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탄의 도구들 (블랙 에디션) - 정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61가지 성공 비밀
팀 페리스 지음, 박선령.정지현 옮김 / 토네이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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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자기계발서' 같은 류의 책들에 대해서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본래 모든 책들이 어쩌면 다 자기계발에 도움이 되는 책들인것 같은데 또 다시  '자기계발' 이란 분류로 나누고 있는셈 같다.

더구나 '자기계발' 이라 함은 자신의 '정신적 계발' 이 우선시 되어야할 것 같은데 요즘 시중에 나오는 자기계발은 대부분 '부의 뭐뭐' , '부자의 뭐뭐뭐', ' 00 억 버는 뭐뭐뭐' 등등의 돈과 물질에 관련된 책 제목이 많은것 같다.

또한 굳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돈에 관련된 제목을 달지는 않았지만 막상 내용의 대부분은 작가의 물질적 성공담을 주제로 삼고 그에 대한 무슨 무슨 법칙이나 공식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다.

세상의 성공을 물질적인 성공만이 최고인것 같은 기분이 들게끔 하는 그런류의 책들에 대해 예전부터 반감이 많았다.

물론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는게 나쁜것은 아니다.

돈은 어느시대에서나 중요했고 당장 필요한 물질이다. 먹고 살기 위해는 꼭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류의 책들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 (작가나 출판사에게나, 또 당장 필요한 독자에게도...)

그런데 내가 볼때 물질적인 성공에 대한 자기 계발서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는것 같다.

첫째, 세상의 구조를 단순화 시켜 무슨 법칙이나 공식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70억의 인구를 가진 우리 지구별에는 사람수 만큼이나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그 예측 할 수 없는 변수를 어찌 아이들 우화속의 인물들 처럼 일반화 시켜 단순하게 법칙으로 내세울수 있을까?

물리학에서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 함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모든 사람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 다는것을 안 것 처럼 '세상의 부' 에도 법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부를 누릴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진정으로 '법칙' 이라고 일컫는다면 누구에게나 적용이 될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구는 적용 되고 누구는 적용이 안된다면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를수는 없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운' 이 좋아 성공한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공 여부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면 조건이 문제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건 '조건' 이라고 해야지 '법칙' 이나 '공식' 이라고 칭하면 안된다.

일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한가지 조건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수많은 조건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만' 이 있어야 성공하고 없어서 실패하는것이 아니라 '~도' 있어서 성공이나 실패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무가불무가 (無可不無可 반드시 어떻게 해야만 하는것도 없고, 어떻게 하면 안된다는 것도 없다) ' 처럼 세상은 '고정된것은 없는것 '이다.

둘째, 자신의 성공담으로 '나와 남을 둘로 나눈다' 는 것이다.

"원래 나도 당신들 처럼 힘들게 살았어. 그래, 맞아, 사실 나도 당신들하고 같은 부류였었어.

그런데 어찌해서 어찌하다 보니 어쩜 이렇게 물질적으로 성공 해버렸네?

그런데 내가 당신네들 사는것 보니 참 안타까워...

그래서 내가 큰맘먹고 이런 성공한 비결을 당신네들께 알려 줄께.

그것은 바로 뭐뭐뭐 야. 당신들도 이렇게 해봐. 참 쉽지?  "

이러한 성공담의 문제점은 세상을 '자신을 포함한 성공한 사람'과 '거기에 포함 되지 못한 당신들 (보편적인 우리들)' 로 나눈다는데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소중하며 각자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의 이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물질적인 성공을 한 사람과 못한 사람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성공담에 나는 공감이 되질 않는다.

세상은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는데 어떻게 자기계발서 까지 양극화를 부추기는 것인가?

세째, 성공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성공에 대한 집착을 당연시 하게 여기는 풍토를 만들고 있다.

성공이라 함은 물질적인 성공도 중요하고, 정신적인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의 소중함도 중요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일부 성공담에 나오는

'나는 이미 성공 했으니 당신들도 나처럼 해봐. 그걸 못해 낸다면 당신들이 문제였던 거야.'

로 들리는 어투는 정말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라~ 이런걸 내가 왜 봐야 하나?

아, 그럴땐 책을 확, 던지고 싶어진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달성해야만이 성공이고 실패를 하면 안된다는 관념을 심어주는것 아닌가?

이것은 목표에 달성하지 못했어도 시도하려는 의지와 그 과정에 대한 노고를 무시하는것이 아닌가?

작가는 책을 통해서 잘못된 성공에 대한 관념을 설파하고 있는게 아닌가?

물질과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자기 계발이 되어야 하는데 물질적인 성공만이 최고라는 관념을 집착하는 작가와 그걸 부추겨 출판하는 출판사의 풍조에서 이미 이 시대는 '산문의 시대' 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것 같다.

아마도 나의 이런 편견 때문에 자기계발서 류의 책에서 배워야 할 것은 나에겐 보이질 않았다.

분명 책에는 좋고 나쁨이 없지만 나의 마음은 편견으로 가득차서 책에 대해 좋고 나쁘고를 가르고 있었다.

이렇게 자기계발 류의 책들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 라는 생각이 이제는 굳어지고 있을때 쯤 <역행자> 를 읽다가 그 책에 언급된 책 <타이탄의 도구들> 이 눈에 띄였다.

알라딘을 통해 구매를 하면서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길 바랬다.

어쨓든 구매를 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책을 펼쳤는데 책의 서문에 전혀 뜻밖에도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가 언급 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 이책<타이탄의 도구들> 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비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의 비밀,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사람들의 비밀 로 3개의 장으로 나눠졌다.

'비밀' 이라고 자극적인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사실은 성공한 사람들의 물질, 정신, 육체에 대한 '조언' 인것이다.

내가 앞에서 우려했던 물질적인 성공에만 치중된 것이 아닌 지혜로운 정신과 건강한 육체까지 포함한 조화로운 자기계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타이탄의 도구> 에서 '타이탄' 은 '거인' 이란 뜻으로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선 사람, 성공한 사람을 그렇게 표현했다.  '도구' 는 디테일을 일컫는다.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디테일한 작은 습관, 태도, 명상, 주문(믿음), 보충 학습 계획, 즐겨하는 질문, 독서법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작가가 이책을 집필한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구절은

'생각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 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는 싯다르타의  대사이다.

