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그래, 구례!’라는 글을 올리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피는데 오류가 있다. 구례(求禮)를 아홉 가지 예를 구하는 곳으로 풀이한 것. 두 군데의 문맥을 수정했다. 구례에서 찾고자 하는 아홉 가지 예(九禮)가 있다는 그것은 무엇일까, 정도로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그래? 그렇다면 구례(求禮)에서 구례(九禮)를 찾아볼까호기심이 꼼지락거렸다. 검색어는 구례 아홉 가지 예. 인의예지신에다 그럴듯한 네 가지만 덧붙여도 되는데, 호사가(好事家)들이 지나칠 리가 없다 생각하면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서울신문>, [그림과 가 있는 아침] 코너다.

 



=네이밍을 하는 이라면 필독서인 크라튈로스의 부제는 이름에 관하여'’. 플라톤 전집3(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이온/크라튈로스/소피스트/정치가)에 수록되어 있다.


스무 살 적엔 구례에 살고 싶었지요. 아홉 가지 예를 갖춘 마을, 이름만으로 이상향이라 생각했습니다. 섬진강 마을을 따라 산수유 매화 벚꽃 차례로 피고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꽃 한참입니다. 강물 위에 분홍색 살구꽃과 연두색 자두꽃 은은히 잠긴 모습 환상이지요. 강물은 흘러도 마을 떠나기 싫은 꽃은 물살 위에 그대로 머뭅니다. 시인이 구례에 이사 왔으니 밤새 술 마실 만합니다. 시도 사랑도 삶도 녹록지 않을 땐 술만 한 친구가 있겠는지요. 술 덜 깬 아침 가연이가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묻는군요. 구례에 왔으니 아홉 가지 예를 갖춘 인간의 시를 꼭 쓰라는 격려의 말입니다.”(곽재구 시인 시평, 서울신문, 2021. 04. 02.)

 

이원규 시인의 <뒷집 소녀 때문에>에 대한 시평이다. 시인이 다른 시인의 시에 감상을 덧붙이는 마당이니 그러려니 할까, 구례(求禮)를 구례(九禮)로 해석하면서 어떤 설명도 없다. 더구나 시평을 쓴 시인의 이름이 재구(在九)이지 않은가. 포구기행에서 이 시인의 아홉()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다산초당이 있는 강진 도암만의 옛 이름이 구강포 혹은 구십포인데, ‘(이곳) 사람들은 강진읍까지 들어오는 긴 바닷길을 도암만이라는 이름 대신 구강포 앞바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130). 시인은 구십포는 강진 남쪽 6리인데 월출산에서 남으로 흘러온 물이 강진현 서쪽의 물과 합하여 구십포가 된다동국여지승람까지 인용한다

시인은 오래전에 <귤동리 1>이란 시에서 이 도암만을 장검(長劍) 같다고 했다.


아흐레 강진강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곽재구의 포구기행구시포 편(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에서도 아홉()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구시포의 옛이름은 새나리불똥‘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로 풀이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란다. 새로운 시작인 극수(極數) ()가 지명에 포함된 사례가 무수히 많다. 그러니 구례의 구()가 이례적일 수밖에,

굳이, 구례를 아홉 가지와 연결시키면, 구구례(求九禮)쯤이 된다. 그런데 옛 구례도 아니고 좀 그렇다. 이제 약간의 기지를 발휘할 때다. 전라선 남원역에서 순천역 사이 굵직한 역 가운데 하나가 구례구역인데, 뜻밖에도 이 역은 행정구역상 구례에 있지 않고 순천시(황전면 선변리)에 위치한다. 역을 빠져나와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구례교)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구례다. 옛날에는 지리산을 등반하려는 산악인들이 어김없이 구례구역에서 내려, 은어회 한 접시나 민물참게 매운탕을 먹고 산으로 향하곤 했다. 어쨌든 구례(求禮) 입구(入口)에 있다고 하여, 구례구(求禮口) 역이니, 구구례라는 어색한 이름 대신, 구례구(九禮求)쯤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떠할지. 그래, 구례구(九禮求) 구례(求禮)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 달빛을 깨물다(시작시인선293, 천년의시작, 2019-06-17)에 수록된 이원규의 시 <뒷집 소녀 때문에> 전문은 아래와 같디. 가연이 '덕분에'  좋은 시 한 편 썼지만 여기서는 '때문에'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뒷집 소녀 때문에


