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공부와 부역 서사 쓰기에 진심인 요즘 이에 부합한 실천으로 숲 정화와 네트워킹 제의를 시행하고 있는데 누군가 신중히 물었다: 선생님, 신비주의자세요?

 

신비주의 아니면서 신비에 깃드는 이치를 자분자분 말해주었으나 어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물론 나도 어렵다. 쉽게 자주 대놓고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어서 그렇고, 그래서 신비는 실재지만, 살갗에 닿는 설명은커녕 묘사조차 힘들다. 어제저녁 나는 다른 길에서 깨달음과 만났다.


백반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돌아와 한의원 건물 현관문을 열려다가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렸다하필 복개 하수로 구멍 속으로 리튬 건전지가 빠져버렸다. 10년이 훨씬 넘은 일이라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멀지 않는 곳에 사는 간호사를 찾아가 리튬 건전지를 받아왔다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았다비밀번호 찾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손댄 탓으로만 여기고 다시 간호사에게 연락했더니 부랴부랴 왔다순식간에 문이 열렸다간호사가 막 웃는다원장님이러시기에요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간호사가 묻는다혹시 비닐 팩 속에 있는 채로 터치하시지 않았나요? ‘·’ 타성을 지닌 나는 그 질문이 뜻하는 바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 생각에 잠겼다. 비닐 팩 속에 있는 채 리튬 건전지를 터치한 행동과 가죽 커버 속에 있는 교통카드를 터치한 행동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차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같으리라 무심코 생각한 ·나태를 그제야 불현듯 알아차렸다. 전자기로 통합할 수 있다고 해서 전기와 자기가 본성상 똑같은 하나라고 할 수는 없다. 전기와 자기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而不一), 내 용어로 말하면 비대칭 대칭 사건이다. 이 이치를 생각하는 일과 생활하는 일은 다르다. ‘·이 아니라면 범할 수 없는 사소하지만 커다란 실패가 나를 통렬한 반성과 깨침으로 초대했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실재를 둘로 분리하면 기계론, 하나로 환원하면 신비주의다. 신비주의 전복했다고 자부하는 기계론이 오류라는 진실은 되돌아 기계론 극복한답시고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오류를 향한 경고다. 기계론과 신비주의 경계에서 피는 꽃, ‘신비 기계가 참 실재다.


나는 나고 나무는 나무다. 나는 나만이 아니고 나무는 나무만이 아니다. 나는 나무기도 하며, 나무는 나기도 하다. 나는 나고 나무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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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부역 서사


2. 고려신학대학원 최덕성 교수가 쓴 <교회가 참회해야 할 열 가지 친일행적>은 개신교 부역 전경을 제대로 보여준다. 개신교도 아닌 사람은 이 이상 알 필요도 없다. 출처가 뉴스앤조이(2005.9.13.)라는 사실만 소개하면 찾아 읽기 쉽지 않은 현실을 고려해 전문을 인용한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예정자 3,090명의 명단이 발표되자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를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언론회라는 단체는 친일명단 발표가 '단죄'의 성격을 띠어서는 안되며,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서 발생한 불행한 과거에 대해 현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는 상투적인 반응을 보였다. 천도교 대표자가 명단 발표와 더불어 "천도교의 과거 친일 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고 발표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교회가 과거사에 대해 전체적으로 참회가 부족했고 지금이라도 신앙조상들의 잘못을 참회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공감대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교회가 친일행각을 한 기독교인의 명단을 공개한다고 참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족과 사회의 양심의 교사다운 처신을 위해서 먼저 무엇을 참회해야 할 것인가를 검토해야 하고 그 점에 대해 한국교회 전체가 공감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친일행위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신사참배만을 주로 거론해 왔다. 한국교회가 참회할 과제는 우상숭배의 죄만이 아니다. 배교, 이교개종, 신도침례, 백귀난행-친일행각,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각 등 청산해야 할 죄가 많이 있다. 한국교회가 양심의 교사다운 정체성을 회복하고 민족과 사회를 위한 양심이 교사다운 정체성을 회복하자면 아래의 열 가지를 공적으로 참회해야 한다.