자신이 만나본 타이탄들은 싯다르타가 가지고 있는 세가지 능력을 키웠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싯다르타> 에는 분명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사고할 알고, 기다릴 알고, 단식할 안다면, 누구나 마술을 부릴수 있고, 누구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할 있습니다.  - P106더스토리 초판본>

소설속에 '당신은 무슨 능력이 있느냐?' 는 상대의 질문에 대한 싯다르타의 이와 같은 대답은 읽는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기도 하는데 읽고 음미 할수록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타이탄의 도구들> 의 작가의 통찰은 <싯다르타> 소설속의 한 대목에서 타이탄들이 가진 공통된 능력을 찾아내고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는데 초점을 둔 주제를 다뤘다는 것이다.

세속에서의 성공은 물질적인 성공뿐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조화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작가는 명상의 중요성과 효용에 대해서도 책의 전반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명상의 핵심은 정신을 집중하는데 있지 않다. '정신이 방황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있다. 정신이 흩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챈 후 단 1초만이라도 다시 만트라에 주의를 집중하면 그건 ' 성공적인'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P. 31 >

<족첸을 아는가? 이는 티베트 불교의 최고 수행법이다. 두려움이나 불안이 엄습할 때는 눈을 뜬 채 맑은 하늘과 지평선 너머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에 아무 판단 없이 주의를 기울여 보라. 머리가 맑아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을 때의 감정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P. 163 >

<명상 도중에 모욕을 당했던 일 때문에 화가 솟구치면 곧 바로 속으로 ' . 분노의 감정이 찾아왔군' 하고 말하면서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고 나면 금세 다시 집중할 수 있다.... 감정과 싸우는 것은 모래 늪에서 허우적거릴수록 점점 더 깊이 발이 잠기는 것과 같다.... 이름 붙이고,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이자 최선의 공격이자 최선의 방어다..  P. 271 >

특히 뒤에 이어지는 '마라에게 차 대접하기' 구절은 내가 이책에서 건진 가장 뜻 깊은 조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양한 얼굴의 마라가 찾아온다. 환영의 인사를 건네며 따뜻한 차를 대접하라.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친절로 감싸 안으라. 그렇게 바라보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면 우리는 마라의 구체적인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마라는 곧 우리 자신이다. P. 272 >

*마라는 마왕의 파순을 일컫는다.

지금은 <존윅> 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 리즈 시절 영화중에 <리틀 붓다>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서 '키아누 리브스' 는 석가모니 붓다의 역할로 열연을 했었다.

영화의 백미는 붓다가 보리수에서 정각을 이루기전, 새벽이 오기전에 마왕 파순과 극렬한 내면 전쟁을 치루는 장면이다.

그 격렬했던 전쟁 마지막, 자신과 대립했던 흉악한 마왕 파순의 모습이 본래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으로 변해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 잘생긴 '키아누 리브스' 가 본래 붓다이며 마왕 파순이기도 했다는 걸 영화적으로 표현 한것이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니라는것' 을 보여 주는 장면 인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성공과 실패도 본래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 성공에만 집착하는 우리는 실패에서 좌절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더 많은 성장을 이루어 낼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것이다.

<눈에 보이는 발전이 없을 때 나타나는 좌절감은 탁월함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좌절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니까요.... 우리가 실패하는 건 좌절감 때문이 아닙니다. '조급함' 때문이죠. 좌절감과 싸우는 동안 조급함을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표 달성에 실패합니다. P. 326 >

이책의 작가 팀페리스는 자신이 방송하는 <팀페리스 쇼>에서 세상에 성공한 200여명이나 되는 석학, CEO, 예술가, 전문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성공 비결에 대해 자신만의 노트로 정리를 했다.  

이책의 수많은 조언들은 아마도 다른 자기계발을 쓰는 작가들에게서도 볼 수있겠지만 한쪽으로 편향 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물질과 정신, 육체의 조화를 이룬 조언은 타 자기계발서 보다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 이란 개념에 대해서 반드시 '남들보다 더 나은~ ' 이라는 '' 과의 비교에 치중하는 면이 강한것 같다.

성공은 주관적인 개념인데 이것을 모두에게 추구 하라고 하는것은 '선동' 으로 밖에 안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성공 지상주의' 가 된 것이다.

'성공' 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성공' 이란 단어를 풀어봤다.

성공(成功) 이란 말의 성()은 '이룰 성' 과 공() '공 공' 자( )으로 이루어졌는데 공() 은(: 장인 공+ 힘력) 이 합쳐진 글자다.

원래 '장인 공()' 은 돌 위에 구멍을 뚫은 막대 기구를 형상화한 상형 문자인데 도구를 잘 다루는 장인 즉 기술자나 전문가를 뜻하게 된다.

따라서 공() 힘을 써야 하는 장인을 뜻하므로 성공이란 글자 안에 '이루어 낸다' 와 '장인', '힘' 등이 포함 된것이다.

즉 성공이란 결국 '사람이 막대로 돌위에 구멍을 뚫듯이 힘과 집념으로 이루어 내는 것' 이라고 볼수도 있겠다.

자, 그렇다면 성공이란 단어엔 '노력과 집념, 힘 그리고 이루어 내는것' 이 함축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 이란 말 자체에 그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어 성공을 만들어 내는것은 본래 부터 쉬운게 아닌것이 되는 셈이다.

돌에 구멍을 낼 정도의 힘과 노력이 들어 가야 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일인가?

사람이 힘과 노력으로 돌에 구멍을 뚤어 내는것. 그게 바로 성공이다.

결국 '성공' 엔 남과의 비교는 없는것이다.

각자의 돌에 구멍을 뚫을 정도의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것이다.

자신의 현재 모습에서 자신의 한계 규정하지 말고 현재보다 한차원 높이는데 치중해야 되겠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 에서 '역부족자, 중도이폐, 금여화( 力不足, 中道而廢, 今如畵: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나아가다가 필시 중도에 그만두게 되나니,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구나)'  라고 했었다.

,  스스로가 자신을 '미약하다 , 부족하다' 하고 한계를 그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계발하고 발전 시키는 것만이 우리가 눈을 감기전까지 해야될 의무이자 책임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이상 무의미한 성공에 대한 집착과 남과의 비교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부터 그렇게 해야지. 밖에 있는 집착과 비교는 그만 하자.

내 안의 돌에다 구멍을 내는것만 집중하자.

그래서 이책의 작가가 <싯다르타> 를 통해 통찰했던 '생각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아는 능력 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는 구절은 앞으로 내가 두고두고 곱씹게 될 명언이 될 것이다.

마라와 함께 마실 차 한잔을 위하여....

‘의문‘ 은 삶의 수준을 결정하고
‘질문‘ 은 삶 자체를 바꾼다. - P95

길거리에서 오프라 윈프리를 만나면 절대로 ‘토크쇼 잘 보고 있어요!‘ 라고 하지마라. 대신 ‘키위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라.
상대가 예상치 못한 주제를 꺼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 당신은 오프라 윈프리와 키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평생 기억에 남을 멋진 경험을 할 수도 있다. - P221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4000시간 정도 쓰는 건 충분히 타당하다. 이는 일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2년에 해당한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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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싯다르타 (문고판) - 192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진권 옮김 / 더스토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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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래 <싯다르타> 독후감은 안 남기려고 했다.