                                        이원규



 기필코 좋은 시를 써야겠다

 섬진강 변 녹차밭 대밭 옆으로 이사 온 뒤

 집들이 꽃놀이 밤새 너구리처럼 술만 퍼마시다

 뒷집 소녀 때문에 시를 써야겠다

 

 평균 연령 71세의 강마을에

 쫑알쫑알 아이 목소리가 들려

 필름 끊긴 창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니

 강아지 얼씨구와 놀던 아홉 살 소녀

 먹포도 두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한다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두 눈이 빨개,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슬그머니 눈곱을 닦으며

 마침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생 단 한 편의 좋은 시를 써야겠다

 오로지 뒷집 귀농자의 딸 가연이 때문에



 =왼쪽은 구례구역(求禮口驛)  전경,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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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5-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올리고 보니, 부지를 내주고 이름까지 내준 순천시의 아쉬움이 입석 문구에 남아 있지 싶다. 순천시 황전면 구례구역이라니. 영역표시가 확실하다. ˝아홉 가지를 예를 찾는(九禮求) 구례구역(求禮口驛)입니다.˝로 바꾸면 어떠할까? 예를 찾는 데 순천이면 어떻고 구례면 또 어떠하겠는가!
 
플라톤전집 3 -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이온 / 크라튈로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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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하나 링크했더니 답이 왔다. ‘짧고 재미있게써주시라. 지인의 주문, 내겐 무섭다, '맑고 향기롭게'보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리 하고 싶습니다. 누군 하고 싶지 않아 그러는 줄 아십니까대답하고 싶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든든한  지리산을 뒷배로 섬섬옥수 섬진강도 흐르는 전남 구례, 구례(求禮), 예를 구하다(청하다)

화엄사 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 먹고 오는 길, 군계(郡界)에 있는 입간판(옥외광고). “그래, 구례!”(안녕히 가십시오)


지명 유래야 찾아보면 금세 알겠지, 그 예가 무엇인지도 곧그래도 그냥 좋았다. 한 방 먹었구나, 충격이었다


태도다. 예를 구하는 방법1은 경청(敬聽).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 그런 가르침. ‘해주는것 아니라 하는

들어주는것 아니고 듣는. 당신과 만나 대화로 소통하는 가장 기본

이것 하나 있으면 누구나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그래를 대치하는 다른 용법을 찾는다. 하나는 맞아요다른 하나는 좋아요

맞아요는 문제가 많다옳고 그름 또는 틀림, 삶에 정답이 어디 있다고 맞아요라니

좋아요도 '그래', 무엇이 좋다는 거야좋음의 주체가 나여, 그대여뭣이 좋은지 설명이 필요하다

그냥 좋아요는 위험하다(좀 그렇다).

 

, 그렇지, .”

그렇군요.”

무소식이 희소식 아..

“..그러게요.”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의 부제는 이름에 관하여'그런가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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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번역 일리아스 / 오뒷세이아 세트 - 전2권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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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인지 북리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미국의 대학교 리드칼리지는 해마다 입학선물로 책 두 권을 선물한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세트>. 리드 칼리지(Reed College),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사립 리버럴 아츠 칼리지다. 신입생들에게 인문학 수업은 선택 아니고 필수다. 신입생들은 서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의무다. 

선물 구성, 알겠다. 학생들은 3학년 때 논문 자격시험에 붙고, 4학년 2학기 동안 교수들과 함께 연구한다. 학생들은 졸업논문을 완성한 다음, 논문 주제뿐만 아니라 이전에 들었던 수업 내용들까지 포함하는 구술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 학교의 학생 대 교수 비율은 9:1이고 토론식 수업을 강조한다.

애플 스티브 잡스는 이곳에 철학 전공으로 입학하지만 곧 중퇴한다. 학부생 1447(2017년 기준)이고 교직원이 164(교수, 2010)이다. 소수정예 같은데, 비율 9:1은 환상이다. 학비 부담 때문에 중퇴하고 도강하였던 스티브 잡스를 이해할 수 있다. 입학선물부터 커리큘럼까지,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다. 하나에서 열을 읽는다.

