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말 일요일에 어머니가 계시는 본가로 찾아갔다. 결혼 후에도 나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1주일마다 1번은 꼭 집에 가서 어머니와 밥은 먹으려고 한다. 결혼 후에 남편은 아내의 것인지 아니면 아내는 남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천륜에 의한 인연은 하늘이 무너질 정도의 일이 아니면 깨질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어머니 댁에 가는 것은 남들의 입장에서 보면 귀찮은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당연하기도 하다. 결혼 전의 사람들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다. 부모님은 적어도 본인의 인생을 위해 30년 전후를 고생한 분이란 점을 말이다.

 

어째든 집에 가면 항상 어머니가 집에만 있는 것만이 아니다. 주말이 되면 외출을 하여 친구 분이랑 종종 모여 마트에 가거나, 운동도 가고 때로는 커피숍에 가서 대화를 나누고는 한다. 그래서 종종 이런 일이 있을 경우 나는 집안에 홀로 앉거나 누워 TV를 시청한다. 문제는 내가 TV를 봐도 뉴스만 보기에 지겹고, 그런다고 오락연예물이나 드라마를 보는 것도 맞지 않는다. 시리즈를 이어가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으며, 방송 중인 콘텐츠가 아주 친절하게도 제1화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중간에 끼어 들어가서 보는 것도 무리수가 넘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나를 위해 케이블TV에는 별도의 시간보내기 콘텐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인기가 많이 없거나, 인기가 조금 있더라도 시간이 제법 지난 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 적벽대전>이나, 배우 견자단이 나온 작품도 볼 수 있다. 이번에 내가 집에 찾아갈 때 구경한 작품은 <기묘한 가족><가문의 영광4, 가문의 수난>이었다. 처음 <가문의 영광>이 나올 적과 다르게 <가문의 수난>편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2편과 3편은 보지 않고, 그대로 4편을 봤는데, 보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바로 특정지역을 비하하는 영화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나온 점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거나 또는 조폭이랑 많이 연관된다. <가문의 영광4>은 전라도라는 지역의 특성을 왜곡 그 자체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나올 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집안이고, 모두 범죄기록이 있는 전과자란 점도 있다. 무식하고 교양이 없으며,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국제공항 출구 심사대에 들어가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기내식을 마구 탐내는 모습, 심지어 화장실에서 담배 피는 모습까지 그렇다.

 

전라도라는 이미지는 딱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여전히 드러난다. 최근 상영한 영화 중에 정우성씨가 출현한 <증인>이란 작품에서 미란이란 인물은 살인교사자에 의해 주인집 아저씨를 살해하도록 강요당한다. 미란이 구사하는 언어는 서울말이 아니고, 전라도 사투리이다. 영화 <증인>의 배경 수도권이다. 수도권에서 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주는 주방아주머니가 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하는지 에서도 다소 의아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이 영화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정우성씨와 조인성씨가 출현한 <더 킹>에서 조인성씨의 배역을 보면, 고향 및 학교출신지가 목포이다.

 

목포에서 깡패 아버지 아래서 성장한 영화 <더 킹>의 조인성씨가 결국 싸움만 하는 문제아라는 점, 그의 친한 친구가 목포출신의 조직폭력배란 점에서 더욱 부각시킨다. 전라남도의 도청은 광주에서 목포로 이전했고, KTX 철도도 목포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목포 그리고 전라도는 항상 무식하고 폭력적인 도시로 그려낸다. 미디어란 그런 점에서 다소 아쉬움만 남긴다. 다소 영화소재가 진보적인 관점이라 해도 그 틀에서 크게 비켜나가지 못한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목포와 전라도에 대한 최고의 왜곡은 <목포는 항구다>라는 영화이다.

