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독자 시점 Part 1 : 제4의 벽 에디션 세트 - 전8권
싱숑 지음 / 비채 / 2022년 1월
평점 :
절판




소설 같은 이야기를 언제 떠올리는가? 오늘의 현실이 팍팍할 때, 어떤 달콤함을 상상하고 싶을 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뭐 이런 거 아닐까? 하나의 이야기는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잠시 고통을 잊고자 할 때 몰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 이유나 목적은 각자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며, 우리 앞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


처음으로 소설을 읽은 순간을 기억한다. 손가락 끝에 닿는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 드넓은 백색의 대지에 꽃핀 까만 활자. 내 손으로 접어 넘기던 페이지의 감촉.

활자를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활자의 행간에 있단다.

책을 좋아한 어머니는 가끔 그런 말을 했는데, 적어도 어린 내게 그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활자와 활자가 만든 빈틈. 그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나만의 작은 설원(雪原). 그 공간은 누군가가 들어가 몸을 누이기에는 터무니없이 좁다랗지만, 숨기 좋아하는 어린 나에게는 꼭 맞는 장소였다. (8105페이지)


주인공 김독자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놓을 수 없던 연재 한편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잘 못 해서, 다음 회의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연재를 못 보는 나 같은 독자도 있지만, ‘김독자처럼 한 회 한 회 마음을 다해 빠져들면서 기다리는 독자도 있다. 그에게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의 연재를 기다리는 것은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기다릴 희망이 되는 일이다. 그가 몰이하면서 읽는 그 소설은 그의 힘든 시간을 이겨내게 한 처방전과 같다. 거의 십 년 동안 그는 멸살법을 읽으며 견뎌왔다. 처음 그 소설을 읽는 독자는 많았으나, 연재가 계속되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오면서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김독자는 그 소설의 유일한 독자로 남았다. 이럴 수 있을까?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이런 상황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 버티는 작가나 그 글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독자나, 이 상황은 말 그대로 일대일, 유일한 작품에 유일한 독자 아닌가. 작가는 마지막 연재를 끝내고 김독자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김독자가 작가의 선물을 받은 그 순간, 그의 현실 속 세계가 변한다. 멸살법 속 이야기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SF영화 속 한 장면처럼, 도깨비의 등장과 영문을 알 수 없는 미션이 주어지는 상황이 몰아친다. 지하철 속 사람들은 그가 소설 속에서 본 인물들과 맞춰지고, 이제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그는 금방 눈치챈다. 하지만 그가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이 상황이 쉽게 풀어지지도 않는다. 어쨌든 소설 속 상황과 거의 일치하면서 흐른다고 해도 그가 그 순간을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의 현실과 다른 세계, 하지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게 비슷한 이 세계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마치 실감 나는 게임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주어진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그 대가로 코인을 얻는다. 이 코인은 후에 그들이 목숨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는 데 사용된다. 매번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완성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성좌들에게 코인도 받는다.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배후도 선택하고, 때로는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각자의 스킬을 장착함으로써 위기를 탈피할 무기로 쓴다.


흥미롭다. 등장인물 모두 다양한 캐릭터였다. 어린아이부터 아이 엄마, 학생, 군인, 조폭까지. 갑자기 닥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어쩌겠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서든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면서 그 결말에 다다라야 했다. 그 가운데서 김독자의 활약은 빛난다. 그는 이미 이 소설을 읽었던 사람이고, 이 소설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독자였으니,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응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스킬, 그 스킬은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무기가 되고, 김독자의 스킬은 다른 사람의 정보를 읽을 수 있는 텍스트(txt)였다. 이미 읽은 소설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이 가진 무기, 생각 등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김독자는 이 세계의 시나리오는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 된다. 많은 사람이 죽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누군가를 따르면서 목숨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은 김독자를 따른다. 그의 스킬은 매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데 필요했으며, 그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다. 그런데 뭔가, 그가 아는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 소설 속에서와 뭔가 다른, 스킬의 속도와 상황이 조금씩 달라진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 이제 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시나리오는 클리어될 것인가. 누가 살아남아 이 소설을 완성할 것인가.


