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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피로사회』 전반에 걸쳐 저자는 우울증을 다시 정의하거나 용어 사용의 차별성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기존의 우울증 개념을 일반적인 용례에 따라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우울증이 동질적 긍정성을 기조로 하는 후기근대의 성과사회를 대표하는 질병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우울증에는 그 어떤 부정성, 그러니까 무의식도 초자아도 예속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적 폭력”(111쪽)이 “자본주의적 자기 착취의 관계”(111쪽)를 교묘하게 조장하여 성과주체를 우울증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흠결 없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 타당성은 진실의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입니다. 이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를 전부처럼 논리로 세우는 과정에서 저자는 우울증 개념에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개성을 확장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98-99쪽)
저자가 성과사회 시스템 안에서 우울증이 초래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동원한 개념은 성과사회가 요구하는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좋은 “유연한”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을 자주 바꾸려고 자기 착취를 계속하다가 소진되어 우울증에 걸린다는 논리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착취적 소진이 야기한 우울증을 시스템 차원에서 통찰해낸 것은 분명 그의 탁월함입니다. 그러나 소진을 매개로 하여 걸리는 우울증이라면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진이 자기 착취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긍정의 착취는 우울증이고 부정의 착취는 우울증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자신이 쓰는 우울증이라는 용어는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나타나는 질병으로 국한시킨다고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많은 개인은 물론 세계보건기구나 미국정신의학협회까지 부정의 착취에도 우울증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른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나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형태든 용어 정리만으로도 이 책에 나오는 비판적 서술 대부분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정체성 문제 자체를 거론하겠습니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정체성은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포착한 정체성입니다. 시간성의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단히 바꿀 것인가, 변함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동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바꾸는 쪽으로 치우치면 ‘전환’의 정신장애(전환장애와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키는 쪽으로 치우치면 ‘강박’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 자체는 우울증과 필연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연히 역사적으로 소진이 개입되어서 우울증 문제와 결부되었을 뿐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저자의 통찰에서 소진의 문제가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고, 이를 매개로 하여 ‘전환’의 (정신장애) 문제가 우울증 개념과 결과적으로 연결된 것뿐입니다. 사회현상으로서 ‘전환’에 볼모 잡힌 소진이 몰고 온 우울증이 이 시대를 설명할 특징적인 개념이라는 말과 이 우울증만이 우울증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후자는 제유의 폭력입니다.
우울증이 직접 도출되는 정체성 문제는 공시적synchronic 지평입니다. 나와 남, 나와 세계의 관계적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나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인가, 남과 세계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지워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단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는 쪽으로 치우치면 ‘분열’의 정신장애(정신분열증과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워가는 쪽으로 치우치면 ‘우울’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스스로 자기 경계를 허물고 착취하는 자기부정증후군이 우울증의 본령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의 시스템적 폭력 이전에, 자본주의적 자기착취 관계 이전에 자기부정증후군은 엄존해왔습니다. 이질적 부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과 동질적 긍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이 다르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 다름의 실재입니다. 저자는 면역학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를테면 신경학의 시대가 왔다고 말함으로써 그 다름의 실재성을 극명히 드러내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서구세계의 한복판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앞선 글 <위장된 동질성, 위장된 긍정성>에서 말씀드렸거니와 제3세계에서 이런 구분은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면역학과 신경학, 그러니까 부정성과 긍정성을 구분하는 근대사회와 후기근대사회 또는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의 차이가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와 신식민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략의 차이입니다. 식민지사회의 노골적 이질성·부정성을 은폐하여 동질성·긍정성의 외형을 갖추게 한 것뿐입니다. 강제를 자유로 착각하게 한 것뿐입니다. 저자의 명쾌한 구분과 그에 따른 차이는 그다지 육중한 실재성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오늘 여기가 신식민지 상태인 한 우울증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울증은 말하자면 자기면역질환인 것입니다.
질병 논의의 최종 단계는 치료 문제입니다. 저자가 <우울사회>에서 치료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피로사회>를 언급한 부분에 간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치유적 피로”(82쪽)를 처방으로 제시하면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라고 풀이했습니다. 성과사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울증으로 들어간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성과의 향상을 위해 소진이 되도록 자기를 착취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과사회의 소진적 자기착취를 멈추는 방법이지 우울증 자체에 대한 처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울증의 본령이 바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치료는 지나치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겨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격정을 인정하면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하면 자기를 우선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것이 건강한 삶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되 중심에 세우지 않으면 비로소 자기 인연에 걸맞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저자가 이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임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라기보다 우울증 자체에 대한 통찰이 도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울사회> 에필로그에 증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 그자체가 치료의 시작이라는 독자의 깨달음 넘어 이렇다 할 저자의 전언은 없습니다.
개인 심리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학적 시스템 자체로 구성원 전체에게 내재적 테러를 가하는 성과사회가 우울증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방식으로 우울증을 이해하는 맥락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맥락이 설혹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이 맥락 안에 우울증을 가두는 것은 단순한 폭력을 넘어 참람한 오류입니다. 우울증은 공포·불안과 관련된 병리의 한 축으로 인간의 역사를 관류하여 존재해온 역동적 사태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이해하고 오해하며, 품고 배척한 방식이 달랐던 모든 풍경에 전체적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거기 깃든 보편과 특수를 정확히 간취하여 오늘 여기 문제를 푸는 자산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제가 한병철을 주의 깊게 읽고 수긍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변방의 소시민으로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임상의로서 제 앞에 놓인 구체적 문제를 통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제 삶의 맥락을 이끌고 들어가므로 수긍과 비판 모두가 협애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협애함을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좁더라도 제 눈앞에서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옹골지고 생생한 언어와 행위입니다. 그 언어와 행위를 구하려고 바로 이 순간도 한병철을 이슥한 눈으로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