 

  1. 신사참배, 우상숭배, 황거요배, 신도예배

 

한국교회는 1938년 말부터 1945년 여름까지 우상숭배, 곧 신사참배를 했다. 교회 대표자들과 총회원과 노회원들이 열을 지어 신사(神社)에 가서 신도교의 예배 대상인 일본 신()을 참배했다. '가미나다'라고 하는 이동식 신사를 교회당 안 동편에 두고 신도들은 그것을 향해 예배했다. 1부 예배로 신도예배를 드렸고, 2부 예배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했다. 일본의 신을 향하여 기도, 소원간구를 드렸으며, 그 예배는 찬양-손뼉, 예물 바치기, 황국신민서사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해석했다. 일제는 신도교를 국교로 삼은 종교국가였다. 정부가 이 국가종교와 그 사제를 관장했다. 일제는 신도주의(Shintoism)를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였지만 그것은 일본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국가종교, 신도교의 우상숭배 의례였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와 주한 선교사들과 일본의 종교인들은 신사참배의 제의성(Cultic Nature)과 우상숭배의 성격을 간파했다. 일본인 학자들도 그것이 종교행위이며 우상숭배라는 것을 규정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그것이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거요배, 동방요배도 신사참배에 버금가는 이교예배 행위였다. 주일날 신자들은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일어서서 동쪽을 향해 절을 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 사이에는 그것이 '살아 있는 임금'을 향한 신하와 백성의 예()인가 아니면 우상숭배인가 하는 견해의 불일치가 있었다. 당시의 일왕은 '천황'이라고 하여 신격화 되고 있었다. 천황의 ''()은 종교성을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천황에게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행위로 풀이할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의 황제숭배와 같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이지 종교[제의]가 아니라는 일제의 해석을 받아들였다. 교회가 '국가의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것이다. 일제의 기만적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것은 한국교회가 국가권력에 무작정 굴종하는 전례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교회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와 군사정권 하의 철권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한 저항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1)우상숭배, 동방요배, (2)신도예배, (3)그리고 이것들이 종교제의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교인들을 기만한 일, (4) 일제의 신학적 해석을 수용한 일, (5) 일제의 교회 간섭을 허용한 것 등을 참회해야 한다.

 

  2. 신도침례

 

한국교회의 대부분 목사들은 '목사연성회'라는 이름의 단체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서울의 한강, 부산의 송도 등 전국의 강과 바다와 호수에서 신도교의 결례의식인 '미소기'(神道淸淨)를 행했고 이른바 ''()를 받았다. 이것은 신도의 신주(神主)가 더러운 옛 것, 비일본적인 것, 비신도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을 씻는다는 의미를 지닌 의식이었다. 신도 사제가 '천조대신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베풀었다. 불교와 신도교에서 계를 받는다는 것은 개종을 의미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목사들이 신으로 숭앙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신도침례를 받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기독교인이 신사참배 하는 목사, 신도침례를 받은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광복 후 재건교회 일부 신자들은 이들이 베푼 세례의 효용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신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3.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 밀고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을 한 것은 불가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회는 친일파 인사들의 주도로 '신사참배인식운동', '신사참배권유운동'을 전개했다. 신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선전하고 신사참배를 권유했다.

 

경남노회의 경우 임원들은 거창에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펼치는 주남선 목사에게 찾아가 신사참배를 권유했다. 1939년 김길창 목사와 김ㅇ일 목사가 찾아가 신사참배를 행할 것을 권했다. 부산과 거창은 그 시대의 교통형편을 고려하면 아주 먼 곳이었다. 주남선이 거절하자 그들은 강변에 나가 함께 이야기를 좀 하자고 제안했다. 주남선은 "그 일이라면 더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일로는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고 답했다.

 

장로교 총회는 19422월에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목적을 알리고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협조하도록 설득하려고 연사를 5개 반으로 편성하여 파견하고 지방 시국 강연회를 개최했다. 신사참배거부자들을 찾아다니며 참배를 권고하고 '애국자'가 되라고 강권했다.

 

친일파 목사들은 경찰을 대동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동료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찾아다녔다. 발견 즉시 "이 자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자이다"고 고발하여 형무소로 끌려가게 했다. 총회 산하 노회들은 신사참배거부자들을 제명, 파면시켰다.

