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00년 수도의 역사를 유리벽 아래 가두고 고층 폐허만이 나날이 치솟는다. 수백 년 된 건물이 일상의 공간인 유럽 도시들과 너무도 판이한 풍경이다. 폭력적 권력과 수탈적 재력만으로 통치되는 대한민국의 품격을 고스한히 드러내는 종로1길에서 한 아기가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2. 아이들을 차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죽인 지 800번 째 되는 날이 다가온다. 진실을 짓밟은 채 여전히 희희낙락 지절대는 자들이 기억의 문 저멀리 고래등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저들의 지휘 아래 수천만 개의 기억이 가라앉는 중이다. 지나가는 발길 말고는 한산한 광화문 추모 공간. 




역사를 땅 아래 묻고 기억을 바다 밑에 빠뜨리고서도 공동체인 사회는 없다. 의인 김관홍이 아이들 곁으로 떠나던 날,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공동체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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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 낭떠러지

목놓아, 툭

아득히 가득히

의미 푸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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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와 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손 글씨입니다. 손 글씨와 자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만드는 문자는 서로 전혀 다릅니다. 자판 문자는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르든 똑같은 손가락 동작의 행렬로 조합됩니다. 동일한 손동작의 반복은 인간의 행위라기보다 기계 작용에 가깝습니다. 누가 써도 똑같습니다. 인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손 글씨는 다른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다른 모양을 그려 구성합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쓴 사람의 실제 행위가 새겨집니다. 누가 써도 다 다릅니다. 인간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 또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손가락을 두드려 수많은 글을 씁니다. 그러다 문득 손 글씨로 돌아갑니다. 손이 굳어 있다는 사실을 대뜸 느낍니다. 글씨 모양을 그릴 때 낯설어한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립니다. 결국 글씨 모양 전체가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면 그 굳음과 낯섦이 더욱 선명해져 아름다움은 말하기조차 민망한 지경에 이릅니다. 그 글씨를 가만 들여다봅니다. 문명이 내 인간과 그 미학을 이렇게 구겨버렸구나 탄식합니다. 손 글씨를 잊지 말아야겠구나 다짐합니다. 조그매서 커다란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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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날 곳은 

비 그친 뒤에도 비를 내리는


그 숲으로 나는 죽었다


끝과 처음이 맞닿는 숲과 숲 사이

나는 숲하는 말이며 


비 닿지 않는 잎과 잎 사이

나는 

서 있는 기다림이며 기다리는 서 있음




[그림/ 김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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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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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서 전개되어온 남한의 현대사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에 시달려왔다.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북한)와 민족적 타자(미국)의 문제. 이 때문에 근대적 의미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혼선을 빚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민족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고, 민족적 타자에 대한 부정은 이데올로기적 타자에 대한 부정(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의 구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124쪽)


우리는 이제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이래로 우리를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했던 이중의 부정성이라는 문제에서-여전히 이런저런 불안 요인과 염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중의 부정성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된 남한 특유의 정치 지형(보수-진보의 대립 구도)도 조만간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126쪽)


이글은 저자의 논지가 타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쓴 김태환의 <역자 후기> 일부입니다. 이 내용에 저자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리뷰 닫는 글을 씁니다. 이 글이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 이후 요동치는 대한민국의 광경, 특별히 세월호사건을 목도하고 쓰였다면 또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짐작해볼만합니다. 그러나 초판 1쇄가 나온 이래 40여 쇄가 찍히는 동안 다시 쓰지 않은 것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태환이 남한의 현대사를 이중 부정성 문제로 이해하는 내용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며, 그 전망 또한 긍정성 사회의 도래를 간명하게 안내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내용의 설득력은 문제를 단순화한 데서 오는 편의처럼 다가오고, 전망의 간명함은 추상의 착시처럼 감지됩니다. 이 글이 본격적으로 남한 사회와 그 역사의 성격을 논하려고 내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피로사회』에 대한 ‘축사’로 읽힐 위험성이 다분히 있어 보입니다.


김태환은 남한 사회의 이중 부정성을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과 민족적 타자인 미국의 길항으로 놓습니다. 그런 대립구도 형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실체는 대부분 허구에 가깝습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과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하는 힘의 ‘대결’이 실제로 남한사회에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제국주의며 조국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힘은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 과정에서 NL로 불리다가 나중에 주사파로 헤게모니 일부가 넘어가기도 한 극소수 ‘운동권’ 진영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남한 사회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들 자체의 힘이 아니라 이들을 거대 세력을 부풀리고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이용한 집단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그러니까 북한은 주적이며 미국은 형제라고 주장, 또는 어쩔 수 없이 동조하는 자들이 줄곧 남한의 권력을 잡아왔으므로 남한의 이런 이중 부정성 문제는 위장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누락시킨 문제 상정은 안일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 은폐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이중 부정성의 문제가 실제 어떤 대결로 일어났던 것은 80년대 NL과 PD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한 사회가 식민지인가 아닌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던 운동권 내부 경험이 실재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이 경험을 전거로 들며 남한 사회와 역사를 논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 그럴 힘을 얻지 못한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외부의 힘으로 갑자기 종식되면서 남한 사회가 겪은 정체성 혼란의 진원은 김태환이 말한 민족적 타자인 미국이나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식민지 및 신식민지 전략을 구사한 미군정(청)입니다.


