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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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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게 있다.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몸이 아픈 것도,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대개 전조를 보이지만 그 전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리가 없어, 아직은 아닐 거야, 하는 마음의 안심이 그 위험을 감지하는 걸 막는다. 나에게도 그렇게 전조를 무시하다 일어난 일들이 몇 가지 있지만, 여기서 그 얘기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마이클 길모어가 전하는, 사형수 가족의 이야기는 그 전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의 형 게리가 살인자가 된 건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게 아닐까 싶은 위험스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전조가 마이클에게 적용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하다.

 

길모어 집안에서 폭력과 학대가 시작된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없었다. 한 살인자의 가족으로, 동생으로 살면서 그가 파헤쳐간 그의 가족의 역사는 평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한 길모어 집안의 폭력과 학대의 역사는 게리가 그런 괴물이 된 이유를 비춘다. 잠깐의 기간이 아닌, 그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 부모까지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지속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비와 용서를 모르는 모르몬 교도 부모 밑에서 자랐다. 저자가 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았던 게 행운이었을까. 혹시 저자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계속 자랐다면 또 한 명의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저자의 길모어 가족 역사는 끔찍했다. 게리가 괴물이 되었던 배경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한 가정의 이런 모습이 그 안에서 자란 아이를 모두 범죄자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모,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 같다. 비단 저자가 들려주는 길모어 가정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사형제도가 거의 사라지던 때 부활한 사형제도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된 게리 길모어. 이미 게리의 이야기가 한번 나왔음에도 저자는 형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근원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모든 저주 같은 흐름을 끊어내고 싶은 걸까? 저자의 형들은 변해간다. 그들 중 게리의 살인은 그들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드러낸 위험의 경고처럼 보였다. 사형대에 오름을 선택한 게리의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듯하다. 이렇게 한 번 다 쏟아내고, 자기가 속한 가족의 역사를 풀어내고 나면 게리의 잘못도, 자기 가족의 어둠도 조금은 걷히지 않을까 싶은...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저자가 이 책으로 건넨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는 저자 자신만이 알 테니까. 다만, 이 이야기로 우리가 듣고 느끼게 되는 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떤 범죄자의 탄생 이면에 상당히 다양한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족, 그 부모의 영향으로 기인하는 경우, 남겨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 거기에 저자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부분의 답을 찾는 일까지. 아프지만 꼭 한 번은 확인하고 싶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책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말로 대신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죽음이 끝일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이쯤에서 끝이었을 것 같은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읽는 중간 중간, 나의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선뜻 말문이 트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읽기도 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적나라한 그들의 가족사가 분명 어떤 답을 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분노가 일기도 했다가, 시무룩 절망하기도 하면서 기분이 널을 뛰고 있었다. 결국, 끊어낼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된 게 우리 운명인 건지,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시작된 운명을 거둬낼 수 없다는 건지... 저자의 글은 끝났는데, 나는 이제부터 이 글이 시작하는 것만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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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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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행을 꿈꾼 적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거나, 좋아하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추적하듯 찾아가는 길. 오래전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미 어떤 소설 속 장소들을 밟아갔더라. 그것도 내가 참 좋아하는 소설이어서 더 관심 두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랐던 일을 그 블로거는 상상으로만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바람을 실행으로 옮겨 이미 이뤄낸 여행이었다. 그냥 발을 내디디면 되는 거였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었는데, 나의 게으름은 그걸 이루기 어려운 꿈으로만 새겼던 듯하다. 근데 정말 괜찮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게 멋져 보이지 않나? 이 책의 저자 서정이 들려줄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방을 걸었다』도, 나는 그런 흔적을 밟는 거로 생각했다. 유럽의 어느 곳을 따라 걷는 길. 어떤 작가의 흔적을 찾아 차곡차곡 밟아가는 시간. 낯설지만 친숙하게 새겨지는 글귀들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뭐, 나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러시아에 거주하는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럽과 러시아 문학, 예술을 가까이할 수 있었나 보다. 푸시킨, 톨스토이, 카잔차키스, 고흐, 샤갈, 쇼팽 등 다양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각 작가와 예술가의 고뇌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흔적까지 들춰낸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아는 독자도 많겠지만, 나처럼 평소에 즐기지 않은 분야의 독자라면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면서도 흥미롭게 들린다. 앞에서 내가 말했던, 작가나 작품 속을 따라가는 여행을, 저자는 두 가지 다 이뤄내고 보여준다. 예술가의 삶을 좇다가, 소설 속 주인공을 비추는 여행도 풀어낸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여정까지 보탠다. 뭐랄까, 저자가 그곳에 사는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진다고 말해도 되려나. 고전 속 주인공의 모습이나, 평범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에 저자의 발자취까지 같은 흐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문 저자에게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비슷한 향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좋았지만, 그리 편하게만 읽히지는 않았다는 거다. 내가 너무 무지해서인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따라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고, 이것저것 찾아가면서 읽기에는 에세이라는 분야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뭔가를 좀 덜어내고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풀어내던지, 아니면 뭔가를 더 보태 전문적인 장르로 엮어내든지 했다면 좀 더 분명한 책으로 남았을 것을... 어쩌랴,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건 그저 나의 무지함이 첫 번째 원인인 것을.