 

차인표씨와 조재현씨가 출현한 영화에서 약골 형사 조재현씨는 목포의 조직폭력배 수사를 위해 목포로 찾아간다. 이때 택시를 타는데, 운전기사가 전라도 말투로 대화하는 것은 맞지만, 갑자기 다른 동료택시기사를 만나 조직의 큰형님이 출옥하자, 손님을 강제로 하차시킨다. 이에 다른 택시를 타니 이번에 말도 점잖게 하고, 교회성경과 십자가까지 차에 구비한 기사였다. 얌전하고 매너 있는 분이라 생각했지만, 방금 자신을 쫓아낸 택시기사를 만나. 출옥소식을 듣는 순간 태도가 역변 한다.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게 바로 전라도라는 지역이 상당히 비하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부터 이런 게 시작했을까? 역사라는 지점에서 전남지역 특히 광주의 518를 생각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518의 광주는 다른 전남지역을 소재로 내세운 영화에 비해 무식한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범죄의 온상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물론 전남지역 조폭영화에서 광주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적어도 광주에서의 518의 모습은 다른 영화와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지역적 고립, 그리고 정치적 왜곡으로 수모를 당했지 현재에 이르러 세계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을 가진 민주화의 성지로 거듭나는 도시이다.

 

그렇다면 전라도라는 호남이란 지역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찬밥을 받아온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430년 전 선조가 조선의 군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1592년 늦은 봄에 일어난 이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 기축옥사라는 정여립 역모란 의문의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여기며, 군주사회인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역적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정여립은 관군을 피해 도망가다 결국 자결을 하고, 아들 역시 관군에 잡혀 죽임을 당한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동서로 양분할 때. 정여립은 처음 이이와 친분이 있었지만, 이이가 세상을 뜬 후 동인세력인 이발과 친하게 지냈고,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이발을 중심으로 하던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던 최영경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이발과 이길 형제, 그의 어머니와 어린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고 만다. 조선의 선비 천 여 명이 죽임을 당한 기축옥사의 피해는 특히 호남지역에 심각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에 유배 올 때, 호남지역의 명문사대부 집안은 3개 정도만 나열하고, 나머지는 모두 빛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 원인은 바로 기축옥사이다. 기축옥사가 1589년 일어난 일이고, 정약용 선생이 황사영백서로 인해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시기는 1801년이다. 대략 220년이 지난 시점에 회복되지 않을 정도 큰 화를 당했다.

 

사림세력이 기축옥사로 당한 것도 모자라, 호남지역에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을 지키고 있더라도 육상에 주둔한 왜군을 무찌른 사람은 대부분 의병이었고, 의병장 및 의병을 일으킨 사대부들 중에서 호남사대부들이 많았다. 이때 많은 사대부들이 죽음을 당했고, 임진왜란 이후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쇠락해진 것이다. 기축옥사로 역적의 낙인부터 시작해 임진왜란 피해, 그리고 조선시대 특성상 귀양은 사형 다음으로 높은 처벌이다. 귀양지가 도성 한양으로부터 멀면 멀수록 그 죄가 매우 크다. 특히 북방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과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남해지역, 또한 제주지역은 멀고도 험한 여정인 것이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죽는 사람도 있고, 가서 죽는 사람도 많았다. 낯선 땅에 가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이 들어 고생하는 사람도 많다. 변방의 지역은 유배자들의 눈물이 서린 곳이다. 또한 호남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시작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곡창지대이다. 많은 곡식과 축산물이 생산되며, 한국인들의 식탁에서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 지역이다. 농민과 어민이 계속 대를 이어가는 지역이니,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다. 조선시대 역적과 중죄인이 머물던 곳, 일제 강점시대에는 식량을 수탈당하던 곳,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며 근대화로 오면서 빈곤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바로 호남지역 그리고 특히 전남이다.

 

이런 전남지역 그리고 대표적 깡패도시로 영화에 등장하던 목포시가 조금 다른 식으로 전개되려 했다. 물론 고상한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변화의 바람을 가지려고 했다. 영화 <롱 리브 더 킹> 목포의 영웅이란 영화는 그렇게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물론 영화에서 목포지역의 국회의원은 검사출신의 권력자로 조직폭력배와 검찰조직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게다가 경제권을 동원해 기존 영세상인이 몰린 전통시장을 철거하려 한다. 거기에 대규모 빌딩을 세우면, 토지를 판매하는 자는 엄청난 부동산 수익을 올리고, 목포관광객의 유치가 성공하면 상권의 이익이 보장된다.

