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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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던가. TV로 본 어떤 남자는 하루를 버티는데 26알의 약을 삼켜야 한다고 했다. 여기가 아파서 이 약을 먹으니 부작용이 생겼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다시 저 약을 먹고, 저 약을 먹고 생기는 또 다른 부작용 때문에 다른 약을 먹다 보니 그렇게 많아졌다고 한다. 약이라고 하면 몸의 독을 빼는 데 쓰는 거 아닌가? 그 독을 빼기 위해 먹은 양은 몸속에 또 다른 독을 만들고, 그 독을 빼려고 또 다른 약을 쓴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하지만 우리는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내 독과 약의 엎치락뒤치락, 흡입하고 쏟아내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들어온 독을 내보내기 위해 먹는 약, 그로 인해 쌓이는 독을 내보내는 일의 반복. 우리 몸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서 버틸 것이다.

 

한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다.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료진의 추측이 있지만, 사실 화자인 ‘나’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나’가 눈을 뜬 곳은 3인실 병실이었는데, 같은 병실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는데, ‘나’는 점차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듣게 된 이야기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독을 다스리던 남자 조몽구의 이야기를 쓴다.

 

함부로 손대기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게 독이 아니던가. 음식에서, 자연에서 만나는 동식물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독은 절대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독을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니고 사는 남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그 자신이 지닌 독의 존재를 조몽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는 아버지(실은 할아버지에서부터)로부터 이어져 온 독과 그 해독을 위해 존재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가진 독의 근원, 독을 향해 손을 뻗는 일, 독에 관한 관심 같은 것을. 어머니가 그렇게 해독하려고 애쓰던 모든 상황을 지켜본 그로서는 이 운명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두통마저 소화하려고 애쓴다. 두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즈음 등장한 삼촌 조수호는 그가 독에 가까이 가는 다리가 된다.

 

소설에서 줄곧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한 가지 정의로 향해 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독이면서 약이라고. 그렇게 접근하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가까이하는 독은, 독이면서 약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찾은 독으로 연구와 실습(?)을 한다. 독과 독이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어떤 독이 서로 만났을 때 강해지는지 또는 약해지는지, 독이라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사용할 때 약이 되는지 직접 독에 닿으면서 확인한다. 온갖 꽃, 동물, 광물에서 얻는 독으로 인간의 몸이 반응하는 것 역시 확인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 독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하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을 탄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페이지)

 

“삼촌도 독이 무서웠어?”

“그럼 무서웠지. 늘 무서웠지. 세상도 무서웠어. 이 세상에 독이 아닌 게 없거든.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서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독’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약’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198페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식물에 독이 있다는 것인지 놀랍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이곳의 구석구석에 자리한 위험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몰랐을 때는 몰라서 안전(?)할 수 있지만, 한번 알게 되면 그 위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이용하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실제로 소설 속 인물들은 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그 독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조몽구의 엄마는 아들의 두통을 낫게 하려고 독에 손을 댄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했던 자경은 자해를 일삼는다. 자경의 오빠 정우는 오래전부터 약에 중독되었던 때가 있다. 군대에서 만난 광수는 아버지가 술로 살아왔고 술로 죽었다. 결벽증에 걸렸던 소화는 페인팅에 참여하면서 독의 변화를 확인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평범하지 못한 삶을 가졌고, 그 시간 동안 독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 안에 조몽구가, 그 역시 독에 감염되었고, 그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있다. 독과 약을 동시에 품게 된 거다.

 

‘나’가 서술하는 조몽구의 인생은 한마디로 독과 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어디 조몽구뿐이었을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과 닮지 않았는가? 소설은 독과 약의 적절한 사용을 시사하면서 독을 독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독은 단지 물질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들려준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이기심, 공포, 어긋난 신념 같은 우리 정신을 지배하는 것 역시 독과 약이 같이 작용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듯이. 어느 한 곳, 한 사람에게 머문 게 아닌 거다. 물질과 정신에 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세상 모든 일에 스며들어 우리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지켜보게 한다. 모든 물질은 독이고,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고.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분한다는 정의를 이렇게 확인한다.