무수한 활자들이었다.

활자는 모여서 단어가 되었고, 단어는 모여서 문장이 되었다. 문장은 모여 문단이, 다시 문단은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곧 사람이 되었다. (8254페이지)


읽는 내내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자꾸 그려진다. 처음 그들이 갇히듯 사건이 시작되었던 지하철, 여러 다른 지하철역에서 완성해가는 싸움의 결말들, 소설과 다르게 흘러가는 장면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매번 위기를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 긴장감은 고조된다. 목숨을 건 일이니 그들이 살아남아 이 시나리오를 끝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에 관심을 보이고 코인을 날려주는 성좌들은 또 어떤가. 그리스 로마 신화, 건국 신화 등 국적 가리지 않은 많은 신화 속 인물이 성좌로 나오며 신비한 분위기까지 풍긴다. 물론 이 성좌들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각자가 살아남는데 굉장한 힘이 되어주니까. 거기에 각자가 가진 스킬을 활용하면 살아남는 건 노력의 결과로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중에서 능력을 더 보이는 김독자의 활약이 대단한 것도 당연하다. 이 소설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십 년의 세월 동안 이 소설연재의 유일한 독자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는 게, 주인공 김독자가 이 세계를 구할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다. Part 1 보는 것도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다음 이야기는 또 어떻게 펼쳐질까. (Part 2 빨리 내주세요) 김독자가 마주한 인생의 장르가 바뀐 순간은 이제 또 어떻게 바뀔 것인가 궁금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조심스러운데,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완성하는 데 집중하면서 읽다가 8편에서 만난 김독자와 엄마의 이야기는, 그동안 살아온 그의 시간과 그가 연재되는 소설에 빠져들면서 읽게 되었는지 공감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현실 회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 고단한 현실을 이기고 건너갈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많은 것에 빠져들고, 꼭 생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몰입하고 싶은 게 있다. 그 순간 위로가 된다면, 이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 고통을 마주할지라도 말이다.


매력적인 인물들, 역사와 신화를 가미한 요소들, 이야기에 빠진 세계, 시공간을 초월한 이 소설에 빠져들 이유가 충분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하며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소설이 소설로만 남지 않을 매력이기도 하다. 김독자가 이 소설의 결말까지 어떻게 이끌어갈지, 어쩌면 그가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소설을 연재하든 출간하든, 작가가 있다면 독자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작가가 없다면 독자를 이야기를 만날 수 없고, 독자가 없다면 작가의 이야기는 읽히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소설의 역할을 더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왜 소설(이야기)을 읽는지, 그 소설 속에서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그 안의 인간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남기게 될지. 당신은 소설에서,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찾았는지, 찾고 있는지...


이번 ‘PART 1(8)’은 전체 이야기 중 약 1/3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이번에 출간된 건 페이퍼백 에디션이고, 올해 여름 페이퍼백 에디션 PART 2-3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거기에 하드커버 에디션 PART 1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어마무시한 작품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오랫동안 이 소설 출간을 기다려온 독자에게 기쁨이 되겠습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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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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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브래스카의 작은 마을 스위트워터에는 포레스터 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저택이 있다. 평범한 그 집에 포레스트 대령과 그의 아내가 산다. 누구라도 그 마을을 지나면서 머물 수 있는 곳, 마을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철도사업으로 부유한 포레스터 대령의 집을 부러워했을 수도 있겠지. 사람들이 보는 그 집은 그런 부러움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대령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항상 환대했으며, 포레스터 부인은 집을 둘러싼 숲에 찾아오는 아이들도 반갑게 맞아주며 가진 자의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 모두 그 부부를 좋아했을 것 같다. 그렇게 그 집에 판사인 삼촌과 함께 드나들던 소년 닐. 그는 상냥한 포레스터 부인을 좋아했고, 존경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부인을 보면서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던 중 포레스터 부인을 향한 그의 마음은 변한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단순히 외모의 변화만은 아닐 테다. 우리가 가진 생각과 시선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것,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영향이 있는 어떤 것에 시선을 두기도 한다. 닐이 바라보는 포레스터 부인이 그랬다. 그의 눈에 부인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대령에게 최선을 다하는 아내로 보였다. 대령 역시 아내와 잘 지냈다. 누가 봐도 두 사람 사이의 불화나 나이 차이 때문에 오는 불안함 따위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포레스터 집안이 쇠락해가고 대령의 몸이 아프고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인의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제 올 게 왔군 싶을지도 모른다. 나이 많은 남편을 돌보는 일이 이제 지겨워졌겠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면서 혀를 차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상황이 변하면서 생기는 시골 생활의 지겨움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춤을 추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그녀가 겨우 한숨 돌리는 시간은 남편의 돌봄을 잠시 맡겨두고 집 근처의 물가로 나가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겨울이면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오는 삶이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하고 갇힌 듯이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인간이 가지는 욕망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어쩌면 그녀의 이 욕망을 본 순간 닐의 시선도 변했으리라. 내가 아는 부인은 저런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부인이 저럴 수가 없는데? 뭐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어린 그가 다 알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을 이제 서서히 보게 될 것이다. 누구라도 다르지 않을 그 마음 말이다.


