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 - 완결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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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고등학생인 제 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만화에 깊은 조예가 있는 후배의 소개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알게 되었습니다. 딸아이에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사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항께 읽었습니다. 나중엔 영화도 함께 보았지요. 딸아이도 저도, 물론 각기 다른 감각에서지만, 많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엊그제 우연히 딸아이의 서가에 여전히 꽂혀 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제 인생의 오랜 화두였던 이른바 "대칭성/양면성의 사유"를 거의 마무리하고 제 의료적 실천에까지 결합하는 crucial한 경험을 했으므로, 아무래도 책을 읽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앞뒤 문맥을 살피면서, 아, 하긴, 군데군데 재미에 이끌려 쏜살같이 나아가기도 했지만^^, 천천히 깊이 읽게 되더군요. 사실, 사회 상식으로 보아 이 나이에 이른 어른이 어찌 됐든 (아이들이 읽는) 만화책을 붙들고 음미 씩이나 하면서 읽는다는 게 희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어디에도 깃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2. 인간의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이 빚어낸 폐허, 그럼에도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또 다시, 아니, 여전히 그 무절제한 탐욕의 스펙트럼으로 발산되어 폐허의 폐허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고, 그 길에서 나우시카라는 어린 소녀가 불가사의한 힘으로 생명의 본령을 지키는 흐름을 이끌어낸다, 뭐, 이런 이야기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흥미진진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적절한 문맥에서 적절한 깊이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통찰과 철학적 깨달음이 대가란 다만 재주만 가지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해줍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심취하면서 책을 읽는구나, 하면서 문득 딸아이 기색을 살폈더니, 예상대로, 아빠, 그렇게나 재밌수?, 이런 질문이 두 눈에 써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밖에서 저녁 식사하고 걸어 집으로 들어올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다시 읽으니 참으로 예사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측면에서? 

-흠, 지난 번 아빠가 너희 학교 가서 학부모 특강할 때 말한 것 기억나지? 세계는 대칭성으로 되어 있다, 생각도 그리 해야 한다, 그게 왜 논리와 심리에 중요하냐, 뭐 그런 얘기 말야. 

-응. 근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읽었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진실에 이미 정통해 있더라구. 그래서 과연 고수가 맞다, 무릎을 쳤다니까. 

-흠. 그래? 어떻게? 

제가 딸아이에게 전해준 내용은 이러합니다. 마지막 슈와의 무덤에서 순수 빛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또 다른 탐욕을 지닌 "기술자" 신(神)과 대면할 때의 대화. 

-너희는 위험한 어둠이다. 생명은 빛이야! 

-아니,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제7권 201쪽)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이에 대해, 방금, 나우시카 때문에 대오각성한 토르메키아 왕이 게송을 읊어 화답합니다. 

-마음에 들었어. 너는 파괴와 자비의 혼돈이다!(제7권 212쪽) 

3. 저는 이 대목에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한 부분을 떠올립니다. 세번째 장, 아연 중에 나오지요.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일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51-52쪽)       

만화가가 그려낸 세계의 실상이나, 화학자이자 문학가가 깨달은 세계의 실상이나, 醫者가 알아차린 세계의 실상이나, 결국, 참으로 그러하다면, 일치하는 게 이치겠지요. 대칭을 이루는 모순이 다양한 역설을 빚어내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장관이며 파노라마, 특히 생명입니다. 타인을, 어둠을 악이라 몰아세우고, 자신만의, 빛만의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나서는 무리들이 유난히 준동하고 있는 우리사회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 때, 저들에게 이 만화를 권하면 사탄이라  저주하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소녀 나우시카는 저들을 "그림자"(제7권 196쪽)라 했습니다. 과연 그렇지 않나요?   

