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6
송기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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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과의 만남은 문학 작품이 아닌(?) 그의 책 <뒷골목 기행>을 통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책 이전에 그의 시나 소설을 만난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이었던 셈이지요. 지금은 잊혀 진 책이지만 그 무렵 저는 그 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 이후 송기원에 대한 관심은 깊은 차원으로 나아갔습니다. 

<뒷골목 기행>은 그야말로 뒷골목을 몸으로 겪은 아야기를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지요. 목포 '히빠리마찌' 늙은 창녀 이야기, 부산 사창가로 흘러든 여대생 이야기 등. 송기원의 삶과 문학은, 인생여정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지만, 아니 에르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투사였던 그가 청산거사에게 선도 수련을 배우고 <청산>이란 소설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뭐라 했던 기억이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그리고 인도, 티벳 여행, 수련으로 그의 정수리 부분이 융기되어 모자를 쓰고 다녔던 이야기, <인도로 간 예수>란 소설.......문학과 삶이 한 몸으로 엉켜 뒹구는 연인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마지막 시집이라 선언한 <저녁>. 한달음에 읽고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한달음에 읽기를 거듭합니다. 이런 우문이 맴돕니다. 그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사실, 그가 썼다기보다 그에게 시들이 내려왔다고 해야할 테지만. 그가 책 머리에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하니까 선뜻 '아, 그런 책이구나!'하기 쉽지만 제 느낌은 좀 다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위로만도 아니고 죽음 자체마저 넘어서라는 초탈만도 아니고 생사를 가로지르는 무애자재만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숙명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지니는 질펀한, 그래서 애잔한, 더욱 황홀한 美感 또는 味感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그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유일한 산문시인 장다리』가 그 회귀를 노래하는 절창입니다. 

 한달 내내 장다리만 바라본 적이 있다........젊은 주인 아낙네가 장다리 텃밭에서 하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장다리 꽃대 아래 시들어서 누렇게 시래기가 된 이파리만을 따주는 것이었다. 단 한 잎이라도 생생한 잎은 건드리지 않은 채 시든 이파리만 따는 주인아낙네의 행동이 나에게는 무슨 종교적인 의례처럼 경건하여서, 이를테면 장다리의 삶은 건들지 않고 죽음만 치워주는 무슨 장례식 같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좀 더 나에게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서 앉으나 서나 잠이 들거나 잠이 깨거나 해종일 형이상학적인 생각들에 몰두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장다리의 장례식을 치르는 주인아낙네가 나에게는 히말라야에만 산다는 무슨 영적인 스승으로까지 여여졌다. 내가 숙소를 떠난 것은 장다리 장례식의 비밀을 알고 난 후였다. 해마다 8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이듬해 5월 말에야 눈이 녹는 혹독한 기후 속에서, 그렇듯 춥고 긴 극빈의 겨우살이에 필요한 시래기를 한 잎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서 모든 푸성귀를 키울 수 있는 한껏 장다리로 키운 것이었다.  장다리 장례식의 비밀을 알게 되자 한 달 동안 속절없이 황홀한 호사를 누렸던 내 눈만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바보가 된 내 눈에는 아직도 활짝활짝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들이 어쩐지 장다리의 눈물들이 활짝활짝 매달린 것 같았다. 

이를 산문시 형태로  빚은 것 또한 그의 생명감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본디 우리네 보통 사람의 삶이란 산문적이 아니던가요. 그가 <저녁>을  마지막 시집이라 한 것, 그 마지막 시집의 정수리에 이 산문시를 가만이 놓아둔 것, 모두가 그의 美感 또는 味感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부의 마지막 시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한 뜻에 직접 머리 조아린 시들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시들이 뛰노는 마당을 바라보며 씽긋 웃고 삶의 애틋함을 챙기는 엄마 같은 시들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앞에 인용한 제4부의 끝시장다리, 제2부의 끝시 『맨발』, 제6부의 끝 시 『밤바람 소리 세 편은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좋은 스승인 모리 슈워츠의 마지막 메시지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송기원은 자기 인생의 깊은 저녁 무렵, 죽음을 말함으로써  밤으로 가는 삶의 여정을 더욱 살갑게 더욱 진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려놓을수록 무거워지는, 애착할수록 가벼워지는 삶의 속살을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하게 겪은 그이기에 말입니다. 마지막 시 마지막 부분이 귓전에서 밤바람처럼 웅웅거립니다. 