 

저자가 언급한 작가, 예술가의 흔적들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만 본다면, 거장이라 불리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기에 조금 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느리게 페이지를 넘길 시간이 있다면 좋을 듯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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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잠깐 들춰봤다. 말 그대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으면 될 책 같았는데, 오히려 나는 저자의 말 몇 마디로 늙는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다. 병 앞에서 죽어가는 시간에도 제대로 사는 일에 대해 말하는 듯한데, 그런 말보다, 죽음보다는 늙어간다는 것에 더 많은 부분을 떠올리다가 그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그날, 종일 늙음에 관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너선 실버타운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까지 구매목록에 넣게 되었는데, 제목에서부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진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소개 글에 써진 이 말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노화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비통한 심정을 25편의 시를 통해 보여주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소개 글. 주제 자체가 어두워질 수 있음이 뻔했는데, 그 주제로 사람을 얼마나 부담 없고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기대하고 싶어져서다.

 

그게 불과 지난 주말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죽는다는 거나 늙는다는 것을 떠올리는 게 생각처럼 긍정적이게 되지 않았다. 어제오늘, 늙음에 대해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도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에 우울해졌다.

 

 

엄마 나이 쉰이었을 때, 엄마가 노래 부르듯 하던 말이 있다. ‘내 나이가 마흔이었으면 좋겠다...’ 그땐 나도 어렸을 때여서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로 가볍게 생각했다. 항상 지나간 시간에 마음 두기 마련이니까, 그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엄마가 쉰다섯이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내 나인 쉰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때는 느끼는 게 좀 달랐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에서 아쉬움을 찾고 있지만, 우리에게 더 해주지 것들에 미안함을 담은 말로 들렸다. 엄마로, 가장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부족한 많은 것에 계속 마음을 두었던 듯하다.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그때 기억에 엄마는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말을 했었는데... 아직 키워야 할 자식들이 많은데,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데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않았을까.

 

나도 점점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고 있다. 나이라는 숫자가 그렇고, 외모와 육체의 나이 듦이 그렇다. 엄마의 자식으로 살면서 의지했던 마음을, 이제는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드러내곤 한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니까. 그냥, 엄마의 뒤를 조용히 밟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서 요즘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가장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동안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다. 우리 형제들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던 동안 외모는 엄마를 닮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부를 때 “학생~” 이렇게 부른 적이 많았다. 병원에 가서 진료받는 것만 아니면(병원은 접수할 때 이미 실제 나이가 그대로 기록되니까) 아무도 내 나이를 그대로 보진 않았다. 친구랑 같이 다녀도 한참 동생처럼 보여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는데, 올해 시작하면서 나의 외모는 내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봐도, 다른 사람이 봐도 내 나이로 보인다. 언제까지 동안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게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확 보일 정도일까. 엄마 나이 일흔이 넘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환갑이 지났느냐고 묻곤 했다. 엄마의 실제 나이보다 평균 열 살은 어리게 보였다. 남들이 봐도 내가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만큼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이제껏 늘 그랬는데, 이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가 봐도 엄마가 나이 들어 보인다. 어제는, 내가 “엄마,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물었더니, 안 그래도 언니랑 동생이 전화할 때마다 요즘 그 얘기를 한단다. “엄마, 지난번에 가서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 막내 남동생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나 장가갈 때까지는 늙지 마. 결혼사진 찍을 때 엄마가 늙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늦은 나이에 남동생을 낳았고, 아무래도 자기가 자라는 동안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 더 일찍 보였나 보다. 친구들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를 더 드신 엄마를 보는 게 슬펐을까. 다행히도 남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젊어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런데 그때보다 몇 년이나 흘렀다고, 이제 엄마가 늙어 보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엄마의 얼굴이 그 나이의 노인으로 보인다. 하아...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나이 먹어가는 시간을 아파하고, 나이 든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2년 넘게 치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별일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과에 간다. 지난주 진료 때 입안에 다른 장치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고 해서 본을 뜨고 오늘 병원 가서 입안에 새로운 장치 하나를 붙였다. 최소 석 달은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을 할 때나 뭔가를 입에 물고 있으면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고 웅얼웅얼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칫 방심하면 입 옆으로 침이 줄줄 흐르고... 이걸 못해도 석 달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숨이 쉬어지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장치를 붙였다 떼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치위생사가 와서 괜찮은지 묻는다. 그에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오더라. “어른들 틀니 하는 게 이런 원리인가요?” 그렇단다. 똑같단다. 이제야 틀니 하는 사람들 불편할 게 이해가 된다고,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틀니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고 괜히 속상한 마음인데. 이런 거였구나.