4. 딸아이가 제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그리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 삶의 몫 만큼 깨달아 나아가겠지요. 이 아비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읽듯 그 아이도 다시 읽으며 자신과 사회의 그림자가 아닌, 참 주체로 살아가기를 빌면서, 나우시카의 얼굴에는 제 딸아이 얼굴을, 프리모 레비 얼굴에는 제 얼굴을 겹쳐서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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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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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수아비 춤>의 조정래 작가와 <강남몽>의 황석영 작가는 모두 1943년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정래 작가가 훨씬 윗 연배라는 느낌을 줍니다. 사회적 행동 양식이나 문학 스타일의 차이와 관련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 혼자 생각입니다만.  

아주 사소한 이야기지만 <허수아비 춤>과 <강남몽>의 책 느낌도 그런 차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전자가 더 길어 보이지요. 두툼하거든요. 그러나 책과 활자의  크기, 활자 간격, 행 간격 등을 따져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출판사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우연일 테지요. 그러나 전자가 날카로울 때라도 날렵하지는 않은 것처럼 후자는 유장할 때라도 중후하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겨버릴 일만은 아닙니다. 

게다가 조정래, 하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을 대뜸 떠올리게 되니 사유 양식 자체가 어째 diachronic할 것 같고, 황석영, 하면 <장길산>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째 사유 양식 자체가 synchronic할 것 같지요. 허나 여기선 <허수아비 춤>이 오히려 synchronic하고 <강남몽>이 diachronic합니다. 어쨌거나 두 책을 연거푸, 또는 묶어 읽으면 대한민국 역사적 맥락과 사회구조적 지평의 집장태(集藏態)를 단박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2. <강남몽>은 박선녀, 그리고 길든 짧든, 깊든 얕든,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각각 어떤 경로를 밟아 강남으로 흘러들어 왔는지 날렵하면서도 유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로 시작해 군정과 독재정권을 거치며 토실한 재력가로 자리를 잡아가는 대성백화점 김진의 이야기가 그 중 압권인데요. 그의 개인사가 우리나라 근현대정치사, 특히 지배층형성사를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허수아비 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우울감이 엄습하는 통에 몇 번 책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뭐, 그리 투철한 민족주의자나  애국자는 아니지만, 민주투사는 더욱 못되지만, 식민지 논리가 갈수록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제압해 가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던 탓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준동하는 김진류의 사람들, 그들이 곧 <허수아비 춤>의 주인공들이므로, 감정의 범람을 억제하기 힘든 독서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김진을 둘러싼 김창수, 이희철, 그리고 그들의 동선과 맞물리는 사건에 따라 명멸하는 다양한 어둠의 종족들, 심지어 박정희, 김종필, 뭐 이런 대한민국 현대사를 복마전으로 만든 邪派 고수들까지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격정의 불을 지피는 저 '황구라'의 입담은, 그러나, 두 점 사이에 직선을 긋듯 날렵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 듯한 대목에서 속절없는 한 문장으로 긑이 나기도 하지요. 때로는 여백미학으로 느껴지고, 때로는 뒷심이 달리나,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강남을 말할 때, 사실, 부동산 투기와 '룸쌀롱' 낀 조폭 빼면 임현식 빠진 <허준>이고  이희도 빠진 <동이>지요. 뭔, 조폭 얘기가 이리도 길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동아 쪽에서 표절 시비를 걸어와 좀 시끄러워진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지하(地下)적' 본질을 가진 시공간으로서 강남을 일으키고 기르는 데 정치가 기여하는 바는 가히 전지전능에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윤무혁의 <강남몽>은 윤성훈의 <허수아비 춤>과 다릅니다. 진실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디를 돋을새김 하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3.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붙잡는 두 여인, 박선녀, 임정아. 비슷하고도 다릅니다. 각자의 꿈을 지니고 변두리에서 흘러들어와  강남의 '바벨탑' 대성백화점, 그것도 그 붕괴현장, 생사를 넘나드는 경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전자는 이미 강남 사모님이고 후자는 아직 풋나기 점원입니다. 전자는 끝내 죽었고 후자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가장 명징한 마음결로 펜끝을 움직였을 대목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이 또한, 저 혼자 생각입니다만.  