"아득한 곳에서 홀로된 그대가 듣는 밤바람 소리 속에는 어머니와 누님을 부둥켜안은 내 목소리도 함께 섞여 있을는지요."  

아득한 곳에서 홀로된 그가 듣는 밤바람 소리 속에 네 살 이후 먼 타인이 된 어머니를 부둥켜안은 제 목소리도 함께 섞여 있을까요? 제가 이 <저녁>을 남다르게 읽는 까닭이 바로 이 질문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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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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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우리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는 재해석의 대상으로 남을 국보급 아이콘입니다. 그녀는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잃을수록 우리가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오래된 미래'로서 작동할 것입니다. 그녀의 아우라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는가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조건, 특히 문제적 조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문제적 조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녀는 재주 많은 기생 정도에서 당대를 준열히 꾸짖는 저항적 지성까지 다양한 전형으로 유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를 해석하는 폭과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 자체를 문제적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망가뜨리는 데까지 나갈 수 없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예의입니다. 그녀가 아직도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은 그녀의 바로 그 문제성 때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살았던  당시 조선은 건국 세력이 그 기득권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결과들이 안정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종-인종-명종 삼대에 이르는 시기는 수구(守舊)의 절정이 정치경제적 모순을 극대화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구에 임진왜란의 대파국이 밀어닥칩니다. 

황진이의 스승 서경덕이 1546년까지 살았는데 임꺽정은 1561년에 죽임을 당했고 임진왜란은 1592년 일어났으니  시대의 어두움은 그야말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때 망국의 수도였던 송도에서 기생 노릇이나(!) 하던 한 여성 황진이.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일 무엇 하나  없어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스승인 서경덕보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소설 속 허태휘)보다, 주리파 거두 퇴계 이황(1501-1570)보다  그녀가 훨씬 더 문제적입니다.

그녀의 삶은 내리 누르는 발을 치받고, 옭죄는 손을 비틀어 물리치고, 막아서는 벽을 뚫고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항적 소통, 그 도저한 자유혼. 버림 받은 존재로서 버린 자들을 마주하고 품고 넘어서는 옹골찬  결기. 다만 문화적 담론에 가두기에는 그녀가 너무 큽니다. 그녀는 매우 정치경제학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진이는 계속해서 우리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가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김탁환의 해석은 성큼 한 걸음 내디딘 것으로 평가해 마땅합니다. 이른바 '서경덕 에콜'의 대모 지성으로 자리 매긴  것. 이는 물론 역사적 근거를 힘써 추적한 결과일 테지요. 제 느낌엔 아직도 '만주 벌판' 너른 땅이 더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만으로도 거보임에 틀림 없습니다. 

바리데기와 황진이를 연결하는 여성사상 지평 열기에 힘을 쏟고 있는 저로서는  <나, 황진이> 문장 하나하나를 탱탱하게 만질 수 있어 좋습니다. 시와 산문의 맛이 절묘하게 어울린 문장은 마치 제가 웅얼거려만 놓고 못챙긴 말을 반듯하게 재현한 듯 소름이 돋습니다. 소설임에도 때때로 신영복 선생의 글과 '돌림'인 느낌도 납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으니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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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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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경우, 본디 시를 더 가까이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소설은 '철 지난' 걸, 다른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아니 에르노라는 문제 작가 또한 김탁환의 <천년습작>을 통해 알게 되어 한꺼번에 몽땅-그래 봐야 절판된 게 많아 몇 권 안 되지만-사들고 들어와  일거에 다 읽어버린 예에 속합니다.    

참으로 '일거에' 읽었다는 표현이 맞고, 그리고, 깊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찰나에 저의 '인간'이, 삶이, 관통되는 데서 오는 웅숭깊은 통증의 울림이었지요. 아, 이런 사람, 이런 삶, 이런 글쓰기가 있구나!  타인의 마음을 만지면서 살아 온, 아니 그리 산답시고 어리바리 지내 온 醫者의 세월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느껴지더군요. 어허, 이런.......   

