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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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블로그 활동을 하다가 이웃 분의 포스팅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스팅 하던 주제는 서울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인상파 화가 전시회였다. 이때 전시회 주제에서 메인 그림으로 소개된 그림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장갑에 양산을 잡고 멀리 떠나는 배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탈리아 인상파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에서 <작별>이란 그림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의상에서 느껴지는 색의 미학도 그러하나 작은 손에 잡힌 양산, 게다가 살짝 접힌 손가락, 얼굴은 옆에 뺨만 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상당한 품위를 가진 우아한 여성이란 것을 알게 해준다.

특히 등을 반득하게 피며, 검은 여기를 내뿜는 배를 바라보는 그 여성의 눈가에선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마 떠나보낸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인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양산이 그런 것 같았다. 뾰쪽한 것을 잡은 여성의 손, 그것은 아마 남성의 상징인 남근인 것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태운 배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들을 이래저래 살펴보다, 그 아름다운 선과 색, 그리고 따뜻한 색감들은 나에게 큰 인상을 건네주었다. 미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단지 그림을 처음 보며 로코코의 탐미주의적인 요소의 여성도 보이고, 고전주의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도 보인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그려진 여성들은 대부분 우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 중에 <꿈>이란 그림이 있다. 어느 한 여성이 벤치에 책을 올린 채 정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나간 것에 대한 미련은 없고, 단지 지금 나의 고독인지 혹은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의 드레스와 장갑에서 보이는 우아한 몸짓에서 어떤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낯선 거리감과 동시에 상당한 매력이 넘친다. 책을 읽는 여자의 느낌인가?

이 그림이 새겨진 어느 신문기사에서 나는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란 소개를 받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에스파냐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의 <무도회 이후>라는 작품이었다. 무도회에 권력과 재력이 있는 속물적인 인간들 사이에 있기보단 차라리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책을 잡는 여자의 모습은 매우 도발적이면서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려 한다. 물론 그 기사의 소개에 나온 사진으로 매릴린 먼로가 아주 관능미가 넘치는 육체인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도 있으며, 역시 내가 이끌린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이 있다. 개인적으로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분수 곁에서의 기다림>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읽는 것은 책을 읽는 여자에 대한 책이다. 개인적 취향보다 소중하지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를 읽으면서 생각 드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여성에 대한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책이란 흔한 물건 중에 하나였지만, 19세기까지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은 흔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에 따라 인쇄술이 대량생산과 대량판매로 인해 유통되었으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부류도 대다수의 대중보단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류였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20세기 이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성들은 대다수 어느 정도 경제적 지위와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자본>을 본 것처럼 가난한 여성 아니 가난한 남성 그 모든 사람들이 일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으로 정착되던 시기는 아직 130년도 되지 않았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사색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정신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시간적 여유, 공간적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런 조건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다. 물론 이것조차도 호혜일 수 있다.

여자들이 왜 책을 읽으면 위험한가? 책에는 각종 지식이 담겨있고, 인간의 사유를 넓혀 준다. 고대사회부터 중세사회까지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권력계층이 가진 특권이었다. 즉 인간의 언어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해도 글로서 쓰고 읽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식으로 얼마든지 현실의 문제를 알 수 있었고, 자신의 통치를 해주는 관리자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식이 대다수 민중에게 퍼지는 순간, 부당한 현실에 반항하고 지배계층에 의존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중 특히 여성에게 책은 금물의 대상이었다.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신학서적, 그것은 당시 중세유럽에선 신앙이 정치적인 제도와 권력을 좌우했기 때문에 종교와 신학에 대한 이념은 결국 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만약 여기에 정치학과 사회적, 그 밖에 많은 서적들을 여자들이 읽는다면? 남성과 똑같은 수준의 지성과 이성이 생기는 것이다. 작가인 슈테판 볼만은 이런 점을 잘 지적했고, 특히나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실천한 이유도 진시황 자신의 통치방법을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대 지식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이 없어지면 자신의 정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책까지 불태우면 앞으로 반대할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로 책을 읽는 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얻음으로서 현실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 내지 지식인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아쉽게도 그런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은 권력을 지닌 남성이었다. 가난한 농민과 여성들은 뒷전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 혹은 지나치게 민감한 여성들은 남녀차별로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 계급에 대한 차별이었다.