 

이권이 보장된 사업에 정치권과 조직폭력배가 만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존 가난한 영세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조폭의 도시 목포이니 조폭의 방식대로 폭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물론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분명 존재한다. 법적인 절차와 일반적인 상식에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영화 <롱 리브 더 킹>은 그런 갈등과 문제점을 중간지역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주먹으로 해결하기도 하나, 주먹이 아닌 것으로도 해결하는 점이다.

 

지방조직폭력배 두목인 장세출은 우연히 강소현 변호사를 만나고,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반해 사람이 바뀐다. 기존 조직폭력배라는 모습을 버리고, 한 사람의 목포시민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더 나아가 배고프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강소현 변호사에 어울리기 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때 목포지역에 내려온 재야정치인 황보윤이 영세상인의 힘이 되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장세출은 황보윤이 운영하던 식당을 관리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세력에 의해 황보윤이 크게 다치자, 이에 국회의원후보자를 장세출로 내세운다.

 

장세출은 우연히 버스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자, 목숨을 걸고 버스기사를 구해낸다. 그게 이슈가 되어 일약 영웅이 되었고, 그가 유명해지자 과거의 유령이 따라온다. 그는 과거의 유령을 부정하기보단 오히려 당당히 맞서 싸우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비극이 아닌 점에서 분명 장세출이 당선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선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른바 조폭영화에서 남자가 두목 내지 조직원으로 등장할 때 상대배역의 여성은 항상 엘리트 사회인으로 등장할 경우가 많다. 서로 티격태격하다 우연히 마음이 맞아 연애를 진행하는 로맨스가 다소 비현실적이며, 또한 억지로 포장한다.

 

영화 <롱 리브 더 킹>에서 장세출은 강소현 변호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꾸준히 그녀 앞에 얼굴을 비추고, 90일 가까이 다른 용역깡패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한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알아도 사랑이란 우연한 계기로 찾아오나, 그 사랑을 받아주는 상대방은 치고받는 과정에서 우연에 의해 생기는 게 아니라, 진정성에서 시작된 점이다. 단순히 무식하게 기분파의 분위기가 아니다. 하루와 이틀 그리고 이어지는 나날이 계속 이어져가면서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장세출은 변했고, 그는 어느 순간 가진 것 없는 늙은 노인들의 우산이 되어주었고, 영세상인들의 우군으로 변했다.

 

기존 목포를 소재한 영화를 보면 어떨까? 그저 무식한 녀석이 무식하게 주먹으로 휘두르고, 의리도 좋지만, 의리를 제외하면 그저 조폭이 주먹으로 해결했다는 구시대적 낭만에 빠져있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다. 전남지역을 비롯한 낙후되었던 지역이 그대로만으로 볼 수 없다. Well being 시대 천연의 자연과 식료품이 나오는 지역은 관광지가 되어가고, 문화유산도 보전이 잘 되었기에 우리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목포는 항구다>만이 아니다. <롱 리브 더 킹>에서 조폭 장세출이 신분세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게 아니라 꾸준히 자신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처럼 더 이상 지역 차별적 발상이 영화 속에 투영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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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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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죽음을 본 장면은 너무 슬펐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을까요? 이사오 감독님 제발 좋은 곳에서 앤과 같이 꽃마차를 타고 아름다운 숲을 거닐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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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5.18 - 다시 읽는 5.18 교과서 질문의 책 23
김정인 외 지음, 5.18기념재단 기획 / 오월의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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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오월은 노무현 대통령의 10주 기일 되는 해이고,
내년은 518비극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비극의 싹은 꽃을 피워 지지 않은 채 하늘만 무심하게 바라본다.
비극의 꽃을 지고, 그 뒤에 희망이란 열매를 그리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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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막 2019-03-26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그리 되었군요 이래저래 슬픈 봄이지만 그아래 숨어 있는 희망을 우리는 보았다고 생각해요

만화애니비평 2019-03-26 09:01   좋아요 0 | URL
희망은 절망의 형제인듯 합니다.
 