그러면서 점점 부인과 상대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대령이었다. 처음 대령을 봤을 때는 그저 나이 많은 남자가 돈을 무기로 젊은 부인과 사는 건가 싶었다. 그에게는 두 번째 아내였고, 시골의 조용한 생활에 익숙한 동네 유지 정도로 보였는데, 그가 참 어른이구나 싶어 보였던 일화가 그를 추락시켰음에도 그는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으로 다시 보인 거다. 그가 임원으로 있던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그는 집을 제외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으며 은행 고객을 지켰다. 사람들의 신임을 다시 굳건히 하면서도 그는 가난한 삶으로 들어왔다. 그런 선택을 누군가는 말렸을 테지만, 그는 인간으로 우선 돌봐야 하는 것을 선택했다. 포레스터 부인은 그의 선택을 존중했지만, 가난한 삶은 그녀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령을 떠나지 않고 돌봤으며, 대령 옆에서 아내의 역할을 해냈다. 포레스터 플레이스에 찾아오는 많은 남자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동안에도 대령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느 날 문득 닐이 느꼈던 것처럼, 아마도 대령은 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 모두가 그녀를 아름다운 작품처럼 여기던 것도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던 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곁에 계속 머물기 위해 고요히 있던 것일까.


그 무엇도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이 옆에 있어서, 남편은 아내의 옆에 있어서 존재감을 갖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지나고 보니 다시 보인다. 포레스터 부인은 대령의 옆에서 아내의 모습으로 있던 게 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아마도 소년 닐이 처음 포레스터 부인을 마음에 두게 되는 건 이 장면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소년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이던, 아내가 남편의 옆에 머무르는 게 익숙한 그런 거 말이다. 부인은 그곳에서의 삶을 힘들어했는데,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는 무료한 시간을 감당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인생과 자꾸 멀어져가는 불안함에 어느 곳에도 마음 두지 못했겠지. 대령은 점점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가고, 포레스터 플레이스는 쇠락해가며 남은 게 없고, 부인은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했으니. 닐이 바라보는 부인은 점차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추한 인간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누가 봐도 비열한 청년 아이비와 함께 있는 부인을 보는 닐의 마음은 절망이었으리라. 부인이 그럴 수는 없다는 확신, 그런 부인에게 그동안 가졌던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순간을 견딜 수 없었기에, 그는 떠났다. 자기 인생을 살아야 했기에.


