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5일에 <시작하며> 글을 올린 지 꼭 50일째 되는 날 <마치며> 글을 올립니다. 세월호사건 2주기 개인 애도 기간을 마칩니다. 물론 이는 한낱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삶을 마친 뒤에도 저의 애도는 계속됩니다. 아이들에게 헌정한 이 『중용416』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인간이려고 또 다른 416 글을 쓰고 그것들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이 영속하는 애도는 애도를 넘어 삶이 되고 변혁이 되고 역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중용416

-세월호 아이들에게 헌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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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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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74쪽)


오순절, 그러니까 예수 부활에서 50번째 되는 날은 성령강림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는 필경 구약성서의 희년jubilee 개념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일 개념의 극대치에 해당합니다. 7번의 안식년이 지난 그 이듬해, 그러니까 50번째 해입니다. 해방과 복원의 역설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대변혁의 해입니다. 결국 오순절은 희년 사상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의문은 바로 이런 장엄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대체,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이야기 그 대단원의 막을, 왜 하필 기독교 경전의 내러티브를 언급하는 것으로 내린 것일까요? 그것도,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무기력한 문구로 말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겸손함이 아닙니다. 피로인 듯합니다. 무슨 피로일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철학자의 피로니까요. 궁금함을 접고 성직자 출신 변방 임상의의 피로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오순절의 모임은 “피로한 자들의 사회”입니다. 물론 이들의 피로는 “특별한 의미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피로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데서 오는 깊으면서도 영적인 그 무엇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어법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곡진함의 극한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곡진함의 극한이기에 피로의 극한입니다. 피로의 극한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다름 아닌 하느님나라입니다. 기독교 어법을 넘어서 말하자면, 인간 개체의 배타적 경계가 사라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지평, 곧 드넓은 소통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을 비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비움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러나 차마 괴로워할 수 없는 것인지 알기에 철학은, 인문정신은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 틀릴지라도 ‘그렇다’고 명토 박습니다. 왜냐하면 그 오류를 머금은 선언 속에 인간다운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병철도, 임상의 강용원도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의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들을지라도 그때그때 약속은 결곡하게 맺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피로사회』의 <피로사회> 부분 리뷰는 여기서 맺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를 언급했더니 누군가 그에 대한 석명의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저도 답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그다지 큰 논쟁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에서 제가 절감한 것은 여전히, 큰 세계 가서 공부한 분들의 작은 땅 쟁점에 대한 무감함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요구의 권리가 제게 없음에도 임상의인 제게는 언제든 어디서든 그 문제가 끽긴사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는 질문임을 삼가 밝히고자 합니다. 제 앞에는 늘 아픈,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로에 제가 즉각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로사회, 이 화두, 적어도 제게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로 던져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한병철이 이 책을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질병 이야기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색하며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 질병들에 대한 한병철의 답이 오순절-사회일까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로사회일까요? 세월호 예은 아빠한테 이 말은 무엇일까요?


대체, 철학함doing philosophy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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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처음 『중용』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제 딸은 현재 대학생입니다. 아비와 함께,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낯선 촛불 광장과 거리에 섰던, 중학생의 그 마음, 공부에 파묻혀 지낸 고등학생의 그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딸도 제 아비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다 알 수는 없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다 알지 못 하는 그 틈새에서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물론 그 전부터 이미 저희 부녀는 명시적이지 않았을 뿐 조금씩 이런 유형의 대화를 나누어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이 다 하는 일상적이고 수직적인 대화가 아닌, 특별하고 수평적인 대화, 곧 평등한 인격체로서 삶과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말입니다. 대개 훈계와 관리 차원에 머무르는 “무심코” 식 대화에서 놓여나 쌍방향으로 진실을 소통시키는 “유심히” 식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딸이 대학생이 된 직후,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대화를 정식으로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대화를 “제2채널the second channel”라 이름 지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제2채널은 필수적입니다. “무심코” 자행되는 정복과 지배, 그리고 수탈 행위에서 생명을 지켜내려면 “유심히” 이 평등한 소통 행위를 복원시켜야 합니다. 권력, 돈, 지식을 독점한 극소수의 탐욕이 대다수를 공포와 무지의 노예로 만들어 모두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세상이 바뀌려면, 피할 수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어 서로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해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제2채널이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제2채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공간입니다. 제1채널 체제를 믿고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던 아이들이 무참히 죽어간 세월호사건은 이에 대한 웅변적 증거입니다.


