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다섯 번째 본문입니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무릇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어그러진다. 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착오가 생기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곤란하지 않게 되며 행동하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탈이 없게 되고 방법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    

 

2. 이 문단 또한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다가 느닷없이 예(豫)와 전정(前定)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집자가 흩어져 있는 문서 조각(fragment)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 칼 같은 문헌비평에 의거 빼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이 경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자연스러움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신(修身)문제를 계속해서 말하였고, 이 문단 바로 뒤에서는 성(誠) 문제를 언급합니다. 대략 이런 연결의 지도리로   豫와 前定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사회적 실천의 핵심으로 사적 실천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 예비적 단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꼿꼿한 발걸음 없이 사회적 외양만을 갖추고서는 참된 중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 내함은 修身과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다음 문단의 誠과 잡는 것이지요.   

 

豫前定은 끊임없는 실천의 닦음, 즉 修身의 자세를 다른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 알아차리고 챙겨야 적확한(誠) 사회적 실천, 즉 중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의미군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살핀 것이 修身, 豫前定, 誠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면 간편합니다.  물론 誠은 그 자체로 중(中) 또는 중용의 '본토'에 깊이 발 들여 놓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연속성을 구태여 예리하게 구분할 실익은 관념 영역 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궁극적 실천영역에서는 상호 연속성이 그대로 힘이 됩니다.     

 

3. 豫前定은 사회의 동향, 역사의 흐름을 읽고 참여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올바른 결과를 내기 위한 기계적 인과간계의 전제 조건으로 豫前定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豫前定은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투명한 정신, 옹골찬 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야합과 흥정이 설 땅이 없습니다.  

 

4대강 사업과 내년도 예산 문제를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들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지배집단의 야합과 흥정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전혀 豫前定이 안 된 상태에서 저마다 준동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삶과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모르쇠하고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豫前定하려면 저 "높으신 분들"은 저자 거리로 나와야 합니다. "특별함"의 기득권과 편견을 타고 앉은 채 이루어지는 仁은 없습니다, 중용은 없습니다. 지도자입네, 원로입네,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기만 하는 자리에서 냉큼 내려와 백성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들의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舜)임금의 실천인데 누가 감히 여기에 토를 달 것입니까?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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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네 번째 문단입니다.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凡爲天下國家 有九經 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 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不怨 敬大臣則不眩 體群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試 餼禀(廩)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所以行之者一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배우기를 좋아함은 지(知)에 가깝고 실천을 힘씀은 인(仁)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며,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면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며,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안다.  

  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림에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니 몸을 닦음과,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과, 친족과 하나가 되는 것과, 대신을 공경하는 것과,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과,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과,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과,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과,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을 말한다.   

  몸을 닦으면 곧 방법이 생기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면 미혹되지 않으며, 친족과 하나가 되면 제부(諸父)와 형제가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을 내 몸처럼 여기면 선비들의 보례(報禮)가 중후하게 되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들이 분발하게 되며, 백공들을 오게 하면 재물을 쓰는 것이 풍족해지고,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사방 사람들이 돌아오며, 제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면 천하가 두려워하게 된다.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정복을 갖추어 입고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을 닦는 수단이고, 아첨하는 자를 제거하고 여색(女色)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생각하고 덕(德)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현자(賢者)를 권면하는 수단이며, 그 지위를 높이고 그 녹(祿)을 무겁게 해주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 하는 것은 친족과 하나 됨을 권면하는 수단이고, 관직의 수가 많아져 지휘권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충심(忠心)으로 대하고 믿으며 녹을 많이 주는 것은 사(士)를 권면하는 수단이고, 부역을 때맞게 하고 세금 걷는 것을 줄이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보수를 일의 능력에 맞게 하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착한 것을 칭찬하고 잘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수단이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을 붙잡아주며 조회[朝]와 초빙[聘]을 때에 맞게 하며, 보내는 것을 많이 하고 받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은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수단이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나 그것을 행하는 수단은 하나이다.  

 

2. 다섯 가지의 보편적인 도와 세 가지 보편적인 덕을 거쳐 아홉 가지 다스림의 칙을 말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길고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일일이 풀어 설명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시대 최상위 정치 지도자를 대상으로 강론한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라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성질의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히려 강조할 것은 수신(修身)으로 풀어서 수신(修身)으로 매듭지은 사실입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 또한 다함없이 실천의 결기를 닦는 평범한 일에서 비롯한다는 내용입니다.  부단히 깨어 있어 찰나 찰나를 챙기는 닦음, 그 미세한 통찰을 소홀히 하고서는 천하와 국가의 다스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 사회의 통치자 위치에 서는 꿈을 지닌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사적 실천에서 떳떳함을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회의 어두움을 틈타 온갖 부조리에 발을 담그며 이득을 누려 왔다면 통치자 자리에 앉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통치자 자리조차 이득의  하나로 여기는 판국이라 이런 말도 우습습니다만 사적 이익 추구 능력을 공적 통치 능력과 혼동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런 혼동의 후폭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새삼 수신(修身)이란 말의 향기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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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세 번째 문단입니다.  

