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떠나는 여행 - 중독치유와 새 삶을 위한 몸 중심 심리요법
크리스틴 콜드웰 지음, 김정명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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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년에 나온 책인데 저는 뒤늦게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선 자리에서 skim 할 때, 아, 이 책 만만치 않구나, 했습니다. 역시나 읽을수록 곰곰 생각하게 하는 바람에, 적어도 제겐 이 책이 최근 읽은 그 어느 책보다 무게가 있었습니다. 본문만으로 따지면 200쪽도 안 되지만 통독하는데 꽤나 긴 시간이 들었습니다. 한 문단에 해당하는 한 문장이,  한 chapter에 해당하는 한 문단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이 책이 각별한 인연으로 엮인  연유를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은 제가 이 책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야겠습니다.  제 자신과 환우의 구체적 정황을 떠올리며 치유 차원에서 읽었다는 말입니다. 본문과 구체적인 사람을 일치시키며 읽었기 때문에 관통과 흡수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이 책에 담긴 사상과 내공이 가히 압도적인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틱낫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과 치유를 했다고 하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유장하고 해체적인 불교사상에다 여성 특유의 직관과 생명감각을 버무려 넣었습니다. 영어적 표현이 감당하지 못하는 내용을 담은 어휘가 출몰하는가 하면 고도로 절제된  분위기 가운데서도 화들짝 오감을 깨우는 묘사가 나타나 순식간에 핵심을 꿰뚫기도 합니다.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엉덩이를 들어 올려 춤을 추어야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전광석화처럼 온 몸을 관통하는 지적 오르가즘이랄까....... 글쎄요, 물론 저만의 punctum일 수도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사실 이런 순간에서 책(libre)은 텍스트(texte)가  되는 것일 테지요. 살아 움직이는 인연의 꽃을 피워내는 특이점이자 경계 사건입니다. 뜻하지 않은 은총이지요.  

2.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독이란 중독성 물질을 복용하는 식의 행동 양태라기보다 우리 몸이 참다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그 직접경험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말한다. 어느 중독성 행태에서든 그 출발점은 우리가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중독이란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경향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지금 거대한 중독문명 한 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끼들끼들 웃으며 허공에 붕 뜬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중독은 우리가 자기혐오라는 벌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동안 위락용 영화를 계속 즐기도록 대형화면 TV를 감옥 속에 갖다놓은 것과 같다." 

준열하기 그지없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즐기고, 기대고, 그리워하는 수많은 감각이 실제 느낌이 아니라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래서 우리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어떻게 나선구조 속에서 확대재생산 되는지 그 이치와 과정을  매우 함축적이면서도 세밀하게 그려 놓고 있습니다.

나아가 몸을 되찾는 일을 각성, 고백, 수용, 행위의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례까지 들어가며 조근조근 이야기하지만 언어의 깊이는 대단합니다. 부분 부분 모호한 표현이 없지 않으나 번역 문제도 적지 않은 만큼 독자가 행간을 살펴 읽으면 오히려 그래서 더 풍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독과 치유 과정에서 호흡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호흡의 멈춤을 어떻게 치유 과정 안에 위치 지을 수 있을까, 새로운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과정에 걸쳐 관통과 흡수 문제를 매우 감각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문제의식은 30년 이상 제 사색과 강의와 글쓰기를 이끌어 온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3. 요컨대 이 책은 인간인 한 본능적으로 그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중독의 문제를 몸 중심으로 심도 있게 다룬 특별한 책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중독하고 무슨 상관이람?" 하시겠지요.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독은 이미 우리 안에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아니 중독은 우리를 넘어 범람하고 있습니다. 종당 중독은 중독 자체도 넘어서 문명을 깡그리 말아먹을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중독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몸을 되찾는 일(Getting our boddies back: 이 책의 원제목)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몸을 되찾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참된 생명감각을 되찾는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인류에게 남은 단 하나의  선택입니다. 선입견 내려놓고 이 책을 찬찬히 읽어 끝에 이르면 저자의 마지막 말이  소리 없는 벼락이 되어 그대 가슴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계속 걸어라. 그리고 여러분이 어디쯤 있는지 찾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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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자아
디디에 앙지외 지음, 권정아.안석 옮김 / 인간희극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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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아주 오랜 동안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 삶의 뒤집혀 맞물린 뫼비우스적 연장면에서 사십 대 중반에 의학, 우리 사회에선 모두 한의학이라 이름하는 학문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아무도 가지 않았던 '상담치료 하는 한의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남 없이 그 길을 낯설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한의학과 한의사에 씌운 편견의 굴레를 벗기고 나면 그닥 이상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폭넓고 깊게 마음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지요.  