입학 선물과 스티브 잡스(전기물덕분에 이 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한동안 내게 이 학교 이름은 리드(READ) 혹은 리드(LEAD)였다. 최근에야 잘못 알고 있음을 알았다. 1908년에 세워진 이 학교 이름은 컬럼비아강의 무역업자였던 시메온 가넷 리드로부터 따왔다. 내 유산을 포틀랜드 시민들의 교육과 문화발전,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써주세요. 아내 아만다 리드가 남편의 유언을 실행했다. 리드(LEED) 부부가 남긴 그들의 유산이 부럽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 어느 것부터 읽어야 하냐, 행복한 고민이다. 하나는 하드하고 하나는 소프트하다 등 의견은 분분하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서양 고전 읽기 0순위가 두 고전이라는 점은 동서양이 거의 일치한다. 동양고전학 입문인 인문학 수업이 필수인 그런 대학이 우리에게 있다면, 입학선물로 제공할 책 두 권이 무엇일까?

일리아스오뒷세이아라는 거대한 봉우리 사이 가슴골처럼 깊은 길, 서양 고전을 만나러 가는 항해는 역풍과 함께 시작된다. 남쪽 인민들은 (중국이 아닌) 북한 땅을 거쳐 가는 백두산 트래킹을 선망한다. 북한 국민들은 한라산에 로망이 있다. 한반도 최북단 백두산, 최남단 한라산처럼 언젠가는 한두 차례, 몇 번이고 오르고 싶은 산들, 서양인들에게는 자부심 자체이고 우리에게도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대체로 그렇게 다가온다. 한두 차례는 제대로 읽어야 한다, 생각하는 그런  책이다. 

 

(닮은 듯 아니 닮은 듯 언젠가 진안 마이산 지나며 떠올린, 사진_진안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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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01 1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 의견으로는 ‘일리아스‘를 먼저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내용이 별개인 듯 하지만 그래도 시간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지옥여행에서 트로이 전쟁에 같이 참여한 사람들을 계속 만나거든요~~

Meta4 2022-05-01 12:15   좋아요 1 | URL
저도 님과 의견은 다르지 않습니다. 문득 시작되지만 그래도 일단 산행을 시작했으면 낮은 봉우리라도 끝까지 오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죠.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독서였더란 말입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 알아야 할 정보(주석들이)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실눈 뜨고 일단 세계에 빠져드는 방법에는 말 그대로 공간을 따라 시간을 따라 가는 로드무비, 기행수필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엉뚱하지만 두 권을 동시에 읽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도 있답니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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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불문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들을 읽노라면 항해 관련 장면, 용어, 비유가 곧잘 있다. 나는 늘 이물과 고물 사이에서 배회한다, 배의 머리와 배의 뒤쪽 사이에서. 이물은 선두(船頭), 고물은 선미(船尾), 하면 명확한데 순우리말 사랑 때문? 읽을 때마다 헷갈린다이물은 늘 이물(異物정상적이지 않은 다른 물질)로 거기 어디쯤 있다.  

또 있다. '선두맡'이다,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익숙한. 어린 시절 좀 쓰던 말인데, 최근 검색에도 내가 아는 용법을 찾지 못하였다선두맡이란 배(풍선돛단배)들이 정박하는 포구바다로 나갈 때는 그물 등 어구를 싣고 , 돌아와 그날 혹은 그때 잡은 생선들을 내리는 그런 곳선창(船艙)의 다른 이름이었다머리맡의 ''처럼 선두맡은 뱃머리들이 그 머리를 기대는 그런 곳쯤이 아니었을까. 

비닐하우스 농사로 요즘이야 딱히 농한기가 없다. 당시 아버지는 농한기가 되면 바다로 나가 한동안 뱃사람이 되기도 했다배가 들어올 즈음이면 1킬로미터 가까운 거기까지, 대바구니를 들고 선두맡으로 갔다당신이 품삯으로 받을 크고작은 생선들을(대체로 상품성은 떨어지는집으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땐 없었던 생각이지만 무사귀환한 가장의 안전을 확인한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냥 선두맡이었을 뿐이다짧게는 한 나절길게는 며칠을 거친 파도와 씨름하여 고단했을 어선들이 마침내 돌아와 뱃머리(선두)를 기대고 쉬는 집, 선두맡그곳은 포구였고규모만 달랐을 뿐 요즘의  항구였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우리 이웃에게 바다는 늘 풍요로운 반찬이었다선두맡은 내 유년 시절 아련한 그리움이며 재현불가한 선미(鮮味)이다.