세월호사건은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가 제1채널체제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천문학적 부를 축적해온 과정의 거대한 결절점입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이 빼돌린 국민의 돈이 스위스비밀은행에 980조, 버진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에 870조, 도합 1850조라고 합니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3위 수준입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많은 국민은 제1채널을 통해 온갖 수탈을 당하면서도 그게 애국애족의 길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은 세월호사건에서 그랬듯 일방적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일방적으로 테러방지법 제정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필사적으로 필리버스터 행렬을 이어가고 시민 필리버스터로 번져가는 동안 ‘존엄’은 공식석상에서 책상을 내려치며 격노하는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총선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국회심판’ 운운하는가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전국을 누비며 반 헌법적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진두지휘 아래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경천동지. 그 동안 그가 자행해온 저강도 쿠데타에 맞서 시민이 고요한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구체적인 심판에 착수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하면 됩니다. 심판은 세월호사건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부터 명실상부한 제2채널을 열어야 합니다.


반중용의 폭거가 극에 달한 오늘 여기, 우리가 벼린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시중時中하는 제2채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용은 평등한 쌍방향소통으로 이 불의한 사회를 자주·민주·통일로 나아가게 하는 인문전쟁 행동입니다. 『중용』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생인 딸에게 제2채널을 통해 아비 아닌 동지가 되어야만 하는 삶의 조건을 나지막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딸조차 전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밖에 없어서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조금 덜 미안하고 조금 덜 부끄럽기 위한 짓은 아무래도 서투르기 일쑤일 것입니다. 이 또한 평생 걸머지고 가야 할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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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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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의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1:1-2:3에는 신אלהיםElohim의 창조와 안식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레째 날 안식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신의 안식은 창조에 대한 만족, 그러니까 ‘보기에 좋았다’는 거듭되는 표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의 깊은 피로가, 그 안식이 거룩한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말입니다.


성과사회가 부추긴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신의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한병철이 이미 말한 바입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신이 창조를 마치고 그 피로를 거룩한 안식으로 푼 논리는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는 성과 향상을 마치고 보기에 좋아서 거룩한 안식으로 태평히 누리는 깊은 피로가 아닙니다. 성과사회는 탈진 피로만을 가파르게 누적시키는, 보기에 나쁜 성과를 더욱 향상시키도록 여전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깊은 피로, 거룩한 안식인 피로를 말하려면 그것이 단지 탈진 피로의 대립자라는 사실 적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가 어떻게 그 대립자를 삶의 실재로 만들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한트케는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를 신뢰하는 사람, 놀이하는 아이, 오순절의 사람들 정도로 느슨한 주체에다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행위 양식을 제시합니다. 한병철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책의 전반을 통해 ‘주체’가 돋을새김 되지 않고 ‘사회(존재)’가 마치 생략된 주어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런 느낌의 정점에 바로 창조주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병철은 책의 끄트머리 바로 직전에 왜 신의 피로, 그 거룩한 안식을 (뜬금없이) 거론하였을까요? 성과사회 전체가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닐 텐데. 성과사회를 끌고 가는 지배집단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닐 텐데. 성과사회의 희생양으로 탈진 피로에 허덕거리는 소시민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닐 텐데.


한 권의 철학서가 구체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다는 것까지 말할 의무는 없을지 모릅니다.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침 제시만으로도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못내 안타까운 까닭은 너무나 좋은 말이 아득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의 거룩한 안식과 구의역 청년의 치명적 노동 사이에 가로놓인 저 심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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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려 찰나마다 애쓰며, 이 애씀이 어떻게 이 땅의 모든 문제 속으로 농밀하게 배어들 수 있는지 살피며 『중용』을 읽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매판·독재·분단을 본질로 하는 대한민국 통치세력은 저 뜨르르한 반중용을 더욱 결결이 배어들게 하고, 더욱 겹겹이 쟁여지게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놓고는 손발을 묶어버렸습니다. 공안 총리를 발탁해 416연대를 치고 그 대표를 잡아넣었습니다. 세월호 리본 달았다고 김연아를 빨갱이 취급했습니다. 세월호를 엄폐 인양하도록 정체가 수상한 중국 업체에다 맡겼습니다. 청문회를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협잡을 일삼았습니다.


