인데 내부 공생한다. 인간 몸 자체가 이미 화쟁을 거쳐 무애 공존을 이룬 우주 이치 체현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 생명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이 떨어지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암, 치매, 뇌졸중을 포함한 130가지 질병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을 높이려면 그 개체수를 증가시켜주어야 한다.

 

미토콘드리아 개체수를 증가시키려면 적색근육을 자극해야 한다. 특히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들어 있는 등과 허벅지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평소에 등을 곧게 편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더 중요한 일은 걷기다. 허벅지 근육을 자극하려는 거다.

 

미토콘드리아에 바치는 걷기는 몇 가지 적정 요건이 있다. 무엇보다 배고픈 상태. 체온을 효율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다. 그다음은 속도다. 30분 걸어 3km 답파할 정도면 좋다. 그다음은 운동량이다. 일주일에 5일이 적당하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허리를 펴는 거다.

 

금상첨화가 되는 팁 두 가지. 복식호흡을 병행한다.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알아차린다. (허벅지와 등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도 좋다. , 심장, 간을 묵상해도 좋다.)

 

[사족] 내 미토콘드리아 걷기에는 의미 실재가 하나 더 붙는다: 노동.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원리 핵심에는 체온 상승이 있다. 체온이 상승하는 현상은 생체진동수가 높아지는 현상이므로 효과가 광범위하다. 그 효과는 정신적 질환에도 당연히 미친다.

 

연구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세로토닌 전구물질인 트립토판 분비를 촉진한다고 한다. 논란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세로토닌은 몸·마음, 의식·무의식, ·우뇌의 역동 균형과 관련되는 신경전달물질이므로, 정확히 비대칭 대칭 운동인 걷기가 이런 효과를 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세로토닌이 선형적으로 우울장애와 인과관계를 이루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걷기가 일으키는 역동 균형 작용이 우울장애를 치유할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울장애도 결국은 불균형 문제고, 불균형 문제는 생체진동수 저하 문제기 때문이다. 다른 정신장애에도 이런 이치는 두루 통한다.

 

걷기가 인간에게 개체 단위로 미치는 지상(!) 효과는 일렁고요. 일렁고요는 역동 균형을 이른바 도() 차원에서 묘사한 말이다. 말하자면 구원이요, 견성이다. 걸어서 우주에 깃든다. 걸어서 우주와 합일한다. 홀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 찰나적으로만. 이 상태를 홀로 영속화하려 할 때 깨달은 마귀가 된다. 깨달은 마귀가 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깨쳐야 한다. 진정으로 깨치는 길은 구원의 확신으로 홀로 구원받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견성으로 홀로 부처 되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진부한 진리가 진부해지지 않으려면 찰나마다 새로운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새로운 발걸음은 더불어 걸음으로 나아가는 몸짓이다. 누구와 더불어 걷는가? 이웃이다. 이웃은 누군가?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사람이다.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자연이다.

 

 

3. 혁명에서 개벽까지

 

걷기는 혁명하는 녹색 행위다.

 

2017310일은, 평범한 시민의 걷기만으로, 대통령직 도둑질해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박근혜를 심판한 날이다. 5천 년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적지 않은 잘난 인간들이 혁명은 아니네, 한계가 있네, 비폭력 자랑할 일 아니네, 민노총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네, 운운···훤화하지만 잘난 입에서 언제나 나오는 후렴구다. 시민 비무장은 더없이 강력한 무장이다. 걷는 시민은 다시없는 전차군단이다. 촛불 파도는 어디에도 없는 해일이다. 목말 탄 아이도 함께 지른 함성은 ‘B52’ 굉음 너머다.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제국과 식민지가 엎어진다. 부역과 독재가 무너진다. 이 일에 끝은 없다.

 

걷기는 반제국주의 전사를 깨우는 녹색 격문이다.

 

걷기 혁명은 인간 사회를 넘어선다. 인간이 걷는 땅은 사람만을 위한 터전이 아니다. 바이러스(으뜸 바리)와 박테리아(버금 바리)와 곰팡이(균류)와 말(조류)과 돌꽃(지의류)과 이끼(선태류)와 망초와 백합과 지렁이와 개구리와 도마뱀과 여우를 위한 터전이기도 하다. 제국과 부역 인간이 땅을 착취하고 독점하는 짓을 지금처럼 계속하게 놔둘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각성으로 걷는다.

 

각성한 우리는 걸어서 땅을 공유하고 있는 뭇 생명들과 이어진다. 우리는 걸어서 우리 너머 뭇 생명이 반제국주의 전사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걸어서 녹색 전사를 깨운다. 모든 녹색 전사가 세우는 통일전선으로 제국과 부역 국가를 무너뜨리고 팡이실이 공동체를 복원한다. 팡이실이 공동체 복원이야말로 각성한 무지렁이 부역자가 최후로 최상으로 할 수 있는 근원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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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뇌가 커져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미성숙기가 오래도록 지속된다. 윤리 뇌가 다 자라는 일을 마지막이라고 보면 여성은 25년가량, 남성은 30년가량 자라야 한다. 전인격적 성숙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인간 대부분은 평생토록 다 자라지 못하고 살다 죽는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 이면이다. 비대칭 대칭이란 진리는 여기서도 예외를 허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가는 과정은 단계적인 몸짓 변화로 이루어진다. 몸짓이야말로 존재론이며 근원 의학이다. 소소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넘기고 큰 몸짓 이야기만 한다. 아기가 가장 먼저 하는 몸짓은 뒤집기다. 뒤집기는 눕혀진 상태에서 엎드린 상태로 바꾸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만드는 최초 행동이다. 배가 위로 향해 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죽어가는 물고기와 움직이지는 않으나 배를 아래로 향하고 잠든 물고기를 비교하면 그 이치를 금방 알 수 있다.

 

뒤집은 다음 아기가 하는 몸짓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전진하는 배밀이다. 이는 명백히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 생명 운동이다. 그다음에는 손발을 쓰면서 진행하는 엎드려 기기다. 배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 양서류 단계부터 시작해 파충류 단계를 거쳐서 이윽고 배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생활하는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 그러다가 주위 사물을 의지하면서 서고 발걸음을 떼면서 영장류로 변화해간다. 최후로 걷기가 시작되어 능숙해지고, 게다가 달리기로 나아가면 비로소 인간 몸짓이 완성된다. 이 과정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로 은유된다.

 

어류는 어류대로, 양서류는 양서류대로, 파충류는 파충류대로,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영장류는 영장류대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우주 이치에 맞는 생명을 살다 간다. 그들 삶에는 심신 분열도 없고, 자아와 우주 분리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걷기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조건이다. 걷기 진리를 미처 자각하기 전에 인간은 자아 폭발(스티브 테일러)이란 분리를 겪으면서 걷기에서 스스로 소외되었다. 걷기에서 소외된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이 이제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어찌할까?

 

걷기 진리를 복원해야 한다. 걷기를 되살려야 한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당장 걸어야 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기어야 한다. 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밀이 해야 한다. 배밀이도 못 하는 사람은 뒤집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걷기를 복원하면,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인간이 왜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걷기란 무엇인가? 이미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이브의 몸(14)>에서 대강을 밝혔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본성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연속과 단절, 역설적 조화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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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회룡 계곡에서 길 잃고 헤매던 와중 비옥한 부엽토 한 움큼을 떠왔다. 한의원 난 화분에 조금 넣어줬더니 세상에나 달개비꽃을 피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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