미국이 민족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거의 전혀 타자로 인식되어오지 않은 것 또한 명백합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은 일제의 식민지체제 근간을 유지한 채 식민지 부역 세력을 그대로 온존시키면서 미국적 콘텐츠를 각 분야에 이식하였습니다. 이 전략에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하나, 매판적 본질을 지닌 식민지 부역세력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아탈 뿐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적 부정성의 문제를 가만히 앉아서 사라지게 하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약점을 거머쥐고 표면에 내세우면 신식민지 전략을 손쉽게 연착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 식민지 부역세력이 자기들의 매판적 본질을 덮기 위해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 반공 이데올로기를 생산함으로써 남한 내부를 허위 이데올로기적 타자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남한 사회는 명실상부 민족적 정체성 구성을 위한 이론적·실천적 싸움을 한 적이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미국의 신식민지 상태로 깊이 침륜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북한을 타자라고 보기에는 남한 자체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 너무도 심각한 것 또한 명백합니다. 북한이 정말 이데올로기적 타자라면 남한이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세습독재만이 아닙니다. 남한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것인지 문제 삼아야 합니다. 남한의 부정불의를 덮기 위해 북한을 동원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적 부정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남한의 이데올로기적 부정성 문제의 중심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유린하는 남한의 허울뿐인 민주주의와 사실상의 독재국과 관련된 것입니다. 북한은 이 부정성 문제의 일개 변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된 이데올로기적 타자는 이승만 이후 남한의 권력을 독식해온 반민주주의·반공화국 세력입니다.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과 북한의 타자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김태환이 말하는 이중 부정성, 이중 타자의 문제의식은 피상적 또는 도식적인 것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한 현대사 이중 부정성 문제의 비틀림, 그 분열과 착종의 부조리한 전개에 결정적 이니셔티브를 행사한 것은 물론 군정청을 교두보로 한 미국의 신식민지주의 세력입니다. 일제 식민지에 이어 미국의 신식민지 세력에게까지 부역하면서 남한 현대사를 치욕으로 몰아간 세력이 다름 아닌 남한의 매판독재분단세력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의 모든 권력과 부가 저들의 독과점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 독과점을 더욱 공고히 영구히 하려고 저들은 제국의 자본에 민족혼을 팔고, 민주공화국을 압살하며, 이 생명공동체의 연속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대선 부정, 세월호사건, 일본군성노예문제 합의, 개성공단 폐쇄 등 일련의 정치적 협잡을 통해 드러나는 두 세력 간의 역학관계를 보면서 이중 부정성의 문제에서 점차 빠져나가는 중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브하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서구 사유에 젖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순이나 역설을 다루는 사유의 방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과 긍정은 모순개념이고 이 모순 사이에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구 형식논리학의 배중률입니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는 부정이기도 하고 긍정이기도 한 중간, 부정도 아니고 긍정도 아닌 중간이 존재합니다. 이 중간 상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배중률을 사유의 중요한 한 축으로 삼는 서구 사유로는 쉽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사유는 그 중간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감수성을 지녔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과 긍정 사이에 ‘인정’이 있습니다. ‘인정’이야말로 실재를 관통하는 사유입니다. 실재의 세계는 모순을 그대로 품은 ‘인정’의 세계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는 모순입니다. 전자는 부정이고 후자는 긍정입니다. 식민지와 독립 국가 사이에 신식민지가 있습니다. 신식민지는 인정의 세계입니다. 인정의 세계에 낯선 서구 사유로는 자기들이 만든 것이면서도 신식민지를 낯설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테지만 저들이 낳은 사생아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구인들은 영원히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이행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배운 비서구인들도 공부에만 머물면 그리 될 것입니다. 한병철도 김태환도 아직 공부에 머물러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와락 기우가 들이닥칩니다.


모든 사유, 모든 글쓰기는 자기 자신의 현재 삶 자리를 깔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이기도 하고 책무이기도 합니다. 세월호사건, 아이들에게 던져진 한마디 말로 요약되는 오늘 여기, 대한민국이 제 삶 자리입니다. 이 말이 과연 부정성에서 빠져나가는 표지일까요?


“가만있어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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