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로사회』 전반에 걸쳐 저자는 우울증을 다시 정의하거나 용어 사용의 차별성에 관하여 특별히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기존의 우울증 개념을 일반적인 용례에 따라 쓰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우울증이 동질적 긍정성을 기조로 하는 후기근대의 성과사회를 대표하는 질병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우울증에는 그 어떤 부정성, 그러니까 무의식도 초자아도 예속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적 폭력”(111쪽)이 “자본주의적 자기 착취의 관계”(111쪽)를 교묘하게 조장하여 성과주체를 우울증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흠결 없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 타당성은 진실의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입니다. 이 작은, 또는 새로운 일부를 전부처럼 논리로 세우는 과정에서 저자는 우울증 개념에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우울증에 자주 선행하여 나타나는 소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힘이 빠져가는 주권적 개인의 증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자기 착취의 병리학적 결과이다. 개성을 확장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98-99쪽)


저자가 성과사회 시스템 안에서 우울증이 초래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면서 동원한 개념은 성과사회가 요구하는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좋은 “유연한”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을 자주 바꾸려고 자기 착취를 계속하다가 소진되어 우울증에 걸린다는 논리입니다. 맞습니다. 자기 착취적 소진이 야기한 우울증을 시스템 차원에서 통찰해낸 것은 분명 그의 탁월함입니다. 그러나 소진을 매개로 하여 걸리는 우울증이라면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진이 자기 착취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긍정의 착취는 우울증이고 부정의 착취는 우울증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자신이 쓰는 우울증이라는 용어는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나타나는 질병으로 국한시킨다고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많은 개인은 물론 세계보건기구나 미국정신의학협회까지 부정의 착취에도 우울증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른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나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형태든 용어 정리만으로도 이 책에 나오는 비판적 서술 대부분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정체성 문제 자체를 거론하겠습니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정체성은 통시적diachronic 맥락에서 포착한 정체성입니다. 시간성의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단히 바꿀 것인가, 변함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동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바꾸는 쪽으로 치우치면 ‘전환’의 정신장애(전환장애와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키는 쪽으로 치우치면 ‘강박’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 자체는 우울증과 필연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연히 역사적으로 소진이 개입되어서 우울증 문제와 결부되었을 뿐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에 대한 저자의 통찰에서 소진의 문제가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했고, 이를 매개로 하여 ‘전환’의 (정신장애) 문제가 우울증 개념과 결과적으로 연결된 것뿐입니다. 사회현상으로서 ‘전환’에 볼모 잡힌 소진이 몰고 온 우울증이 이 시대를 설명할 특징적인 개념이라는 말과 이 우울증만이 우울증이라는 말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후자는 제유의 폭력입니다.


우울증이 직접 도출되는 정체성 문제는 공시적synchronic 지평입니다. 나와 남, 나와 세계의 관계적 조건 속에서 공포·불안을 견디기 위해 나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분명히 할 것인가, 남과 세계를 중심으로 삼아 내 경계를 지워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른바 자기단일성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는 쪽으로 치우치면 ‘분열’의 정신장애(정신분열증과는 다른 개념)가 나타납니다. 지워가는 쪽으로 치우치면 ‘우울’의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스스로 자기 경계를 허물고 착취하는 자기부정증후군이 우울증의 본령입니다.


성과주의적 후기산업사회의 시스템적 폭력 이전에, 자본주의적 자기착취 관계 이전에 자기부정증후군은 엄존해왔습니다. 이질적 부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과 동질적 긍정성이 야기한 자기부정이 다르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습니다. 문제는 그 다름의 실재입니다. 저자는 면역학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이를테면 신경학의 시대가 왔다고 말함으로써 그 다름의 실재성을 극명히 드러내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서구세계의 한복판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앞선 글 <위장된 동질성, 위장된 긍정성>에서 말씀드렸거니와 제3세계에서 이런 구분은 폭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면역학과 신경학, 그러니까 부정성과 긍정성을 구분하는 근대사회와 후기근대사회 또는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의 차이가 제3세계에서는 식민지와 신식민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식민지와 신식민지의 차이는 본질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략의 차이입니다. 식민지사회의 노골적 이질성·부정성을 은폐하여 동질성·긍정성의 외형을 갖추게 한 것뿐입니다. 강제를 자유로 착각하게 한 것뿐입니다. 저자의 명쾌한 구분과 그에 따른 차이는 그다지 육중한 실재성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오늘 여기가 신식민지 상태인 한 우울증은 면역학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울증은 말하자면 자기면역질환인 것입니다.