세월이 흐르고 닐에게 들리는 부인의 소문은 좋을 수만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도 마을을 떠났고,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거나. 누군가 그녀를 돌봤다면 잘 돌봐줬으면 좋았겠다 싶은 바람만 남았을 즈음, 그에게 들려온 소식 한 자락은 그를 안심시킨다. 그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그 시간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는 다시 그녀를 찾아갈 수도 없었을 텐데, 그 불편한 마음을 다독여준 그녀의 안부는 오히려 그를 더 성장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되는 어떤 것을 다시 느꼈으리라. 치열한 삶 앞에서 포기하거나 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누구나 그런 순간 앞에서 어떤 선택도 완벽하지 않음을, 한 사람의 인간에게 담긴 아름다움은 한 가지 모습은 아니라고. 그녀를 향해 독처럼 뱉은 말을 되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썩은 백합이 아니라 살아가려고 애쓰던 질긴 잡초였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다를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 역시 각자의 몫이려니. 대령이 부르던 그 아가씨를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가씨의 모습은 삶이 다양하게 만드는 거라고. 인간에게는 살아가려는 욕구,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남자에게 의지하는 여성의 삶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건지도 모르겠고, 남편의 그늘에 머무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던 시절의 시선을 반박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포레스터 부인의 인생이 대령의 존재 여부에 따라 달라질 것은 없는데, 주변의 남자들이 보는 그녀는 위대한 남자들 모두의 과부라고 여기곤 했던 것. 한 시대가 끝났다고, 그녀의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그녀 스스로 소멸하기를 원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대령(남자)이 없는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마을을 떠난 그녀의 생활 역시 달라지지 않았지만(다른 남자를 만났다), 닐이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들으면서 점점 그녀의 삶과 인간의 변화를 알게 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를 예술품으로 바라볼 수도 없고, 인간 역시 단순하지 않다. 삶이 만드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 대상이 당신의 첫사랑이어도 인정해주기를,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한 사람일 뿐이라고. 당신은 그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그 장면을 다시 그렸다.


아직 살아 계실까?” 닐이 물었다. “만나러 가볼 생각마저 드는데.”

아니, 3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건 확실해. 스위트워터를 떠난 다음에도 어디에서 살든지 매년 현충일에 대령님 무덤에 꽃을 놓아 달라고 그랜드 아미 포스트에 송금하셨거든. 3년 전에 영국인 노인네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포레스터 대령님의 무덤을 앞으로도 계속 관리해 달라며 수표를 동봉했대. ‘내 아내, 메리언 포레스터 콜린스를 추모하며라고 적혀 있었고.”
그럼 부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살핌을 잘 받았다고 확신해도 되겠구나.” 닐이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그렇게 느낄 줄 알았어.” 따뜻한 감정의 물결이 얼굴을 스치며 에드 엘리엇이 말했다. “나도 그랬거든!” (200페이지)



#로스트레이디 #윌라캐더 #소설 #문학 #첫사랑 #코호북스 #위대한개츠비 

#책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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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책이 있어서 도서관에 갔다.

이곳 도서관은 예전에 예약 대출이 가능했는데, 

그러다 보니 직접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불편함도 발생하는 지라, 

예약 대출 시스템을 없애고 도서관 이용 시간을 연장했다.

그리하여, 상호대차 서비스는 잘 되어 있는 편이고(시간은 하루이틀 이상 걸리지만 괜찮음),

신간 도서 입고가 느린 편이지만 그럭저럭 기다릴 만한 책을 신청하는 편이기에 괜찮은데...


아, 도서관에 비치된 도서를 가지러 갔는데 

바로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이 대출해가는 걸 보는 건 너무 괴롭....ㅠㅠ


검색해보니 여러 도서관 중에 딱 한 곳만 비치된 책이더라.

그것도 이제 막 입고된 도서였고,

마침 다른 책도 필요한 지라 겸사겸사 일부러 거기까지 갔는데,

바로 서가 바로 앞에 도착했는데 바로 내 앞에서 서성이던 어떤 사람이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어서 막 힘이 빠지더라는.

이걸 뺏어올 수도 없어서 더 허망했다. 자주 가는 도서관 아닌데, 일부러 멀리 있는 그곳까지 갔건만...