 

대체 독이 뭐야? 그 물질이 무엇이든 간에, 몸 안에 들어와 생체의 리듬과 균형을 무너뜨리면 그게 독이야. 몸에 꼭 필요한 호르몬, 비타민, 히스타민, 세로토닌 같은 생물활성물질도 내부에서 과도하게 분비되거나 외부에서 대량으로 투여되면 독이 된다는 걸 너도 모르지 않잖아. (467~468페이지)

 

“모든 물질은 독이며 독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다만 올바른 용량만이 독과 약을 구별한다.” (177페이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그들이 독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보면서 낯설지 않았다. 그 ‘올바른 용량’을 지키기가 어려워 우리는 극단적으로 독과 약으로 치닫는 거 아닐까 싶다. 살아가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독의 세계의 혹독함에서 약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만난 인물들 역시 독과 약, 극과 극을 오가면서 대립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점점 다다르는 지점이 그 ‘올바른 용량’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약에 가까워지는 경우보다 독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을 것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계속 보여줄 뿐이다. ‘해독과 정화’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면서 ‘해독’보다는 ‘정화’의 삶으로 가는 방향을 열어준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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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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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철이 없을 때는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혹시 나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가 아닐까, 우리 진짜 부모는 저기 어디서 굉장한 부자로 사는 분들이 아닐까, 학벌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런 사람이 내 부모는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너무 어렵게 자라던 시절의 상상 같은 일이기도 하고, 정말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막연하게 떠오르던 동화 같은 일이다. 조금 더 자라서는 뉴스에서 보던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저지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때도 생각했다. 부모가 되는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혹시 어느 나라에서는 부모 자격시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부모는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당연하게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를 알아 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146페이지)

 

내가 상상만 하던 일을 이야기로 내놓은 작가가 있다. 놀랍기도 했지만, 어떤 내용으로 독자의 궁금증을 채워줄까 하는 기대가 더 컸다. “부모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이 소설은 이미 첫 페이지를 열게 하는 마법을 부렸으니까.

 

미래의 어느 시대.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국가가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생겼다. 아이들은 이 센터에서 같이 먹고 생활하며 자란다. 한 마디로 국가가 아이들을 키워주는 양육 공동체가 된 거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부모 선택을 못 하면 기관을 나가야 한다. 기관을 나가기 전까지 아이들은 두 가지 결정을 한다. 양부모를 만나서 나가느냐, 아니면 이대로 스무 살을 채우고 나가서 센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회생활을 하느냐. 이게 무슨 차이인가 싶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만의 차별을 두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어쨌든, 센터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관리자가 특별히 선별한 부모 후보를 만날 기회가, 그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쉽게 상상이 되는 일이던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니. 물론 이 아이들에게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치명적인 과거가 있지만, 그런 과거가 그다지 단점이나 불편함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맞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만을 가진다. 시뮬레이션으로 본 부모 후보의 모습, 직접 만나서 몇 분간 대화가 가능한 시간, 마지막 세 번째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최후 결정을 한다. 자기 부모로 선택할 것이냐 마느냐. 센터의 아이들은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페인트라고 부른다. 주인공 ‘제누301’에게도 페인트 할 기회가 왔다. 그동안 진심으로 페인트에 응한 부모를 만난 적이 없던 제누에게 이번은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처가 많은 아이가 선택한 부모 후보는 어떤 사람들일까? 아이들을 입양함으로써 정부의 복지 혜택만을 욕심냈던 부모들과는 다를까?

 

읽다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온갖 현실이 다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센터의 아이들은 태어난 달의 이름을 따서 뒤에 번호를 붙인다. 1월에 태어난 아이는 제누, 제니. 그 뒤에는 아이들을 구분하려고 붙인 번호. 그래서 센터의 모든 아이는 똑같은 이름이 많다. 그중에서도 6월에 태어난 아이들과 10월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이 가장 많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차’ 했다. 여름 휴가철, 겨울의 크리스마스 시즌.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가볍고 설레기 좋은 그때 잉태된 아이들이 6월, 10월에 태어나고 버려졌다고. 어른들은 자기들의 즐거운 시간을 만들었지만, 그 후에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센터로 보내진 아이들의 인생을 한번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을까 싶은 아쉬움이 계속 떠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아이를 양육하는 현실은 아주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할 것이다. 경제적인 형편, 산후 우울증, 육아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 아이가 자라면서 겪는 많은 일을 같이 경험해야 하는 감정적인 문제들까지. 더군다나 그게 다 처음 겪는 일이라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하지만 그 두려움을 안고 겪어야 할 게 아이와의 공동 성장 아닐까? 그 경험이 이뤄지는 동안 우리는 더 많은 감정과 상황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하게 묶이는 기적을 맞이하게 되는 결말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하나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163페이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또 모르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겪잖아요.”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196페이지)