[세트] 골든아워 1~2 세트 - 전2권 -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8 골든아워
이국종 지음 /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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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배 위에서 혼자 크레인작업하다 바람과 선체의 기울임으로 크레인바가 아버지 무릎을 타격되자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아버지는 그뒤로 걸음걸이가 불편해졌으나, 만일 이런 분들이 없었다면 출혈과다로 쇼크사했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현실에서 골든타임은 생존의기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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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연휴에 개봉된 영화는 참 특이한 작품이 나왔다. 대한민국 과거시대면 대부분 조선시대를 그린다. 그렇지 않으면 삼국시대 이야기를 다루는데, 이번에는 고구려 역사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고구려 역사에 대해 생각하면 좀 많은 희비가 엇갈린다. 최근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역사 재조명에 대해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보통 과거 조선이나 그 이전의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개국과정, 임진왜란, 병자호란 또는 의병들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을 넘어 전투나 혹은 격전 등을 일제강점기시대 항일투쟁 열사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개봉한 <안시성>을 조금 다른 성격이다.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 나는 이미 안시성 전투를 알고 있고, 양만춘이란 인물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인물일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다. 역대 한국 역사영화에서 자국 내 개국, 내전, 쿠데타, 반정, 암살 등이 등장하는 내분을 제외하여 타 국가와 적대관계가 놓인 정도는 역시 중국과 일본이다. 특히나 일본은 임진왜란을 시작하여 항일운동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다. 중국과 전쟁하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고대 중국과 전쟁하면서 우리가 제대로 이긴 전쟁은 고려시대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몽골족의 지배에서 명나라로 교체될 때 명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았고, 이후 청나라 여진족들이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

 

지금 중국은 공산국가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국가라고 하나, 그 이념의 토대는 공산주의보단 오히려 과거 고대에서 내려온 중화민족, 한족(漢族)의 세력을 생각한다. <광해군>이란 역사연구서적을 작성한 한명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과거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대참사를 두고 일본은 풍태합 조선역(豊太閤朝鮮役)” 내지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이냐? 그들은 항일원조(抗日援朝)”라고 부른다. 일본에 저항하고 조선을 도왔다는 뜻은 아직도 임진왜란을 보는 중국과 일본은 피해자이면서 승리의 주역인 조선은 제3자인 것처럼 꾸민다.

 

중국의 주석 모택동(毛澤東)은 자신의 성이 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한 것이 있었다. 인조 초반 그리고 인조반정 이전에 중국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란 장수가 있었다. 후금 청나라에 계속 열세이던 명나라가 운 좋게 모문룡이 1번 청나라에게 이긴 적이 있었다. 후금은 여진족이고, 명나라는 한족이다. 한족이 결국 청나라에게 멸망해도 중국은 한족의 실세들이 장악한다. 나머지 민족은 변방의 존재이다. 결국 한족과의 관계에서 모택동은 자신의 성인 로 통해 모문룡을 거론한다. 모문룡은 조선 인조정권 시절 많은 패악질을 한 장수이다.

 

아직까지 광해군이 패주 내지 폭군으로 불리고, 궁궐공사에 투입된 금액이 엄청나다 하지만, 모문룡에게 빼앗긴 은과 국가예산은 조선 전체의 1/3 정도까지 이른다고 한다. 모문룡이란 존재가 조선에게 가장 큰 인물로 된 이유는 조선은 반정국가이고, 명나라 장수를 통해 임금 자리를 명나라에게 책봉 받아야 한다. 인조라는 존재는 그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은 용군(庸君)에 불과했다. 그 이후 그가 선택한 미래는 병자호란이란 역풍으로 도래한다. 조선의 역사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관계에서 타격은 둘 다 만만치 않으나, 병자호란에 대한 부분은 아주 미묘하다.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개입 후 조선은 승전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패전국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승리와 패배에서 타격이 큰 것은 병자호란이다. 그런데 오히려 임진왜란에 대하여 현재 한국인들은 더 큰 감정을 주입한다. 임진왜란 이후 을사늑약에 따른 조선의 몰락,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조선 민중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통치는 300년이 넘었다. 청나라에 대한 미묘한 부분은 청나라에 패배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나, 청나라 세력에는 고개를 숙인다. 이중적 심리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도부가 지려는 것을 회피하려고 한 점이다.

