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브라더스 -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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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평짜리 옥탑방에 성인 남자 4명이 부대끼고 있다고 생각해보니, 잠깐 숨이 막힌다. ‘잠깐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걸 아주 잠깐 했으니까. 친구의 하숙집 방에서 하룻밤도 신세 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혼자 생활하는 공간을 침범하는 게 어지간한 사정이 아니면 말도 못 꺼내 볼 것 같아서 이해되기도 하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웃기면서도 슬프다는 게, 또 그게 현실 속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라는 게 더 아프기만 했다.


화자인 오영준. 8평짜리 옥탑방의 공식적인 세입자이자, 무명 만화가이다. 출간된 작품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백수에 가까운 구직자이기도 하다. 오늘을 또 어떻게 버텨야 하나 근심하던 중, 어느 날 영준에게 예전 출간작의 출판사에서 알게 된 김 부장이 찾아와 함께 지내게 된다.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싶을 무렵, 김 부장은 텐트 하나로 옥탑방의 또 다른 방을 만든다. 거기에 오래전 영준이 들었던 만화 작법 강의에서 인연이 된 싸부도 이 옥탑방에 동거인으로 등록한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집주인이 아니다. 집주인 슈퍼 할아버지는 이들을 야단치고 명확하게 계산하여 월세를 다시 책정하기에 이른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만년 고시생 삼척동자역시 이 옥탑방에 드나들며 이들과 형제애(?)를 쌓는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각자의 절망을 공유하는 이들이, 한 공간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날들을 보면, 이게 형제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여기까지만 들어도 심란한데, 이들 모두가 오늘도 보장 못하는 날들을 살고 있다는 거다. 만화를 그리겠다고 하지만 일이 없어서 누가 건너 소개해준 학습만화를 그리게 된 것도 감지덕지하는 영준, 기러기 아빠로 아등바등하고 있지만 역시나 캐나다로 보내줄 돈이 없어서 걱정만 가득한 김 부장, 큰소리 떵떵 치고 있지만 별 볼 일 없어서 아내와 이혼 직전에 놓인 싸부, 언제까지 결과 모를 고시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걸 알지만 다른 길을 찾지 못한 삼척동자까지. 이들이 모여 머리 맞대고 있으면 뭐가 나올까 궁금하긴 했다. 종종 월세도 못 내서 보증금 까먹는 건도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데, 영준은 이들의 인생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이 방에서 나가주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오갈 데 없는 이 루저들에게, 걱정에 한숨이 덤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무슨 대책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느긋함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인간들이 모여 있는 게 수상하기만 할 무렵, 뭔가 꿈틀거린다.


바닥을 친 사람이 다시 일어서는 방법은, 그 바닥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랬다. 이들이 더 떨어질 수 없는 데까지 떨어졌을 때, 내가 아는 현실은 그냥 그 바닥에 누워있다가 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비빌 언덕도 없으면 또 포기하게 되는 거고. 이들이 가진 환경에서 다시 일어서고 뭔가 이뤄내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는 않은가 보다. 자꾸만 뭔가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며 움직이고, 이렇게 계속 바닥을 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구시렁대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보여준다. 계속하다 보면 되는 게 있다는 믿음을 주기 시작한다. 해봐, 더디지만 되긴 되잖아. 뭐 이런 말을 듣는 듯한?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긍정적인 생각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 앞에서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하고 정리해나가면서도, 걱정부터 앞서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거나 잘 되지 못하는 결과 앞에서 더 절망하거나, 뭐 그랬다. 이들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던 일도 그리 잘 되지는 못했다. 싸부는 결국 이혼했고, 삼척동자는 예상대로 고시에서 떨어졌다. 손맛을 자랑하던 김 부장의 콩나물국밥도 망한 것 같았다. 그렇지, 다시 일어서는 게 그리 쉽다면, 세상에 잘 안될 일이 뭐가 있겠어. 웃긴 건, 그런 나의 부정적인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가가 이들에게 한 번만 더 해보라는 주문을 거는 거다. 당장에 솥단지 엎고 그만둘 것 같았던 김 부장의 콩나물국밥은 몸이 피곤할 정도로 손님이 들끓었고, 뭘 위해 하는지도 모르게 계속 고시를 파고들었던 삼척동자도 다른 길을 찾았다. 지질한 이혼남으로 남을 것 같았던 싸부에게도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영준. 그는 생계를 위해 학습만화를 그리지만 그만의 또 다른 인생도 펼쳐졌다. 잘됐다고 엉덩이 팡팡 두드려주고 싶게 하는 이들의 표정이 막 그려진다. <꽃보다 남자>F4보다 이들이 더 사랑스럽다.