세월호사건의 증거들이 인멸되어가듯 이 땅의 중용도 가뭇없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한 협잡술을 동원하여 통치세력은 대놓고 함부로 반중용합니다. 기민하고 얍삽한 조작으로 중용의 이미지만 전유하여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자기 치부는 물 타기나 치고 달리기hit & run 전술을 써서 상대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이대로라면 괄목상대할 세력이 더는 나올 수 없을 듯합니다. 절망적 상황입니다.


절망이 들이닥칠 때, 홀연히 활화산으로 우뚝 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민중이라 부릅니다. 민중은 절망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 깨치는 천명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 천명의 실천이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중용의 실천 주체이니 그가 곧 군자입니다. 군자, 그러니까 민중군자, 다시 그러니까 평등하게 상호 소통하는 필부필부 집단 군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평범하디평범한 바로 옆 사람과 낮은 연대로 손잡고 이야기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마시며 서로를 깨워 함께 폭발할 화산이 되어갑니다. 함께 폭발할 화산이 되어가자는 자주·민주·통일의 격문檄文, 그러기 위해 결코 놓을 수 없는 그리움, 이 아이들입니다.



고해인 김민지 김민희 김수경 김수진 김영경 김예은 김주아 김현정 문지성 박성빈 우소영 유미지 이수연 이연화 정가현 조은화 한고운 강수정 강우영 길채원 김민지 김소정 김수정 김주희 김지윤 남수빈 남지현 박정은 박주희 박혜선 송지나 양온유 오유정 윤민지 윤솔 이혜경 전하영 정지아 조서우 한세영 허다윤 허유림 김담비 김도언 김빛나라 김소연 김수경 김시연 김영은 김주은 김지인 박영란 박예슬 박지우 박지윤 박채연 백지숙 신승희 유예은 유혜원 이지민 장주이 전영수 정예진 최수희 최윤민 한은지 황지현 강승묵 강신욱 강혁 권오천 김건우 김대희 김동혁 김범수 김용진 김웅기 김윤수 김정현 김호연 박수현 박정훈 빈하용 슬라바 안준혁 안형준 임경빈 임요한 장진용 정차웅 정휘범 진우혁 최성호 한정우 홍순영 김건우 김건우 김도현 김민석 김민성 김성현 김완준 김인호 김진광 김한별 문중식 박성호 박준민 박진리 박홍래 서동진 오준영 이석준 이진환 이창현 이홍승 인태범 정이삭 조성원 천인호 최남혁 최민석 구태민 권순범 김동영 김동협 김민규 김승태 김승혁 김승환 남현철 박새도 박영인 서재능 선우진 신호성 이건계 이다운 이세현 이영만 이장환 이태민 전현탁 정원석 최덕하 홍종용 황민우 곽수인 국승현 김건호 김기수 김민수 김상호 김성빈 김수빈 김정민 나강민 박성복 박인배 박현섭 서현섭 성민재 손찬우 송강현 심장영 안중근 양철민 오영석 이강명 이근형 이민우 이수빈 이정인 이준우 이진형 전찬호 정동수 최현주 허재강 고우재 김대현 김동현 김선우 김영창 김재영 김제훈 김창헌 박선균 박수찬 박시찬 백승현 안주현 이승민 이승현 이재욱 이호진 임건우 임현진 장준형 전현우 제세호 조봉석 조찬민 지상준 최수빈 최정수 최진혁 홍승준 고하영 권민경 김민정 김아라 김초예 김해화 김혜선 박예지 배향매 오경미 이보미 이수진 이한솔 임세희 정다빈 정다혜 조은정 진윤희 최진아 편다인 강한솔 구보현 권지혜 김다영 김민정 김송희 김슬기 김유민 김주희 박정슬 이가영 이경민 이경주 이다혜 이단비 이소진 이은별 이해주 장수정 장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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