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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74쪽)
오순절, 그러니까 예수 부활에서 50번째 되는 날은 성령강림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는 필경 구약성서의 희년jubilee 개념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일 개념의 극대치에 해당합니다. 7번의 안식년이 지난 그 이듬해, 그러니까 50번째 해입니다. 해방과 복원의 역설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대변혁의 해입니다. 결국 오순절은 희년 사상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의문은 바로 이런 장엄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대체,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이야기 그 대단원의 막을, 왜 하필 기독교 경전의 내러티브를 언급하는 것으로 내린 것일까요? 그것도,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무기력한 문구로 말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겸손함이 아닙니다. 피로인 듯합니다. 무슨 피로일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철학자의 피로니까요. 궁금함을 접고 성직자 출신 변방 임상의의 피로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오순절의 모임은 “피로한 자들의 사회”입니다. 물론 이들의 피로는 “특별한 의미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피로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데서 오는 깊으면서도 영적인 그 무엇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어법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곡진함의 극한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곡진함의 극한이기에 피로의 극한입니다. 피로의 극한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다름 아닌 하느님나라입니다. 기독교 어법을 넘어서 말하자면, 인간 개체의 배타적 경계가 사라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지평, 곧 드넓은 소통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을 비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비움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러나 차마 괴로워할 수 없는 것인지 알기에 철학은, 인문정신은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 틀릴지라도 ‘그렇다’고 명토 박습니다. 왜냐하면 그 오류를 머금은 선언 속에 인간다운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병철도, 임상의 강용원도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의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들을지라도 그때그때 약속은 결곡하게 맺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피로사회』의 <피로사회> 부분 리뷰는 여기서 맺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를 언급했더니 누군가 그에 대한 석명의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저도 답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그다지 큰 논쟁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에서 제가 절감한 것은 여전히, 큰 세계 가서 공부한 분들의 작은 땅 쟁점에 대한 무감함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요구의 권리가 제게 없음에도 임상의인 제게는 언제든 어디서든 그 문제가 끽긴사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는 질문임을 삼가 밝히고자 합니다. 제 앞에는 늘 아픈,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로에 제가 즉각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로사회, 이 화두, 적어도 제게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로 던져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한병철이 이 책을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질병 이야기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색하며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 질병들에 대한 한병철의 답이 오순절-사회일까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로사회일까요? 세월호 예은 아빠한테 이 말은 무엇일까요?
대체, 철학함doing philosophy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