무슨 인생 반전을 이렇게 이뤄내나 싶겠지만, 소설이니까 그렇게 그리는 것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참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그리고 이들과 같은 인생의 힘든 시기를 건너는 소설 밖 또 다른 주인공들에게. 이들이 다시 일어설 용기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냥 바닥에 누워있지만 않아서다. 뭔가 계속해보려고 하고, 그때마다 또 다른 위기에 부딪혀 다시 절망하며 벽 보고 누워있었지만, 또다시 벌떡 일어나려고 했던 의지를 보여줬기에. 말 안 해도 다 아는, 이 험한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서 별일을 다 겪고 사는 우리지만, 그때마다 망원동 브라더스의 고군분투를 떠올리면서 또 한고비 넘어가고 싶어진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 어쩔 건데.



#망원동브라더스 #김호연 #나무옆의자 #소설 #한국소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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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맥파든 신간 출간 소식을 듣고 찾아보다가.


<차일드 호더>


어느 순간 일상화된 가정 폭력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는데,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지 모르겠지만,

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고구마 같은 상황에 시원한 사이다 들이켜게 해주기를.


그런 의미로, 오늘 <모범택시3> 하는 날이다. 시즌제 계속 쭈욱, 가주세요.




<재소자>


브룩은 셰인에게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은 뭘까.







제목이 <잠겨진 문>이라고 해서,

참 한꺼번에 신간이 많이 나오는구먼, 했는데,

소개 글 보다가 긴가민가 하는 마음이 들어서 찾아보니까, <핸디맨>이었다.

제목 바꾸고 새로 출간되었는데,

출판사도 같던데, 제목 바꾸고 나왔다는 얘기 좀 써주면 안 되나요?

하마터면 읽은 책 또 살 뻔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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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12-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제목 바꾸고 나왔다는 얘기 좀 꼭 좀 써줬으면 좋겠습니다. 핸디맨은 저도 읽었단 말이에요. -.-

그나저나 프리다 맥파든 책 많이 나왔네요? 오호라~

구단씨 2025-12-09 23:06   좋아요 0 | URL

대충 소개 글도 안 보다가, 제목만 보고 신간인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살 뻔 했어요.
이분이 참 다작을 하시나 봅니다. ^^
 



책을 거의 읽지 않은 가을을 보냈는데, 12월의 시작도 비슷할 것 같다.

오랜만에 시간이 나서 알라딘 기웃거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추천마법사가 궁금해지는 건 왜인지.

예전에는 가끔 한 번씩 클릭해보곤 했는데, 이게 여전히 내 취향이나 선택과는 맞지 않는 듯해서 멀리한 적도 있다.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궁금해서 클릭해봤다.


여전했다.

추천마법사는 딱히 내 마음이 끌리는 책을 추천해주지는 않았다.

내가 다른 이유로 검색해본 책이나, 우연히 배너를 잘못 눌러서 들어가 본 책까지 다 아울러서 추천해주는 듯했다.

그래도 그냥 나갈 수는 없어서 추천마법사가 안내해준 몇 권의 책을 살펴보는데,

아, 이 방식으로 완전히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를 수는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권은 끌리게 되더라는 또 이상한 결과가 만들어지네.

그렇게 최은미의 짧은 소설이 장바구니에 담겼다.

아무래도, 아직은 추천마법사를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할 듯하다. 









그래도, 

추천마법사 보다는, 서재 이웃님들의 책 이야기로 보관함이나 장바구니에 담기는 책들이 훨씬 좋다. ^^











나이 오십에 청소 노동자. 괜히 울컥한 마음에 소개 글 보자마자 북펀드에 참여했고,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내 안에서 완전 사라진 듯한 감정 하나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기차의 꿈. 북펀드에 참여할지 출간에 맞춰 구매할지 조금만 더 고민해 보고,









모순. 읽지 않았으면서도 읽었다고 혼자 착각한 책을 이제 막 펼쳤다.



11월이 이렇게 갈 줄 몰랐는데, 벌써 올해의 한 달을 남겨둔 상태라니,

작년에도 그 전에도,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네.

여기저기, 이런저런 일들로 펼쳐 놓은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 마음.

후회 없이 살기는 어렵다는 걸 이미 알았으니,

그나마 덜 후회하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도 의미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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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정 2025-12-20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공감되어 울곰웃고 힐링됩니다.
 