그 동안 제가 깊게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우울과 불안, 특히 우울이었습니다. 한의사로서  어떤 치료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차별적 지평을 발견하기 위해 지난 십 년을 꼼짝 않고 그 질문을 궁굴려 왔습니다. 나름대로 한약, 침, 수기(手技), 상담의 독자적 패러다임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피부와와 마음을 하나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피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배워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마음의 문제와 마주세워 소통과 통섭(通攝)을 꾀하는 안목으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우리사회, 특히 피부 특화해서 '대박나는' 의사, 한의사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개념, 즉  피부=미용이라는 등식에 대한 저의 비판적 선입견이 작용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초저온 공기 요법으로 피부온도를 섭씨 0도로 낮추어 전신의 회복 기전을 급격히 활성화함으로써 각종 질환, 심지어 우울과 불안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확 뚫리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어허! 

그 동안 마음의 문제는 다름아닌 "경계"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몸의 문제 또한 그렇고, 그 둘은 결국 하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찰나에 알아차리게 된 계기였습니다. 피부는 면역의 최전선이고 면역은 나와 나 아닌 존재의 구별과 관련된 문제이니 갈 데 없이 피부는 내남의 "경계" 그 자체이자 의미입니다. 이 의미가 바로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여러 층과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상호작용 아닌 것은 없으므로 부득불 "경계" 사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이 깨달음의 와중에 눈에 벼락처럼 들어온 책이 바로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입니다. 제목만으로 이미 제게는 천만 마디 말 이상의 울림을 주었습니다. 내용 여하와 상관 없이 크낙한 깨달음으로 제 가슴을 열어젖혀버렸습니다. 책을 대하면서 저자가 정신분석의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큰 울림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빌헬름 라이히가 떠올랐습니다. 아, 이 사람의 피부와 라이히의 근육은 반드시 만나겠구나, 예감은 적중했고, 거기서 사유는 일망무제로 그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책, 어렵습니다. 거침없는 영역 가로지르기와 전문 용어 쓰기, 과감한, 그래서 독자에게는 불친절한  압축과 생략, 게다가 처음부터 이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어서 드러나는 비조직성, 마지막으로 지은이에게 함몰되어 허위적거리는 듯한 번역.......사실 웬만한 프랑스어 학부 전공자 이상의 프랑스어 감수성을 지녔다고 '자뻑'하는 저조차 도무지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문장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어렵거나 모호한 경우, 차라리 원어 낱말과 문장을 괄호 속에 넣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눈에 띄거나, 뜻이 잘 들어오거나 하는 부분부터 발췌해 읽으면서 넘어가더라도 좋은 책임은 분명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말고 재독을 거듭하면서 문맥과 행간을 간취하면 책의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할 것입니다. 이런 유의 프랑스 책을  만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번역자들이 치밀하고 농익은 모국어로 다시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납니다.  

3. 지은이의  전복적 명제는 이것입니다. 

"자아는 피부다." 

이 말을 역으로 하면 "피부는 자아다."입니다. 사실 이 말만으로도 전복적입니다. 피부를 그런 맥락으로 읽어 본 예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은이는 주어와 술어 위치를 바꿈으로써 더 한층 날카롭게 나아갑니다. 피부가 자아의 부분집합이 아니고 자아가 피부의 부분집합인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명제로써 한 순간에 피부는 광대한 은유가 됩니다. 피부이자 피부를 넘어선, 현실과 상상을 가로지르는 절묘한 실재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엄마와 아기가 살을 부비는 정밀하고 사소한 일상부터 반생태적 제국·자본주의 문명의 제약 불가능한 경계 란까지 실로 엄청난 폭량의 은유가 피부라는 경계, 즉 "가장자리"에서 요동치는 사건입니다. 피부는 다만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며 역동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지은이는 피부의 기능 여덟가지를 말합니다. 지탱하기, 담아주기, 항상성, 의미, 교감, 개별화, 성욕화, 에너지화.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피부의 기능이라기보다 피부라는 사건의 다양한 발현 양식이라 해야 하겠지요. 이런 차이는 지은이 또한 서구적 사유방식, 즉 명사적이고 주객이분법적인 생각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서 왔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가 시종일관 견지하고 있는 자세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오늘날 서구문화에서 나타나는 관건적 정신정애가 경계선장애이고 보면 지은이의 선언은 현실적 근거에 터 잡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우울증, 불안장애, 자기애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이름의 정신장애의 근저에 바로 "경계"의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전천후적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밀한 상황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와 우리사회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의 구체적 과정도 달라야 할 것입니다.  