그런 차별이 점점 와해되어 가던 시기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부터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혹은 근대사상과 근대정치의 틀을 만든 것이 프랑스대혁명이다. 전 근대적인 봉건왕조시대를 넘어 이제 다른 정치체가 열린 것이다. 이때 프랑스대혁명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보수보다 급진까지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들은 프랑스대혁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자크 루소를 존경했고,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국민공회와 헌법체계를 만든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루소의 서적인 <사회계약론> 이전에 유명한 서적으로 <신 엘로이즈> 또는 <줄리>라는 서적이 있었다.

낭만주의 문학이 도래하고, 루소를 이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열광적인 사랑과 더불어 시대적 문제를 공격한 위험한 책이었다. 귀족이나 혹은 상류계급의 여성과 그녀를 사모하는 계층이 남자의 사랑은 낭만적으로 다루었으며, 끝내 이루지 못해 영원한 이별로 긴 여행을 가거나 때로는 베르테르처럼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는 당시 귀족이나 상류여성 또는 막 태어난 지식인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프랑스대혁명 여걸 롤랑 부인 역시 귀족의 아내지만, 루소를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 외에 수많은 여성들이 루소의 책에 흠모를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19세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던 시기 책을 읽은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면 18세기까지 책 그 자체가 귀했다.

책을 생산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고, 그 책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한정적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곧 특권이었다. 책을 소장하는 것은 곧 그의 지식의 보고이며, 또한 그의 지식은 권력이기도 하다. 어떤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소설의 등장과 보급은 엄청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처음 보고 놀랐지만, 18세기 전후로 책 1권이 보통 가족들이 2주 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치란 점에서 책이 귀하고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단 번에 알았다. 하지만 이제 책은 점점 보급되면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들어가게 된다. 여성들은 처음에 내부 활동만 하게 되면서 순종적인 인생을 강요받다 어느 순간 그 내부 생활에서 책으로 통한 여가생활을 가지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존 지배계급과 그 지배계급에 의해 다시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층)남성과 남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아마 그런 기존의 이념에 순응적으로 따라가는 여성이 아니라 거기에서 탈피하거나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책을 읽는 여성들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자신으로서 있는 모습이 많다. 곧 나는 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후기에도 그런 진보적인 남녀관계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문학가 엘케 하이덴라이히는 여성의 자율적인 인간을 완성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여자들은 표지의 글처럼 책과 나 사이에 당신이 들어올 빈 자리가 없다고 하나, 막상 그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추천의 글을 남긴 엘케 여사의 글을 보면 책을 읽는 여자는 남성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근대사회나 근대사회에서나 남녀의 결혼문화에서 여성에게 결정권은 없었고, 그저 시대의 도덕에 따라 흘러간다. 이제는 그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은 기사에선 이 말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책을 읽는 여자들은 결국 책을 읽는 남자, 아니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공유하고, 책으로 혹은 자신의 판단으로 얻은 그 무언가를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뭔가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잘 지적하다시피 21세기 시대는 영상의 시대다. 문자문화의 이전 시대는 종교의 관념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지배했지만, 다시 이제 이미지의 세계가 인간의 관념을 지배한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흐름에 부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의 항로를 찾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확실히 밖에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여자들은 뭔가 색다름이 있어 보인다. 물론 책이라고 하여 수험서 내지 교과서, 자기계발서 같은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책까지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의 양식, 당장 돈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찾아 자신만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개성이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이 중요한 것 같다. TV 내지 미디어로 익숙한 삶을 살게 된 현대인들은 도저히 각자의 개성을 알 수 없다. 흔히 미팅이나 또는 모임자리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가진 공감대가 잘 형성된다.

