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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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말한 진리는 내적인 결심과 그 결심을 인내로써 지키려는 삶의 태도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다.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을 서서히 바꾸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서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것을 지키려 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이 문장에서 비문의 요인이 된 원문 일부분을 인용자가 수정함.)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초월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 과정으로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 즉 인간 안에 씨앗으로 존재하는 신의 형상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심지어는 커다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왔습니다.(이 문장에서 비문의 요인이 된 원문 일부분을 인용자가 수정함.) 나는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191-192쪽)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또는 그 인식 내용.’ 이 통속한 명사적 진리관은 로마인 총독 빌라도의 것입니다. 진리眞理를 글자의 본디 뜻을 헤아려 동사 문장으로 구성하면 ‘바른 삶의 길을 옥의 원석 속에 숨어 있는 고운 결을 갈아내듯 다듬어 간다.’입니다. 간단히 줄이면 ‘바르게 다듬다’ 정도의 구문이 됩니다. 이 동사적 진리관은 유대인 죄수 예수의 것입니다. 사실 여태껏 우리 대부분이 알아온 진리는 빌라도의 진리가 아니던가요? 심지어 기독교인조차도 그렇지 않은가요?


예수는 진리를 위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 함으로doing truth, 아주 정확히 말하면 진리true(이는 바르게 수행하다는 동사)로 죽습니다. 우리 대부분, 더욱 기독교인은 돈을 위해 ‘죽기로 살’지 않습니까? 예수는 진리와 동의어입니다. 우리 대부분, 특히 기독교인은 돈과 동의어입니다. 돈이 진리를 대체한 세상에서 여전히 ‘성경책’을 끼고 교회 들락거리는 행위는 예수를 모독하는 짓입니다. ‘성경책’은 더 이상 성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증언하지 않는 껍데기 글씨의 집합일 뿐입니다. 어찌하면 여기서 벗어날까요?


‘성경책’을 버려야 합니다. 성서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를 헐어버려야 합니다. 진리로 살아야 합니다. 각자 예수가 되는 것이야말로 저 예수의 죽음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입니다. 이 진부한 진실을 2천년 동안 백안시해온 기독교는 결국 하느님의 것을 빼돌려 카이사르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자본과 신자유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성소를 침탈했습니다. 카이사르가 보낸 총독 빌라도가 오늘 다시 와서 묻습니다. “무엇이 진리인가?” 당신은 예수로서 답할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모독하는 자로서 답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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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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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에 발견된·······‘차코스 사본’·······중 한 문헌이 26쪽으로 이루어진 <유다복음>이다.·······<유다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배신의 상징이었던 유다를 예수의 12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해한 제자로 묘사한다.(155-157쪽)·······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종교적으로 개방되어 삶에 깊은 성찰과 용기 있는 행동을 유발시키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다복음>은 신이 2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유다에 대한 재평가는 곧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억압해온 집단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인, 식민지인 등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159쪽)

  유다는 세상에 보여줄 ‘연민’이라는 가치를 충격적이며 감동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 악마가 아니라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예수의 위대한 마지막 길을 밝혀준 존재는 아니었을까?(163쪽)