 


조선이 설립하여 중국 명나라에 대한 외교 이후 청나라까지 이어졌을 때 북방진출에 대한 꿈은 없었다. 단지 효종에 이르러 북벌론을 거론했지만, 이 역시 허무하다. 청나라를 치고 이후 다시 명나라 왕조를 복귀한다는 생각이다. 자주적 조선은 없었다. 청나라가 계속 동북아시아 패권자로 군림하면서 점차 사대부들의 의식도 바뀌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고대사에 대한 연구도 조금씩 개선되었다. 고대사와 단군에 대한 정신은 조선이 몰락하면서 더욱 빛이 났다.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내지 대종교 신자들이 고대의 조선을 역사속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시대에 저술된 서적이다. 고려는 아시아에서 강대국이 아니다. 고구려를 이어받아 고려라고 명칭하나, 그들의 모습에 고구려는 없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호령했고, 고려는 압록강 위로 나가지도 못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존재했지만, 결국 요동반도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국역사에서 요동반도에 머문 조선인과 그렇지 못한 조선인에서 요동반도에서 머문 조선인의 역사가 길었다. 고조선을 필두로 고구려는 대륙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셈이다.

 

리뷰 서두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말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아시아 대륙의 세계에 중국만 있고, 나머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심지어 고구려의 역사조차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중에 하나인 것처럼 만들었다. 역사의 교육은 무섭다. 바로 고구려의 역사, 그리고 대륙의 기록이 사라진다면 고구려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과의 문제도 거론된다. 고구려의 영토에서 수도는 평양성이다. 현재 북한의 수도는 평양이다. 평양이란 곳은 고구려와 북한의 수도이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마르크스가 제시한 것과 상관없는 관료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분단되어 있지만, 통일한국 내지 연합국가로 이어질 경우 북한과 중국의 관계성에서 역사의 과거는 현재의 진행형으로 되어 미래까지 좌우된다.

 

역사는 과거에 존재된 것들이 현재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각인된다. 독도가 일본 영토이라고 말한다면 모두 버럭! 하고 화를 낼 것이다. 일본이 독도망언을 일삼고 있는 와중, 역사학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의 문제는 영토를 넘어 영해와 영공까지 이어진다. 영해가 사라지면 어업권이 사리지고, 영공이 사라지면, 공중작전권을 상실한다. 역사를 조작하거나 새롭게 바꾸려는 것은 현재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전술이다. 영화 <안시성>을 다소 다른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시나리오 흐름이나 결말 따위는 이미 파악된 영화이다. 안시성 전투 영웅 양만춘이 있는데, 영화 <안시성>에서 안시성의 성주와 성민들이 패배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단지 그 과정과 그 전쟁에서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와 이념적인 요소가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추석은 한국 전통에서 매우 소중한 연휴이다. 물론 고부간의 갈등, 귀경차량, 제사 준비의 번거로움과 예산소요는 많은 부담이 된다. 그런데 한가위 전통은 한국인에게 무시하지 못할 역사적 행사이다. 예전에 서울 단군성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국조 단군상이 외롭게 작은 방안에 모셔져 있었다. 단군성전을 참배하고, 모금함에 운영비를 모금하니, 관리하는 분이 오셔서 예전에 개최한 개천절 행사자료를 주었다. 개천절은 한국민족이 가장 중요한 날이나, 왠지 모르게 잊어진 날이나, 행사자료를 보니 고조선 시대부터 쌀농사를 수확 후에 떡을 바쳐 하늘에 올리는 일들이 몇 천 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국인은 쌀을 송편을 빚어 먹고, 설날에는 떡국을 만들어 먹는다. 오랜 역사가 이어진 음식문화에서 한국인이란 존재는 과거 몇 천 년 전이라도 그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권자로 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연개소문의 아들이 권력다툼으로 결국 고구려는 망한다. 고구려는 망할지언정 고구려의 후예들은 아직도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독과 제작진들은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든 작품이다. 21세기 한국이 7세기 삼국시대를 그린 것이다. 복식과 음식문화, 그리고 군수물자와 무기까지 재현하면서 말이다.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상황적 조건은 고대국가를 묘사했다.