"....... 

 -앞으로 꼭 하구 싶은 게 뭐야?  

 -돈 벌어서 내 동생 전동휠체어 사줄 거예요. 

 -그게 비싼가? 

 -엄청 비싸죠. 집두 이사가야 해요. 평지에다 공원 근처에 이사가면 순아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고....... 

 -그래. 그거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박선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임정아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들을 지워버리고 말을 끊었다. 

 -나 재력이 있는 사람야.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박선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임정아가 천천히 말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그러구 집두요. 저는 임시직인데요. 우리 부모님은 시골서 올라와서 여태껏 일만 죽도록 하구두 산동네를 못벗어났지요. 

 -그러니까 앞으론 잘살아야지. 

 -그렇지만....... 

 정아는 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337-338쪽) 

이 대목에 이르러 허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맑게 하면, 강남으로 흘러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임정아, 그리고 그 외. 오직 임정아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우리의 뼈에 대고 긋는 비수 소리 같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지닌 사람만이 살아 남는다, 아니 살아 남아야한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삶의 자세를 지닌 사람 (모두를 상징하는) 박선녀는 살아 남지 못한다, 아니 살아 남지 못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음성 아닐까요.  

4. 오년 가까이 환우들과 고락을 함께한 제 일터가, 하필 옛 삼풍백화점 자리 발치에 있습니다. 수없이 그 앞을 오가면서 묻지 않았던 질문인데 <강남몽>을 내려놓으며 문득 던져 봅니다. 

"나는 과연 임정아처럼 이 서초동에 들어선 것일까?" 

저는 곧 이 서초동을 떠납니다. 다시 스스로 묻습니다. 

"너는 죽어서 떠나는가, 살아서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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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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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내내 우울했다는 게 작가가 독자에게 건넨 첫 마디 말입니다. 이 소설의 독자로서 저 또한 읽는 내내 우울했다고 첫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 좀 더 세세하게 표현하자면 평범하지도 못한 소시민으로서 느끼는 깊은 두려움, 무명의 醫者로서 느끼는 아득한 절망감, 그리고 그럼에도 이런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뼈에 사무친 슬픔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소설 전체 구조는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다 알 법한,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유비통신’으로 입에 올릴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어릴 적 엄마가 옷 솔기에 박힌 서캐 훑듯이, ‘두당’이 뼈에서 살코기 발라내듯이, 풀어주고 있어서 때로는 무릎을 치며, 때로는 한숨을 쉬며, 때로는 쌍욕을 해가며, 때로는 조소를 날리며 쉽게 이야기 전반을 챙길 수 있습니다.

윤성훈, 박재우, 강기준, 이 세 사람을 둘러싼 비루한 음모와 술책. 거기에 섞여드는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 정치인들의 더러워서 성공적인 거래. 섞이지 않는 ‘소수’의 고단한 투쟁. 이들을 가로지르며 무자비하게 전진하는 金權의 질주. 이 사태들의 변두리에서 속절없이, 하릴없이 독자들은 저들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저들의 너절하고 남루한 인격을 목도할수록 독자들의 막막함은 깊어갑니다.

손목에 억대를 후가하는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도 주눅 드는 ‘사두품’ 골든 패밀리의 열등감조차 뒷목을 뻣뻣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육두품’을 거쳐, 로열패밀리임에랴. 想像不可之大本. 진골, 성골로 갈수록 인간과 인생 사이는 멀어지는데 현실 세상은 한사코 탐욕, 교활, 언변을 갖추어 성공한 사람과 훌륭한 사람을 동일 개념으로 몰아가니 도무지 ‘근본 없는 것들’은 마음 둘 바를 알지 못합니다.