이책을 이미 올 봄에 감명 깊게 읽고난 후 곧 바로 <유리알 유희>를 통해 나름 힘겹게 헤세의 사유를 정리했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한것이다.

그런데 몇일전 <타이탄의 도구들> 이란 책을 읽는데 책의 서문에서 싯다르타의 구절을 언급하는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 내용은 <싯다르타> 를 읽으면서 내 마음으로 들어온 구절 이였다.

"나는 사고 할수 있습니다. 나는 기다릴수 있습니다. 나는 단식 할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 갈수는 없을것 같다.

<싯다르타> 에 대해 다시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이 든것이다.

 

어릴때 부터 <싯다르타> 는 책 제목만 보고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 '고타마 싯다르타' 라고 여겨져서 그냥 단순히 부처님 일대기를 소설로 쓴것 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어쭙잖게 안다는 오만한 생각에 읽고 싶은 마음이 안들었다.

그러다 어쩌다 올 초에 알라딘에 뜬 광고에서 '초판본 표지 디자인' 이란 광고에 충동 구매를 한것이다.

이거 불교 소설이고 표지 디자인이 초판이니 소장 가치가 있을 꺼란 이상한 심리가 들었다.

 

그런데 막상 책은 소장용 치고는 너무 아담하고 깔끔해서 책꽃이에 두기엔 폼은 안난다.

그래도 구매를 했으니 안읽을수가 없지 않나?  별다른 기대는 안했지만....

그뒤에 어마어마한 감동이 올지 몰랐다.

 

사람들은 소위 명작이란 작품은 나이가 변함에 따라 다시 읽어 보면 다른 느낌을 받는다고들 한다.

대표적 인게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가 있다.

10대에 읽을때는 어린 왕자의 지구 여행기 수준의 감흥이 있을것이고

20대에 읽을때는 장미와 어린 왕자의 사랑, 여우를 통한 길들임에 대한것을 느끼게 되고,

30대에는 지구에 오기전에 여행하며 각각의 행성에서 만난 인간 군상의 상징까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40대 때는 세상과 사랑에 대해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읽게 되는것 같다. 적어도 나에겐...

 

그래서 책은 당시 읽는 이의 마음 상태, 이해도, 삶에서 경험한 체험 상태에 따라 사람마다 시기마다 느끼고 이해하는게 전부 다르지 않나 싶다.

싯다르타 또한 그런것 같다.

내가 젊은 시절 착오로 몰라 봤지만 만약 그때 읽었었더라도 지금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를것이다.

지금 상태의 나에게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대한 헤르만 헤세의 풀이 이자 서양판 <유마경> 소설로 읽힌다.

 

싯다르타는 어릴때 부터 총명했고 잘 생겼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인물에 출신 또한 바라문 이였다.

'사마나' 라고 부르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친구 고빈다와 같이 스승을 찾아가 수행을 한다.

그리고 그 스승들이 만족할 만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물위를 걷거나, 사람을 부리는 마법 같은 초능력을 할 줄 안다 해도 그건 해탈이 아니다.

그런 정도의 수행과 경지로는 싯다르타의 마음을 비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타마 붓다' 의 문하(門下) 를 찾아가게 된다.

붓다는 당시에 완전한 깨달음, 즉 무등정각을 성취한 분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계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제자가 되길 청하고 수행하기를 원했다.

싯다르타의 친구 고빈다는 결국 붓다 곁에 남아 제자가 되지만 싯다르타는 붓다에게서 떠나게 된다.

 

<오, 지존이시여! 제가 당신의 제자들 중 하나가 된다면, 저의 자아가 단지 겉으로만, 허위로만 안식에 도달하고 해탈을 얻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실제로는 저의 자아가 계속 살아서 커지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P. 69 >

 

난 이 부분에서 당시 싯다르타의 입장을 안타까워 했다.

왜 지금 눈앞에 계신 최고의 스승을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는지?

스승에 대한 완전한 귀의(歸依)  만이 자신과 스승을 하나로 만들수 있을 텐데...

어쩌면 싯다르타는 너무나도 영리해서 아상 (我相) 과 교만 때문에 진정한 스승을 못 알아 본 것인가?

 

하지만 싯다르타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없거나 아만, 아상이 높아서가 아니였음을 책을 다 읽고 난후 에야 겨우 싯다르타의 마음을 알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은 '붓다 만의 체험' 이라고 봤다.

붓다가 아무리 설법을 훌륭하게 하고 제자들을 교화 시켜도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건 각자 자신들의 체험이 아니라고 본것이다.

싯다르타 자신은 자신만의 길로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속으로 나와서 카말라와 사랑에 빠지고, 상인이 되어 장사를 하고, 노름과 술에 빠지는 둥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 반복되는 세속적인 삶의 염증 끝에 그 모든것을 버리고 떠난 싯다르타는 강가에 이르게 된다.

그 강가에서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게 된다.

바수데바의 언행에서 감명을 받은 싯다르타는 자신 또한 뱃사공이 되어 강() 의 노래를 들을줄 알게 된다.

 

<싯다르타는 강으로 부터 끊임없이 배웠다. 무엇보다고 강으로부터 고요한 마음으로, 영혼을 열고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격정을 일으키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 경청하는 법과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P. 178 >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점차 깊어지는 깨달음에 다다랐지만

고타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던 카말라와 자신의 아들과 상봉을 하게 된다.

하지만 카밀라의 죽음과 남겨진 혈육에 대한 애착을 싯다르타는 마주 해야만 했다.

자식에 대한 애착은 싯다르타 자신도 몰랐을 정도로 큰 상처만 남겼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다시 또 강에서 싯다르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싯다르타는 들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귀 기울이는 자가 되었고, 완전히 경청하는 데 몰두 했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완전히 빨아들였다....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옴', 완성이었다. P. 226 >

 

결국 싯다르타에게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장면들이 전부 구도(求道)였던 것이다.

 

나는 이부분에서 전에 읽었던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에서 산티아고가 사막에서 바람으로 변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산티아고는 '만물의 언어' 를 익혀 '사막' 과 대화를 하고, '바람' 과 대화를 하며, '태양' 하고 대화를 한다.

종국에는 세상을 창조한, '천지만물을 기록한 손' 에게 아무 바람도 없는 기도를 하며 깨우친다.

만물의 정기가 신의 일부이고 신의 정기가 곧 자신의 영혼임을.