저자가 증언하다시피 기독교는 이미 그 태동기부터 장구한 세월 동안 가룟 유다와 유대인을 동일시함으로써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해왔습니다. 그 정점에서 히틀러와 공범 관계를 이루며 저 잔혹한 아우슈비츠 굴뚝 연기를 피워 올린 것입니다. 기독교 강대국들이 그 뒤 유대의 고토에 이스라엘을 세워준 협잡은 대칭적 제노사이드를 위한 영구적 음모의 일환이었습니다. 구교든 신교든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 없이 그들의 신 앞에 온전히 서지 못 할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 말했듯 역사란 승자가 패자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구 역사가 차별·전쟁·착취를 통해 지구 전체를 죽임의 시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성·어린이·이민족·자연의 의롭고 선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지웠듯 말입니다. 기독교의 가룟 유다 지우기와 반유대주의는 바로 이런 서구 역사에 합류하기 위한 야합이었습니다. 구교든 신교든 기독교는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성찰 없이 그들의 신 앞에 온전히 서지 못 할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유다는 모든 지워진 이름의 상징입니다. 신의 “지상 임무를 완벽하게 이해한 유일한”(155쪽) 존재면서도 그가 버림받은 까닭은 서구적 사유 속에서는 모순을 역설로 달여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예수를 팔았다면 악할 수밖에 없고 그 악은 지워야 할 무엇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극진히 바라도 기독교는 유다를 복권시키지 못 할 것입니다. 이율배반 대문에 모순율 빗장이 걸린 기독교 프레임을 깨뜨리기 전까지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버림받은 자로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완벽하게 실천한 유일한 존재, 그 이름 바리데기. 우리 무조신화 <바리공주>는 버림받았으면서도 버린 자까지 구원하는 바리데기의 장엄한 삶을 그려놓았습니다. 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아비를 살리기 위해 지옥행을 마다하지 않은 딸 바리데기가 있습니다. 바리데기는 결국 세계 유일의 여성 구세주가 됩니다. 이율배반 대문에 모순율 빗장을 걸지 않는 사유와 삶, 이것이 한[아래 아 한]의 사람들입니다. 한[아래 아 한]의 품으로 복귀하면, 아니 스스로 개벽하면 이 땅의 기독교는 변화의 틈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기독교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무심코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당한 어르신들에게 권력이 저지른 짓에 대하여 아무 생각 없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구럼비 잃고 미군기지 들어서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강정마을이 도대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가슴에 손을 모으고 묵상에 잠깁니다. 이 말 할 때 예수의 마음 진경은 무엇이었을까?


“너는 입맞춤으로 나를 넘겨주려고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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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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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심오한 책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왜곡되어 전달되기도 한다. 경전은 한 번도 자신이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131쪽)·······

  예수는 당시 랍비 전통 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는 그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내재적인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것, 이것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을 정죄한 유일한 인간은 당신뿐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을 찾아 사십시오.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141쪽)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저는 알라딘 서재 <벽효서실>에 『중용416』이라는 이름으로 44편의 『중용』 해석 글을 실었습니다. 그 들머리에 썼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오늘 여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권위 있는 어떤 시공간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텍스트가 있을지라도 고전은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전으로 떠받들리는 찰나 그것은 이미 고전이 아닙니다. 경전이 만들어내는 믿음에는 거짓의 독버섯이 무성합니다. 거짓을 걷어내고 살아 있는 진실을 마주하려면 경전을 가차 없이 베어버려야 합니다. 경전을 베는 마음 고갱이에는 의문이라는 용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문은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통이 빚어낸 눈물입니다. 그 눈물 없이는 당최 고전의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전은 한 번도 자신이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경전이 살아 있는 ‘인간 삶의 기준’이 되려면 의문을 품는 인간의 주체적 말 걸기가 필수적입니다. 주체적 말 걸기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내재적인 힘을 키우고 그 힘을 믿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것”에 힘입습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는, 그러면 어디서 발원하는 걸까요? 전통에 매몰된 노예적 부품으로서 인간은 결코 자신을 깊이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립된 개인적 명상이나 수행에서 자기 신뢰를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 자기 신뢰는 일종의 환각이며 결국은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기 신뢰는 삶의 한가운데서 흘리는 눈물에서 나옵니다. 눈물은 관계가 빚어내는 통렬한 감각이자 각성입니다. 관계는 고통당하는 이웃, 수탈당하는 자연과 마주하는 경계 사건입니다. 이 경계 사건에서 찰나마다 내재화되는 힘이 생겨납니다. 내재화된 그 힘이 자기 신뢰의 바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권력이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시민의 자기 신뢰를 거세하고 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논리에 사로잡힌 맹목 집단은 거기 부화뇌동해 의롭고 약한 이웃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돌팔매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도 일본군 성노예 피해 어르신들도 밀양 할머니들도 강정마을 주민도 저들의 정죄놀이에 끝없이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숭고하게도 이 선한 이웃들은 스스로 정죄하지 않으니 감사하고도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예수의 이 마지막 말은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그 길에서 떠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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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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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우리에게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문장의 의미는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이다. 이것이 믿음이다.(123쪽)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 [비슷한 말] 믿음.”