집에 와서 바로 가까운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다음달에나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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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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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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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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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0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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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읽는 조현병
나카무라 유키 지음, 김성우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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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조현병이라는 말을 뉴스에서 자주 보게 됐다. 주로 나쁜 소식에, 누군가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이 다치게 될 때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해자가 이런 질병을 앓고 있었다면서 범죄의 원인에 갖다 붙이던 병명이 아니었던가. 그래서인지 조현병에 관한 인식이 매우 나쁘게 각인된 듯하다. 내 주변에도 조현병 앓는 사람이 있었는데, 좋은 관계가 아니어서 그런지 나랑 상관없는 미친 사람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보니, 조현병이 100명 한 명에게 있는 질병이라는 말에 이 병이 다시 보인다. 누구나 갖고 있을 질병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단지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나 조금씩 조현병 증상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엄마 본인이 이 병에 관해 잘 알고 싶지만, 항상 약을 먹다 보니 설명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읽어도 금방 잊게 된다고. 게다가 전문 서적은 너무 어려워서 읽을 수조차 없었다는 말에, 저자는 엄마가 오랫동안 앓아온 조현병에 관해 조금 쉽게 설명하는 책을 보여주고자 이 책을 냈다고 한다. 저자의 엄마가 34년째 조현병을 앓고 있기에 가능한 생생함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역자의 아내 역시 조현병을 앓고 있다. 아내를 위해 조현병 관련 서적을 찾다가 이 책을 만나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사정이 있다.


백화점 직원 수진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사회초년생 주인공의 현재 상황과 조현병 발병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수진은 친구에게 애인을 뺏기고, 직장생활에서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환청과 망상에 시달리는데, 그게 참, 사람 불안을 최고조로 올려놓는다. 누군가 자기를 자꾸 쳐다보는 것 같고, 자기를 두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고, 안절부절못하고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또다시 실수할까 걱정되고.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누군가 계속 나쁜 말로 공격하는 것처럼 들리는 거다. 그러니 사람들 앞에 서기도 어렵고, 자꾸만 집안에 숨어들게 되고, 과격한 성격도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의 도움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가 진찰받지만, 그 후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은 주인공이 처음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서 본격적인 조현병 진단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조현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 저자가 겪은 시간을 바탕으로 했는데, 일단 병원에 간다는 것으로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인데, 문제는 그 후의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우왕좌왕한다는 거였다. 진찰과 처방된 약을 먹고, 그 후에는?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 사회적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지, 계속 이렇게 약에 의존하면서 사회생활이 멈춰 있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지속한다. 무엇보다 조현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왜 발병하는지 알 수 없던 것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그 치료의 시작을 연다. 저자는 이 만화의 주인공 사례로 수진과 그 가족이 어떻게 이 병을 마주하고 감당해 나가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조현병에 관한 선입견과 진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조현병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을 굉장히 상세하게 들려주는데, 이런 설명이 실제 조현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에게,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 것 같다. 오랜 세월 경험한 저자의 상황이 이런 비법을 만들었다. 조현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각 장의 마지막에는 내비게이터 유미네 가족을 등장시켜 문제 원인과 대처 방법, 조금 더 잘 건너갈 수 있는 팁을 정리해서 알려준다. 갑작스럽게 재발할 수도 있고,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아서 약 복용을 중단했다가 악화하기도 하고, 약 복용의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이 문제와 마주한다. 이 상황에 더 어렵고 힘들어지는 생활에 도움을 받고 활용할 방법도 알려준다. 하나씩 차근차근, 자기 병과 마주하며 나아갈 방법을 적용해보면서, 잃었던 일상을 되찾고 살아갈 수 있는 귀한 팁이 가득하다.