 

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 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交也 五者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   

 

천하의 달도는 다섯 가지가 있고 이를 행하는 소이는 세 가지가 있다.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 다섯 가지가 천하의 달도이다. 지, 인, 용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소이는 한 가지이다. 혹 나면서 알며 혹 배워서 알고 혹 고심해서 알지만 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혹 편안하게 행하며 혹 이롭게 여겨서 행하며 혹 애쓰고 억지로 힘써서 행하지만 그 공을 이루는 점에서 보면 같은 것이다.  

 

2.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도가 펼쳐지는 인간관계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까운 이웃을 거쳐 사회정치적인 큰 지평까지  아우릅니다. 각각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지만 근본에서 일치하는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커 보이는 정치적 인간관계의 이치 또한 "평범함에서(庸) 벗어나지 않습니다(中)".   

 

이러한 도리를 바로 알아(知) 어질고(仁) 날래게(勇) 실천하는 것이 세상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덕입니다. 세 가지를 따로 나누어 각각 덕이라 이름 하는 것, 그리고 다시 둘로 나누어 지와 행을 논하는 것이 오래된 명사적 독법 전통이지만 중용의 실천적 맥락을 놓치는 안일한 해석입니다.  

 

아는 것도 실천입니다. 실천도 아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지식은 처음부터 지식이 아닙니다. 깨달음 없는 실천은 처음부터 실천이 아닙니다. 적어도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知는 行知이며 行은 知行입니다. 실천 없는 명상적, 관념적 중용에는 중도 없고 용도 없습니다. 중용의 외양을 취하더라도 알아차림 없는 동작이라면 가치로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처한 상황이 있는 까닭에  완벽하지 않은 수준에서 사회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므로 지니는 현실적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닦아야(修)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신(修身)입니다. 실천 자체를 부단히 최고의 경지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입니다. 허나 최고의 경지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므로 자신의 실천이, 아니 자신 자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확인하는 것이 수신의 핵심입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도 동사적 독법의 필요성이 나타납니다. 반복되는 "일야(一也)"는 "오직 그렇게 다함없이 닦아 나아가야 한다."는 역동적 격려요 요청입니다.   

 

3. 우울증으로 고통 받는 분들과 대화치유 과정을 함께 하다 보면  매 순간 그 분들이  제가 마법적 구원자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에 마법은 없습니다. 치료자라 이름 하지만 저 또한  우울의 깊은 우물 속에 영혼 얼마를 담근 채 살아갑니다. 사실 누구도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믿으며 환우들과 동행합니다. "제가 꼭 한 걸음 앞에서 걷겠습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그만큼 낫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조금 먼저 경험했을 뿐입니다.  그 이상의 경지, 그 이상의 자격을 갖춘 자 과연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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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두 번째 문단입니다.   

 

故君子不可以不修身. 思修身 不可以不事親. 思事親 不可以不知人. 思知人 不可以不知天.  

 

그러므로 군자는 그 때문에  몸을 닦지 아니할 수 없다. 몸을 닦으려고 생각한다면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부모를 섬기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알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2. 앞 문단에서 이미 신(身)을 실천이라 번역한 바 있습니다. 군자가 군자인 증거는 실천에 있습니다. 말과 명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생득적인 것도 아니고, 한 번 하면 영구히 자격증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간단없이 닦아야(修) 하는 것입니다. 삶의 조건은 그 때 그 때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런 실천의 수련은 부모(친족)를 모시는 일에서 처음 사회적 위치를 획득합니다. 이는 단순히 효의 가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를 모시는 행위는 부모를 닮는 행위입니다. 부모를 닮아야 하는 까닭은 부모가 바로 사회적 실천의 발원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한테서 중용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모시듯 이웃(人)을 알아 갑니다. 그 이웃은 부모한테서 시작된 생명 연대의 한 지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안다는 것은 물론 인식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소통의 앎입니다. 삶을 공유하는 앎입니다.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앎입니다. 서로 大同의 원리를 깨우치는 앎입니다. 더불어 성찰함으로써 성취를 일궈내는 앎입니다. 결국 그 이웃은 남이 아닙니다(天下無人)!  