질병 논의의 최종 단계는 치료 문제입니다. 저자가 <우울사회>에서 치료를 말하지 않았으므로 <피로사회>를 언급한 부분에 간접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치유적 피로”(82쪽)를 처방으로 제시하면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다.”라고 풀이했습니다. 성과사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울증으로 들어간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성과의 향상을 위해 소진이 되도록 자기를 착취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과사회의 소진적 자기착취를 멈추는 방법이지 우울증 자체에 대한 처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울증의 본령이 바로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치료는 지나치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겨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격정을 인정하면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 자기 경계를 확인하면 자기를 우선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고 나면 비로소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것이 건강한 삶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우선순위에 두되 중심에 세우지 않으면 비로소 자기 인연에 걸맞게 세계를 믿고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저자가 이 문제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임상가가 아니기 때문이라기보다 우울증 자체에 대한 통찰이 도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울사회> 에필로그에 증상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 그자체가 치료의 시작이라는 독자의 깨달음 넘어 이렇다 할 저자의 전언은 없습니다.


개인 심리 차원을 넘어 정치경제학적 시스템 자체로 구성원 전체에게 내재적 테러를 가하는 성과사회가 우울증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방식으로 우울증을 이해하는 맥락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맥락이 설혹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이 맥락 안에 우울증을 가두는 것은 단순한 폭력을 넘어 참람한 오류입니다. 우울증은 공포·불안과 관련된 병리의 한 축으로 인간의 역사를 관류하여 존재해온 역동적 사태입니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이해하고 오해하며, 품고 배척한 방식이 달랐던 모든 풍경에 전체적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거기 깃든 보편과 특수를 정확히 간취하여 오늘 여기 문제를 푸는 자산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제가 한병철을 주의 깊게 읽고 수긍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변방의 소시민으로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임상의로서 제 앞에 놓인 구체적 문제를 통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제 삶의 맥락을 이끌고 들어가므로 수긍과 비판 모두가 협애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협애함을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좁더라도 제 눈앞에서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옹골지고 생생한 언어와 행위입니다. 그 언어와 행위를 구하려고 바로 이 순간도 한병철을 이슥한 눈으로 읽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4월 15일에 <시작하며> 글을 올린 지 꼭 50일째 되는 날 <마치며> 글을 올립니다. 세월호사건 2주기 개인 애도 기간을 마칩니다. 물론 이는 한낱 상징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삶을 마친 뒤에도 저의 애도는 계속됩니다. 아이들에게 헌정한 이 『중용416』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인간이려고 또 다른 416 글을 쓰고 그것들이 남아 있는 한 말입니다. 이 영속하는 애도는 애도를 넘어 삶이 되고 변혁이 되고 역사가 되리라 믿습니다.   


중용416

-세월호 아이들에게 헌정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74쪽)


오순절, 그러니까 예수 부활에서 50번째 되는 날은 성령강림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는 필경 구약성서의 희년jubilee 개념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일 개념의 극대치에 해당합니다. 7번의 안식년이 지난 그 이듬해, 그러니까 50번째 해입니다. 해방과 복원의 역설이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대변혁의 해입니다. 결국 오순절은 희년 사상과 역사의 완성입니다. 의문은 바로 이런 장엄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대체,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 이야기 그 대단원의 막을, 왜 하필 기독교 경전의 내러티브를 언급하는 것으로 내린 것일까요? 그것도,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무기력한 문구로 말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겸손함이 아닙니다. 피로인 듯합니다. 무슨 피로일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철학자의 피로니까요. 궁금함을 접고 성직자 출신 변방 임상의의 피로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오순절의 모임은 “피로한 자들의 사회”입니다. 물론 이들의 피로는 “특별한 의미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피로는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데서 오는 깊으면서도 영적인 그 무엇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어법으로 말하자면, 종말론적 곡진함의 극한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곡진함의 극한이기에 피로의 극한입니다. 피로의 극한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다름 아닌 하느님나라입니다. 기독교 어법을 넘어서 말하자면, 인간 개체의 배타적 경계가 사라진 광활함the Spaciousness의 지평, 곧 드넓은 소통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을 비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비움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그러나 차마 괴로워할 수 없는 것인지 알기에 철학은, 인문정신은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 틀릴지라도 ‘그렇다’고 명토 박습니다. 왜냐하면 그 오류를 머금은 선언 속에 인간다운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한병철도, 임상의 강용원도 인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의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들을지라도 그때그때 약속은 결곡하게 맺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피로사회』의 <피로사회> 부분 리뷰는 여기서 맺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를 언급했더니 누군가 그에 대한 석명의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저도 답 글을 두 개 올렸습니다. 그다지 큰 논쟁으로 비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에서 제가 절감한 것은 여전히, 큰 세계 가서 공부한 분들의 작은 땅 쟁점에 대한 무감함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거기까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요구의 권리가 제게 없음에도 임상의인 제게는 언제든 어디서든 그 문제가 끽긴사이기 때문에 결코 멈출 수 없는 질문임을 삼가 밝히고자 합니다. 제 앞에는 늘 아픈,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로에 제가 즉각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로사회, 이 화두, 적어도 제게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로 던져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한병철이 이 책을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 질병 이야기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색하며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 질병들에 대한 한병철의 답이 오순절-사회일까요? “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로사회일까요? 세월호 예은 아빠한테 이 말은 무엇일까요?