숨이 멎는 밤(feat. 코골이) -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 작지만 무서운 침묵
유제원 지음 / 좋은땅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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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는 사람이 코를 곤다. 처음부터 그랬냐고?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어쩌다 한 번씩. 그냥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한번 코를 골았던 게 점점 빈도수가 높아지는 듯하다. 원래 비염이 있는 사람이고 갑작스러운 코골이가 무슨 문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병원에 가보기도 했다. 새벽부터 줄 서서 접수해야 만날 수 있는 의사가 있는 곳이었다. 온전히 하루를 비우고 기다림에 지쳐 쓰러져갈 즈음 의사와 대면했다. 비염은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고, 현재 환자 상황이 크게 어떤 치료를 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코골이 상담. 콧속에 무슨 통로가 있단다. 이게 숨을 쉬는 것과 연관된 건데, 그 구멍이 양쪽의 크기가 다른 상태이고, 그것 때문에 코골이가 심해지거나 얕아질 수 있었을 거라고. (남편은 오래전에 큰 사고를 당했고, 그때 거의 전신 수술에 가까운 치료를 받았는데, 그 사고로 코뼈도 부러졌던 터라 코가 곧지 못하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어느 쪽으로 옆으로 누워서 자는 게 편한 잠을 이룰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이 사람의 코골이 역시 지금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정도도 아니라고 판단되니 조금 더 지켜보자는 것. 궁금하면 수면다원검사도 해볼 수 있지만, 그것까지도 마구 추천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결론은 지금의 코골이가 심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거다.


사실 옆에서 같이 자면서 견딜 수는 있다. 이 사람이 눕기만 하면 코를 고는 것도 아니고, 본인의 컨디션에 따라 가끔 소란스러울 뿐이니까. 조금 피곤하다거나, 술을 한잔 정도 했을 때나. 순전히 궁금증 때문에 만났던 의사가 저 정도의 언급을 하니 이게 심각한 건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 제목을 보고 갑자기 심각해졌다. ‘숨이 멎는 밤이란다.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 작지만 무서운 침묵이라니. 어쩌면 좋으냐. 많은 사람이 코골이를 단순하게 여긴다고 한다.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아버지도 평생 코를 골았고, 제부도 눕기만 하면 코를 고는 사람이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반대로 생각하면 코를 골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했을 건데, 왜 코를 안 고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자는 피곤해서 그렇다는 말을 믿고 있으면 진짜 병을 놓칠 수 있다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위험한 말이라고. 단순하게 보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술 한잔한 날에 코골이가 심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일시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변화일 수 있단다. 하지만! 이게 매일, 몇 년째, 숨이 멎거나 다시 쉬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수면무호흡증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고, 온몸의 기능을 떨어뜨리는 병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몇 가지 오해를 확인해봐야 한다. 살이 쪄서 그렇다고, 마른 사람은 괜찮다고 여기거나, 애가 코를 고는 건 크면 괜찮다고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신호다. 진짜 문제는 이런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 그러니 앞서 말한 증상이 심해지고 반복된다면,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고 치료하면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하니 잘 살펴보길 바란다.



그래서 코골이는 못 고치나요? 아니다. 고칠 수 있단다. 맞춤형으로. 코골이의 원인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치료가 효과적이라고 할 수 없기에, 코골이 원인에 따라 맞춤 전략으로 치료하는 게 핵심이다. 가장 먼저는 생활 습관을 잘 조절하여 좋아질 수 있다. 양압기 같은 기구를 사용할 수도 있고, 구개확장기 같은 구강 장치를 이용할 수 있다. 때로는 수술적 치료도 필요할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전문적인 진단으로 치료 방법까지 이어져야 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고, 생활 습관 개선으로 기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니, 시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생활 습관 개선으로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건 당연하다. 수면의 질이 일상생활의 질을 높여준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으로 편한 잠을 이루기 어렵다면 주저하지 말고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숨이 멎는 밤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숨이멎는밤 #유제원 #코골이 #코골이치료 #수면무호흡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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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눈부셔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여름 다음의 계절이 아닌, 곧 시작될 겨울을 예고하는 날씨에 마음이 더 추워진 듯하다. 어제 모처럼 생긴 여유에 아파트 놀이터에 잠깐 앉아 있었는데, 바쁘고 피곤하다고 노래하면서 살다 보니 못 봤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이터 한쪽에 자리한 은행나무 잎이 진한 노랑으로 물들었고, 단풍잎은 금방이라도 타버릴 듯한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네, 가을이었네. 몰랐다. 조금 더 덥고, 조금 더 서늘하고, 그저 아침에 나갈 때 점퍼를 챙길까 말까 하는 생각만 했는데, 계절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다 지나간다, 기운 내라, 다 잘 될 거다. 너무 잘 아는 뻔한 말들이 귀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이 눈앞의 현실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듣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머뭇거리고 싶을 때 말이다. 요즘 나의 일상이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소 같으면 손이 가지 않았을 이 책들에 오늘은 잠깐 마음을 내려놔 볼 수 있었던 건, 내일 다시 시작될 한 주의 마음이 정돈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다. 오랜만에 찾은 도서관에서 신청한 책을 받아들고 나오다가 이상하게 눈길이 갔던 자리에, 이용자들이 읽고 반납한 도서를 놓아두는 자리에 쭉 늘어선 책들이 있었다. 한 사람이 빌렸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읽고 반납한 책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걸까. 상처받고 힘든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많은 사람이 지금 위로의 한 마디가 필요했던 걸까.



