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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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신비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용서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88쪽)·······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는 사실 큰아들에 대한 경고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이 쌓아놓은 이기심이라는 제단에서 희생된 인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가장 거룩하고 가치 있다고 여기는 그 이데올로기, 그 신념, 그 원칙이라는 제단을 부수고 우리의 가까운 가족, 친족,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마음이다.(105쪽)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용서는 결코 “신비”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는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에만 용서는 신비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고 상상함으로써 상대방과 내가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구태여 용서라고 이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란 서로 다른 삶 상호간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용서인 것은 아무리 깊이 묵상하고 상상해도 상대방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없지만, 아니 없어서 상대방의 그 통약 불가능한 마음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마음만이 지닌 곡절을 곡진히 그 자리에 모실 때, 용서는 신비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래서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다면 거기서 “용서의 긴 여정이 시작”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오히려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 일어나는 통렬한 감각입니다. 용서가 용서인 것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어떤 깨달음으로도 상대방의 경험 세계에 가 닿을 수 없지만, 아니 없어서 상대방의 그 통약 불가능한 경험 세계를 차마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경험 세계만이 지닌 곡절을 곡진히 그 자리에 모실 때, 용서는 그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용서를 위대한 가치로 꼽는 것은 그 내용 자체보다도 평범한 인간에게는 실천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어려운 것은 용서를 문제 삼아온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 정신이 병을 앓아왔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테일러는 그의 역작 『자아 폭발』에서 이를 타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자면 성서는 타락 초월 운동의 한 국면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 정신의 병리 상태, 그 타락상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배철현의 탁월한 두 저작 전반을 통해 가장 낮은 지대를 흐르는 뉘앙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인간 정신의 병리적 현실에 들이대는 칼날에서 나옵니다. 그의 학문과 삶의 기조가 반영된 것일 터이니 비판한다기보다 임상 현실에 서 있는 저로서는 이런 장면을 마주할 때 오래 멈추어 서서 곰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어찌 오독을 하건 저자는 분명히 <탕자의 비유>를 큰 아들에 대한 경고라고 못 박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큰아들은 과연 누굴까요? 저는 저자처럼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가장 성공한 인물”(104쪽)인데 “우리와 매우 닮아 있다”(105쪽)고 뭉뚱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타락의 시스템이 1%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은 가장 성공한 인물’들로 하여금 99%의 기쁨을 극단적으로 수탈하게 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닮아 있다 하고 넘어갈까요. 매판독재의 적자로 태어나 권력과 돈을 깔고 앉아 세월호사건을 일으키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10언 엔에 팔아넘긴 자들과 매우 닮아 있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제단을 부수고 원수까지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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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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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웃’이라 하면 흔히 옆집에 사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원래 의미는 좀 다르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레아rea’라는 단어는 ‘친구/동반자’ 또는 몸종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레아는 옆집 사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이나 동물, 민족과 종교,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당시 율법교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자신과 같은 종교, 이데올로기, 취미 등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율법교사가 간과한 ‘레아’의 정의를 새롭게 시도한다.·······

  이야기를 마친 예수가 율법교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는 눈물지으면서 말한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한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80-81쪽)


너무 당연한 진실일수록 상대방이 정색하고 들을 수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무슨 교훈을 품고 있는지도 모를 리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또 다시 누군가에게서 듣는 것은 그다지 설레는 일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지겹도록 반복해서 우리 앞에 목청 높이는 까닭이 있습니다.


“선생님! 말만 하지 말고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몰라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행동하지 않으니 행동할 때까지 반복해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입으로 ‘천만 기독인’이라 하면서 세월호사건 유가족에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 있기는 합니까. 무관심을 넘어 ‘종북’이라 매도까지 하는 자들이 활개 치는 것을 보면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림이 마냥 무례만은 아닌 듯합니다. 설혹 그들 주장대로 ‘종북’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이해한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따른다면 그 ‘종북’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고 묻는 것이 예수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당연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논리입니다. 문제는 기본으로 전제되어야 함에도 기독교인에게 이 논리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 가르침의 본말을 전도시켰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독교인은 대부분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서 이웃이 “누구”냐를 묻는 것이 이웃 문제의 핵심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는 정반대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그에게 “무엇”이 이웃이냐를 묻고 있습니다. ‘누구’는 정체성의 문제고 ‘무엇’은 실천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실천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민족적·신분적 정체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여 그들은 자신을 강도 만난 사람의 유대, 이스라엘 정체성에 위치시킵니다. 그렇게 그들은 당당히 고난 받는 의인이 되어 유유히 자비 실천의 의무에서 벗어납니다.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은 이방인, 그러니까 마귀의 정체성, 예컨대 ‘종북’으로 몰고 당연하게도 마귀에게 고통을 가하는 세력을 자신의 의로움에 일치시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겹겹이 왜곡하고 능멸한 현실 위에서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가지 마시고,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 가시기 바란다.”는 참람한 말이 그리스도 말씀 이상의 권위를 지닌 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한다면 우리사회의 온갖 끼리끼리 사랑을 대체 누가 있어 정화할 것입니까. 영남, 서울대, 육사, 검찰, 경찰, 조중동·······심지어 연예인, 셰프·······예수는 준엄하게 다시 묻습니다.