2.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예술의 주류적 전통적 정의, 가령, 피카소의,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이다." 운운, 을 단박에 부숴버립니다. 이 때 거짓이라 함은 필경 예술가의 창조력을 신화적 僞惡으로 담은 표현일 것이므로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일기를 감출 권리가 내겐 없다"  

그렇지요. <탐닉>은 <단순한 열정> 속의 삶이 진행되던 기간에 쓰여 진 아니 에르노의 일기이고, 그것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예술의 오랜 인습을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한 칼에 베어버린 것이지요. 예술가의 '감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정직한 글쓰기의 지평선을 단도직입으로 열어버렸습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일단 아니 에르노의 말대로 감추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감추지 않는다는 것은 은폐나 미화, 또는 과소화나 과대화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중독과 편집의 한복판에 있는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어는 사랑의 탈을 쓴 학대, 이른바 '애지중지 학대'로서 도리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죽도록 놓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내밀한, 小乘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입니다. 소승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은 大乘의 자기를 만드는 질적 전환을 기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구원을 위한 글쓰기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아니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원하고자 하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우선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책들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그래요,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도 바로 그렇게 얻어진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내 자신에 대한 구원은.......글을 쓰면서 나라는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해체인 동시에 극단적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내면일기만으로는 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면일기는 내가 살아온 순간들만 보전할 뿐이기 때문이죠." 

결국 정직한 글쓰기란 자기를 해체하고, 죽이는, "칼 같은" 글쓰기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베는 글쓰기는 여러 곳에서 죄책감의 결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통속하게 윤리적 차원에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니 에르노가 삶의 과정에서 온 생명으로 받아들인 급진적, 페미니즘적 사유와 실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여기서 죄책감이란 사회적 각성으로 빚어낸 대승적 자기로 하여금 소승적 자기를 보편적/집단적 가치의 지평으로 이끌어내게 하는 해방의 힘입니다. 결코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내면을 옥죄고 다그치는 억압의 힘이 아닙니다. 아니 에르노에게 죄책감은 "내밀한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시키지 않"는 융합의 동력인 것이지요. 

이 독특한 죄책감은 결국 아니 에르노의 텍스트를, 아니, 아니 에르노 자신을 독자에게 넘겨줍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을 대가로 확보하는 '상호텍스트성'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결집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곳은.......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기록되는 공간이다.......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자를 해체하면 독자가 창조됩니다. 이렇게 창조된 독자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그 텍스트를 재창조합니다. 읽기와 쓰기의 분리선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글로 된 결과물을 남기느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지평융해를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뭔지 아세요? 누군가 내게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할 때랍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삶의 자리 또는 context가 독자 각각의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전혀! 그럼에도 이런 일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 에르노가 스스로 저자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text를 자기 밖으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text는 그 총체성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방된 text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보편적/집단적인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열린 '사건'이 됩니다.  text는 더 이상 고정된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는, 하여 context들과 상호순환하는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문학과 삶의 무한연쇄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게 그의 정직함이 담아내는 강렬한 힘입니다.  

 

3. <단순한 열정>으로 담아내지 못한 진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보면 <단순한 열정>과 <탐닉>은 그가 자기 신과 삶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데 기여한 완벽한 짝패라고 알 수 있겠군요. 어쩌면 딸과 어머니? 뭐, 아무튼.    

 

<단순한 열정>에 비해 <탐닉>은 확실히 정제되지 않아서 생명의 냄새를 날것으로 맡을 수 있습니다. 비린, 그리고 곰곰한 냄새들.......훨씬 더 아니 에르노의 감정선들이 질펀하게 드러나면서 독자들을 同調의 감흥으로 빨아들입니다.  

 

<단순한 열정>에서는 열정이, 여기서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절망/죽음의 감각이 탐닉의 이름으로 준동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애인인 S를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인물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다 각주를 붙이길, “젖먹이 어린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감”이라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마음을 찌르지 못한 각주였습니다. 아뿔싸! 과연 그렇구나, 이야기 전반을 꿰뚫고 흐르며 온통 마음을 흔들고 가는 공포와 불안이 거기에 젖줄을 대고 있다니! 수시로 흘리던 아니 에르노의 눈물을 이제야 전율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기다리고, 섹스하고, 글을 썼던 거였습니다.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이 모든 아름다움."

이 비문(非文)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첫 문장, 이 비문. 그런데, 불과 7일 뒤,

"S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1990년 4월 9일에야 끝날 이야긴데 이미 예기불안은 벽두부터 섬뜩하게, 잔혹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두렵고 불안할수록 탐닉하고, 탐닉할수록 두렵고 불안하고.......이 지독한 악순환은 죽음의 무저갱으로 빨려들어 가고, 그 허무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쓴다! 아니 에르노가 인류 최초로-흠, 이 정도 호들갑은 괜찮겠죠?^^-글쓰기와 섹스를, 목숨 건 노동이자 황홀한 유희라는 역설적 일치로 통합해냈군요. 으악(喝)!