이 책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목자에서 이미 그 섬세함도 보인다. 크게는 조현병의 증세와 조현병을 알아가는 과정, 치료하면서도 조현병을 예방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경험자로 들려주는 방법은 신뢰가 생긴다. 특히나 이 병이 무서운 게,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들게 하면서 병을 잘 치료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중에 다시 악화할 수도 있는, 언제든 급성기가 반복될 수 있다. 그러니 꾸준한 관찰과 치료에 힘써야 한다는 것. 말로 하니까 쉬워 보이지만, 실제 이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몹시 어렵고 힘든 시간일 테지. 중요한 것은 조현병이 인류의 태초부터 현재까지 유병률이 1%라고 하니,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책 속의 말처럼, 조현병은 인류가 종으로 생존해가는 데 필요한 질환이라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많은 병이 스트레스로 시작된다고 한다. 흔하게 겪는 위장 질환, 불면증, 폭식, 암 등 우리 육체에 생기는 병이, 마음과 정신의 시달림 때문에 생긴다고 하니 정신과 육체가 연결되어 우리 몸을 이룬다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일본어판을 우리나라의 현실과 상황에 맞게 많은 감수와 검토, 확인과 취재를 통해 가다듬었다고 한다. 조현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사람과 주변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조현병을 바라보던 선입견을 많이 버렸다. 조현병은 단순히 정신 질환이 아니라 뇌의 병이며, 적절한 치료로 회복 가능하다고 한다. 누구보다 주변 사람의 도움과 전문가의 치료가 필수라는 것도 알았다. 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사회적인 문제임이 분명한 것을 이미 많은 사건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사회적 시스템이 많이 갖추어져, 우리 일상에서 빈번하게 찾아오는 이 병을 치료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조현병의 이해와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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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기사 열린책들 세계문학 264
레오 페루츠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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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고백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추리소설 같으면서도, 주인공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게 했다. 매 순간 선택의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마다 그는 본능이 말하는 대로 움직였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도 없었다. 목숨을 건 방향으로 걷는 것 말고,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소설은 마리아 크리스티네라는 여인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기억을 써 내려갔다. 이 원고는 후에 손자가 발견하고 출간하게 되는데, 18세기에 접했던 다양한 사건이 배경이 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스웨덴 기사라는 제목으로, 자기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었고, 그 묘한 내용은 독자에게 이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대하게 했다. 당연하지. 전투에 참여한 아버지가 그 밤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그리웠던 밤에 딸의 눈앞에 나타난 아버지, 그 아버지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 사라졌으며, 딸은 그런 아버지의 방문이 꿈인지 아닌지 헷갈리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오던 그 짧은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만남은 후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남겨진 딸은 그날의 일을 아직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딸의 눈에 보였던 아버지가 아버지였는지 아닌지 의문스러운 상태로 말이다.


1701년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추위를 뚫고 걷고 있다. 한 명은 도망 중인 도둑, 다른 한 명 역시 도망 중인 병사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훔치다가 붙잡힌 도둑은 다시 잡히면 안 되는 간절함이 있다. 병사는 명예로운 삶을 위해 참전했으나 견디기 어려워 탈영했기에 용기병들에게 쫓기고 있다. 눈보라와 거친 바람에 시달리면서 지칠 대로 지친 둘은 어느 허름한 물레방앗간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더 움직일 수 없던 병사는 도둑에게 부탁한다. 병사는 귀족 청년 토르네펠트였으며, 물레방앗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대부이자 친척이 살고 있다면서, 도둑을 그곳에 보내 도움을 청하려고 한다. 용기병에게 쫓기며 위험한 것은 탈영병이나 도둑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상황에서 도둑은 탈영병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인생 끝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운명을 시험해보는 수밖에.


귀족의 부탁을 받고 영주를 찾아간 도둑은 어떻게 했을까? 어느 정도 예감했듯이, 도둑은 귀족을 배신하고 영주의 터전에 자리 잡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아리따운 아가씨의 약혼자로 둔갑하여 사랑을 이루고 신분도 바꾼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오랜 세월 저택의 하인으로 살아온 그가 그동안의 경험으로 무너져버린 영주의 공간을 부활시킨다. 제때 파종하지 않고 게으른 농사로 영주의 가문은 황폐해졌던 거다. 그곳에 영주는 없고(죽었으니까) 영주의 딸만 있었는데, 주인으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그곳은 이미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 그런 곳이, 그가 등장한 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귀족(탈영병)의 약혼자와 결혼하여 귀족이 되었고, 아내의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그럼 원래 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도둑을 믿고 영주에게 구조요청을 했으나, 도둑의 거짓말로 주교의 지옥이라 불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운명이 나뉜 두 사람의 인생은 각자의 상황대로 흘러간다. 소설은 대부분 주인공인 도둑의 삶을 말하는데, 읽으면서도 한 번씩 떠오르는 궁금증 때문에 들려오지 않는 귀족 청년의 안부가 궁금했다. 도둑은 신분을 바꿔 아내까지 챙기면서 잘만 살고 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귀족 청년은 보이지가 않네.