“패거리끼리 사랑하는 것이 과연 사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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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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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시몬에게 “해변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져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고기를 잡기 위해 당신의 그물을 내리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한글 성서 번역은 보통 “너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이다. 이는 성서 원문의 뜻을 전혀 살리지 못한 번역이다.·······그리스어 원문은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이다. ‘돌아오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에파나고επαναγω’는 원래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먼 곳으로 진출하다’라는 뜻도 함께 지닌다. 그러므로 그리스어 원문은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애써 나와 깊은 곳으로 진입해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예수는 이 명령을 분명 자신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말했기 때문에,·······아람어로 재구성하면 ‘어바르ebar'가 될 것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제한 구역을 넘어서다/(법, 관습을) 어기다‘라는 심층의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는 시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따분한 일상에서 애써 탈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에파나고’에 숨겨진 핵심 의미는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과감히 떠나는 일, 단절하는 행위다.(62-63쪽)


제 인생에서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과감히 떠나는 일, 단절하는 행위”는 크게 두 번 있었습니다. 법관이 되는 길에서 과감히 떠나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하나입니다. 다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도가 아닌 가족, 친지 입장에서 보면 미친 짓이 틀림없습니다. 성직자가 되는 길에서 과감히 떠나 (한)의학 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그 둘입니다. 다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성직을 신의 부르심이라 여기는 선배 성직자, 동료 신학도 입장에서 보면 미친 짓이 틀림없습니다.


단절하는 행위” 자체도 어려웠지만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기나긴 과정은 어렵고 또 어려웠습니다. 누구 말따나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할 길이었습니다. “제한 구역을 넘어서”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법, 관습을) 어기”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 도상에 있습니다.


애써 탈출”하는 것은 지난 삶을 모두 없던 일로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아적·고립적 에고를 베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법학에서 의로움을, 신학에서 드넓음을, 의학에서 홀가분함을 벼려내어 통짜로 트인 삶을 이루는 통섭通攝consilience이 남아 있는 제 길입니다. 그 순간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아니 이미 들이닥쳤는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채 찰나마다 곳곳에서 발맘발맘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성서 원문이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뜻을 지녔다는 사실에서 무엇보다 장엄의 울림을 받습니다. “다시 돌아오라”라는 것은 깊은 곳이 본디 인간다운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다운 삶이란 자기 불안·탐욕·무지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사는 경계를 넘어 낯선 이웃과 자연이라는 심연을 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전혀 새로운 제3의 길이 아니라 인간의 거룩한 본성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내재된 신성의 DNA를 복구하는 것입니다. 영겁 이전부터 있었던 불성을 깨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숭고한 틈, 엶, 깸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장엄의 음성에 영혼을 내맡기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가운데 숭고의 귀를 열고 장엄의 음성을 들으며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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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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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삶에 있어 의식주의 해결보다 근본적인 임무인 “신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신이 요구하는 의”를 행하라고 주문한다.

  ‘신의 나라’는 신의 뜻이 널리 그득 찬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원칙이 지켜지는 경지를 의미한다. 신의 원칙은·······“신이 요구하는 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란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49쪽)


어느 날 가족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가까운 지인이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기에 제가 얼른 화제를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자 괜찮다는 표정을 지은 것은 의외로(!) 딸아이였습니다. 딸아이가 정색하고 물었습니다.


“생명이 1년 남았다면 뭐 할 거야?”


딸아이가 제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온 나라를 떠돌면서 강의할 거야.”


딸아이는 과연 아빠답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내 공감의 뜻을 전했습니다. 저는 이 대화를 끝내고 나서도 한참을 그 여운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내용의 강의를 할 것인지 딸아이와 아내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제가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 말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의 나라”라 하든, 바리데기사상이라 하든, 원효철학이라 하든, 정치경제학비판이라 하든, 인문한의학이라 하든 결국은 같은 이야기일 테니 각자 버전으로 이해하고 수긍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카르텔로 귀결된 인류 타락의 대헌장은 강고한 “자기중심적 삶”을 총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물론 돈과 권력입니다. 돈이 사람의 근본이고 권력이 사람의 기품인 세상을 만듦으로써 그 타락은 구원으로 둔갑했습니다. 신문을 펴도, TV를 켜도 나오는 모든 것이 돈과 권력 이야기입니다. 극소수의 과두가 민주주의를 빈껍데기로 만들고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우스개로 만들어 돈과 권력을 독식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돈과 권력 이야기는 다시없는 막장드라마입니다.