 

최훈 목사는 한국교회가 솔선수범하여 저지른 '신인공노할 무서운 범죄' 일부를 소개한다. 어느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고향산천을 등지고 북만(北滿)으로 이거(移居)한 신자들에게 일본의 경찰을 앞세우고 찾아와서 "이 사람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자"라고 고발했다고 한다. 최훈은 그때 붙잡혀 옥고를 치른 바 있는 은기호 집사 증언을 예로 든다.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성도들을 왜경에 고발하여 붙잡아 가도록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신인공로(神人共怒)할 무시무시한 죄악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일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담임목사는 자기 교회의 장로 한 명을 일경에 고발했다. 그 장로는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담임목사가 고발한 이유는 그가 교회가 시행하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피하기 위해 예배가 시작한 30분 뒤에 참석했다는 것이었다.

 

  4. 변절은 넘어 배교


한국교회는 일제말기에 배교(背敎)했다. '굴절', '훼절', '변절'의 차원을 넘어 고대 이단 마르시온주의에 버금가는 이단성을 보였다. 교회는 '천조대신이 높으냐? 여호와 하나님이 높으냐?" 하는 질문에 천조대신이 더 높다고 하는 문건에 서명을 해서 관청에 제출했다. 교리와 신학을 변개(變改)했다.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개편했다. 성경을 편집하여 구약성경과 요한계시록을 제거했다. 찬송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통치와 하나님나라에 관한 찬송,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등을 삭제하게 하고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장로교 총회장은 '전향성명서'라는 배교신앙고백서를 발표했다. 군소교단들은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진 폐쇄했다. 일제의 강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께서 피 흘려 산 교회를 저항 없이 폐쇄하거나 '일본기독교'라는 이단집단에 통폐합시킨 것은 참으로 불충행위였다.

 

친일파 목사들은 광복 후에 "우리는 교회를 지켰다", "경찰통치 아래서도 한국교회는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지킨 '교회'는 무엇인가? 그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조대신의 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했을 때 주한 장로교선교회들(미국북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은 한국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협력-자매 관계를 철회했다. 그 당시의 한국교회를 참 교회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5. 면직, 제명, 사임압력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파직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거창읍교회 목회자 주남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가 1939년부터 광복 때까지 옥살이를 했다. 경남노회는 '주 목사에 대하여 거창읍교회 위임목사 해제를 통보'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뒤였다. 노회의 압력을 받은 교회는 그 가족에게 사택을 비우라고 강요했다.

 

장로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면직시키고, 이기선 목사를 제명하고, 한상동 목사에게 압력을 가하여 사면하게 했다. 상당수 목회자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목회지를 사임한 사람들은 자의로 사표를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압적으로 축출되었다.

 

  6. 적극적인 부일협력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부일 행위를 했다. 일제가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벌인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 조직을 전쟁보조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 원, 휼병금 172천 원을 바쳤다. 또 무운장구기도회 8953, 시국강연회 1355, 전승축하회 604,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317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에 열린 제42회 총회의 보고를 보면, 장로교단은 교회의 종 1540개와 유기(鍮器) 2165점과 12만여 원을 마련하여 일제에 바쳤다.

 

경북노회 노회장 송창근 목사는 산하 교회들에게 명령하여 교회의 종과 철제 물건과 유기를 관청에 바치고 그 보고서를 노회에 올리도록 했다.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이러한 친일 애국활동은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친일 부역은 조선예수교장로교도 애국기(愛國機) 헌납 기성회회장 정인과 목사를 포함한 일부 친일파 목회자만의 소행은 아니다. 감리교회는 1944년에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3대를 살 수 있는 돈 21만 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성도의 헌금 전액과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해 폐지된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에 따랐다. ‘교회 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광주지역 기독교는 세 교회당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매각하여 일제에 바쳤다. 금정교회는 교구장의 사무실과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광주지역에서 예배를 드린 곳은 양림교회당과 중앙교회당 뿐이었다. 향사리교회, 구장정교회, 일곡동교회, 유안동교회를 폐쇄하고 부동산과 재산을 팔아 일제의 군수물자 구입비로 상납했다. 밀려난 목사들은 농사를 짓거나 소일을 했다. 이러한 친일 행각을 한 광주지방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총 책임자는 정경옥 목사(전 감리교신학교 교수)였다. 장로교의 성갑식, 백영흠, 조아라 목사가 그 아래에서 친일 행각을 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의 신자 대부분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 교회는 연맹회비를 한 사람당 20원씩 받았다. 당시의 <동아일보> 평기자의 월급이 2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것은 거액이었다. 교회는 이렇게 받은 회비, 헌금 등을 가지고 일제의 병기 구입에 사용하라고 헌납했다. 병기 헌납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연맹회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인을 제명한 교회도 있다. 예컨대 광주 송정제일교회 당회록은 당회로서는 전 교인에게 교회의 의무 실행과 국민의 직무에 열성을 다하여 국방헌금과 연맹원의 의무에 충성을 다하게 하되 불이행 시에는 교인의 명부에서 제명하기로 가결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솔선수범 친일 행각이 어느 정도로 열광적이고 열성적이었는가를 입증한다.