서구 문화는 본디부터 개별적 인격의 쌍무적 계약 관계를 근간으로 합니다.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 전통과는 사뭇 판이합니다. 그래서 이 책도 예컨대 접촉 금지와 초월을 말하는 대목에서 서구적 이원론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합니다. 전반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유연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근본 원리가 대칭성이라는 사실, 하지만 그 대칭은 스스로 거듭 부정을 통해 서로 비춤으로써 진정한 무애자재(無碍自在)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은이의 사상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을 아주 좋은 책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아니 우리 피부감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은이를 넘어서는 우리 독서는 피부의 심오함(폴 발레리)을 "명징한 모호성"으로 흥건하게 말랑말랑하게, 그래서 힘있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통찰을 돋을새김으로 가르쳐준 지은이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거듭 하고 있습니다. 

4. 거의 전 생애를 아토피에 시달리며 우울에 젖어 사는 한 제자에게 이 책을 내밀었습니다. 책 제목만 보고 한참을 흐느껴 울더군요. 그래서 올 겨울 이 책 부둥켜 안고 깨쳐라, 일러주었습니다. 피부-자아(Le Moi- Peau)라는 화두가 삶 자체가 되어버린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치유독서도 시작했습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도 삶이 무한히 열린 깨침의 시공간임을 알게 한 많은 벗들과 더불어 이 책으로 또 하나의 경이로움을 열어가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삼가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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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치유 여행 - 버림받은 후에 나에게로 이르는 길
수전 앤더슨 지음, 안인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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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특히 두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지니고 있는 커다란 인습적 사고 하나에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제 제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딱딱한(hard)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봄으로써 말랑한(soft) 사건의 치명성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슬픔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림받아 홀로 남은 것에 대한 슬픔은 대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장례식도 없고 애도 편지도 없다. 오히려 당신은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사람으로 여겨진다.......(하지만) 죽음을 애도하는 경우 슬퍼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다. 그것을 소중히 품고 그로써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사랑하는 사람이 관계를 끝내기로 선택한 경우 당신이 느꼈던 사랑은 뺏긴 사랑이 된다. 파트너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당신에게서 사랑을 거두어간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 의미를 갖는 상실이다. 사랑의 상실과 거부는 당신 자신에 대한 핵심적 믿음에 영향을 주는 특별한 고통이다......." 

사별(死別)이 지니는 분명한 격절성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생이별의 엄혹한 영향력을 뒷전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다른 곳에서 말하듯 사별은 자연의 사건이지만  생이별은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가하는 모욕의 사건입니다. 생이별, 즉 버림받음은 그야말로 "산 채로 포 뜨기"를 당하는 고통입니다. 

저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버림받음을 예시해줍니다. 물론 그 예만큼 다양한 예화가 실리지 않은 면은 좀 아쉽지만 우리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안내서로서 손색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2. 또 하나는 저자가 상처받은 내면아이와 외부아이를 선명하게 구분지어 세밀하게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는 보통의  내면아이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인격적 개별화가 서구인이 아닌 우리에게는 더 낯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면아이와 어른자아가 대화를 한다'는 개념만으로도 어색한 우리임에 비춘다면 더 혼란스럽기도 하겠지요. 이런 혼란을 위해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까운 이해를 보태 보겠습니다.

내면아이는 버림받아 격정상태(emotionalism)에 있는 우리의 정서를 의미합니다. 외부아이는 그런 격정상태에서 보이는 원시적(성숙하지 않은, 그래서 보호한다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파괴하는) 방어 반응입니다. 저자는 이런 방어 반응에 관해 무려 100가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까이 있는 타인을 위해서 이 부분을 두고두고 음미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사회를 어렵게 만드는 소통 부재의 현실을 염두에 둘 때 버림받음의 슬픔을 서로 인정하는 치유적 관점을 지니게 됨으로써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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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공부 - 슬픔, 절망, 두려움에서 배우는 치유의 심리학
미리암 그린스팬 지음, 이종복 옮김 / 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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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신의 삶과 인격이 녹아든 글쓰기를 대할 때 내용의 여하를 떠나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누구든 이런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심리치료사인 저자는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적인 경험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영역 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삶을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직성 그 이상의 이미를 지닙니다. 이는 용기가 필요한 사회적 선언이자 실천입니다. 그 무엇보다 저는 이런 면에서 이 책이 주는 울림을 깊이 느끼고 공감합니다. 