이왕이면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무슨 일이 생기든 조금 더 배려하며,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 근심과 걱정이 휘몰아칠 땐, 결국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라는 대담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 책임감의 무게를 애써 버틸 줄 아는 것. 그렇게 성숙하게 살아가는 것.” (남에게 좋은 사람보다 나에게 좋은 사람, 227페이지)


그래서 병이 났다. 그저 그러려니 하지 못해서, 둥글게 살아가지 못해서.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참 싫어하는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너무 자주 찾아왔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해서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닌 이런 일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아야 하는데 성격이 그러지 못해서. 지난달에는 예정에 없던 지출이 있었다. 우리 집 한 달 소득 이상의 금액이었다.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고, 그만큼 오래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알면서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소비할 수 있는 지출이었으니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면 될 것을, 필요한 지출이었으니 살아가는 날들에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지나가면 될 것을, 머릿속은 갑작스럽게 구멍 난 금액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계획으로 다시 분주해졌다. 그래봤자 뾰족한 다른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ㅎㅎ 별 수 있나. 그저 살던 대로 열심히 살면서, 평소의 소비 습관대로 또 살아가면서, 조금 더 아껴가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그러면 되는 일인데, 왜 속에서는 안달복달 불안함만 남은 것인지. 이런 마음을 다독여줄 어떤 문장이 박혔으면 싶어서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겨본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좀 나아질 테니 하면서.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하면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진다. 가끔은 내려놓기도 하고, 또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무겁게 걸어가지 않았으면 싶다.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 가벼울수록 멀리 갈 수 있으니까. 떠나보내고 내려놓아도 괜찮다. 모든 걸 짊어지고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 버리고 놓아주고 잊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신선한 기분. 뭐든 될 것만 같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159페이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단 한 번의 삶, 61페이지)


언제부턴가 누굴 옆에 두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에게 닿지 않을 때도 많았고,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시절 인연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한때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관계였다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끝난 인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사람 관계에 어느 정도 느슨해졌다고, 언제 끊어질지 모를 마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친하게 지내는 지인과 일주일에 2~3일 같이 일하고 있다. 겪어 보니 이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많은 순간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점점 그 성격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는 거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나란 인간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어디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가 싶어서 고민이 많아진다. 그 사람과 나,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일터에서 보이는 태도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이 불편해지는 걸 몇 번 보고 나니, 이 문제에 대해 언젠가는 대화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더라. 분명 유쾌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닐 테고, 내가 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 이 사람을 다시 안 보고 살 수도 있겠다는 다짐이 아직 서지 못했다. 이 사람과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나쁜 마지막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다. 생각해보니 이런 바람도 너무 과한 욕심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어떤 마음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은 내려놓고 기다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것을 곁에 두려고 애쓰지 말고, 내려놓기도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가볍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순간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고.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감이 너무 컸나 싶기도 하고. 역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였던가 보다. 아직 까지는 그렇더라.