왜냐하면 항상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대형극장가에서 보고, 어제 재미있는 쇼 프로그램을 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제는 거의 대다수가 같은 것을 돌고 돌며 이야기하기에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야기의 형태는 다르게 진행되어도 결론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후크 송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취향을 읽거나 혹은 새로운 재미를 찾아 다른 분야의 서적도 읽어본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보았다. 최근에 읽어본 <서재에 살다>라는 책은 19세기 조선시대 북학파 및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인생과 업적 그리고 서재에 대해 다룬다. 이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이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알았고,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서울 쪽에 세미나 참석 후에 잠시 성북동 일원을 거닐고 있을 때 옆에 있었던 분이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로 통해 새로운 문화와 가치 그리고 다른 재미와 세계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모임 때 새로운 지식과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하며, 서로 공감도 하기도 하나, 때로는 전혀 다른 반응이 오기도 한다. 그런 타인과 공감과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매력이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성이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이질적인 존재 즉 책 제목처럼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로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책을 읽지 않는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더욱 위험하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세상의 물결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남겨둠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을 그저 그래 다루지 않는다. 그 남자가 언제나 한 권의 책이 된다면 자신의 선택지점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그녀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가진 존재다. 프로이트가 남자들은 성욕에 빠진 존재라고 하듯이 나 역시 남자라서 성욕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 성욕을 가진 평범한 남자라도 여자에 대해 생각하면 성욕의 대상으로 살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체력의 한계가 있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욕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진 상대만이 정신적이나 육체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인간은 한가로움을 추구해도 지루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내가 보통 TV나 유행에 쫓는 여자들에 대해 눈이 갈 수 없는 것은 내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있으면 언제나 지루한 기분만 느낄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은 여자들만 있는 세계가 위험한 이유는 나라면 그 세계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지루함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성과 이름, 얼굴과 형태만 다를 뿐 그 속은 어느 누구 하랄 것 없이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은 분명 여성인 것 같았다. 내가 이 책을 소개해준 것에 대한 소감을 덧글로 남길 때 그분이 나에게 답변내용으로 “요즘은 정말 지성과 감성이 이성이 고루 분배된 여인은 드물죠, 그림도 그렇고. 문학 속 인물들 그렇고, 살기가 바빠서 라고 탓하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에 기본적인 품위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이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어째든 책을 읽는 여자들이 위험한 이유는 그녀들이 위험하다고 하나, 그녀들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는 정신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남자들이 단순히 그녀들을 보는 시선에서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파울로와 프란체스코>처럼 있기보단 차라리 그녀의 손에 든 책에 대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녀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될 듯하다. 물론 이 시대는 그런 그녀들이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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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1-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통해 주루룩 여성들을 감상용으로 보는 시점이 묘하기도 한데, 아름다운 걸 어떡하나 싶기도 하고; 마릴린 먼로 책 읽는 사진 종종 보게 되면 들고 있는 책이 또 화제 아니겠습니까? 아니, 조이스 <율리시즈> 의식의 흐름을 저렇게 탐독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거의 다 읽었기까지! 여기 올려진 사진도 거의 막장 페이지가 보이려 하잖아요ㅎ...마릴린 먼로가 무슨 책들을 읽었나 평전이 읽고 싶어질 정도 ㅎㅎ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13   좋아요 0 | URL
저도 먼로가 저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했습니다. 육체적 미, 즉 남성의 눈을 자극하는 글래머에 저런 지적인 매력이라니..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묘한 게 좋습니다. 오덕의 특성상..후후후

AgalmA 2015-01-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한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ㅎ
간송미술관 성북에 있을 땐 일년에 딱 두번 일주일밖에 개방이 안되는 데다 건물도 일제시대 건물이었나 해서 괴상했죠. 그림을 무슨 죄수들 감옥 들어가듯이 줄줄이 보는 희한한 상황이었는데 ㅎ 동대문 상설관이 생기니 여유부리며 더 안가게 된다는 함정 ㅎ;
김홍도<미인도>를 아직 실물로 못봐서 간송전시는 늘 눈여겨보긴 합니다. 모사로 그린 실물크기액자만 봐도 모나리자 저리 가랄 아우라예요.
서울 오시면 이제 간송미술관 편하게 보시겠네요~