 

매달 비용이 아깝기도 하여(시간이 더  그럴 것인데)  OTT서비스를 만끽한다이등병 시절 보초 수준의 경계다. 최근 <트로이왕국의 몰락>(영국드라마, 2018)을 봤다. 회당 60분씩 8부작러닝타임 480 드라마다. 2004년 개봉 <트로이> 196(3시간 16)보다 할애한 시간 상당하다덕분에 서사시 <일리아스>는 물론이고 전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드라마 <트로이>의 미덕이다더 이상 볼 장이 없음에도 1회당 60분 남짓은 드라마를 16부작까지 꼭 채우는 국내산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이 아르고스()에서 출항해 재차 아울리스()에 도착했을 때 함대는 역풍에 묶였다그러자 칼키스가 말하기를아가멤논의 딸들 중 가장 예쁜 딸을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더 이상 항해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후반요약적게는 열두 척에서 많게는 100척 이상까지트로이로 출항해야 할 그리스 곳곳에서 소환된 함선들이 출항하지 못하고 있다그곳아울리스 항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아버지는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었다드라마는 필요 이상으로 이 대목에 집중한다아울리스 선두맡에서 있었다는 일에 대해서.

도서관 서지 목록에 가까운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자앞서 언급한 신화의 요약본까지 수록한 책 후반부를 읽다문득 발견한다여기에서 역풍이 분다.’는 적절하지 않다는 주석이다그가 역풍에 묶였다.’로 옮긴 이유다.

 

역풍의 그리스어 ‘aploia’는 항해할 수 없음이란 뜻으로 바다의 잔잔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당시의 항해술로는 노를 저어 에게 해를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사전적 정의로 역풍(逆風)이다. ‘역풍이란 한자어 의미까지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대체로 역풍에 대한 오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바람이 필요한데 필요한 바람이 오지 않는다서핑하기에 딱 좋을 만큼 포구로 몰아치는 그런 파도가 아닌 것이다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고 하지 않나맥락은 맥락이다. 아가멤논은 무플과 싸운 것이다무플 때문에  무단히 세 딸 중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바치면서너의 전쟁은 나의 전쟁우리의 전쟁으로 바꾸는 나쁜 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어선에 동승한 적 없으니잘 모르지만 버스에 동승한 아버지로 짐직하건데 거의 모든 탈것 들에서  멀미가 유난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갈 수 있는 배 위에서의 인생도 그랬으리라. 동쪽 나라트로이로 가는 대장 함선에서 아가멤논의 심사는 대체로 복잡하였고신화와 서사시와 비극들 사이에서변명하거나 변론을 하는 고전들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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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문현미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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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 그 옆 어딘가 종합병원이 있다면  응급실 옆에는 어김없이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장례식장은 낡은 문법처럼 응급실 가까이에 있다. 장편소설이라는데 제목 때문에 수상록인지, 아니면 생활 속 잠언들 모음집인지, <말테의 수기>는  늘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다가온다. 그래도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부분이 있다. 첫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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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민음사

"그래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펭귄 클래식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하지만 나는 도리어 죽기 위해서 모인다는 생각을 한다."(문예출판사)

그래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모두 죽어 가지 싶다."(열린 책들)


한 작품이지만 옮긴이, 옮긴 때 , 펴낸 데가 저마다인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들의 이 책 첫 문장은 이렇다(이하 몇몇 인용은 민음사 번역을 따라간다). 좋은 작품에는 늘 있지만 그것이 번역되었을 때는 실감하기 힘든 것,  번역본임에도 문장과 문장 사이, 문장들에서 발견하는 리듬감이다. 시인의 산문이니까,  필치에 운문의 리듬이 배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말테'를 '릴케'로만 바꿔어놓으면, 소설보다는 수상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특별함, 뭘까?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마땅찮은 부분이 있다.  오히려 작가의  삶, 그 이력을 참고하면서 부분 부분 빛나는 대목들을 이해하는 식으로 발견의 방향을 바꾼다.  