 

이웃을 아는 것은 하늘 이치를 아는 것에 닿아 있습니다. 하늘 이치는 생명의 연대성이니 이것이 곧 仁이요, 중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誠微(제16장)입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숭고한 하늘 이치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웃과 섞는 일상의 삶, 부모 섬기는 평범한 실천이 그 고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3. 이른바 "큰 일", 즉 정치나 언론이나 거대 기업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걸핏하면 국민을 상대로 훈계하는 버르장머리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아는 바입니다. 자신들의 일이 특별하고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병역 미필자인 여당 대표가 보온병을 들고 포탄이라고 떠드는 기사가 큼직하게 나왔습니다. 포탄과 보온병을 구분하는 일은 하찮은 것이고 여당 대표하는 일은 큰 것이어서 그토록 뻔뻔한 것이라면 그 하찮은 일하러 연평도 날아가 구태여 망신은 왜 당하나 싶습니다. 국민에게 점잖게 훈계나 하고 앉아 계셨으면 그 아니 좋았겠습니까.  

 

하늘의 이치는 커녕 이웃의 삶도 모르고, 이웃의 삶은 커녕 가족의 삶도 모르고, 가족의 삶은 커녕 제 한 몸 닦지도 못하는 주제에 군자연 하고 중용을 주워섬기는 무리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공자의 한탄은 그대로 오늘 우리의 한탄이 됩니다. 오호, 통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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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의 문서들은 대개 오랜 세월에 걸쳐 편집, 가필된 복합 저작물입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손을 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더하거나 덜어지고, 심지어 왜곡까지 되면서 오늘날의 최종(?) 텍스트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중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사로 비정되는 최초 저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동안 숱한 손길이 이런저런 변형을 가한 것이지요. 그래서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중복도 있고, 억지로 우겨넣은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문가의 문헌비평이 세밀하게 밝혀낼 문제입니다. 저는 다만 제 삶과 인격 수준에서 그런 어기(語氣)와 내용을 가려 보고 나름대로 독법을 선택하면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용>을 읽기 시작할 때 텍스트 전체를 보고 그 구조를 살피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심스레 가다 보면 그럴 때가 오려니 하고 있었는데  제16장에서 많이 망설이게 되더니 급기야 제17장부터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공부를 멈추고 유심히 <중용> 뒷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중용> 텍스트는 대략  16장 내지 20장을 경계로 하여 앞 뒤 내용이 다른 듯합니다. 제2장에서 시작한 전반부는 중용에 대하여, 후반부는 성(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1장은 이런 차이를 통합하기 위해 주희가 집어넣은 서론 또는 총론이 아닐까 합니다.    

 

문제는 제16장부터  제20장까지입니다. 제 눈에는  제17장에서 제19장은 확실히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추정컨대 후대에 끼워 넣어진 듯합니다. 이 판단에 의거 우리 읽기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문헌비평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단이라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억지스러워 보이는 내용을 구태여 견강부회하거나, 동떨어진 상태 그대로 문맥과 상관없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공부해 보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16장도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와서 만만치 않게 낯설기는 합니다. 허나 앞서 읽은 대로  성미(誠微)를 중용의 다른 묘사로 읽으면 제16장이 <중용> 전반부와 제20장 이하 후반부를 잇는 지도리로 자리매김 되어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제20장 내용도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다. 다섯, 셋, 아홉 등 숫자를 통한 열거 어법 모두가 공자의 오리지널 어록인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중복된 문장이 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착잡이 일어났음에 거의 틀림없습니다. 誠을 직접 언급하는 후반부부터 진정성이 있는 본문으로 보고 싶으나 큰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전반부를 誠을 설명하기 위한 토대쯤으로 이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냥 처음부터 진행합니다.    

 

2. 제20장 본문 첫 부분입니다.  

 

 哀公問政. 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蒲盧也. 故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修道以仁.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宜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애공이 정치를 물었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문왕과 무왕의 정치는 방책에 펼쳐져 있으니 그러한 사람이 존재하면 그러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치는 멈춘다.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하고 땅의 도는 나무에 민감하다. 대저 정치라는 것은 창포나 갈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데는 몸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데는 도를 가지고 하며, 도를 닦는 데는 인(仁)을 가지고 한다. 仁이란 人이니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고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친족과 하나 됨에 있어서의 순서와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의 등급이 예가 생겨나는 바탕인 것이다.  