만화애니비평 2015-01-21 23:41   좋아요 0 | URL
요새 미디어는 그랗게 만들죠?
간송은 성북동 지나가면서 본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서울은 진짜 볼 게 많아 놀랬습니다. 부산에 살면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들이 있지만, 문화적 공간이 부족하죠. 저 같은 특이종자는 아무래도

예전에 서울에 페루애님과 막걸리 마신 적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동대문 체크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전시보단 제가 남도에서 해남 윤선도 녹우당, 강진 정약용의 다산초당, 정약용의 외손자 방산 윤정기가 기거한 명발당도 가봤는데, 역시 실제 보는 게 좋죠.
다산초당에서 바라보는 강진포구....참...좋죠...

AgalmA 2015-01-22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저 위 기사 ˝남자들이여, ...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작성 글은 매우 편협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권신장이 많이 돼 그것에 대한 비꼼과 비굴함도 느껴지거니와 기사니 만큼 다분히 선동적인 부분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겠지만 무자르듯이 그렇게 일반화시킬 부분이 아닙니다. 프로이트의 업적 인정하긴 하지만 가장 큰 패악 중 하나가 인류문화에 남성/여성 이분법을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겁니다. 융이 왜 갈라섰는지 이해할만 했죠. 우산, 파이프 ... 비슷한 모양새만 나오면 너무들 쉽게 남근이라 말하지만 사실 당시의 복장문화부터 따져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그림이 그려졌을 때 작가는 프로이트 시대였나도 중요한 문제죠. 도상학적으로 그림에 그러한 배치 문화가 있었다는 것도 저도 알지만 프로이트 이론확립 후 모든 기표들을 성적잣대화하려는 경향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한 인식이나 교육이 저변화됨으로서 그것이 또한 역으로 더깊은 무의식화 과정을 밟습니다. 인간의 연상작용이 얼마나 쉬우면서도 편파적인지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학습된 삶으로 삶을 재단하는 또다른 폐단을 만들 수 있는 거죠. 진화가 진보가 아닌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되도록 사실을 더 거론하되 제가 깊이 검증하지 않은 걸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거론할 때조차도 누차 검증하려 하고요. 다들 너무 쉽게 담론화 만들지만 사상의 자유 추구라는 명목하에 사회 갈등과 편견의 양산은 아닌지 모든 지식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말은, 상대가 그 합을 찾게 만들어야지 내 말을 진짜로 믿게 만드는 답이자 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09:19   좋아요 0 | URL
우선 답글 전에 제 블로그에 가보면 ˝Das Kapital˝ 자본 오리지널이 있습니다. 1987년 이론과 실천이란 출판사에서 나온 서적인데, 당시 강신준 교수님이 다른 분과 같이 공역했죠. 한국 최초의 자본 번역서라고 하더군요. 당시 검찰에 고소당했는데, 검사가 이 책을 보고 그냥 풀어주었다고 하던데(어려운 도서이니)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총 9권의 책 중에서 3권을 구했죠. 지금은 5000원에 파나, 앞으로 저 책의 가격은 엄청 비싸지겠죠? 한국 인문학 도서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니깐요.

http://tomanderson.blog.me/220149863532

아무튼 저는 일단 남성이고, 아갈마님은 여성이시겠죠? 모르겠습니다. 일단 신문기사 내용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732645&cp=du