 

광주의 어느 교회당 종을 떼려고 왜경이 일꾼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종이 종각에 단단히 붙어 있어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 때 그 교회 담임목사는 산소 용접기를 빌려와 종을 강제로 분리하여 관청에 바쳤다.

 

한국교회는 앞 다투어 전승축하기도회를 가졌고, 위문품을 보냈다. 기독교 인사들은 집회에 연사로 나섰다. 김활란, 백낙준 등은 이곳저곳에 강연하러 다니며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선에 나가 애국적 정열을 나라를 위해 바치라고 외쳤다. <동양지광>(발행인 박희도) 등의 친일 잡지에 글을 써서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내몰고, 친일 부역을 하도록 부추겼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가 발행하는 <청년>은 기독교 단체와 지성인들이 민족배신 친일 행각에 어느 정도로 광분했는가를 말해준다.

 

일명 채필근신학교라고 불리는 평양신학교(1940년 설립)는 한 달간 황민화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교화기관 구실에 충실했다. <장로회보>는 이 학교의 졸업반 학생들이 19411022일부터 112일까지 성지참배내지견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을 방문해 신사참배를 했다고 보도한다. 19411224일자 <장로회보>내지견학기를 실었다. 학생들을 인솔한 김관식 목사는 나중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초대 통리로 선출되고 광복 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주도했다.

 

그 무렵 노회들이 총회에 올린 보고서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중에 잘 지냈사오며하는 따위의 말로 일관한다. 평북노회는 관내 각 교회의 교인 수는 증가하지 못하였으나 신앙생활은 질적으로 향상하였사오며관내 각 교회 지도자를 시국에 적절한 지도자로 양성코자 하오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노회의 보고는 특히 인상적이다. 위문편지, 위문품, 상이장병 위문금, 유기헌납, 국방헌금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한 국가에 성의를 표했다면서 조선신학교와 연합하여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 및 신자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 일본 건설 등을 인식시켰다고 보고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교정치 권력에 충성을 바친 행위를 한 것은 출세와 영달이 목적이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 앞서 모범을 보였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신사참배를 통해 경쟁적으로 보여주었다. 한국교회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런 일들을 솔선려행’(率先勵行)했다. 일제가 신사참배에 대한 굴복만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부일협력을 요구하고 교회의 창부화를 강요할 때 한국교회는 일제의 작부(酌婦)다운 기고만장한 행태를 연출했다. 반민족 배교집단으로, 이교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일제와 신도교의 창기로 변해 있었다.

 

  7. 비인도적 행각, 민족배신

 

평양노회(노회장 최지화)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옥에 갇힌 주기철에게 산정현교회 목사직 사표를 종용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그를 면직시켰다. 노회는 그의 가족을 사택에서 끌어냈다. 사택 문에 못을 박아 봉쇄했다. 평양신학교 교수 고려위 목사가 그 집에 거주하다가 동네 사람들이 거듭 비난하자 그곳을 떠났다.

 

<한국교회박해사>를 쓴 최훈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가족을 끌어내던 바로 그 목사가 광복 후에 한국장로교회에서 유력한 목사로 추대 받는가 하면, ㅇ 목사는 얼마 전에 공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신앙 양심이 마비되면 못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가 저지른 이 같은 비인도적인 행각은 비일비재했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목사의 가족이 오갈 데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걸인이 되어도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핍박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과 재산을 침탈당한 동족을 돌보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기는커녕 항일자들과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 괴롭혔다.