 결국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단지 자신과 삶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자신과 삶을 “걸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행위입니다. 필사적으로 글 쓴 만큼 열정을 다해 살아내고, 열정을 다해 살아낸 만큼 필사적으로 글 쓰는 상호 동력으로 한 생을 창조해 간 것이지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單刀直入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단소정한(短小精悍)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4. 아니 에르노의 거울에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나는, 내 인생은 單刀直入인가? 단소정한(短小精悍)인가?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인간에, 인생에 나의 인간이, 인생이 一音으로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아니 그리하여, 나만의 context에서 나만의 글쓰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아니 에르노와 겹치지만 온전히 포개지지 않는 나만의 “칼 같은” <탐닉>을 써내려가야 한다. 그게 아니 에르노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이다. 아니 에르노의 마지막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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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하라! - 사람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고, 감정은 뇌에 따라 움직인다 세로토닌하라!
이시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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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인 이시형 선생은 탁월한 정신과전문의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power celebrity로서 익히 알려진 분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사회적 성취가 결합하여 빚어낸 여유와 자신감을 듬뿍 담은 책이군요. 전반적인 내용이 무엇일 것이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읽지 않으려 했는데 저 자신이 세로토닌이 부족한 경향성을 지닌 사람이라 아무래도 한 번 들여다봐야겠다 싶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목차를 쭉 훑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휘릭 스쳐갑니다. 첫째, 흠, 과연 이시형이군! 둘째, 어? 일본 냄새? 앞의 것은 사족을 붙일 까닭이 없으니 넘어가고. 일본 냄새에 관해 말씀드리지요. 일본 에도(江戶) 시대 사무라이적 화의(和醫)로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가 있습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을 canonical text로 하는 음양오행론적 주류의학을 거부하고 <상한론(傷寒論)>이란 다른 전승의 text에 터 잡아 독자적인 의학체계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의학의 핵심은 이른바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입니다. 즉 모든 병은 하나의 독에서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생각은 분명히 사무라이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병의 성격이 그러하다면 치료의 성격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징(藥徵)>이란 저서에서 모든 약에는 한 가지의 주치(主治)가 있음을 천명해 놓았지요. 그의 이런 사고는 병의 증거와 거기에 맞는 처방은 일대일로 대응한다는 의학사상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최근 우리나라 한의학계를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 열풍이 휩쓸고 있습니다. 그의 의학으로 무장한 학회가 전 한의사의 1/5 이상을 거느린 공룡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주류한의학의 설명 방식이 은유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단도직입으로 딱 잘라 설명하는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류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회적 트렌드와 맞물려 있는 현상일 것입니다. 뭐에는 뭐가 좋다, 하면 온 국민이 일제히 그리로 쏠리는 일상적이고 통속적인 치우침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초일극집중구조'로 나아가고 있으니  한의학계 또한 예외일 수는 없겠지요.

만병일독설(萬病一毒說)의 관점을 연장하여 행복 문제를 거론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복일( )설"이 의당 나올 테지요. 바로 그 ( )에 세로토닌을 집어넣으면 어렵지 않게 "세로토닌하라!" 는 강령과 함께 powerful한 사유/실천 체계가 나올 것입니다. 마치 요시마스토도(吉益東洞)의 그림자 밑에 공룡학회가 탄생했듯 세로토닌 깃발을 높이 든 일본인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이 책이 나온 게 아닐까, 추측했던 바, 아니나 다를까, 저자 서문에 아리타란 일본인이 중요하게 언급되었고 맨 뒤에 그가 쓴 추천사가 있더군요. 그러나 이건 여전히 추측입니다. 얼마나 크게, 그리고 한 방향으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2. 이 책의 내용이 형성된 구체적인 곡절과 과정은 일단 덮어두고 "세로토닌하라!"는 강령을 펼쳐낸 책의 내용 자체를 검토해 보기로 하지요. 두 가지 화두를 설정하겠습니다. 하나는 이 책은 무엇을 목표로 삼았을까? 다른 하나는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서 과연 "세로토닌하라!"는 무엇일까? 