이치를 따지고 보면 저들이 주무르는 엄청난 돈의 주인은 바로 ‘근본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탐욕, 교활, 언변으로 빼앗아 ‘저들만의 천국’을 만들었고, 도리어 저들이 돈의 주인을 ‘근본 없는 것들’로 날조했으며, 날조 당한 사람들은 실제 그런 줄 알고 살아갑니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할 의무를 지닌 것이 작가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유비통신’인지 모르지만 모 재벌가에서 작가에게 접근을 시도했다는군요. 물론 의도는 빤합니다. 그 때 그 제안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태백산맥>을 쓴 사람입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이 말을 듣는데 몇 가지 생각이 겹쳐서 흘러가더군요. 과연 그 재벌가답다, 과연 조정래다,  과연 나는, 그럼.......어허, 이런! 그렇게나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남이 써놓은 글 읽고 나서 거기다 토 다는 일이나 하는 주제에 두려워한들 뭘 하며, 절망한들 뭘 하며, 슬퍼한들 뭘 하나. 어느 날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이 많은 책 가운데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이 없다니, 나는 대체 평범한 사람인가, 평범한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인가, 불쑥 의문을 품었던 기억과 정확히 맞물리는 생각입니다.

그럼 또 누군가 말하겠지요. 그런 당신 글 읽고 댓글 한 줄조차 달지 못한 채 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아니 당신 글 읽는 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더, 더 많지 않은가, 호강에 겨운 자기모독 아닌가.......어허, 이런! 그렇게나 말입니다. 이런 의문을 주고받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를 키워 가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정말 작가가 말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박재우가 이렇게 말했거든요.

아까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힘에 의해 80년대 군부독재가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예, 그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들 또한 그 경험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경제 민주화’ 운운해 가며 다시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정치’라는 것과 ‘경제’라는 것의 차이를 모르고 설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군부독재 30년이 국민들에게 준 것은 무엇입니까. 억압과 공포 두 가지뿐입니다........경제는 전혀 다릅니다. 경제가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정치와 정반대로 꿈과 희망입니다. 오늘 고생한 만큼 내일은 더 잘살게 된다.......모든 사람들이 더욱 더 잘살기를 원하는 한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가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어떤 종교의 주문보다도 신통력이 막강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니까 아무 염려 안하셔도 된다 그겁니다.”(408-412쪽)

강기준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는 점입니다.......더욱 더 잘살게 된다는 희망과 꿈을 품은 자본주의 열차의 승객들은 절대로 중간에 내릴 수가 없습니다.......그자들이 떠들어대는 소리는 그 열차에서 뛰어내리라는 소린데, 그 소리가 잘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고 있는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있습니까. 그자들은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설쳐대는 아마추어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한 주먹 감도 안 됩니다.......전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413-415쪽)

그리고 두 사람은 인간에게 깃들어있는 재물욕심 때문에 대중은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있다고 단호하게 결론짓습니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대중. 깨어서 저항하는 민중. 앞은 현실이고 뒤는 당위입니다. 이 둘의 경계에서 고뇌에 찬 싸움이 벌어지겠지요. 책을 덮으면서 새삼 허수아비 춤이라는 제목을 생각해 봅니다. 정녕 허수아비 춤을 추는 자는 누구인가?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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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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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휴전>이라는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이중성으로 치밀하게 직조된,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symmetry 또는 chiasmus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포로가 된 사람들이 죽음을 전제한 닫힌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짙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휴전>은 포로에서 놓여 난 사람들이  삶을 전제한  열린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옅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큰 틀은 전혀 다르지요, 이렇듯.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임에도 펼쳐지는 인간성의 파노라마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전혀 같다고 할 수 있는 면들이 전편에 걸쳐 드러납니다. 사실, 휴전은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닙니다. 끝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질서하고 전쟁적 탐욕이 여전히 작열합니다.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풀어져 있고 평화적 역동이 육감적으로 준동합니다.  