또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면 그 시대의 사회참여운동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교회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이웃사랑, 사회참여, 문화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일본민족주의 제례(祭禮)인 신사참배에 적극성을 보이고 친일 행각에 솔선수범한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8. 에큐메니컬운동, 교단통합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컬운동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출범한 1924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일본도의 권위 아래서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을 단일화하는데 성공했다. 일제 말기에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한국교회의 이교화와 배교와 우상숭배에 이바지했다. 신도이데올로기를 고백하도록 했고, 각 교파를 해체하고 단일화하여 신도주의에 충실한 일본기독교단에 종속시켰다.

 

이러한 에큐메니컬운동은 광복 후에 하나의 한국교회의 대명사인 조선기독교단이라는 교단을 조직하는데 이바지했다. 친일전력자들은 친일잔재 교단을 만들어 교회권력을 계속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리교 측의 탈퇴로 실패하자 교단은 해산되고 그 대신 일정 때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의 재건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194693일에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여기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그리고 국내의 각 선교부와 교회 기관들이 가입했다.” 이때의 주동 인물은 대부분 친일전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이 단체는 오늘날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로 개편되었다.

 

  9. 황국(皇國)의 교회사(敎悔師) 양성소

 

한국장로교회는 번쩍이는 일본도와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서 독자적인 신학교들을 설립했다. 평양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를 설립했고, 서울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정통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들을 일본민족주의 정신으로 개종시킬 교회사’(敎悔師)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는 그 태생적 성격에서부터 황국(皇國)을 위한 학교였다. 조선신학교가 민족이나 민족적 자주성이나 민족 독립의 의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 기관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다. “복음적 신앙에 기()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충량유위(忠良有爲)한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일장기와 번쩍이는 일본도의 권위로 개교한 학교들은 한결같이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교의 설립과 존립이 불가능했다.


조선신학교는 설립목적에 걸 맞는 여러 가지 황민화 활동을 했다. 경성노회와 더불어 국민총력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역자와 신도들에게 제국의 세계적 지위와 내선일체신일본(內鮮一體新日本) 건설을 인식시켰다. 1944년 졸업생 김종삼 목사(1912~, 예장통합 대흥교회 담임)의 증언에 따르면, 이 학교는 황국의 충량유위한 신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 ‘충량유위한 황국의 교역자로 부족하다는 까닭으로 졸업을 보류했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학생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그 무렵 감리교신학교는 구약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로 김진철 등 신학생을 퇴학 처분했다.

 

  10. 솔선수범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하고 부일협력한 것은 일제의 강압 아래서 억지로 죽지 못해 한 것이며, 한계상황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변명했다. “그때 좋아서 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과거사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 교단 총회를 주도하는 친일파 목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유호준, 정인과, 김응순 목사를 비롯한 교단 지도자들이 일본에 성지순례와 신사참배를 하러 간 것은 자의로간 것이며, 솔선수범한 것이었다. 유호준은 그것이 부득이한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으나 그 다음부터는 자의로 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친일행각이 삼엄한 공기 아래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의로행한 것임을 입증한다. 처음에는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하다가 점차 솔선수범했고 나중에는 경쟁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한국교회의 우상숭배·배교·친일 행각·민족 배신·백귀난행·비인도적 광란은 일제조차 깜짝 놀랄정도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이었다. ‘삼엄한 공기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극성스런 소수의 친일파만이 친일행각을 한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우상숭배와 친일행위의 주체였다. 한국교회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상숭배와 친일행각은 공동체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죄악들을 단지 각자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한국교회라는 신앙고백공동체가 험곡(險谷)을 통과하면서 겪은 아픔은 오늘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교회의 실패는 일제의 강압이라는 구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죽지 못해, 한계상황에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친일파 인사들의 주도로 한국교회는 우상숭배·배교·친일 행각·민족 배신 행각에 솔선수범했다. 자의적으로 열성을 다했다.”