무조건 해결해야 한다고 애쓸수록 마음의 짐은 오히려 더 무거워진다. 피하는 것이 무조건 비겁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야 가벼워지는 짐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몰아붙이지 않고 때로는 느슨하게 자신을 다루는 것. 그것도 충분히 용기 있는 선택이다.” (어른의 품위, 87페이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조금 일찍 나를 쉬게 하는 일. 쉬는 것도 감각이다.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앞으로만 나아가면 나만 흐려진다. 누구에게 강요받지 않고 내 선택으로 결정해서 멈췄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 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방법이다.” (어른의 품위, 92페이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아주 사소한 것도 잘 정리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최고의 것만 향해 가고, 좋은 것만 갖고 싶은 노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정말 사소한 순간 하나도 잘 끝내고 싶었다. 다 잘하고 싶은 마음, 그게 얼마나 사람 속을 태우는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일주일에 2~3일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정말 여유로울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엄마를 살피러 다녀오면 하루가 지나가고, 가끔 한 달에 서너 번쯤 엄마와 병원 투어를 하면 또 하루가 사라진다. 또 어떤 날은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엄마들은 하루가 얼마나 빨리 지나갈까 하고 말이다. 이번 달에는 또 예정에 없던 병원 일정이 늘어나 있었고, 시어머니의 병원 일정까지 챙기게 되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 내일 하루는 좀 늦잠을 자고 밀린 은행 일을 보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잠이 든 게 어젯밤에 세운 계획이었는데,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날은 없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간을 빠듯하게 사는 건 아닌데, 왜 항상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입에 붙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고단했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고단함은 잠잠했던 대상포진으로 표시를 냈고, 마음마저 물렁물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도 못 하고 종일 호되게 앓았다.


내가 해야 한다고 여기던 일들이 사실은 내가 아니어도 되었던 것을,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그 순간은 흘러갔을 것을, 왜 내가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마음을 볶아댔는지. 안 된다고, 싫다고, 핑계든 거절의 말이든 하면서 피해도 괜찮았던 것을 왜 못하고 그랬는지. 그래도 조금은 시간 여유가 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지는 것도 모른 채로,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순간이 올 것처럼 위태로웠던 것도 무시한 채로 말이다.



우리는 다 알면서 못 하곤 한다. 하다 보면 하게 되고, 일어서다 보면 걷게 되고, 잘하기 전까지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 안다. 사는 동안, 살아 있으면, 살아가다 보면 또 살아지게 된다는 것을. 아는 대로 배운 대로 해 오던 대로 이겨 내면 된다는 것을. 결국 잘 이겨 내리란 것을 안다.” (행복할 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12페이지)



주말이라 도서관은 5시에 폐관한다. 5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자료실에 놓은 의자에 앉은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시간에 빠져있다.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집중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저마다의 목적에 맞게 선택한 책의 문장에 빠져있는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그들 틈에서 내가 오늘 이 책을 만났던 것은 의외의 인연이기도 하다. 평소에 자주 만나던 책들이 아니었기에, 그 뻔한 말들이 싫어서 화가 날 때도 있었기에. 잠깐이었지만, 그 문장들에 눈길이 머물렀던 순간은 좋았다. 거추장스러운 마음 한 조각 떼어내서 한쪽에 던져둘 수도 있었고, 변덕이 죽 끓듯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을 한 번 더 살필 수도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고 금방 또다시 잊을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고달파질 때마다 한 번씩 생각날 것 같기는 하다. 살짝 등을 한번 두드려주는 것처럼, 잊었던 다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나를 먼저 돌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를 먹고, 참 새삼스럽다. 그걸 몰라서 고민하고 있다니. 아니, 고민보다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못 했던 것, 상대방을 먼저 살피느라 내 마음 그대로 표현하는 데 주저했던 것을 드러내는 일을 이제부터라도 잘해야겠다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주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도,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어른들의 존재도 잠시 잊고, 잠깐이라도 나를 먼저 챙기고 돌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이다.


주말 잘 쉬었으니, 다시 시작되는 내일을 잘 준비해야겠다.











#어른의품위 #내가죽으면장례식에누가와줄까 #단한번의삶

#남에게좋은사람보다나에게좋은사람 #위로가필요해 #또한번의다짐 #나를먼저살피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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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ZM 2025-11-10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라는 표현이 와닿네요
저도 다른 누구보다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ㅎㅎ인간관계에 지쳐있는데 글 보고 댓글 남겨봅니다^^

구단씨 2025-11-11 19:50   좋아요 1 | URL

이쯤 되니, 기대를 안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봐요.
그 사람에 대한 기대보다, 인간에 대한 기대였나 싶기도 하고요.

2025-11-20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단씨 2025-11-27 17:59   좋아요 0 | URL
제가 5년쯤 전에 대상포진 처음 걸렸는데, 진짜 죽는구나 싶었어요.
오래 치료 받고 주사도 맞고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대상포진이 가끔 오긴 오는데, 거의 느낌 없이 왔다 가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몸이 힘들었나 봐요. ㅎㅎㅎ

추워지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몸도 마음도 포근한 연말연시 지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