 

뿐만 아니라 후에 읽은 헤세의 <유리알 유희> 의 세편의 이력서는 모두 <싯다르타> 의 이야기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특히 고해사에 나오는 두 수도승의 관계는 싯다르타와 바수데바의 관계, 싯다르타와 고빈다의 관계는 각 각 다른 소설이지만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수 있었다.

아마도 헤세의 입장에서 싯다르타에서 하고 싶은 메세지는 헤세가 말년 까지 고수한 자신이 추구한 이상(理想) 혹은 깨달음과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옛친구 고빈다와의 재회에서 궁극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통해 여실히 체험하게 된다.

이 장면이 바로 내가 본 이 소설의 백미(白眉) 이자 헤세가 추구했던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모든 진리의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 세존 고타마께서 가르치시면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실때,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눌수 밖에 없었다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없네. P.236>

 

현대 물리학에서 차원에 대해 이렇게 정의 한다.

일차원은 점으로 되있고 이차원은 선으로 된 평면이고 삼차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인 입체 공간이며 사차원은 입체 공간 에다가 시간이 더 해졌다고 한다.

차원에 대한 특징은 각각의 차원은 자신보다 높은 차원을 볼수도 없고 이해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일차원은 이차원을 이해를 못하고, 삼차원은 4차원을 이해를 할수가 없는것이다.

하지만 4차원은 3차원을 알수 있고, 3차원은 2차원을 알수가 있단다.

즉 우리가 사는 3차원은 4차원을 모르지만 4차원은 3차원을 잘 안단다는 뜻이 된다.

이런식으로 보면 깨달음의 세계는 3차원을 넘어선 세계나 다름없다.

그 세계를 3차원인 현실 세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려면 이해할수 있는 범위에서 설명해야 한다.

그 도구가 언어이다. 즉 말을 통해 이해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란 도구로 진리, 깨달음을 설명 하려해도 그 전하는 말 자체는 진리가 아닌것이다.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항상 부를수 있는게 아니고 이름을 항상 이름 지어져 부를수 없다) 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존께서 깨달은 경지를 아무리 말로 표현 하려 해도, 결국 우리의 관념안에 있는 것으로 밖에 설 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敎外別傳) 이라고 하는것이다.

 

싯다르타가 붓다의 문하를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라고 해도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의 길에서 자신만의 체험으로 진리를 알고자 했던것이다.

 

<한 인간이 완전히 신성하거나 완전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네. 우리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세계와 영원사이, 번뇌와 행복 사이, 선과 악 사이에 놓인 것 처럼 보이는 간격 또한 착각이라네. P.237 >

 

<죄인 안에서, 자네 안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생성되고 있는 붓다, 가능성을 지닌 붓다, 숨겨져 있는 붓다를 존경해야만 하네.... 이 세상은 불완전하지도 않고 또는 완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지도 않다네. 아니 세계는 매 순간 완전하네. P.238>

 

얼마전에 읽은 유마경의 사상과 일치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가 곧 불국토라는것.

더럽다 깨끗하다도 없으며 번뇌와 깨달음의 차별이 없는 바로 이 자리에서 , 지금 내 안에 있는 불성(佛性) , 즉 참성품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이 둘이 아니 () 라는 불이 사상과 일맥상통하다.

 

<사랑이야 말로 나에게는 무엇보다 도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네..... 그 분께서 어떻게 사랑을 모르시겠나? ..... 그분의 손짓 하나하나가 그분의 의견보다고 더 중요하다네. 나는 그분의 설법, 그분의 사상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는게 아니라, 오직 행위와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네. P.246 >

 

이 부분에서는 얼마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다.

비록 조르바의 차원과 붓다의 차원은 다르겠지만 사랑에 대한 본질과 순간순간을 걸림없이 산것은 틀림없다.

 

<고빈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위대한 사랑과 예감에 이끌려 그에게 순종하여 그의 몸 가까이로 몸을 숙여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술을 대는 사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빈다는 자기가 바로 조금전에 입을 맞추었고, 바로 조금전에 모든 형상과 생성과 모든 존재의 무대였던 싯다르타의 고요한 얼굴 위로 몸을 굽힌 채 잠시 서있었다..... 싯다르타는 잔잔히 미소지었고, 그윽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P.252>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 오랜 여정 동안 싯다르타가 추구했으며 세존 고타마가 한 체험을 고빈다 본인이 몸소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은 오직 각자의 영역이다.

이것이 바로 헤세가 전하는 깨달음에 대한 소설적 표현 이라고 본다.

 

<싯다르타> 는 1922년에 출판 되었다고 한다. 계산을 해보면 헤세의 나이 45세 즈음에 완성된 것이다.

헤세의 말년에 지은 <유리알 유희>는 1943년 에 나왔으니 20년이 흐른 시간 뒤에 65~66세가 되는 나이다.

두 작품의 연관성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분명히 이어져 있다고 본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했던 일이관지(一以貫之 : 한가지로 꿰뚤어 버리는) 처럼 그의 사상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관통하지 않았나 싶다.

 

싯다르타는 어쩌면 이미 완성된 자 일수도 있겠다.

붓다의 또 다른 모습이며, 유마경에 유마의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볼수 있고, 헤세의 또 다른 분신이기도 하다.

 

 

헤세가 말했던 산문의 시대 속에서 남들에게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사고하는 능력,

바쁜 세상속에 홀로 여여하게 기다릴 수 있는 여유.

맛있어 보이는 식()의 유혹에서 벗어나 스스로 단식할 수 있는 선택.

각각의 능력이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선택하는것 보다 AI  나 남들의 평판에 의지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는것 보다 남들 보다 더 빨리 성취하려고 조급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맛집 과 먹방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단식을 하기는 너무나 힘들지 않는가?

 

그래서 시대엔 사고할 있고, 기다릴 알고, 단식할 아는 능력은 사실 대단한 능력 인것이다.

 

 

 

그것은 곧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를 의미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기다릴 수 있는 능력, 단식할 수 있는 능력은 독서에 빠지면 자연스레 이루어 지는 능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앞으로 누군가 헤세의 작품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싯다르타 !" 라고 외쳐야 겠다.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사고하고, 단식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몸을 움직이지도 않은채, 마치 물속을 헤쳐 나가는 돌처럼 세속의 일들을 헤쳐 갑니다.
- P105

만약 사고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면, 누구나 마술을 부릴수 있고, 누구나 자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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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 - 집착과 분별을 넘는 큰 가르침
성태용 지음 / 북튜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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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을 알라딘의 추천으로 보고 나의 대학졸업 논문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 썼던 논문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에 관한것 이었다.