같네요.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적이고, 우선 이분법적인 요소로 통해 남녀의 차별문제를 인류학적 영역에서 상당히 공격을 많이 하는 부분이죠. 양산이란 이미지 상의 배치가 단순히 그 당시의 복장에 대한 흐름으로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남자)라는 것으로 전 생각했죠. 차라리 우산을 편 채 2~3명의 여자가 있었으면 그저 양산은 악세사리나 생활용품의 기능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라는 것, 정말 자유란 소중하나, 그 자유가 이성이 없으면 자유로 볼 수 없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나는군요. 편파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인간 누구에게 있고, 그 편파적인 요소가 업다고 믿는 것보다 차라리 있을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해 망각하고, 혹은 지나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갈마님의 조언은 여러모로 좋은 의견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죠. 제 자신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이 아픈데도 병원에 가지 않거나, 약속시간을 정해놓고 지키지 않으면 물론 이 부분에선 강요하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요는 아닙니다. 공격도 아니고요. 제 말투가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늘 그 때문에 사과를 하곤 합니다; 저는 혹시 놓치고 계신 부분은 없으신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푸념이나 일상대화의 글을 쓰시는 게 아니니 더더욱.
이성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 자유 또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 현재 제 생각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저도 압니다. 종종 갔었죠. 이젠 없어졌다고 들은 거 같은데. 비싸지겠다는 말씀은 왜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인문학의 책임감을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서보다 사람의 가치가 더 덧없는 세월이라서 말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5-01-22 13:56   좋아요 0 | URL
제 답글에 아갈마님에 대해 강요나 공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지나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주신 것이 좋다고 한 것입니다.,,아하하하...
보수동 책방골목 규모가 예전보다 많이 적어지게 되었죠.
이론과 실천에서 판매된 도서가 이젠 나오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완전한 세트가 아니라 분리되었으니 언젠가 마르크스 서적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마 먼 미래가 되겠지만) 물론 저는 팔지 않겠지만요.

AgalmA 2015-01-22 14:46   좋아요 0 | URL
걱정했는데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보수동 책방골목 없어지면 안되는데...그나마 유지된다니 그것도 다행입니다.
이론과 실천 좋은 책 많았었는데 그리 되었군요.
링크는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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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위한 레퀴엠에서 신해철은 그를 두고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라 했다. 이제 그 역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 그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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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9일 김해 명예의 전당에서 개최된 경남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우연히 국내 만화 및 애니메이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부천에 위치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만드는 것과 운영하는 것, 게다가 한국 근현대만화역사에서 원로이신 조관제 화백을 비롯하여, 한국 만화가 중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최규석 작가, 그리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장형윤 감독까지 있었다. 세미나를 관람한 후, 우연히 세미나 발제자 및 행사를 주관한 분들과 같이 식사할 기회가 있었고, 식사 뒤 뒤풀이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었다.

 

그런 자리에 우연치 않게 내 왼쪽에는 최규석 작가가 오른쪽에는 장형윤 감독이 앉게 되었다. 이 두사람의 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셀마의 단백질 커피>라는 작품이다. 최규석 작가는 같은 대학 출신 친구인 연상호 감독과 더불어 <내사랑 단백질>을 장형윤 감독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이란 작품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최규석 작가, 연상호 감독, 장형윤 감독 작품을 접해본 것은 바로 그 인디 애니메이션인 <셀마의 단백질 커피>이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감각과 스토리 전개에서 색다른 요소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유아 내지 초등학생을 상대로 하는 작품만 나오기에 청소년 내지 성인들을 위한 작품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이 만화책이고, 최근에 라이트노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큰 시장을 열게 되었으며,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서 그나마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을 겨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면 성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점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 시장이 형성된 공간을 고려한다면 유아계층과 더불어 성인들도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적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 여긴다.