-릴케는 51세가 되던 1926년,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또 지붕이 없는 마차가 도착하는 걸 보았다포장을 열어젖힌 역마차로서 일반 요금으로 달린다임종 시간당 2프랑 꼴이다."(15면). "(오래된 디외 병원은지금은 559대의 침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물론 공장과 같다이런 대량 생산에 있어서는 개개의 죽음이 알뜰하게 처리될 수가 없지만문제는 그것이 아니다양이 문제다오늘날 잘 마무리된 죽음을 위해 돈을 치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아무도 없다빈틈없는 절차를 밟아 죽을 수 있을 만큼 돈을 가진 부자들조차도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냉담해지기 시작했다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맙소사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15~16면)

 

-사건이 아닌 상상과 기억의 단편만으로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 문제를 탁월하게 형상화해 낸 일기체 소설릴케가 파리 생활의 절망과 고독을 통해 29살부터 쓰기 시작해 6년 뒤인 1910년에 출간했다. (책소개)  루 살로메와의 두 차례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독일 화가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하였다그곳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고(저자 소개)

"그 밖에 나는 또 무엇을 보았더라?"(10면),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왜 그런지 모르겠으나모든 게 지금까지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이제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11~12) " "내가 이미 말했던가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그래나는 시작했다아직 서투르지만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 한다."(12면)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나는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8세가 되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지금까지 해온 일을 돌이켜보자."(26면)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돠면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되도록이면 오랫동안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26~27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저자 소개)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불리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그의 가문은 철강업으로 부를 쌓았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상속을 거절했다공식적인 상속을 거절했는데도 그에게는 상당한 유산이 주어졌다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그 첫 번째 수혜자가 바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다.(검색어 '릴케 비트겐슈타인')'"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집도 없고 상속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일까최소한의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24면)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일부윤동주 시인이 1941년 11월 5일 지은 유작친구 정병욱과 아우 윤일주가 1948년 정리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간본) 31편 중 앞부분에 실려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의 버지니아 울프와 더불어시인 릴케는 우리의 대표시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소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바로 정적(靜寂이다"(11면),  "무서웠다사람이 한번 공포감을 느끼게 되면 그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 도시에서 병에 걸린다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일 거다."(14면).  "나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밤새도록 앉아서 글을 썼던 것이다. "(23-24면), "나는 여기 앉아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고 있다열람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다그들은 책에 몰두해 있다그러면서 마치 잠을 자다가 두 개의 꿈 사이에서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듯 책의 쪽수 사이에서 몸을 뒤척인다책 읽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게 너무도 좋다왜 사람들은 늘 책을 읽을 때와 같지 않을까?(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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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옆에 영안실(장례식장)이 있다.  누군가는 마중을 위해, 또 누군가는 배웅을 위해 종합병원을 찾는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죽기 위해서 찾는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뒤처럼 붙어 있는 생의 터미널이다.  저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있다. 어떤 이는 집념, 어떤 이는 집착이라고 한다.  나쁜 습관, 거기에는 늘 죽음이란 두 글자가 어른거린다그대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너무 자만하지 않는가좋은 습관이라고 늘 '까방권'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내게는 책읽기도 그 중 하나다.  발견을 위한 몸부림도 나쁘지 않지만, 나만의 삶에 더 집중해야 하지 않나하는 강박 혹은 반작용. 서른 즈음의 릴케에게서 어떤 터닝포인트(전환점)를 감지한다. 몇 마디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너무 거창한가!     

"너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이 지척에 있다. 살아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동안 선한 자가 되라.”_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IV 17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살 것처럼 살고 있고,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알지 못하지요.”_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03-4, 297


이상  『그리스 로마 에세이』  알라딘: 그리스로마 에세이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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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22-04-24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들 세 번째, ‘내게는‘을 ‘나는‘으로 수정했음을 밝힘. 이 글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는 옮김으로 받아들였기에..

Meta4 2022-04-2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은 그 재산마저, 가난한 유망 작가 후원에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