왕유의 자(:이름 대신 부르는 별칭)가 '마힐(摩詰)' 이었다.

이 '마힐'이란 이름은 불교 대승 경전의 하나인 <유마경(維摩經>의 '유마힐' 거사에서 유래 한것이다.

그 당시 처음 <유마경> 을 보고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나는 것처럼 마치 옛친구를 오랜 시간이 흐른뒤에 다시 만나는 느낌과 비슷했다.

 

원래 대승(大乘) 경전인 '유마경'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 所說經: 유마에 의해 전해지는 경)> 을 줄인말이다.

실제 경전은 '불국품'으로 시작해서 '법공양품'까지 13품으로 이루어졌다.

불경은 팔만 대장경이라 부를 정도로 방대한 양과 수많은 방편(方便)을 가지고 있다.

불자가 아닌 사람들 입장에서 불교 경전은 모르는 한자와 범어(梵語) 등으로 써져 있어 읽기도 어렵고 내용 또한 심오하여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불자들도 반야심경 이나 천수경 독송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불교의 대부분의 경에는 스토리로 구성 되어 있다.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등 부처님 당시의 설법들을 경전에서 소설 속의 장면들 처럼 각각의 이야기와 주제가 펼쳐진다.

유마경 또한 그러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마힐이다. 보통은 유마거사라고 부른다.

거사(居士)는 출가를 하지않고 불법 수행을 하는 남자를 보통 일컫는다.

요즘으로 치면 신심 많은 '재가(在家) 불자' 인셈이다.

 

줄거리는 병이 난 유마거사를 부처님 제자들과 문수보살 일행들이 병문안 하러가는 내용이 큰 줄기다.

이때 병문안 가기전에 발생하는 제자들과의 설전, 그후 병문안 하러간 문수보살과의 문답과 유마거사의 방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들로 짜여져 있다.

유마거사가 부처님 제자들과 심지어는 보살들까지 하나하나 통쾌하게 깨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설정은 사실 상징적 이지만 뒤에 나오는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해 아래에서 <지금, 여기에서 깨닫는 유마경 강의>을 읽어 보았다

오래전에 잊었던 그 감동이 다시 살아 난것 같다.

지금 시대에 맞는 언어로 다시 재해석한 작가에 탄복했다.

불자가 아닌, 유마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을 위한 작가의 배려가 느껴졌다.

작가의 책은 불교 경전은 어렵다는 편견을 단숨에 없애준다.

 

이책의 작가 성태용님은 건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님 출신이시다.

더구나 한학을 깊이 배우신 분으로 본래 지니고 계신 내공이 엄청난 분이신것 같다.

작가는 이책을 집필할때 시중에 나온 다른 유마경 해석서나 해설을 참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만의 관념에도 빠지지 않으면서 지금 시대의 언어로 경전의 참 뜻을 전한다.

부처님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가? 깨달음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하는게 아니라고.

작가 본인이 원래 한학을 연구한 유학자 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불교의 교학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수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작가는 유마경 자체가 지닌 강력한 메세지를 통해  '경전에 갇히고 산속에 숨겨진 듯한 깨달음을 '지금 여기에서' 꺼내야 된다' 고 주창한다.

본래 불교의 역사에서  대승(大乘) 불교가 일어난 배경에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 때문이였다.

소승(小乘),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일반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을 소외 시킨 불교의 모습에 대한 정화 운동에서 시작했다.

대승 운동전에는 중생들의 삶은 하찮고 열등한 것이고 출가자들 삶은 뛰어나고 청정하다고 여겼다.

그러니 중생들은 이생에서 수행은 포기 하고 출가자들에게 보시와 공양하며 복이나 빌고 내생에나 출가하여 수행할수 밖에 없는다는 것이다.

우리 삶 전체가 마음의 위안을 삼는 불교에서 마저 소외 당한것이다.

이러한  출가자와 재가자, 깨달은자와 못 깨달은 자라는 이분법을 유마경에서는 철저히 깨고 있다.

깨달음은 소수의 출가 수행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일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 대중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유희에 머물렀을 뿐 구체적인 현실을 바꾸는데 등한했던 길고도 긴 불교의 역사! 핵폭탄급 파괴력을 가진 힘 있는 가르침을 불발탄으로 만들어 온 역사 아닌가요? P.123>

 

<보수와 진보, 남자와 여자의 평등과 차별, 자유와 평등, 있는자와 없는 자, 사용자와 피사용자 등의 갈등도 결국 그 뿌리를 거슬러 살펴보면  둘에 매달리고 그것을 정말 있는것으로 여기는 집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양극화의 현상이지요. P.150>

 

<차별성을 뭉개 버리고 하나로 만들려는 것은 획일화라는 다른 하나의 방식을 만드는 것일뿐이지요.... 그런  획일화의 입장에서 나오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위험한 사상이지요... P.150>

<둘이 아닌 진리에 깨달아 들어간 이는 상대적 차별에서 벗어나되, 다시 상대적 차별의 세계속에서 노니는 이가 되는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P.153>

 

수많은 선지식들 께서 말씀하시는 유마경의 핵심 사상은  '불이법문(不二法門) : 둘이 아닌 진리의 문' 이다.

'일체가 둘이 아니다. 둘로 보면 안된다. 둘로 보는 차별에서 벗어 나야 한다.'

깨달으신 선지식들께서는 모두 이렇게 공통적으로 설()하신다.

참 쉽다. 둘이 아니라는 말.  정말 어렵지 않고 머리로는 정말 쉽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걸 실천 수행하는것은 대단히 어려운 관문(關門)이다.

 

우리가 소위 '속세(俗世)'라고 부르는 이 현실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 같이 화합하면서 잘 살고 있는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은 왜 벌어졌는가?

멀리 갈것도 없이 우리나라만 봐도 남과 북의 이념 대립, 보수와 진보의 대립, 지역 감정 대립, 남여 차별이 항상 존재 한다.

또 더 가까이 보면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나 내 주위의 친인척, 그리고 가족까지 매일 매일 닥치는 갈등에 번뇌하고 있지 않는가?

유마경을 읽었다고, 아니 불교의 팔만 대장경을 전부 다 읽었다고 해도 이 모든걸 다 극복하고  둘로 보지 않을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관문이다. 그렇지만 꼭 넘어야 하는 관문이기도 하다.

 

<불국품>에서 사리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을 의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처님이 보살시절에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수행했으니 청정하지 못했을것 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는 여전히 청정하지 않고 더럽지 않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마치 이러한 현실의 우리를 대변하는 사리불의 마음을 알고 일깨워 주신다.