이런 상황을 곰곰 들여다보면 휴전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메타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면서도 전쟁이 아니고 전쟁이 아니면서도 전쟁인, 역설. 이것은 <휴전> 전체를 가로지르는 통찰입니다. 이런 통찰에서 필수불가결한 캐릭터가 바로 모르도 나훔이란 인물이지요.  

" ......."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 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라거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도래했다. 그런데 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 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 (77-79쪽)  

사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보면 온갖 이름의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사이를 평화기라 하는 것보다는, 휴전기라 하는 게 맞고, 그 휴전이란 게 특정 전쟁과 관련한 표현일 뿐, 보편적 관점으로 보면 언제나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 즉 전쟁적 존재로 살아 온 게 맞습니다. <휴전>의 시공도 그 역사의 한 에피소드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중대 포인트. 프리모 레비는 이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내밀한 허구적 역설을 끼워넣습니다. 바로 모르도 나훔에서, 저 나훔이란 이름! 나훔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포로기 말기의 예언자입니다. 고대 중근동의 제국주의 질서가 급변하던 기원 전 7세기 경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예언자로서 니네베의 멸망과 유대 백성의 해방을 선포한 나훔서를 남겼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구태여 이 예언자의 이름을 전쟁항시론자인 그리스인에게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훔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저 나훔과 <휴전>의 이 나훔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실을 프리모 레비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저 나훔과 이 나훔을 일치시켰을 것입니다. 이 나훔에게 저 나훔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프리모 레비 자신의 이성의 힘과 낙관을 늘 있는 전쟁 상태에 불어넣어 '주술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도록 한 문학적 장치일 것입니다.  간절한 염원이고, 곡진한 헌정일 것입니다.

히틀러의 독일제국이 일으킨 전쟁은 분명히 끝났고, 그래서 포로들은 귀환하는 도상에 있고,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구체적인 공포와 알 수 없는 불안에 내팽개쳐진 채입니다. 이 현실은 모르도 나훔의 현실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또 다시 포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우슈비치가 과거사일 뿐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불확실하고 막막한 삶의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이성을 극대화시키거나, 마치 체사레처럼, 반대로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성을 극소화시키거나, 마치 플로라처럼, 하여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통합적인 인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누가 이성의 힘과 낙관으로 살아남는가? 바로 프리모 레비 자신이지요. 그는 어떤 캐릭터와도 자신을 일치시키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는 통찰할 따름입니다. 그는 도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를 고요히 유지한 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中道-중도가 바로 正道이므로-적 이성으로써 그 때 그 때 삶의 과제와 마주합니다.  이 태도는 스톡데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어도, 그는 끝내 온전히 살아남아, 이렇듯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나훔이란 알레고리는 이 <휴전>의 시공에서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전쟁과 포로, 이 문제를 학대와 상처의 문제로 치환해내야 하는 저, 醫者인 저에게 벼락 같이 던져진  화두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정의가 상처를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상처는 마르지 않는 악의 샘이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의 빛을 꺼뜨린다. 상처는 압제자들에게는 악명으로 되돌아가고 생존자들 속에서는 증오로 영속한다.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과는 반대로 복수에 대한 갈증으로, 도덕적 굴종으로, 거부로, 피로로, 체념으로, 수천 가지 방식으로 돋아나는 것이다." (20쪽) 

그리고 귀환열차가, 어떻게, 하필, 독일의 뮌헨에 이르렀을 때, 그 거리에서 프리모 레비가 뮌헨의 독일인들과 맞닥드렸을 때,  그 장탄식.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이었다. 의도적인 무지의 요새 속에 있는 양 자신들의 폐허 속에서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강하고,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할 수 있는, 오만과 죄의 그 오래된 매듭에 묶인 포로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봉인된 얼굴들의 저 이름 없는 군중 사이에서 다른 얼굴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얼굴들을, 모를 수 없고 기억하지 않을 수 없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명한 얼굴들을,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하고 죽이고 굴욕을 주고 타락하게 만든 그 얼굴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도였다......." (323-324쪽) 

정교하게 배치한 수미쌍관.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당위(Sollen)가 상처라는 현실(Sein)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지 않느냐고 던지는 준엄한 질문. 이 질문은 끝내 그의 절연한 죽음과 맞닿아 있는 한없이 무거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과 또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상처를 '쌩얼'로 대면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여 그 화두를 깨쳐야만 합니다. 어찌하든. 