대체, 철학함doing philosophy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년 처음 『중용』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제 딸은 현재 대학생입니다. 아비와 함께,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낯선 촛불 광장과 거리에 섰던, 중학생의 그 마음, 공부에 파묻혀 지낸 고등학생의 그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딸도 제 아비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다 알 수는 없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다 알지 못 하는 그 틈새에서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물론 그 전부터 이미 저희 부녀는 명시적이지 않았을 뿐 조금씩 이런 유형의 대화를 나누어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이 다 하는 일상적이고 수직적인 대화가 아닌, 특별하고 수평적인 대화, 곧 평등한 인격체로서 삶과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말입니다. 대개 훈계와 관리 차원에 머무르는 “무심코” 식 대화에서 놓여나 쌍방향으로 진실을 소통시키는 “유심히” 식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딸이 대학생이 된 직후,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대화를 정식으로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대화를 “제2채널the second channel”라 이름 지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제2채널은 필수적입니다. “무심코” 자행되는 정복과 지배, 그리고 수탈 행위에서 생명을 지켜내려면 “유심히” 이 평등한 소통 행위를 복원시켜야 합니다. 권력, 돈, 지식을 독점한 극소수의 탐욕이 대다수를 공포와 무지의 노예로 만들어 모두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세상이 바뀌려면, 피할 수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어 서로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해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제2채널이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제2채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공간입니다. 제1채널 체제를 믿고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던 아이들이 무참히 죽어간 세월호사건은 이에 대한 웅변적 증거입니다.


세월호사건은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가 제1채널체제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천문학적 부를 축적해온 과정의 거대한 결절점입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이 빼돌린 국민의 돈이 스위스비밀은행에 980조, 버진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에 870조, 도합 1850조라고 합니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3위 수준입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많은 국민은 제1채널을 통해 온갖 수탈을 당하면서도 그게 애국애족의 길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은 세월호사건에서 그랬듯 일방적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일방적으로 테러방지법 제정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필사적으로 필리버스터 행렬을 이어가고 시민 필리버스터로 번져가는 동안 ‘존엄’은 공식석상에서 책상을 내려치며 격노하는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총선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국회심판’ 운운하는가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전국을 누비며 반 헌법적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진두지휘 아래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경천동지. 그 동안 그가 자행해온 저강도 쿠데타에 맞서 시민이 고요한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구체적인 심판에 착수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하면 됩니다. 심판은 세월호사건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부터 명실상부한 제2채널을 열어야 합니다.


반중용의 폭거가 극에 달한 오늘 여기, 우리가 벼린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시중時中하는 제2채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용은 평등한 쌍방향소통으로 이 불의한 사회를 자주·민주·통일로 나아가게 하는 인문전쟁 행동입니다. 『중용』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생인 딸에게 제2채널을 통해 아비 아닌 동지가 되어야만 하는 삶의 조건을 나지막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딸조차 전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밖에 없어서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조금 덜 미안하고 조금 덜 부끄럽기 위한 짓은 아무래도 서투르기 일쑤일 것입니다. 이 또한 평생 걸머지고 가야 할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의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1:1-2:3에는 신אלהיםElohim의 창조와 안식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레째 날 안식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신의 안식은 창조에 대한 만족, 그러니까 ‘보기에 좋았다’는 거듭되는 표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의 깊은 피로가, 그 안식이 거룩한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말입니다.


성과사회가 부추긴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신의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한병철이 이미 말한 바입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신이 창조를 마치고 그 피로를 거룩한 안식으로 푼 논리는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는 성과 향상을 마치고 보기에 좋아서 거룩한 안식으로 태평히 누리는 깊은 피로가 아닙니다. 성과사회는 탈진 피로만을 가파르게 누적시키는, 보기에 나쁜 성과를 더욱 향상시키도록 여전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깊은 피로, 거룩한 안식인 피로를 말하려면 그것이 단지 탈진 피로의 대립자라는 사실 적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가 어떻게 그 대립자를 삶의 실재로 만들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한트케는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를 신뢰하는 사람, 놀이하는 아이, 오순절의 사람들 정도로 느슨한 주체에다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행위 양식을 제시합니다. 한병철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책의 전반을 통해 ‘주체’가 돋을새김 되지 않고 ‘사회(존재)’가 마치 생략된 주어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런 느낌의 정점에 바로 창조주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병철은 책의 끄트머리 바로 직전에 왜 신의 피로, 그 거룩한 안식을 (뜬금없이) 거론하였을까요? 성과사회 전체가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닐 텐데. 성과사회를 끌고 가는 지배집단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닐 텐데. 성과사회의 희생양으로 탈진 피로에 허덕거리는 소시민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닐 텐데.


한 권의 철학서가 구체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다는 것까지 말할 의무는 없을지 모릅니다.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침 제시만으로도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못내 안타까운 까닭은 너무나 좋은 말이 아득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의 거룩한 안식과 구의역 청년의 치명적 노동 사이에 가로놓인 저 심연 앞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