 

<나의 불국토는 청정한데 네가 보지 못하는것일 뿐이야. 해와 달은 밝은데 장님이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해와 달의 탓이겠니?  P.15>

 

<"이세계는 더럽다."라는 생각은 부정적 관점이고, 그런 부정적 관점으로는 절대 온전한 이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본래 청정함.  그것을 온전히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실천이고 수행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디 부처 라는 관점에서확고하게 서서 부처가 되는길을 걸어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본디 부처임을 확고하게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생의 나라도 똑같습니다. P.25>

 

그러면서 부처님께선 그 더러운 사바세계를 본래 청정한 불국토의 모습으로 드러내 보인다.

마치 요즘 영화에서 CG 기술 같이 또는 가상현실속의 홀로그램이 겹쳐 보이듯이 현실세계위에 바로 본래 세계인 불국토를 드러낸것이었다.

 

유마는 왜 병이 들어야 했는가?

유마는 왜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고 했는가?

연꽃은 왜 진흙에서만 피는가?

 

앞에 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수 있으리라.

역대 선지식들 께서는 둘이 아닌 도리를 철저히 깨치려면 내 근본부터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대행 선사께서는 나무로 비유하셨었다.

나무의 뿌리는 흙에 가려 보이질 않지만 흙위로 보이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 잎은 다 각각 있는것 같지만 뿌리는 하나에서 나온것이라고 하셨다.

즉 우리가 둘로 보는 것은 가지에 달린 잎들이 서로 '나다. 너다' 하고 분별하는것과 다르지 않은것 이지만  그 근본 뿌리는 하나 라고 하셨다.

이런 비유를 통해 둘이 아닌 도리를 명쾌하게 설하신적이 있다.

그렇다면 수행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근본 불성을 믿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마는 이순간에도 설하고 있다.

바로 이 혼탁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나라라고.

번뇌에 휩싸인 중생이 바로 부처라고.

수행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는게 아니라 바로 진흙에서라야 필수 있는것이라고.

이 모든것이 바로 이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는 거라고.

그렇다. 진리는 고정되지 않았다.

양극화 되고 분별이 있는 이세계가 고정된 채 있는게 아니다.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고히 믿는데서 출발한다.

내가 본래 부처이고 내가 사는 이세계가 곧 불국토임을 믿는것.

이렇게 유마경은 이 혼탁한 세상이 본래 불국토라는 희망을 전하는 대긍정의 법문이다.

 

따라서 작가가 고민했던 현시대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해답을 유마경에서 찾는 시도는 굉장히 환영할만 일인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수행이 뒷바침이 되어야 한다.

책에는 구체적인 수행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긴 했지만 아마도 지면 관계상 어쩔수 없으리라 짐작된다.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언급했던 '산문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물질문명에서 정신세계로의 전향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작가가 제안했던 유마힐식의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활이 곧 수행이 되고, 바로 이 자리가 불국토가 되는 도리.

 

왕유가 '마힐'이라는 자로 불리며 일생을 유마힐 거사를 롤모델 삼아 삶을 살았듯이, 앞으로 나도 '마힐' 로 불러 달라고 해야겠다. 비교는 하지 말고... 이름만.... 뻔뻔 한가?

<중생이란 것은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라고 금강경에도 써있지 않던가?

마힐이라고 부른다고 마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힐일뿐이니... 자격은 논하지 말자.

 

 

 

中歲頗好道     중세파호도     (중년에 무척 도를 좋아해서)

晩家南山隱     만가남산은     (만년에 종남산에 은거하네)

興來每獨往    흥래매독왕    (흥이 나면 매번 홀로 거닐고)

勝事空自如     승사공자여    (좋은 일은 혼자만 알고 있네)

                                                                        <終南別業 종남별업 중에서>

 

- 왕유(王維)는 중국 성당(盛唐)시대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더불어 시불(詩佛)이란 별호가 있는 대표적인 자연시와 선시의 대가이며 수묵 산수화 남종화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것 같다.

남이 알아 주기를 바라서 하는 배움, 즉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하는 사람은 꼭 티를 내고 냄새를 풍기는 것이지요. 완전히 소화해 낸 사람은 그 가르침의 냄새를 풍기고 다니지 않습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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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3-11-01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힐: 마음을 힐링 하다. 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 그래 마힐로 하자.
 
네 인생 우습지 않다 - 인생 일타강사 전한길의 50가지 행복론
전한길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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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쇼츠에서 욕을 하며 소리를 치는 강의 동영상이 흥미를 끌었다.

난 처음엔 개그맨이 쇼하는건 줄 알았다.

아마도 유투브가 아니었다면 전한길 강사가 누구인지 평생 몰랐을 것이다.

내가 공무원 시험 본다고 한국사를 공부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한길 강사는 공무원 시험 분야에서 엄청 유명한 일타강사 였다.

'일타강사'란 말 뜻이 나는 처음에는 '일타(一打): (핵심을 )한방에 때려 잡는 강사'로 생각했었다.

핵심을 잡아내서 가르쳐야 하니 '일타는 한방에 때린다'가 맞는줄 알았는데...

그런데 원래 뜻은  '일등 스타 강사' 의 줄임말 이라 하네...

이분이 수업중에 쏟아내는 대구 사투리, 게다가 쓴소리라고 C 발, 네발 하는데 듣기에 불편할수도 있겠지만 앞뒤 맥락을 함께 들어보면 그속엔 뭔가 진심이 느껴졌다.

어쩌면 일종의 나의 편견일수도 있겠지만 학원강사라고 하면 학교선생님보다 급이 낮다고 생각했었다.

명칭도 강사와 선생님으로 나눠진것이 , 강사라 하면 돈을 받고 가르치기만 하는 분들이고, 선생님 하면 공부외에도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끼치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메스컴에서 들리는 뉴스들을 보면 학교 선생님의 교권은 완전히 무너져 버린것 같다.

또한 공교육과 선생님이 본래 무슨 역할이였는지를 점점 잊게 되는 시대가 되버린것 같다.

오히려 일타강사로 불려지는 많은 학원선생님들이 공교육의 학교선생님들 보다 영향력이 더 커보인다.

작금의 시대는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 유희>에서 언급했던 '산문의 시대' 나 다름없다.

산문의 시대에는 진위를 알수없는 정보와 강연들의 난립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전한길 강사'는 주목할만한 인물인것 같다.

그의 책 <네 인생 우습지 않다> 는 자신의 인생담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담은 책이다.

 <미친듯이 하면 뭐든 성공하고 합격 한다.>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

<숨이 붙어 있는한 네 시간은 온다.>

<기죽지 마라, 청춘은 가진것이 많다.>

<눈 감고 필요 이상의 자는것 외에는 다 배우는 거다.>

<핑계 대지 마라, 난신적자들아>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이야>

책의 곳곳에 나오는 이러한 동기부여 격언도 좋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것은 전한길 강사의 인생 스토리였다.