인간의 도덕성으로는, 이성과 의지로는, 대뇌 전전두엽으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상처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요? 아니, 상처란 본질적으로 없앨 도리가 전혀 없는 것인가요?  대체, 상처는 무엇인가요? 

管見一場. 상처는 감성의 문제입니다. 감성은 몸과 밀착된 마음입니다. 하여 이성과 의지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습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 감성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길은 그 감성의 결을 알아차려주는 것입니다. 공감, 공현, 동조, 지지.......다 같은 결의 마음이지요. 어루만짐, 챙김, 보살핌.......다 같은 결의 실천입니다.  

이 마음과 실천은 영락없는 여성, 특히 어머니의 그것입니다. 이게 답 아닐까요? 프리모 레비가 여성적, 모성적 접근 방식을 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과 역사 전체에 대해서도. 왜냐하면 어머니란 이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게 백 번 천 번 맞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인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그 인간의 기원이기 때문이지요. 절망임에도, 아니 절망이어서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인 인간을 어루만지고, 챙기고, 보살핍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그 이상의 무엇이 아름답고 거룩한 일일까요?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그 자신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를 꿰뚫고 도달한  어머니의 저 숭고한 감성, 그것을 프리모 레비가 지닐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최대한 동원하여 삶을 살아냈습니다. 언어를 통한 증언은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름 값-프리모!-을 다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자기에게 남은 모든 것을 던져 마지막 증언을 한 것입니다. 목숨!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그 충격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 증언을 한 그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허탈감뿐이라면, 이는 그의 죽음을 모독하고 또 모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죽음은 그의 삶에 비추어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그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의 죽음도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그가 서구의 이성의지주의 문명의 아들이었기에 목숨을 던져 그 한계, 그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인간 위기, 그 백척간두에서 갱진일보한 것이라는 사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그가 남긴, 인간세상을 '엄마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엄마는 양육자입니다. 바로 이 양육자적 관점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온통 분열적 질병으로 뒤덮여 있는 오늘날 인간 세계는 실상을 알고 보면 본질은 하나입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작패(作悖)질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힘이 센 어린아이는 남에게, 힘없는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또 진실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휴전>을 끌어안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심경을. 그는 혹시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먹을 것으로 준 게 아니었을까요? 그가 혹시 인류 최초의 남성 어머니 아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이 구절이 가슴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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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10-1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입니다. 나훔과 관련한 해석은 탁견인 듯 합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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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외상(trauma) 가운데 하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아니 증언한 것입니다. 전통적, 아니 통속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을 소설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란 말과도 어울리지 않지요. 그러나 아니 에르노의 말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 할 때, 한 사람의 삶 자체가 이처럼 감동을 준다면 구태여 그것을 소설이라 하지 않더라도, 뭐라고 부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위대한 문학일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다소 아이러니컬한 계기를 통해서였습니다. 국가가 공정하게(!) 집행하는 폭력(!)에 맥없이 당하면서 깊은 두려움과 좌절감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떤 분이 이 책을 제게 건넸습니다. 그 분은 불안장애와 우울증 때문에 제게 상담을 받았던 분이지요. 이 책으로 그 분은 저의 벗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치료하는가, 구분이 사라진, 서로 말하고 들으면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외상(trauma)에서 비롯한 만성적인 우울증후군을 오래토록 끌어안은 채 살아 온 터인데다 그것을 증폭시켜 재점화하는 사건에 휘말려 있었기에 제게 이 책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치료 독서 기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상대로 처음에는 기분부전이 즉각 악화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어린 시절에 두려움에 떨며 겪어야 했던 버려짐, 배고픔, 추위, 폭력의 기억이 하나 둘씩 되살아났습니다. 성인이 되어 겪었던 군대의 나름 수용소적 분위기도 송두리째 기억 저편에서 살아나와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우울증과 이렇게 저렇게 관련을 맺으며 살아온 제 삶이 통째로 기우뚱거리고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관념, 치료 이론, 치료 행위.......모두 재점검하는 정중동의 시공간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독서가 고통스럽고 불편해졌습니다. 펴서는 차마 읽지 못하고 황급히 도로 닫아버리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 편, 어떤 힘에 이끌려, 자꾸 책을 열게 되었습니다. 스무 번도 넘게 이런 뒤척거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제 삶에 대한 고요한 애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애도는 감정이 복받쳐 너울거리는, 장례식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연한 선정의 호흡처럼 꼿꼿하며 투명한 것이었습니다. 치졸한 자기 동정의 각질들이 떨어지면서 순수질량으로 복귀하는 영혼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애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상(trauma)과 고통을 비교해서,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었느냐, 말하는 이성에 기댄 작업만은 아니었습니다. 삶의 조건, 그리고 그에 반응하는 인간의 서로 다른 모습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인간됨, 선악, 분노, 용서.......그리고 우울의 실상을 묻는 작업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금 이스라엘(유대인)이 나치보다 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며 이 책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시더군요. 예,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다만 나치를 고발하려고 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고통 받는 팔레스타인인의 삶의 조건을 먼저 본다면, 거기에 귀 기울인다면 그 분의 마음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시는 아우슈비츠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누구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시공간에 프리모 레비 대신 우리 자신을 놓는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프리모 레비는 문학가로 대성공을 거두고 삶의 절정에 선 순간 홀연히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이런 문제적 죽음과 마주하자, 문학과 문학의 바깥을 가로질러 제 고뇌는 맹렬하게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이 칼 같은 메타포가 되어 이미 죽은 과거를 벌떡 일으켜 세우는가 하면, 유령 같은 미래를 바로 눈앞에 불러 세웠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온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이렇게 계속 살면 희망은 생기나,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에 휩싸였습니다. 급기야.  