 

그 중에서 이번에 내가 감상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전체 관람이 가능한 극장용 애니메이션이고, 장형윤 감독 작품 중에 <아빠가 필요해>와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다시피 그렇게 강한 충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보단 잔잔한 요소로서 관객에게 다가온다. 처음 <무림일검의 사생활>을 보았을 때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인간여자와 늑대남자 사이에 비추어진 긴장감은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필요해>의 경우 상영시간이 10분밖에 되지 않은 단편애니메이션이고, 캐릭터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물처럼 생겼고, 그들은 동물이나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우화적 요소가 매우 강한 점에서 장형윤 감독 작품은 <아빠가 필요해>와 같이 작품 내의 이름이 동화적인 요소가 강하게 보여주었다. 그런 점은 뒤에 <셀마의 단백질 커피> 중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주인공인 진영영은 원래 무림고수였으나, 죽은 후 환생하여 커피자판기로 되었고, 우연히 알게 된 혜미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피자판기인 진영영의 모습은 영락없이 동화 속에 등장할만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런다고 자판기라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미묘한 배치 속에 그의 작품은 뭔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게 있다.

 

인간과 비인간적인 등장인물로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보낸다. 그 정답은 아마 사랑일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아빠가 필요해>는 제목 그대로 아빠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여자가 나와 늑대에게 아이를 건네는 모습에서 가족의 재결합이란 독특한 모습이 나온다. 늑대와 같이 사는 사슴은 애인인 것 같기도 하면서 뭔가 위험에 빠진 존재로 비추어진다. 그러면서도 늑대는 자기에게 맡겨진 아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온다.

 

가족이란 관계에서 늑대와 사슴, 토끼와 거북이,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이고 서로 같은 조건에 있을 수 없는 존재다. 게다가 늑대는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다. 그는 자신의 일보단 결국 자기에게 맡겨진 영희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이 일을 하고 꿈을 가지고 목적을 향하여 가나, 결국 그 끝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장형윤 감독이 제시하는 작품적 가치에서 잘 알 수 있는 대사가 나온다. “문학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하나의 허구적 이야기로 작성된다. 물론 실존했던 일들을 기록한 작품도 있으나, 소설 안의 여전히 허구적 이야기다. 사실이 아니라서 허구인 게 아니라 소설로 작성되는 그 순간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말하듯 소설은 하나의 시가 될 수 있고, 시라는 것은 그 누구의 이야기로 될 수 있는 하나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삶 그 자체가 오히려 소설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기에 그 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대하여 과연 인간에게 자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것이다. 사랑에 대해 내가 잘 말하기란 어렵다. 사랑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하며, 그 사랑이란 개념을 단순히 정의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아빠가 필요해>는 가족의 구성이 이질적인 존재라도 같이 모이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이고, 가족이 없이는 자신이 어떤 출세나 성공을 하더라도 행복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가족 관계에서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빠가 필요해> 이후 등장한 <무림일검의 사생활>은 조금 다른 사랑의 이야기다. 차가운 몸으로 태어난 무림고수는 그저 싸우기 위해 살아왔고, 전생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혜미를 만나 자신의 생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은 <무림일검의 사생활>에서 혜미라는 소녀는 원래 인간이고, 검객인 진영영은 인간이었으나 커피자판기로 환생한 존재라는 점이였고,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주인공 경천이는 뮤지션 지망생이었으나 얼룩소로 변한 인물이고, 우리별 일호는 본래 인공위성이었으나 소녀로 변신한 존재다. 본래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자로 변한 경천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으로 변한 점에서 변신이란 소재가 서로 역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경천이가 얼룩소로 변한 이유는 인간인 그는 인간의 마음을 상실해서이고,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기계이면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경천이는 노래를 하는 가수지망생이었고, 예전에 나름 실력이 뛰어나 오디션에서 최종심사까지 간 실력자다. 그러나 그는 점차 음악에 대한 진심이 사라지고, 그가 좋아하던 여자인 은진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게다가 그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서 상심에 빠지게 된다. 인간인데도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경천이는 좋아하는 여자를 눈앞에서 그저 보낼 수밖에 없는 좌절감이었다.