고3때, 공부보다 의리로 친구들 하고 노느라 대학 진학을 포기 했었단다.

어짜피 집안도 가난해서 대학갈 형편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집안 농사일이나 도울꺼라고 생각 했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외출하셨다 돌아오셔서는 방으로 따라 들어 오라고 했단다.

아버지는 포대 자루를 턱 내놓고 풀어보라고 해서 풀어보니 거기에 현금이 수북히 들어 있었단다.

당신은 아들 대학 등록금을 모아놓고 '합격' 하길 기다렸는데 아들은 아예 시험 조차 치지 않았다 하니 기가 차셨을 것이다.

그러고는 아들 앞에서 아버지는 목 놓아 우셨다고 한다.

그때 학생 전한길은 아차, 싶었단다. 진짜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 바로 다시 짐싸들고 자취방으로 들어가 독하게 재수 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1년뒤 경북 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인생의 황금시기였던 30대, 당시 대구 최고의 스타강사로 떴고 그걸 발판으로 대구에서 제일 큰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이 되고 출판사까지 맡아 경영하였다 한다.

게다가 지방 출신강사 최초로 EBS  방송 강사까지 진출해 당시 인기는 최고였단다.

그렇게 잘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대학 입시제도가 변하기 시작했고 또 어떻하다가 하던 사업이 갑자기 우르르 무너지더란다.

뒤에 정신 차려 보니 빚만 25억이 남겨졌단다.

그뒤로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10년간 빚쟁이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단다.

그러다가 마치 무림의 고수가 혈혈단신에 칼 한자루를 품에 안고 무림에 뛰어든것처럼 노량진에 올라와 자기 본업인 강사로써 목숨 걸고 강의로 승부를 걸었다고 한다.

그렇게 절실한 마음이 통했는지 결국 재기에 성공해서 빚 청산 다하고 지금은 세금만 한해에 15억을 내는 일등 납세자가 되었단다.

참으로 롤러코스터 처럼 전한길 강사의 인생은 참으로 버라이어티 했다.

그래서 전한길 강사의 쓴소리는 자기 체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셈이다.

자신에게 배운 학생들은 모두 합격 시키겠다는 원을 세우고, 자신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어느 제자가 소홀히 할수 있겠는가?

곧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다.

전한길 강사가 전하는 인생론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조언을 꼽으라면 두가지가 있다.

첫째 <인간이란 배신 하는 존재다.>

인간 관계에서 배신은 당연한 거란다.

그래서 배신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상종 하지 말아야 할 두 부류의 인간. 감사할줄 모르는 인간, 미안해 할 줄 모르는 인간>

극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누리는 것중 하나 부터 열까지 자신이 혼자 한것이 있는가?

입는것, 먹는것, 전부 남의 손을 거쳐서 도움을 받는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돈을 지불한다고 하지만 그 만한 돈으로 혼자 그렇게 만들려면 할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였다.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크게 성공하기전에 큰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그 시련을 견디고 버티면 결국엔 성공하는것이 어찌 그리 다들 비슷한지 모르겠다.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계획인지는 모르겠으나 항상 그렇게 되는것이 우주의 법칙처럼 보인다.

날이 밝기전에 새벽녁이 제일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원래 세상 이치가 그런가 보다.

전한길 강사가 지금의 일타강사가 된 계기는 초딩 4학년때 담임 선생님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가난이 창피하다고 생각한 시절, 선생님의 가정방문때 도망을 갔는데 담임선생님은 '가난이 부끄러운게 아니다.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꺼야' 라고 격려하며 안아 주셨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의 따뜻한 기운을 지금도 전강사는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진정한 스승이라면 제자의 모든걸 감싸 안을수 있고 제자가 꼭 잘될꺼라는 믿음을 가지신다는 뜻일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저마다 가슴속엔 불 밝힐 심지 하나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심지에 불을 밝히려면 이미 먼저 밝혀진 불에서 전달 되어야 할것이다.

아마도 전한길 강사가 어릴때 담임 선생님 한테 받은 따뜻한 온기는 지금은 따뜻한 불이 되어 대한민국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전달 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승에서 제자로, 제자는 다시 스승이 되어 다시 또 제자에 전달하고... 이렇게 전등(傳燈) 하는것 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공교육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요즘 세태에 대해 나는 잘 이해가 안가는 면이 많다.

사회는 발전했다고 하는데 왜 선생님들의 교권은 한없이 추락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진정한 스승님이 부재(不在)한 듯한 모습에 씁슬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훌륭하신 선생님은 꼭 학교에만 계시는게 아니지 않는가?

대행선사께서는 만물 만생을 스승으로 삼았고 굴러가는 돌을 봐도 스승으로 여겼다고 하셨다.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탄식보다 내 자신이 배우려는 자세가 있는지 부터 생각해야 봐야 될것 같다.

내 불씨 부터 갖춰졌는지 살펴 보는게 우선이겠지?

.

그래, 적어도 난신적자는 되지 말아야지.

난신적자(亂:어려울 난 臣: 신하 신 賊: 도둑 적 子: 아들 자): 임금을 배신하는 신하와 부모에게 패악질 하는 아들 이란 뜻. 한마디로 욕 이다.

‘Authority‘ 라는 것은 ‘권위‘ 라는 뜻인데 이 권위는 자기가 잘났다고 나오느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출때 나온다. 자신을 낮출 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나온 영어 단어가 understand 다. ‘낮은 곳 under, ‘선다‘stand 의 합성어로 그것이 바로 이해, 상대방의 눈높이, 존중하는 자세.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짜 진리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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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실패를 기회로 만드는 등산과 하산의 기술 아우름 10
엄홍길 지음 / 샘터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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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이라....

친구의 성화로 어쩌다 산악회에 몇번 따라 갔다가 덜컥 가입을 하게 되었다.

산에 소풍가는 기분으로 따라 나섰는데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한번 산행을 하면 왕복 18키로 정도 된다는데 계속 걷고 올랐다 내려갔다 하는게 쉽지 않았다.

오를땐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고, 내려 올땐 무릎이 아파 고통 스러웠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 정도는 산엘 가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무릎이 아파 오를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등산 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엄홍길 대장님이 쓴 책이 눈에 들어온다.

내 평생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일은 없겠지만 나한테는 매달 올라야 할 산들이 에베레스트 산이라 생각될 정도로 아직 나에겐 힘이 많이 들것 같다.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 지은이는 엄홍길 대장.