<세로토닌하라!>는 의학적 견지에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려는 목표를 지닌 책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 지향은 자기계발  또는 성공입니다. 이른바 시크릿류의 담론에 뇌과학을 접목시킨 것이지요. 저자의 활동영역과 사회적 위상을 생각하면 이 책이 치유를 위한 것이라 하든 자기계발을 위한 것이라 하든 별 차이 없어 보입니다. 그게 자연스러울 만큼 저자의 사유와 삶이 광폭이거든요. 그러나 사실은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을 잘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스러움이 어떤 진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의학적 작업은 그 사람의 인간적 완성을 향한 도정에 참여하는 활동이고 자기계발을 이끄는 공학적 작업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을 부추기는 전략을 제공하는 활동입니다. 인간적 완성과 사회적 성공은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 둘을 일치시키거나 균형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인간적 완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사회적 성공에만 골몰하지요. 현대사회는 특히 이런 경향성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오직 '대박나는' 삶을 사기 위해 영혼을 파는 사람들로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권력을 움켜쥔 자들은 다양한 상품을 준비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미 '대박난' 사람들로 하여금 사후논리를 통해 '대박나는' 삶을 꿈꾸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게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게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 내지 성공지침서. 간절하게 원하면 다 된다, 아, 이 얼마나 달콤하고 황홀한 환상입니까. 결코 죽을 때까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이지요.  

이런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고 또 휩쓰는데 어째서 세상은 이리도 살기가 힘들까요. 이런 책들에 감동 받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데 어째서 우리나라는 OECD국가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을까요. 그 의문에 정직하게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도리어 이런 상황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음모적 프로젝트에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 그리고 뇌과학자, 심지어 종교 지도자까지 합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포식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오늘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상을 팔고 있습니다. 

3. 그러면 어째서 이런 전략이 먹히는 걸까요? 서두에 스치듯 말씀드린 바, '초일극집중구조'의 위력이지요. 사회적 상징 조작으로 '영웅'이 탄생하면 세상은 온통 그의 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끝내 '영웅'이 되지 못하는 대다수는 끊임없이 다른 '영웅'을 찾아 헤맵니다. 영원회귀!  

이런 순환의 한 고리에 오늘 우리의 화두인 세로토닌이 놓여 있습니다. 왜 하필 세로토닌일까요? 아마도 이 문제의식은 저자 자신에게도 내부적 고민이라기보다 외부적 임팩트였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일 저자가 먼저 세로토닌을 깊이 들여다보았다면, 나아가 뇌과학적 진실을 좀 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았다면, 유독 세로토닌 하나를 보편적 당위 표제어로 삼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근거에서입니다. 

저자의 말과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연출해내는  뇌내 물질에는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 세 물질,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들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만큼 중요한 물질로 감마아미노부티르산(GABA)과 아세틸콜린(Ach)이 있습니다. 저자가 왜 이 두 물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을 세로토닌과 대척점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는 구조에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로토닌형 인간의 8가지 특징 부분을 보면 오히려 GABA 형 인간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풀어 행복하다." 이 부분. GABA는 정서의 안정을 연출하는 물질로서 따스하고 품 넓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형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Ach형 인간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뇌형이다." 이 부분. Ach은 창조성을 연출하는 물질로서 전형적인 우뇌형 인간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대목에 이르면 세로토닌형 인간의 8가지 특징 또한 세로토닌을 깊고 넓게 들여다보며 발견해냈다기보다 이미 이상적인 인간형을 전제하고 그 모든 특징을 세로토닌에 환원시켰다는 혐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잠재능력 200% 올려주는 전두엽 만들기 10계명도 세로토닌과 직접 연결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깁니다. 세로토닌은 전천후의 능력을 지닌 이른바 전능물질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로토닌하라!"는 명백한 환원주의입니다. '영웅' 만들기입니다. 마치 TV에서 인기 배우 데려다 토크쇼 하는 걸 보면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봉사도 열심이고 심지어, 인격도 고매하다고 과대 포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4. 세로토닌. 그렇습니다. 중요하지요. 특히 스트레스 덩어리인 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스트레스 물질을 제어해주는 세로토닌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강조점을 넘어 세로토닌 하나를 내세워 보편적 당위 표제어로 삼는 것은 전략의 차원에서는 용인할 수 있으나 진실의 차원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맨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세로토닌이 부족한 것으로 진단 결과가 나온 사람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거기까지입니다.  

5. 사족-이 책을 읽는 동안 세로토닌은 외부에서 식품물이나 약으로 공급해줄 수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십상이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세로토닌은 물론 그 전구물질인 트립토판을 듬뿍 함유한 식품도 많고 한약재, 탕약처방도 많습니다. 심지어 세로토닌 수용체와 신경계 자체를 조절하는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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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번 읽고 말기엔 아까워 어떤 구절의 표현, 어떤 대목의 내용을 살피면서 다시 읽었습니다. 소설 가운데 이런 경우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몇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첫눈에 들어온 것은 첫 장을 0번으로 매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맨 나중 것을 다시 0 혹은 00번으로 하지 않았을까, 혹시나 하면서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랜 동안 제 글쓰기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 어린(!) 이야기꾼이 똑 이런 발상을 해냈는지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19 뒤에 '다시, 19' 씩이나.......  