 

영화에서 고구려의 신녀가 고주몽의 활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고구려인 중에 없다 하며, 고구려의 신이 고구려를 버렸다고 한다. 신이란 존재, 한국의 신화를 뜯어보면 우선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해모수 신화, 가야국가, 신라왕조,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천신의 자손이 내려오거나 혹은 알에서 깨어 나온 영웅이 등장한다. 신화(神話)는 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고, 한편으로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가 신화로 되고, 신화가 역사로도 된다. 안시성 전투는 역사적 사건이고, 영화 <안시성>은 역사적 전투를 신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신녀가 말한 것처럼 고구려의 신은 없고, 주몽의 활은 당대의 영웅 당태종 이세민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서 제시한 것처럼 양만춘은 그 활을 날릴 것이란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영화는 전쟁의 끝과 시작이 문제가 아니라, 왜 양만춘이 그 활을 날릴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태학도 수장 사물은 당나라와 전투과정에서 많은 고구려 용사들이 적의 칼에 쓰려가는 것을 봤다. 게다가 비참하게 퇴각하면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양만춘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영화에서 그는 주체적인 존재보단 그저 수동적 존재로 나오나, 양만춘을 만나면서 능동적인 인물로 변해간다.

 

처음에 태학도의 엘리트에서 점차 안시성의 성민으로 변한 것이다.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양만춘은 반역자로 낙인찍히나, 안시성 내 양만춘은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뛰어난 지략, 넓은 도량, 죽음과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은 불굴의 장수, 그가 사물과의 대화에서 싸움에 대한 진의를 대화한다. 싸움은 이길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투쟁을 하는가?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안시성의 병사들에게 뒤를 돌아보라고 한다.

 

뒤에는 안시성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두려운 눈빛으로 안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저들은 죽음과 약탈로 쓰러지고, 안시성이 없어지면 저들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보편적이면서 와 닿는 말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다 군에 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 군에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기나긴 시간에 얻을 것도 많으나 잃은 것도 많다. 2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간단히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적이 내 가족에게 해를 입힌다면 목숨 걸고 총을 잡을 것이다.

 

영화 <안시성>은 영웅 양만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나, 그가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영웅성이 아니라 민중과의 삶이다. 영화에서 다소 어색한 연애장면과 설현의 어설픈 연기력, 설현이 중간에 뛰쳐나간 장면은 (내 개인적으로 설현의 연기력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감독이 일부러 혼자 자살하러 적진에 뛰어가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 양만춘이 등장할 때 광부의 어머니가 길을 잃자, 성주가 직접 그 할머니를 찾아 모시고 오는 것부터 시작한다. 성 안에 백성이 자식을 낳자, 직접 찾아가 선물을 한다.

 

연개소문을 따라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은 평야에 전투를 하면 패배할 것이고, 그러면 안시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안시성을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고구려인이기에 나와 같이 살아가는 고구려인을 지키기 위해 나는 적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영웅은 단순히 영웅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영웅주의를 넘어 민중주의에 의해 탄생한다. 신화라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 가치관이다. 고구려인이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분전한다. 피를 뿜고, 간과 뇌가 터지고, 팔과 다리가 여기저기 잘린다.

 

영화에서 전쟁은 군인만이 하는 게 아니다. 안시성의 주민들도 참여한다. 토성을 쌓을 때 그들의 전략을 저지한 것은 안시성의 백성들, 토굴꾼이었다. 곡갱이와 도끼를 잡고 지하에서 토성을 무너뜨릴 때, 그들은 죽을 것을 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웃는다. 내가 여기서 적을 막으면 내 가족들은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 라는 거대한 모습에 내가 생각하는 작은 소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민중의 삶은 숨 쉬는 곳이다.