 

치과에서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나와서 바로 안과로 갔다. 며칠 전부터 눈이 무겁고 답답하고,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진료도 받아야겠고, 안경도 새로 해야겠기에 겸사겸사 진료받으러 간 건데, 눈에 무슨 질병이 있는 건 아닌데,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현대인의 생활 습관이 그러하고... 우리 몸은 늙어가고 있으니 눈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했는데, 평균 수명의 절반쯤 살아온 나는 이미 구백 냥을 모두 써버린 것 같았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다시 채워지지 않는, 말 그대로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한 생애의 시간인 건가... 안과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내가? 내 눈이? 말도 안 돼. 좋은 눈은 아니었어도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시력검사표를 들고 안경점으로 가서 다시 검사에 30여 분을 소요했다. 이런 시력에, 이런 상태에, 이런 렌즈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에게 노안이 온 건가요?”

“중년안이 시작되는 거죠. 요즘엔 70대까지는 중년안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중년안이라고 할게요.”

“아아... 선생님...”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계속 울었다. 그 큰 안경점에, 직원이 열 명도 넘게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건 말건 내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꺽꺽대다 고개를 들고 보니 나를 담당했던 안경사 아저씨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즘엔 삼십 대 초반에 중년안이 오기도 하고, 이런 렌즈는 초등학생이 끼기도 합니다.”

“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제 안경 보이시나요? 제 안경 렌즈가 바로 그런 렌즈입니다. 하나도 표가 안 나죠?”

그 안경사 아저씨의 실제 나이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면오십 대로 보였다.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건지 몰라도, 그냥 다 이해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진정되고 나니, 다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안경 주문서를 넣었다. 기존에 사던 안경 가격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을 내면서 손이 후덜덜 떨렸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생각에 더 슬퍼졌다. 나빠지는 몸을 유지라도 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 싶어서...

안경은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라면서, 안경사 아저씨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면서 그제야 말을 꺼낸다. “고객님이 갑자기 우셔서 아까는 제가 너무 당황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신가 봐요.” 감수성이고 뭐고, 하나도 귀에 안 들린다. 그냥 내 눈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진실만 깊게 새겨졌다. 언젠가, 노안은 예방할 순 없지만, 진행을 늦출 수는 있다고 들었다.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몸에 찾아오는 대부분 병에서 들어온 말과 같다. 우리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거였다. 예방도 불가능하고, 진행도 막을 수 없고, 다만, 그 진행을 늦추는 게 최선인 처방으로...

 

 

 

 

 

 

 

 

 

 

 

도리언 그레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이 먹지 않는다면, 늙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건 몰라도 눈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결국 내 몸에서 그 눈이 가장 먼저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은 점점 책을 거부하는 눈이 되어 간다. 눈물이 안경점에서 멈춘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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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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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래도 되는 건가? 제목 때문에 막 웃고 싶은데, 내용도 궁금하다. 요즘 본의 아니게 치킨 못 먹고 있는데, 이 책 보니까 치킨이 미치도록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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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 뭔데? - 한 장애인이 청소년에게 묻는다 장애공감 1318
쿠라모토 토모아키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영화를 보려고 극장이 있는 빌딩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는 4층. 마침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1층에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니 빨리 올라가겠구나 싶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뿐인데, 내가 너무 놀라서 당황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분명 그도 놀랐을 텐데, 놀란 것보다는 미안해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왜?’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했던 거다. 너무 놀란 나의 제스처가 그를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3층을 눌러달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건데 3층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로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던 거다. 그가 앉은 상태로 보면, 팔이 그의 가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아, 그래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 안에서 혼자 얼마나 애가 타고 있었을까. 보통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수 누르는 버튼이 문 쪽으로 세로로 만들어져 있고, 벽 쪽으로 안전 바와 나란히 가로로도 있어야 했는데, 왜 그런지 그 건물 엘리베이터는 층수 누르는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다. 그냥 습관적으로 타고, 누르고, 내리곤 했던 터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건물 엘리베이터에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없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는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 엘리베이터가 2대 있었는데 한쪽에는 가로 버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탄 쪽 엘리베이터에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였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3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몇 초 동안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무안함을 감추며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어서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놀랐다고,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그가 전동 휠체어를 작동해서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전에 어느 방송인이 자국의 장애인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서비스, 정부 정책 같은 걸 시행할 때 당사자인 장애인이 그 기획 단계에서부터 같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무엇이 불편하고 필요한 것인지 피부로 직접 닿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참여가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은 그 몇 초의 경험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도 그 빌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엘리베이터였다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애에 관한 책 몇 권을 일부러 찾아봤다. 쿠라모토 토모아키의 『보통이 뭔데?』는 나에게 그날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한울림스페셜의 '장애공감 1318'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자라오면서, 일상을 지내면서 겪은 시선을 이야기한다. 내가 알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정작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날 내가 봤던 일과 그로 인한 생각을 이 책이 그대로 말하고 있던 거다. '네가 그냥 생각하는 것과 직접 부딪혀서 알게 된 것은 이렇게 달라.'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정한 기준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그 보통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보통의 전제가 처음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일부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비장애인에게 치우친 보통의 개념이 장애인에게는 보통이 아닌 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반대로 장애인의 기준으로 '보통'이 이루어지면 비장애인은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보통의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보통이란 기준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보통'을 실현하면서 '공생'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하고.