 

부모를 선택하는 시대라는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차근차근 듣다 보면 결국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족이 어떤 형태와 마음으로 가능한지 설명해주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지도 드러난다. 익숙해서 편하지만 당연하게 생각해서 상처받게 하는 존재가 되는 가족들, 사회에서 출신 성분을 따져가며 사람을 판단하는 시선들, 가족 중심의 사회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러면서 다다르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부모는 어떻게 되는가, 자식은 어때야 하는가. 부모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부모가 되어가는 것’처럼, 자식 역시 부모에게 어떤 자식이어야 하는지 처음부터 정해진 건 아니다. 그걸 몰라서, 알면서도 자주 잊어서 무책임하고 상처 주는 일들이 생기는 거 아닐까. 준비와 노력만으로 가족이란 관계를 완벽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가족이란 계속 서로 맞춰가야 같이 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하는 소설이다. 혹시라도 멈춰있던, 같이 색을 칠하며 그림을 완성해가는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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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신간

진이,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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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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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크든 작든 짐을 지고 있다. 단, 그 짐은 옆에서 보면 내려놓으면 될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오히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색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346페이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던 한 가지는, 그들이 생활의 불편함을 어떻게 견디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당연하고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생활의 불편함이 뭐 별거냐 하는 표정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그들에게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도 괜찮은 것 아니겠냐는 듯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 세상에서 겪은 어려움이 그들은 산으로 보낸 것 같다. 몸이 아파서, 가까운 사람의 배신으로, 사업이 실패 때문에 같은 세상에서 부딪힌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주변에 몸과 마음 뉠 곳 많을 텐데 왜 하필 산일까 싶은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들이 느낀 그대로를 내가 다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산속 생활로 내가 알게 된 건 산이 인간에게 주는 마음의 위안과 쉼이었다. 세상의 복잡한 일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들리기도 했다. 미나토 가나에가 '여자들의 등산일기'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추리소설을 주로 썼던 작가가 인생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들려주고 싶은 게 무엇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평소 접하던 작가의 글 분위기가 아니어서, 기대보다는 그냥 새로운 맛 하나를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내려놓음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들려오는 이야기부터 마음에 파고드는 어떤 느낌이 있다. 공포와 추리를 맛보며 즐겼던 걸 잊을 만큼,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가 일상의 우리에게 훅 다가와 버린 것 같다.

 