 

3. 정치는 단순히 제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사람의 존부에 정치의 존부를 일치시킨 것입니다. 좋은 토양에서 나무가 잘 자라나듯 훌륭한 정치가의 손에서 바른 정치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를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故爲政在人).    

 

그러면 훌륭한 정치가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의 실천(身)을 보고 압니다. 그 실천의 수련이 도리에 의거하는가를 보고 압니다. 그 도리의 수련이 어짐(仁)에 의거하는가 보고 압니다. 요컨대 어짐을 실천하는 사람이 훌륭한 정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짐이란 무엇일까요? 仁者人也. 초간단 답인데, 그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질다는 것은 사람답다는 것이다, 어진 사람이야말로 사람이다, 대략 이런 뜻으로 읽어서 큰 무리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해소하는 일은 일단 뒤로 미루고 문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친족과 하나 됨이 으뜸이다(親親爲大)라는 말이 仁者人也의 이를테면 콘텐츠입니다. 물론 친족이란 말이 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마치 친족처럼"으로 읽으면 금방 괜찮아 집니다. 마치 친족처럼 사람과 사람 관계가 연속성, 일치성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어짐(仁)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짐(仁)이란 생명의 연대성입니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뒤에 의(義)란 의(宜)이니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義者宜也 尊賢爲大) 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대구(對句)임에 틀림없지만 그 위상이 문제입니다. 義를 仁과 대등한 범주 놓으면  仁이란 가치로 훌륭한 정치가를 판단한다는 전체 논지가 어그러집니다. 그러므로 형식적 대구를 전체 뜻에 종속시켜 義를 좁은 의미의 仁의 대칭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높이는 인간관계는 親親의 연속성과는 달리 불연속성을 전제해야 합니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불일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는 말이 바로 親親之殺 尊賢之等 입니다. 쇄(殺)는 차이가 없다는 뜻이고 등(等)은 차이가 있다는 뜻이니 확연히 구분됩니다.  

 

결국 어짐(仁)은 생명의 수평적 연속성을, 옳음(義)은 수직적 불연속성을 담당합니다. 이 구별된 가치의 통합에서 예가 생깁니다(禮所生也). 그러면 禮가 仁의 상위개념일까요? 아닙니다. 禮는 仁을 성찰적으로 살핀 仁의 다른 이름입니다. 미분화적 仁은 그저 親親之殺지만 분화적 성찰 이후 仁은  尊賢之等이라는 義의 관점을 포괄하는데 바로 그것을 禮라 이름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로 보면 仁이 禮의 근원입니다. 親을 거치지 않은 賢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은 차등은 그 자체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역사적 사실로 보면 仁은 이상태(理想態)이고 禮는 현실태(現實態)일 것입니다. 불연속적 계층구조가 정치의 질서를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평등의 이상은 현실 정치의 폭압과 착취를 막기 위한 가치적 영원회귀로서 작동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禮에 발을 디디고 仁을 추구하는 실천 과정이 바로 바른 정치인 것입니다. 문득 20세기의 전설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항상 불가능한 꿈을 꾸자!"  

 

 4. 바른 정치의 목표이자 기준인 어짐(仁)이 모든 인간이 "마치 친족처럼" "하나 되는" 생명의 연대성을 뜻한다면 그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 파자(破字)해서 글자 뜻 새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 경우는 어쩐지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아 그리 해 보지요. 간결합니다. 仁은 두(二) 사람(人)입니다. 둘이 모여 이루는 그 관계가 사람됨의 본령이라면 바로 그게 소통, 즉 관통과 흡수 아니겠습니까?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어짐(仁)이 곧 중용입니다! 서로 소통함으로써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어짐(仁)이라는 말입니다.  

 

5. 그런데 본디 人은 보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동이(東夷)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다시 보면 仁者人也라는 말은 어짐이란 동이족의 가치 내지 품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자 사상의 핵심인 仁, 즉 中庸이 동이족의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라는 말입니다.   

 

이리 말하면 대뜸 우파 민족주의를 떠올리시며 실소를 머금으실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막무가내 민족을 주려 끼고 열 올리며 현실 부조리를 외면하는 우파 민족주의 할 생각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仁, 즉 中庸이 오늘 이 땅에서 사회정치적 실천이자 이념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동이족임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가소롭고 기막힌 자기기만인가를 말씀드리자 합니다. 

 

입만 열면 공맹을 말하고 도리를 논하는 이 땅의 이른바 주류-보수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매판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민족, 국격 운운 뒤에 숨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끊임없이 거짓말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찌 공맹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仁을 안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중용을 실천한다고 할 것입니까? 이들이 어찌 동이족임을 자랑할 자격이 있다고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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