 

저자의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던 게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인 쿠라모토 토모아키는 시각장애인이다. 약시에서 전맹으로 진행된 경우다. 어렸을 적 그가 약시였을 때, 친구들과 야구를 했던 기억은 즐거웠지만 '참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놀이였다. 약시인 그를 배려하며 진행된 야구,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친구들은 야구의 규정을 약간 변형했다. 그에게 공이 날아들 확률이 적은 자리로 수비를 배치해주었고, 그의 자리로 공이 날아오면 옆의 수비수가 대신 공을 받아주곤 했다. 타자로 그가 마운드에 섰을 때는 투수가 가까운 거리로 와서 공을 던져주었다. 친구들은 같이 하기 위해 그에게 이런 배려를 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참여의 의미가 상실된 야구였을 뿐이다. 어른이 된 그가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은 맹인용 지팡이를 짚은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지하철 안에서 잘 안 보이는 통로를 걸어 서 있을 자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을 취했던 거다. 그가 말하길,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아니니 굳이 자리 양보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다치게 된다. 이때 생각할 건, 사람들의 구조정신이 아니라 지하철을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스크린도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필요한 안전장치가 아니겠는가.) 건물의 문턱을 없애 휠체어가 잘 다닐 수 있게,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저상버스를 운행하는 등 배리어 프리가 많이 적용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 공생에 가까이 왔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숨기거나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것이 비교적 쉬운 때문인지, 경도인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중도장애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장애가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조금이라도 비장애인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82페이지)

 

시각장애인만 놓고 보면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또 청각장애인이라면 조금은 들리는 사람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장애가 심하면 더 힘들고 심하지 않을수록 덜 힘들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해서 어려움도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도장애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어렵거니와 어중간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리를 해야 해서 오히려 중도장애인보다 더 힘든 점이 있습니다. (99~100페이지)

 

특히 저자의 이야기에서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경도장애와 중도장애의 차이에 관해서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경도', '중도' 장애라고 부른다. 장애의 정도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차이로 장애의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데다,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오해가 경도장애가 중도장애보다 불편함이 '덜' 할 거라는 거다. 저자의 경우 약시보다 전맹이 더 심한 장애라는 오해에 대해 말한다. 내 생각도 그랬다. 희미하지만 약간 보이는 것과 아주 안 보이는 것 중에서 약시가 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체의 장애를 겪지 않은 나의 착각이었다. '덜' 불편한 것과 '더' 불편한 것의 차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약시일 때의 불편함, 전맹일 때의 불편함이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장애에 대해 알고 있던 약간의 이론마저 온전히 알지 못했던 거다. 내 머릿속에 있던 장애에 대한 지식을 다 지우고 다시 새겨 넣어야 하는 거였다.

 

‘이럴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이렇다’라고 이론으로만 들어왔던 것은 ‘이렇구나!’라고 실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의 몇 초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경험을 허락했는지 알겠다. 실제의 경험과 생각, 시선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됐던 거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경험일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경험은 아닐 터.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무심한 시선을 가진 나에게 일부러 찾아와준, 두 번 만나기는 어려운 아주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에 대해, 세상을 향해 관심 좀 두라고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통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시선을 알게 하고, 공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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