 

3. 최 교수는 <광복 후 교회, 친일파 득세하고 역사 날조하고>(뉴스앤조이(2005.9.15.)에서 광복 후 친일 부역 문제를 공적으로 사죄하지 않고 도리어 부역자가 득세해 역사를 어떻게 날조했는지 낱낱이 밝히고 있다. 더 관심 있는 분은 (https://www.newsnjoy.or.kr)에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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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부역 서사

 

1. 개신교는 고대 근동 예수 공동체에서 출발해 유럽 대륙을 관통하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까지 오는 동안 가장 극렬하고 배타적인 신념 집단으로 태어난 기독교 내 종파 이름이다. 근대에 이르러 제국주의 논리와 결합한 신학으로 무장하고부터는 가장 잔혹하고 뻔뻔한 살해 집단으로 거듭난 기독교 형 정파 이름이다.

 

우리는 이미 육두구의 저주를 통해 개신교가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정착형 식민지에서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 저들이 키워낸 일제 식민지 조선 개신교가 별다른 선택을 했으리라 상상하는 일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그 부역 풍경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이 문제를 개신교 내부에서 어떻게 보는지부터 살펴본다. 목원대학교 김흥수 교수가 쓴 글 <“친일·전쟁·군사정권”: 한국교회의 반성>(기독교사상 20058월호) 일부를 소개한다.

 

해방 60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교회가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신앙훼손과 반민족행위를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데 동의하는 이는 없다. 교회의 친일문제 청산과 관련해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먼저 철저한 반성과 일제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는 입장이 있다. 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이만열 교수이다.

 

그는 친일의 문제를 한국교회의 원죄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신사참배와 태양신에 대한 굴복을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거듭날 기회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교회와 사회의 차별성이 없어졌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친일파 제거를 비롯한 일제 잔재의 청산을 강하게 부르짖을 수 있는 예언자적 기회를 민족사에서 영영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다른 친일파들이 보신을 위해 의지했던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연관된 북진통일론으로부터, 또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적 물신주의로부터 자신을 해방, 단절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기독교가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나 가치를 상대화하지 못하고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절과 부정이라는 철저한 청산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만열은 일제 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요구한다.

 

또 하나의 입장은 친일의 문제를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교회 제도의 유지 차원에서 바라보는 민경배 교수의 관점이다. 그는 몇 해 전 정인과와 그의 시대(2002)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민경배는 장로교 황민화의 선봉장으로 비판받고 있는 정인과 목사를 일제 말기의 형언하지 못할 시련 속에서 한국교회를 걸머지고 가야 했던 한 대역자(代役者)로 정리한다. 정인과는 일제 말기에 교회의 조직과 기구로써 신앙을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할 때 우리 역사에 보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인과가 없었더라면 한국교회는 일본적 교회가 되고 장로교 체계가 소실된 일본 교단이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일제 말기 종교탄압에 대해 네 가지 유형의 대응 자세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인과는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순교이다. 그것은 몇 사람의 영광된 길이나 기독교인 전체가 따르기에는 불가능한 길이었다. 다음은 은둔의 길이다. 해외로 숨거나 산야에 묻히는 일이다. 거기 공교회의 현실적 아픔은 없다. 세 번째 유형은 실질적인 친일파로 경찰서와 헌병대를 찾아다니면서 한국교회를 일제의 제국교회에 통합하려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두세 사람에 불과하다. 마지막 유형은 정인과처럼 흔히 친일파로 불리는 교회 지도자들인데, ‘조절과 현실적 교회 유지의 자세를 취했던 사람들이다. 조절이란 일제 천황의 궁성을 향하여 소위 동방요배를 하고서야 비로소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종을 떼다 무기 만드는 데 바쳐야 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이 거대한 전국적 조직의 교회와 기독교기관을 유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교단과 대학의 책임자들로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이것들을 유지하려면 종교 행위를 일제의 요구에 알맞게 맞추는 조절이외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명의 개인과는 그 선택의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들이 오늘날 심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오히려 부둥켜안고 함께 눈물을 흘려야 할 일이며, 이제 조절의 신학을 선교와 민족 신학으로, 가부간에, 검토하고 반성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경배 주장은 새롭지 않다. 다른 분야에서도 익히 듣던 논조다. 생략해도 될 법한 이 문제를 하필 여기서 꺼내는 까닭은 들머리에서 말했듯 개신교가 다른 세속 분야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다고 스스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 정체성에 비추어 볼 때, 일제에 부역해서라도 유지해야 할 거대한 전국적 조직의 교회와 기독교기관이란 과연 무엇인가? 장로교가 신봉하는 그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가?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가? 자가당착 무인지경이다. 개신교 논리 근저에는 이런 한심한 무지가 판치고 있다. 전광훈 같은 자가 날뛰는 일이 가능한 오늘날 개신교 살풍경이 어디서 발원했는지 알고도 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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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부역 서사