물론 여러 대목에서 독서를 멈추고 곰곰이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동의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가령 그의 삶에서 경험한 고통의 폭량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감이 있는가 하면 그가 지닌 투명한 영성과 직관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에 느끼는 공백감도 있습니다. 위빠사나 등 동양적 수련으로 쌓여진 내공이 때로는 격절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 책은 실천적 측면까지 진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현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름 지을 뿐만 아니라 밋밋한 인지 감각을 화들짝 일깨워 돋을새김으로 묘사하는 영롱한 통찰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귀 기울인 대목은 취약성에 열린 사고, 맥락화, 창조성이 지니는 치유능력 등이었습니다. 가까이 두면서 틈틈이 몇 번 더 읽으려고 합니다. 일독만 하고 꽂아두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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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심리학 - 익숙한 인생의 가치와 결별하라
폴 페어솔 지음, 전경숙 외 옮김 / 동인(김영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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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저자 스스로 이 책이 출판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듯이 저 또한 (번역된) 이 책이 우리사회에서 주목받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골적' 사유로 주류적 시장을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배후가 누구냐고 다그칠 판이니 읽어 본 사람이 어디 권유나 할 수 있겠습니까?^^ 

2.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결혼과 성 치료 센터를 운영하는 신경심리학자이자 임상가입니다. 또 그 자신이 말기 임파종을 극복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삶과 학문을 통해 터득한 진실은 지금 미국을 필두로해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이른바 '자기치료주의'는 사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기치료주의'는 번역 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기는 하나 조금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아마도 그 내용은 이쯤 될 것입니다. 자기를 단절적 자율적 존재로 전제하고 그 자아도취적 환상을 최대한 부추기는 극단적 프로세스를 동원하여  이 사회에서 승자가 되도록 선동하는 사이비 마법. 

자기 긍정, 적극적 사고방식, 신념의 기적.......이런 유의 익숙한 표어들로 도배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기계발/치유/위로의 기술은 이미 우리 사회를 제압하는 통치이념이자 종교적 신조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런 풍조를 깡그리 무시하고 정반대의 강령을 제시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입니다.  

3. 저자의 사유 방식과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엔 불쾌할 수 있지만 들어 보면 과연 그렇다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치면 안 될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른바 자기치료주의가 오늘날 이렇게 압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하는 의문의 지점이지요. 생각컨대 이는 서구 정신사의 거대한 파동적 흐름을 일별해야 풀리는 문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자의 사유는 각성된 고대(古代)정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을 각성된 고대정신이라 할까요? 중세로부터 야기된 정신사적 왜곡을 바로잡아 원래 자리로 복귀했기 때문입니다.  

중세는 교회의 이름으로 초월적 인격신 아래 인간의 개별성을 매몰시키는 억압의 시대였습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원죄 교리를 동원하여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자기부정을 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중세인은 총체적으로 자기모멸적 인간이었습니다. 

이 어두운 중세를 깨부순 것이 근대입니다. 인간의 개별성, 그리고 자기긍정을 신 앞에서 혹은 신을 짓밟고서 선언한 것이지요. 그 근대 정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학적 무기를 앞세우고 지금까지 승승장구해 왔습니다. 이런 맥락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한 통속 기독교의 전면적 세속화가 바로 자기치료주의인 것입니다. 

그리고보면 자기치료주의는 얄미우나마 근대적 정신 혁명의 계보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숙고하게 합니다.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처럼 일도양단으로 '자기긍정'을 때려엎을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우울증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조금 피상적입니다. 우울증의 본령이 지나친 자기부정 타인긍정에서 오는 존재의 무의미감, 아니 무(無: nothing) 감각일진대 거기다 대고 자기긍정을 버려야 한다고 꾸짖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저자의 명제가 전체적으로 전략적, 의도적인 것임을 십분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적인 이의를 가지고 그의 사유 모두에 제동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고유한 컨텍스트를 지니고 있는 법이므로 상호 소통이 일어나도록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와 독자는 근대 정신의 극단화, 세속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은  개별자인 측면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타자와 분리될 수 없는 연대적 존재라는 사실, 더 나아가 보편적 우주와 합일되는 '영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저자와 독자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4. 아무튼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꼭 한 번은 읽어 볼만한 책임은 분명합니다. '반골적' 또는 전복적 사유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상가인 저도 읽다가 가끔 책을 덮고 스스로 지녀온 생각을 진심으로 흔들어 보았습니다. 

모두에 말씀드린 대로 아마 많이 읽히지 않았을 겁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그래서 더욱 권해드리고 싶군요. 아, 출판사나 번역자, 더구나 저자와 저는 아무 인연도 없습니다.^^ 

끝으로 읽을 때 주의하실 사항 하나만 더 얹어 드립니다. 저자의 사유를 드러내는 핵심적 단어인 '신중함'은 번역이 조금 아쉬운 바, 본디 아마 mindfulness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불교의 명상이나 선(禪)에서 말하는 '마음챙김'을 영어로 옮긴 말인 듯합니다. 이것을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나름대로 숙고하여 선택한 용어인데 '신중함'만으로는 그 깊고 넓은 뜻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관련 서적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마음챙김이란 제목의 책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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