엄홍길 대장님에 대해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우리 나라 산악인 하면 엄홍길 대장밖에 안떠오를 정도로 우리 나라 국가 대표급 산악인이다.

하지만 유명세와는 다르게 이책을 읽기전에는 사실 이분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잘 몰랐다.

이책은 엄대장님이 힘든 등정을 통해 도전과 좌절, 다시 도전과 성공을 하는 성장기와 같다.

엄대장은 3살때 부터 살게 된 의정부의 원도봉산 골짜기에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까지 40년을 살았다.

자연스레 어릴때 부터 산과 친숙하게 되었지만 학창시절엔 학교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피해다녔을 정도로 한편으론 산에 사는것을 창피해 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20대 UDT로 군제대 후 거칠것이 없었던 시기, 희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8850미터를 등정을 목표로 생애 처음 8천 미터급의 산에 도전했다.

등정을 위해 훈련도 열심히 하고 자신감도 충만했지만 막상 거대한 산앞에서 한없이 작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동료들이 오르다 사고로 다치고, 죽는 과정을 목격하고 자신도 다치고 죽을뻔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큰 차이가 없구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구나.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서 같이 숨쉬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P. 33 >

산에 오른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결국 또 오르게 된다.

산이 자기를 내버려 두지를 않더란다.

사람들로 부터 가장 많이 받는다는 질문, 왜 산에 오르는가? (그러게... 왜 산에 오르지? )

엄대장의 대답은 아마 '산이 나를 불러서' 가 아닐까 싶다.

그후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 기원을 담은 등정에서 결국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을 밟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임하는 사람은 결국 살아남습니다. 절실한 마음. 이루어 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그 사람을 성장하게 해요. P. 47 >

이후 엄대장은 산에서 여러번 만난 스페인 산악인의 인연으로 인해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8천미터 급 고봉 14좌 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게된다.

<심상사성(心想事成) 간절히 원하고 절실해야 이루어진다. 여러분은 지금 간절히 이루고 싶은것이 있습니까?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P. 50 >

<자승최강(自勝最强)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 나 자신은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 즉 극복인 대상인 동시에 믿어야 할 존재 입니다. P. 65 >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P. 66 >

그렇지만 모든게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는다. 그도 '풍요인 여신' 이라고 불리는 안나푸르나 산앞에서는 4번의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그 과정중 세명의 동료를 잃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결국 안나푸르나 등정은 5번 시도 끝에 정상에 오르게 된다.

<기고 만장하고 교만했던 저를 안나푸르나가 일깨워 준 것입니다. 산이 받아 주어야 오를 수 있다는 것, 산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P. 74>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 내려 오면서 당시 유일한 여성 등반 대원의 실종을 맞이 하는 아픔도 함께 겪는다.

정상을 오르는것도 어렵지만 처음 올라간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하산도 똑같이 어려운 과정이다.

 <서른 여덟번의 팔천미터 등산, 세계 최조 16좌 등정, 실패 할때 마다 생기는 것은 좌절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거듭된 실패 덕분에 오히려 목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P. 76 >

<후회가 없으니 다시 일어설 힘도 나오는 것이지요. 정말로 두려워 해야 할것은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포기 하는 것입니다. P. 80 >

결국 엄대장은 16좌 등정 도전을 달성하고 계속 자신만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40이 넘은 나이에 중국어과에 입학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재단을 설립하여 네팔에 학교을 짓는 원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언제 부터인가 산만 보이는것이 아니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보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P. 104 >

<산은 저에게 삶은 과정이며, 그 힘든 과정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음속에 불어오는 수많은 자만과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교만을 버리고 한걸음 한걸음씩 나를 올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지요. P. 106>

사람들은 성공만 생각하고 실패를 쉽게 무시를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짜 각성은 실패를 통해서 얻을수 있는것이다. 그렇게 보면 성공과 실패는 둘이 아니다.

<욕심이 눈을 가려서는 안됩니다. 평상심을 잃지 말아야 해요.... 늦더라도 포기 할줄 알아야 해요... 판단력은 욕심을 버린 겸허한 마음자세에서 비롯됩니다. P. 112 >

엄대장의 등산 여정은 자신의 삶의 여정과 일치하며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무엇이 도전이고 왜 도전할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엄대장은 함께 등정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10명의 대원들의 사진을 항상 품속에 가지고 다닌단다.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등정을 하고 산에서 어려울때마다 항상 그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그들의 사진을 정상 꼭대기에 함께 묻어준다.

<살아서는 이루지 못한 너희의 꿈을 안고 오르는 거다. 너희도 지금 나와 함께 가는 거다. 그러니 나에게 용기와 힘을 줘. 이 위기에서 벗어 날수 있도록 제발 날 이끌어 줘. P. 118>

<히말라야 신들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거둬 주시고 안아주시고 편안하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요. P. 119>

산에서 힘들때 동료들을 생각하면서 불렀다는 휘비스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란 노래.

전에는 익숙한 멜로디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봤던 노래였는데 책에 개사한 내용을 보니 잔잔한 울림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엄대장의 이 모든 도전은 결국 나눔으로 귀결된다.

엄대장은 동료들은 죽고 자신만이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자신이 왜 살아 남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저는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산이 저를 살려서 세상밖으로 돌려 보낸 이유라고 생각 합니다. P. 131>

<저는 우리 인간들이 쓰는 언어들 중에 가장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말이 '도전' 이라고 생각 합니다. 사람의 산에 오르며 또 하나의 아름다움 말은 '나눔'입니다. 나누는 순간, 베푸는 순간 손해 보는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 140>

엄대장은 가난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르파일을 하는 네팔의 빈촌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받게 하고, 다리를 저는 여인을 수술시켜 완치케하고 간호사 교육까지 받게 하는 등 지금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엄대장은 평생을 도전을 하며 살았는데 그 최종 도전이 '나눔의 확장' 이 되고 있다.

도를 깨닫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처럼, 엄대장님도 그러한 경지가 아닌가 싶다.

<제가 앞으로 올라야 할 산들은 이웃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의 산입니다. 어쩌면 그산은 히말라야 산보다 더 높을지 모릅니다. 더 춥고 외로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P. 141>

엄대장은 외롭고 힘들다면 무조건 산에 오르라고 한다.

그래,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라고.  근처 작은 산부터라도 올라봐야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악회에 가입된게 우연이 아닐수도 있다.

혹시 누가 아는가? 몇년 뒤에 진짜 히말라야라도 가게 될지...

어쩌면 산이 나를 부르고 있는게 아닐까?

내가 아직 듣지 못하고 있는것일 수도...

 

 

조금 알면 오만해진다. 조금 더 알면 질문하게 된다. 거기서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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