 

나 같은 무지렁이는 그렇다 치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그의 삶이 보여준 이성의 힘과 낙관은 결국 실패한 것인가? 이 문제의식을 자기 사유의 핵심으로 놓고 고민한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따르면 그런 단서가 아프도록 풍부하다고 합니다. 물론 서경식은 자살을 이해 대상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어떤 답도 답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세존께서도 침묵하셨을 것입니다. 하여 무기(無記).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답은 유보입니다. 너무 멉니다. 너무 깁니다. 그래서 딱 반걸음 안쪽에 있는 풀만 뜯어먹는 말과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그 이상은 허세이며 과장입니다. 인간, 오직 인간만이, 지나치게 진화하였습니다. 탐욕을 기획하고 집단화하고 구조화하여 서로를 파멸시킵니다. 뼈아픈 반성도 무력하며 따뜻한 희망도 공허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 현실에 대한 주체적 감응(response)은 생사일여를 찰나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로 더 이상 표현해서는 안 되는 차원입니다. 마지막 예의를 지켜야 하는 대목이지요.  

 

프리모 레비의 또 다른 작품, 아니 증언인 <휴전>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알라딘에 주문해 놓고, <이것이 인간인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니 에르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프리모 레비는 제 풀죽은 영혼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 깨우는 독(毒 )이 되어 오래토록 함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람의 아픈 마음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의자(醫者)로서, 그의 증언, 그의 삶, 무엇보다 그의 죽음을 언제나 품에 안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들릴 테지요, 저 영원한 웅얼거림,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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