사실 도둑은 도둑으로 살다가 쫓기고, 귀족 청년을 속이고 그를 멀리 보내고, 다시 성물 도적단으로 활동하면서 부를 축적하지만,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영주를 찾으면서 신분을 바꿨다. 이제 팔자 폈구나 싶을 무렵, 그가 거짓말로 이룬 모든 것에 대가를 치를 순간이 온 거다. 사는 동안 마음 편하지 않았겠지.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 부유한 삶이 그를 안정되게 했지만, 그러면서도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한 감정을 견딜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닐까? 언젠가 들통나면 어쩌지? 역시 이 세상 나쁜 일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답인가 보다. 그에게 다가온 추격자들을 피해, 어찌 보면 이 불운의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일이 실패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는다. 그가 아끼는 딸까지 말이다. 다시 궁지에 몰린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때 반전처럼 나타난 귀족 청년과 아버지가 떠난 후에 밤마다 자기 방에 찾아왔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딸의 이야기가 연결되는데, 마치 처음에 등장했던 상황의 의아함이 이 지점에서 맞춰지면서 우아한 미스터리가 된 느낌이다. 어느 설명에서는 이 소설을 환상 소설이라고 말하던데, 환상적인 분위기가 소설 전체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결말까지 보고 나면 무릎을 치게 하는 구성이 오히려 더 돋보였다. 장면 곳곳에 잘 녹아든 복선과 어느 순간 조금씩 맞춰져 가는 반전이 잘 짜인 추리소설 읽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스웨덴 역사가 배경이 되기도 하면서, 그 커다란 역사 속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다양하게 보여준다. 먹을 것이 없어서 훔쳐야만 했던 도둑(그는 처음에 어느 저택의 하인이었으리라),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자 전투에 참여한 귀족 청년(의미 없는 싸움에 목숨을 건 명예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금수저로 태어나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른 채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문을 이끌 수 없는 의지박약 약혼자(가진 것이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지킬 힘도 없는 그녀가 정신을 차렸으면 했는데)까지, 누구 하나 온전한 삶을 이어가지 못하는 듯하다. 그 상황에 도둑과 귀족 청년의 바뀐 운명이 무슨 일인가 하는 걱정도 잠시, 이야기는 독자를 미친 듯이 빨아들인다. 누구나 궁금하지 않을까? 운명이 바뀐 두 청년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떤 결말로 두 사람의 운명을 마무리할지. 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슬픔이 밀려와서 당황스러웠는데, 지키지 못한 사랑과 욕망의 한계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사랑을 느끼고 욕망이 있다. 도둑 역시 자신의 욕망에 따랐을 뿐이고, 불안함 가운데 그 욕망의 결과물을 지키고 싶었을 텐데 말이지. 운명의 절묘한 힘을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재미있다.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 잘 연결된 짜임새가 매력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고전의 재미가 이런 거라면 계속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사랑과 욕망, 운명과 삶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마 내가 도둑이었어도 그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중에 어떤 운명이 찾아와도 지금은 그 사랑을 선택하고야 말았으리라. 레오 페루츠의 다른 작품 곧 찾아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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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2-03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고맙습니다. 예전에 주차비를 아끼기 위해 이 책을 샀거든요. 아무 정보 없이 덜컥 사고 늘 읽어야지 그러고 있는데 구단씨님 리뷰 보니까 너무 읽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구단씨 2022-02-03 12:50   좋아요 1 | URL
환상소설이라고 하는데, 사실 저는 구매할 때만 해도 왕자와 거지의 패러디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막상 읽고 보니 묘한 분위기로 펼쳐지면서 우리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을 보게 되더라고요.
매력적인 작품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