첫 장을 열어 읽기 시작하면서 ‘아, 보통 내기가 아니구나!’ 직감합니다. 생각의 무애자재한 지평과 방향, 거기에 상응하는 문장의 단소정한(短小精悍). 자지와 보지를 대놓고 말하는 단도직입의 거침없는 입심, 그래도 ‘거시기’ 선에서 일단 자제하는 절제의 주상절리. 순진무구를 길라잡이로 내세운 발칙한, 그러나 절묘한 도발 전략. ‘아, 무당 제대로다!’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의 대칭(대립)구도를 큰 틀로 하여 진행됩니다. 이 대칭구도 에는 다양한 변주가 등장합니다. 이름 있는 사람과 이름 없는 사람, 버리는 사람과 버려지는 사람, 예쁜 사람과 안 예쁜 사람, 착한 사람과 못된 사람,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가족인 사람과 가족 아닌 사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그리고 선과 악, 마침내 삶과 죽음.......  


이런 대칭구도는 현실의 부조리를 일으키고 그것을 치밀한 갈등을 통해 지속시키는 공고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그러나 그 극단한 분별이 부질없어지고 마는 시공에서 적멸의 해법이 나타나 이 대칭구도를 뒤흔들고 마침내 무너뜨려버립니다.  


소녀는 시종일관 (누구나 다 아는)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존재이나 스스로 그 경계 지점에 서기도 하고 자기 반대편으로 가로지르기도 하면서 대칭구도를 앙칼지게 쑤시고 가차 없이 베어 갑니다. 마침내 자기의 어떤 이름(유나)의 일부인 나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리의 새 아빠를 찔러 죽이고 그 칼에 찔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기도 죽음으로써 진짜와 가짜,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대칭구도를 붕괴시킵니다. 그러나 비참하지도 비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죽음을 통해 그는 평화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아니 평화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던 소녀의 ‘쿨’하거나 범상치 않은 정신성은 이미 처음부터 도처에 출몰했지만 결정적 형성은 아마도 나리 엄마를 만난 시공에서였을 것입니다.  


.......뒤늦게 나리의 엄마라는 사람이 경찰서로 왔다.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하고 세련되게 화장을 한 여자였다. 나리의 엄마는 울지도 않고 소리 지르지도 않고, 모든 일이 그저 조용히 정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여자의 무심한 목소리를 듣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 사람이다.  

저기 있다.

나의 진짜엄마는.

 거리를 떠돌며 내가 정했던 진짜엄마의 조건은 모두 껍데기고 포장이며 환상이고 거짓말이다.......이제야 알겠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너무 쉽고 너무 쉽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못 찾고 있었다. 너무 흔하니까.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울을 보면, 그 속에도 있다.  

.......  


전 남편한테서 난 자기 딸이 현 남편한테 무수히 강간당하고 끝내 죽임으로까지 내몰린 현장에서 오직 자기 생존만을 챙기는 그런 엄마가 가짜가 아니고 진짜라는 사실을 홀연히 깨달은 소녀, 바로 그 다음 순간, 자신도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깨달음도 벼락 같이 얻게 됩니다.  


더 이상 뭘 찾아야 하나요? 아니, 더 찾을 것은 없습니다. 어디가 더 성장해야 하나요? 아니, 더 성장할 것은 없습니다. 소녀는 더 이상 성장담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여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참 어른인 소녀의 오도송(悟道頌)이 됩니다. 소녀의 죽음은 독자에게 소녀 시대의 상징적 죽음을 환기시키는 은유가 아닙니다. 소녀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통속한 이분법을 깨뜨리는 관통(貫通) 길을 날렵하고도 토실하게 보여줍니다.  


관통! 이는 우리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 바로 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지녀야 할 삶의 방향이며 성격입니다. 세상이 들이미는 온갖 해악과 폭력을 ‘착하게’, (실제로는 ‘굴욕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치를 담고 있는 진실. 그것의 예리하고 강인한 움직임. 소녀의 최후 관통은 바로 목숨입니다.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그 속에서 완성된 답을 얻었으니 과연 통쾌하고 황홀한 관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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