이 아수라 지옥 한가운데서 예수가 우리에게 묻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이웃과 자연이 돈과 권력보다 소중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아프고 슬픈 이웃이 예수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우리 곁에 있는 푸르고 너른 자연이 하느님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공포와 탐욕, 그리고 무지의 얼룩을 닦아낼 한 소식 전하기 위해 이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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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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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같은 자생적이고 감동적인 모델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라질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침몰하는 그리스도교라는 배에 남은 몇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한 종교나 종파에 속한 종교적 인간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영적인 인간이라고 정의한다.(17-18쪽)·······

  예수가 제자들에게 물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이며 과학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스스로에게 맡겨진 미션을 찾도록 촉구하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위대한 질문과 삶을 통해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찾아야 한다. 예수는 묻는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30쪽)


사람에게 이름을 포함한 호칭은 단순한 외적 식별 도구를 넘어 인격과 삶의 지표로 기능합니다. 많은 경우, 사회적 지위나 평가를 담고 있음 또한 물론입니다. 한의사 호칭 문제가 그렇습니다. 일제가 식민지 시절 폄하하고 왜곡한 것을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전통 의학을 제도 밖으로 축출하면서 서구의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만 의사라는 보편 명칭을 부여하였습니다. 독립국가가 된 뒤에도 정치권력은 전통의학을 공적 의료체계의 근간으로 삼기는커녕 식민지 시대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려 했습니다. 조헌영 등 몇몇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전통의학의 명맥을 살려 놓았습니다. 그 전통의학을 한의학이라 하고 그 의사를 한의사라 이름 한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한의학이 의학이고 한의사가 의사입니다. 서구의학은 양의학이고 그 의사는 양의사입니다. 이 전도된 현실에서 오늘날 양의사들은 한의사를 의사가 아니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대중도 거의 같은 시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한의사인 저는 뒤에서 오거리 침쟁이로 불리기도 하고 앞에서 아저씨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의사라는 이름은 치욕으로 푸릅니다.(손택수 <나무의 수사학Ⅰ> 마지막 구절 ‘치욕으로 푸르다’에서 빌려 온 표현임.)


한의사의 치욕과는 전혀 달리 이 땅에서 스스로의 행실로써 자기 이름을 치욕스럽게 한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도교입니다. 한자어로 기독교라 하니 그 이름만으로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치욕이 되었고 심지어 개독교라 불리기까지 합니다. 물론 개신교를 말합니다. 목사는 먹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들이 뭘 어쨌기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교는 생활 윤리나 자비 행위보다는 교리를 숭배하는 정책을 강조했고 슬프게도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다.


저자의 증언은 부드럽고 점잖습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이 부드럽고 점잖은 표현 훨씬 밖에서 준동하고 있습니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 4개가 대한민국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신교의 타락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대형교회들이 대한민국에 끼치고 있는 악영향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 교회 목사들이 이런 내용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 민족을 깨우치려고 하나님이 세월호 아이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야당 후보 찍으면 빨갱이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


윤리, 자비는 고사하고 교리조차 아닌 이 망발 앞에 머리 조아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세월호사건 희생자 유가족에게 그만하라 비아냥거리고, 눈 딱 감고 오로지 기호 1번 찍어 식민지 상태를 공고히 하고, 십일조 내어 개독교 먹사의 곳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요? 지금 상태라면 이들은 예외 없이 그 질문한 존재를 알아보지 못 할 것입니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자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굳게 믿는 이 기막힌 현실에서 우리는 영성을 상실하고 멸망해가는 한 종교의 운명을 예감합니다.


비단 개신교뿐이 아닙니다. 불교 조계종도 불성을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승려들이 돈 선거를 하고, 외국 원정 도박을 즐기고, 총무원 지하방에서 폭력을 일삼습니다. 아마도 이른바 고등종교들의 이런 현상은 세계적일 것입니다. 바야흐로 “한 종교나 종파에 속한 종교적 인간이 아닌 인류보편적인 영적인 인간”이 일어나 기성 종교를 무너뜨리고 “각자의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가 도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처 없는 불교도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이고 부처인 평범한 사람들이 “내면에 감춰진 위대함”으로 고요히 겸손히 일상의 혁명을 일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귀 밝은 한 사람은 반드시 이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대답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유예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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