 

그가 처음 느낀 그 마음을 담은 노래를 불렀을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래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오직 그 노래를 쫓아 온 우리별 일호라는 인공위성만이 있었다. 인공위성이었던 우리별 일호는 이미 수명을 다하였고, 그저 우주를 외롭게 떠돌아다니는 고철덩어리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저 멀리 지구를 바라보면서 일호가 발견한 것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고, 피아노 반주였다. 그 주인공은 경천이었고,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인공위성인 우리별 일호는 경천을 찾아 지구로 내려온다.

 

하지만 지구로 온 일호는 저주에 걸린 얼룩소를 만나고, 얼룩소는 소각자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져있고, 오사장이란 밀렵꾼은 얼룩소의 간을 노리며 공격해온다. 여기서부터 위기에 빠진 얼룩소 경천이를 일호는 만나게 되고, 단지 그의 노래만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천의 주변을 맴돌게 된다. 사랑도 잃고, 가난한 뮤지션인 경천에겐 아무런 미래와 희망이 없었고, 그저 현실 앞에 무력하고, 이제는 얼룩소의 모습으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소각자는 마음을 잃은 인간이 동물로 변하면, 그 동물을 찾아 자신의 소각로 안에 넣는 괴물이다.

 

괴물의 등장, 그리고 오사장의 밀렵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이미지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 마음을 잃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현실에 놓인 상황이 전혀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은 것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지 혹은 나를 위해 누가 미소를 지어주는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그런 것이다. 삶의 의지가 나를 위해서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도 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가? 그 질문에서 경천이는 오직 자신만을 사랑했고, 다른 사람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동물로 되어버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고, 이성으로서 자신 안의 세계만 아니라 자신 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만물을 보고 느끼고 그리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경천이의 경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가능했으나, 그 세계란 오직 자신안의 세계고, 남에 대한 마음을 없었다. 마음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보통의 동물들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북쪽의 마녀가 경천에게 찾아와 만약 살고 싶다면 자신을 따라 인간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렇다면 소각자와 오사장으로부터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될 경우 경천이는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하다못해 인간의 기억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려 인간의 모습을 잃은 경천이는 자신이 인간인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이 아닌 인간, 우리별 일호와의 사랑이었다. 우리별 일호는 사랑이란 단어를 모르고 감정도 모르는 기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남자가 사랑을 모르는 여자와 만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이란 감정에 눈을 뜬다. 게다가 우리별 일호는 수명이 이미 다 되었기 때문에 언제 멈추지 모른다. 일호의 목적은 오로지 경천이의 노래를 듣는 것, 음악이란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면 이해하기 어렵고 소통이 어렵다. 그렇지만 오로지 음악으로 통해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같이 어울릴 수 있다. 음악의 힘이란 바로 서로 통할 수 없는 존재라도 통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음악의 힘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을 넘어 기계인 우리별 일호까지 마음을 가지게 했다. 마음을 가지게 된 일호에게 서로 의지가 가능한 존재는 얼룩소였고, 얼룩소인 경천이는 이때까지 남들에게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진다. 자신만 생각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일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런 애절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얼룩소의 모습에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일호와 마주하면서 일호는 자신이 로봇인데도 괜찮은지? 아니라면 가슴과 등이 거의 붙어 여자다운 매력이 부족해도 괜찮은지 묻는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으나 현실에서 보자면, 일호는 자신이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지? 그리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도 좋은지 물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이질적이고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경천에게 물어본 것이다. 나란 존재, 너란 존재 있는 그대로, 그 모든 것에서 좋은 점과 더불어 불편하거나 부족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무림일검의 사생활>과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는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상대방에 가진 부족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족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나, 인간 그 개인은 타인에 대해 척도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다른 동식물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에 척도가 되는 것이지 어느 인간 하나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누군가 서로 드러내어 그것을 서로 용인하여 상대방을 아낄 수 있는 게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경천이가 은진에게 바라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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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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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이 100주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처럼 빈곤과 착취, 억압을 해결되지 않음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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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울력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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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의 이미지 소비에 대한 착취를 설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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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2-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저도 엔날에 봤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거였었는데, 흥미 진진하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만화애니비평 2014-12-01 17:45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현실문화연구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