 

고구려의 신은 과연 고구려를 버렸는가? 고구려의 신은 고주몽이 아니었다. 고주몽이란 사람이 국가설립에서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 알 수 없다. 단지 고구려는 한국역사에서 북쪽의 적들을 막아주던 방패였다. 한민족의 방패로써 외세에 저항하며 민족의 삶을 지켰다. 안시성의 성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고구려를 지켰다. 양만춘이 느낀 부담감은 민중의 삶을 알기 때문이다. 2차 전투 때 부상을 잊을 때 그는 망설임에 빠진다. 그의 부하는 양만춘에게 찾아와 성주가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다. 성주만을 바라보고 왔는데, 성주가 의기소침해지면 성민들 역시 희망의 끈을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웅은 스스로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에 조우한 것이다. 물러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고, 항복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운명의 시련에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기에 빠진 자신들을 누가 구원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돌파하는 것이다. 양만춘이 잡은 주몽의 활은 이세민이 눈을 찔렀다. 실제 역사에서 이세민은 양만춘의 활에 의해 부상을 당해 퇴각한다. 20만명 대군은 5천명의 군세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지략, 인덕, 무용을 가진 장수는 드물다. 게다가 운을 가진 장수는 더욱 드물다.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이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평소 지략과 무용도 있었지만, 인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덕을 가진 인물에게 운은 따를 수밖에 없다. 운을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힘이 하나로 모이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만춘이 받은 최고의 운은 그가 안시성의 성주이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만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없다. 사랑의 힘으로 움직일 때 가능하다. 영화는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고, 양만춘을 적대시한 연개소문도 자신이 고구려인이란 사실을 자각한다.

 

영화는 권력의 다툼에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질 때 우리는 한민족이란 사실을 인지하고 움직이면 역경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추석연휴에 나온 <안시성>, 한국전통명절인 추석은 한민족(韓民族) 조선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어진 문화이다. 안시성은 현재 중국에 있고, 평양성은 북한에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한국, 남한에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민족의 갈등에서 영화 <안시성>은 단순히 전쟁영화 내지 오락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단지 영화 시나리오 전개에서 빤한 전개, 무리한 설정과 연출, 아이돌 스타들의 무비등장은 영화의 완성도를 저하시키는 요인이다.

 

영화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을 맡은 배우 조인성은 이번 역할에 극중 메인이다. <더 킹>이란 작품에서 정우성 씨가 맡은 부패 권력 정치검사와 맞물린 역할에서 그는 주인공이지만 한편으로 스토리 전개를 소개하고 대한민국 현실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나레이터(Narrator) 역할을 맡았다. 안시성에서는 조인성 씨는 나레이터의 역할이 아니라 나레이터가 관찰하는 대상이 되었다. 카메라를 보면 알듯이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 많고, 토성이 무너진 후 진격하는 장면에서 흙먼지가 날려 다른 사람은 모두 가려져 있지만, 조인성 씨가 선두에 나온 모습은 보여준다. 그의 역할이 <안시성>이란 영화에서 양만춘을 맡았기에 큰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현대사회를 기반으로 한 영화보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쉽지 않다.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전후관계 그리고 그 상황에 처해진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은 동적인 상황이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심리적 요소나 대화를 보면 동적이기보단 약간 정적이다. 침착성을 잃지 않아야 하는 성주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인성 씨가 단독 메인 주연배우로 등장한 <안시성>에서 그는 대중의 시험을 받을 것이다. 영화배우로써 큰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다. 그래도 <역린>에서 정조보단 훨씬 나아 보인다.

 

어째든 <안시성>이란 영화는 단순히 안시성 전투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안시성의 위치, 고구려와 당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대립, 그리고 현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대중들이 갖는 관심은 매우 중요하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사에서 조선에 저지른 행위를 속이고, 특히 임진왜란을 분로쿠 케이초의 역(文祿慶長)”이라 부는 것은 그들이 침략의 행위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시금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는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족과 세력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모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역사에 의해 부활하고,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와 더불어 인기인이 되었다. 역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매체로 통해 전국시대 장수를 영웅화하는 점, 그리고 추후 그들이 임진왜란 당시 잔인한 살육을 행한 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안시성>이란 영화가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작품성을 가진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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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2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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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7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