이것은 국립국어원이 제시한 “신앙”의 정의입니다. 비슷한 말이라고 한 “믿음”의 정의도 이와 같습니다. 이 정의가 위 본문에서 인용한 예수의 질문에 걸맞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초월적 존재에게 삶 전체를 내맡김(신뢰)이라고 조금 고쳐 다시 정의하면 아마도 근본적인 일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저자는 기도와 묵상의 차이를 설명할 때와 같이 신앙과 믿음의 차이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또 그 때와 같이 왜 차이를 드러내려 애썼는지 궁금할 만큼 마지막에는 두 말이 혼효를 일으킵니다. 탁월한 저작이 드러내는 옥에 티 같은 부분입니다. 사실 어원이나 번역 과정을 좇을 때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원이나 번역이 사유의 매우 중요한 근거인 것은 분명하지만 언어의 발생 조건 자체가 그 언어 공동체의 유한한, 그래서 오류를 필연적으로 머금은 경험과 직관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의 현실 적합성을 탐색할 때 여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신앙과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믿음의 주체 그 누구도 보편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상위 1%를 제외한 99%의 시민에게 신앙은 무엇이며 믿음은 무엇입니까? (상위 1%는 본질상 진정한 신앙과 믿음의 주체일 수 없으므로 제외함.) 이렇게 묻고 여기에 맞추어 대답하면 되겠습니까?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막연합니다. 부족합니다. 이 질문을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바꾸어보겠습니다.


“당신은 매판독재분단세력에게 개·돼지 취급을 받는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이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아직도 막연합니다. 부족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바꾸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세월호사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단식 중인 부모들의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이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416연대 공지 채널에 속보가 떴습니다.


“광화문 416광장에서 8일 째 단식 중이던 세월호 유가족 임영애 님(준영 군 어머니)이 호흡곤란 등의 건강 악화로 현재 병원으로 이송, 의사 검진 후 안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신앙을,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 여길 때, 아니 신앙하는, 믿는 사람이라 여길 때, 당신의 깊은 묵상에 임영애 님이 들어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임영애 님의 소망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그 소망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당신은 진정으로 신앙하는,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백보를 양보한대도 믿음이 적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불의한 권력에게 핍박당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의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준열히 묻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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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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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신비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용서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88쪽)·······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는 사실 큰아들에 대한 경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이 쌓아놓은 이기심이라는 제단에서 희생된 인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가장 거룩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 이데올로기, 그 신념, 그 원칙이라는 제단을 부수고 우리의 가까운 가족, 친족,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이다.(105쪽)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용서는 결코 “신비”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는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에만 용서는 신비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구태여 용서라고 이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란 서로 다른 삶 상호간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용서인 것은 아무리 깊이 묵상하고 상상해도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없지만, 아니 없어서 상대방의 그 통약 불가능한 마음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만이 지닌 곡절을 곡진히 그 자리에 모실 때, 용서는 신비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래서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다면 거기서 “용서의 긴 여정이 시작”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오히려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 일어나는 통렬한 감각입니다. 용서가 용서인 것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어떤 깨달음으로도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없지만, 아니 없어서 상대방의 그 통약 불가능한 경험 세계를 차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경험 세계만이 지닌 곡절을 곡진히 그 자리에 모실 때, 용서는 그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용서를 위대한 가치로 꼽는 것은 그 내용 자체보다도 평범한 인간에게는 실천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어려운 것은 용서를 문제 삼아온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 정신이 병을 앓아왔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테일러는 그의 역작 『자아 폭발』에서 이를 타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성서는 타락 초월 운동의 한 국면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병리 상태, 그 타락상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배철현의 탁월한 두 저작 전반을 통해 가장 낮은 지대를 흐르는 뉘앙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간 정신의 병리적 현실에 들이대는 칼날에서 나옵니다. 그의 학문과 삶의 기조가 반영된 것일 터이니 비판한다기보다 임상 현실에 서 있는 저로서는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 오래 멈추어 서서 곰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어찌 오독을 하건 저자는 분명히 <탕자의 비유>를 큰 아들에 대한 경고라고 못 박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큰아들은 과연 누굴까요? 저는 저자처럼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가장 성공한 인물”(104쪽)인데 “우리와 매우 닮아 있다”(105쪽)고 뭉뚱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타락의 시스템이 1%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가장 성공한 인물’들로 하여금 99%의 기쁨을 극단적으로 수탈하게 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닮아 있다 하고 넘어갈까요. 매판독재의 적자로 태어나 권력과 돈을 깔고 앉아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10언 엔에 팔아넘긴 자들과 매우 닮아 있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제단을 부수고 원수까지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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