 


들어가며

 

종교,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정신을 최고 상태로 인도하는 고매한 가르침이자 운동이다가도 상상 너머 저열한 상태로 처박아버리는 야비한 꼬드김이자 중독이니 말이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비대칭 대칭 진리가 드러나는 한 양상일 뿐 특별히 더 심각하지는 않다. 문제는 종교와 그 신자가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거룩함이 뒤엎어졌을 때 드러내는 추악함이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겹고, 심지어 가소롭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개신교, 천주교, 불교는 어떤 상태일까? 왜 그럴까? 앞으로 어찌 될까?

 

내 시생대 10년은 외양으로 불교 영향 아래 있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인근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어릴 때 여러 번 들은바 나는 할머니 월정사 치성으로 부처님이 점지해주셔서 태어났다. 내가 생후 6개월 만에 걸으며 영특해서 신동이란 소리가 들려오자 문수보살 가피 덕분이라 했다. 월정사가 문수 도량이라는 전설에 근거한 말이다. 상원사 방한암 선사 이야기도 쟁쟁하게 들었다. 물론 어린 내가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불교에 심취했을 리는 없으나, 오대산 월정사에 깃든 아우라가 빚어내는 서사 영향만큼은 분명히 받았으리라.

 

사실 불교보다 내가 내밀하게 느낀 종교적 영향은 무교, 그러니까 바리데기 신앙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 일로 기억한다. 백부가 사고를 당해 객사하자 할머니는 해원굿을 청했다. 그 굿이 진행되는 여러 날 동안 나는 오감이 열린 채 그 풍경 속에 잠겨 있었다. 천정에 가득 붙은 부적, 풍채 좋은 박수가 경 읽는 소리, 신기를 받아 팽팽히 곧추서는 지푸라기 신주, 다듬돌 위에서 스스로 돌아가는 물푸레나무 신목, 망자 영혼을 초대해 빙의 상태에서 만신이 망자 목소리로 가족들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커다란 떡 시루를 번쩍 들고 공중 뛰어나가던 만신, 망자 영혼을 달래 저승으로 보내준 뒤 돌아온 만신 발바닥에 흙이 묻어 있지 않았다는 할머니 증언···나는 60년도 썩 지난 이 풍경을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선연히 느낀다. 이른바 고등종교가 이 풍경을 뭐라 말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나는 고등종교에 천천히 깊숙이 들어간 먼 훗날, 그 어떤 순간에도 이 풍경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 섬세하고 광범위하게 그 실재성을 감지한다. 식물 공부에서 시작해 숲으로 들어간 뒤부터다.

 

서울살이가 시작되면서 동네 교회를 이런저런 인연 따라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지는 않았다. 스무 살 갓 넘었을 무렵, 실존적 고민 끝에 내 발로 걸어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결정적 고비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외부 힘이 작용해 내 희망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보다 큰 인격적 존재를 상정하니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종교가 개신교였던 셈이다. 나는 현실 교회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다. 누군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으며 신앙 기조를 잡아갔다. 공부로 신앙 길을 닦아가는 구도자적 경향은 마침내 나를 신학대학원으로 이끌었다. 공부할수록 신앙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했다. 서구신학이 지닌 한계뿐만이 아니다. 현실 개신교회가 벌이고 있는 신앙 행위와 그 서사가 전혀 영적이지도 생명 윤리적이지도 사회정치적이지도 않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결별을 준비해야 했다. 안에서 바꾸려는 노력이 적어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은 순간 이미 나는 교회 울타리 바깥에 서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일과 신앙을 버리는 일은 같지 않다는 말로 알리바이를 댈 생각이 없다.

 

개신교 신앙에 절망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나는 가지 않았다. 내게 개종할 만한 진실과 가치를 지닌 다른 제도권 종교가 있을 리 없었다. 도긴개긴이니까. 서구 지성이 도달한 무신론도 내 길은 아니었다. 저들 한심한 무지와 뒤엉킬 까닭이 없으니까. 내가 두 눈 똑바로 뜨고 걸어간 길은 시생대에서 시작한 바로 그 길이었다. 되돌아가기 장엄한 출발점은 원효였다. 원효 사상은 제도권 불교 사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 생태공동체가 빚어낸 바리데기 사상을 원효 특유 화쟁 어법으로 풀어냈을 따름이다. 이 회향은 내 운명, 아니 천명이었다.

 

바리데기 사상은 지구 생태계 창발적 네트워킹 전체 사건을 신으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거대유일신론을 관통함은 물론 무신론도 관통한다. 이 두 극단이 공유하는 일극 집중체제, 인간(특히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심주의, 그러니까 제국주의 부역 종교성을 관통한다. 이 반제국주의 참종교는 숲에서 발원했다. 내가 나무와 풀, 돌꽃, 곰팡이, , 버금 바리, 으뜸 바리, 비생명들을 공부하며 숲으로 걸어간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이 바리데기 반제국주의 녹색 종교 언어로 부역 종교, 그 가짜 뉴스진면모를 증언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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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도봉천 계곡 이곳저곳 바위에는 글씨가 유난히 많다(각석군(刻石群)). 제법 오래전 송시열 글씨로 계곡 들머리 바위에 새겨 넣은 <도봉동문(道峯洞門)>을 눈여겨보았을 뿐 대부분 잠깐 보고 그냥 지나쳤다. 절집 포함해 숲에서 보이는 인간 자취·작위를 너무 싫어해 특별한 일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던 습성을 지난주도 따른 셈이었다. 그러다가 <복호동천(伏虎洞天)>이란 글씨에 눈길이 가닿았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도봉서원 역사 기록을 읽었다. 서인 노론 패거리가 도봉서원 중심으로 계곡 포함 그 일대를 장악하고 유세 떨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노론 패거리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에 부역하며 특권층을 형성해 오랫동안 국정을 쥐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조선을 통째로 팔아 일제 부역으로 갈아타고 식민지 특권 귀족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허울뿐인 독립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일제에 이어 USA 제국에 부역하며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유세 떨며 준동하는 중이다. 이들 버러지 무리 뇌에는 일천오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사대 DNA가 탑재돼 있으며 몸에는 매판 독혈이 흐르고 있다. 이것들은 도저하게 직시하고 철저하게 성찰해야만 사라질 악귀다(知幻卽離). 직시와 성찰을 담은 정화 신목 버들을 모시고 나는 다시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동문(道峯洞門)>을 새겨 넣은 바위 앞에 선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봉 숲, 그 나무와 풀과 버섯과 흙과 물과 바람에 기도 올린다. “부끄럽습니다. 고맙습니다. 듣습니다.” 노론 패거리 영혼 속으로 천천히 깊숙이 들어간다(知幻).’ 정화 기운이 바위 밑 땅으로 스며들게 신목을 밀어드린다. 저들이 곧 사라진다(卽離)고 숲이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 제의를 마치고 인사드린 뒤, 홀가분한 마음 따라 더 깊은 숲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작은 계곡 조그만 버섯들이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홀연히 또 길을 잘못 들고 만다. 처음 생각했던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한참이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파른 능선에 올라서서야 행로를 재점검하고 새로이 정해서 나아갔다. 평범하다 싶으면 바로 다음 순간 바위들이 우쭐우쭐 발길을 가로막았다. 그나마 쇠 난간이나 밧줄이라도 있을 때는 안심할 수 있었다. 아주 엉뚱하고 위험했던 숲에서 나와 보니 의정부시 호원동이었다. 허름한 음식점이 있기에 살피지도 않고 쑥 들어갔다. 60대 중반 여인이 투박한 손으로 버무려낸 묵무침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며 잠시 대화했다. 서울 강남 사는 변호사가 집주인인데 수리해주지 않아 안팎이 몹시 낡아 있다. 혼잣말처럼 한 내 말은 예상대로 여인 귀를 스치고만 지나갔다. “노론 패거리 하는 짓은 예나지나 똑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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