8개의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직장동료지만 친하지 않은 사이의 리쓰코와 유미(묘코 산), 맞선 파티에서 만난 미쓰코와 간자키(히우치 산),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게 등산을 배운 여자의 정상 등반일기(야리가타케), 처음으로 언니와 등산을 하게 된 서른다섯의 유미(리시리 산), 동생 유미, 딸 나나카와 다시 산에 오르게 된 여자(시로우마다케), 남자친구 다이스케와 함께 산에 오른 마이코(긴토키 산), 웹사이트 '여자들의 등산 일기'에 모자를 만들어 파는 유즈키의 뉴질랜드 트래킹 투어(통가리로), 언니와의 등산에 두 번 산에 오르고 본격적으로 등산을 즐기려는 여자(가라페스에 가자)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미 제목에서 느꼈겠지만, 여자들의 등산 일기 그대로다. 산에 오르는 여자들의 속내가 하나씩 들려온다. 그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관계의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한때를 불러오거나... 저마다 사연이 다른 그들의 공통된 목적지는 산에 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품게 된다. 때로는 누구에게 털어놓으면서 내가 가진 문제를 조금 가볍게 만들기도 하지만, 끝까지 꺼내놓지 못하고 가슴에 묻게 되는 이야기도 있다.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짐처럼 우리 마음의 많은 걱정거리와 생각들도 그러하다. 단순하게 판단하면서 금방 흑과 백의 논리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 말이다. 불편한 동료와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거북했던 여자, 남편의 이혼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여자,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선택하면서 불안해하는 여자, 애인과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흘러갈 것 같아서 고민하는 여자,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혼자인 삶을 선택했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여자. 각자가 가진 고민은 너무 다양하다. 직장, 결혼, 관계. 평범한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고 있다 보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 앞에서, 산이라는 곳은 분명 무언가 해답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라는 게 맞는 것 같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라, 산에 오르는 그 과정과 시간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어떤 것들이 말해주는 것들. 그것을 찾게 하는 여정에 작가는 독자를 동참시키면서 같이 등산하게 한다. 중간 즈음에 잠깐 멈춰서 물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다시 걷다가 멈춰서 초콜릿을 입에 넣고 당 충전하게 하고, 무심코 바라본 하늘의 구름이 내 발밑에 있는 신기함에 시선을 빼앗기게 하고, 모르는 이들과 함께 오르면서 타인을 이끄는 것도 배우게 하는... 이 여정에서 놓칠 게 하나도 없는 듯하다.

 

이 소설 속 여자들의 이야기가 어디쯤에서 풀려나와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선택한 문제의 해결이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줄지 모르겠지만, 산에 오르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문제를 파고든다. 생각하고, 변화시키고,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애쓴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기의 상황을 냉정하고 간결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까 아니면 단절해버릴까. 뭐든 정리하고 해답을 보고 싶은데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면서도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게 아닐까. 산에 오른다고 해서 각자가 짊어진 문제와 고민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변화하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게 등산 일기에 기록될 팩트다. 빠르게 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히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도착하는 그 목적지를 보게 하는 일.

 

어디가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무엇이 목표인지는 알 수 없다.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가 아닐 것이다. (50페이지)

 

페이스를 맞춰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처음부터 나 혼자 힘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는 사람과는 같이 오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염치도 없이 상대방에게 말했다. (140페이지)

 

타인과 함께 하는 삶을 이해하고,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누군가 함께 걷는 길이 생각보다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이야기에 은근한 감동까지 생긴다. 아마도 그동안 작가의 글에서 만났던 강함보다 부드러움이 전해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걷는 즐거움을 배운 듯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급하게 하지 않아도 결국 닿게 되는 그 지점에 다다르는 우리 마음의 변화가, 생각보다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천히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걷다 보니 보이는 것들을 확인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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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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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조금 무민의 이야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벌써 무민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괜히 서운했다. 무민 가족과 그 친구들이 들려주는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에 일상의 다정함 같은 것을 전해 받는 느낌이었다. 착해지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투덜거리고 싸우는 것 같아도 진짜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서일까, 이들이 주고받는 마음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니 더 푸근해지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이제는 더 들을 수 없다니, 매우 아쉽다.

 

무민 가족은 어디로 갔을까. 무민 가족이 없는 골짜기로 모두가 모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시 모여들었는지. 여름의 싱그러움은 점차 사라지고 겨울을 바라보는 가을에 이들은 다시 만났다. 바람은 차갑고, 웬만한 곳의 문은 다 닫혔다. 겨울과 함께 추위와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그러니 꽁꽁 닫힌 문은 더 단단하게 닫히길 바라겠지. 그런 숲길을 걷는 스너프킨은 무민 골짜기의 친구들이 일어날 시간을 기다린다. 그럼블 할아버지와 헤물렌, 밈블, 토프트, 필리용크, 스너프킨. 이 여섯 명이 무민의 빈집으로 찾아온다. 무민 가족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무렴 어떤가 싶은 마음들인지 무엇인지. 주인 없는 집에 모인 이들의 추운 날이 시작된다.

 

각자의 시간을 살면서 이들은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마음에 어떤 생채기를 담게 되었을까. 무민의 골짜기로 모여든 이들은 각자의 아픔이 있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상처 가슴에 품은 채로 살고 있다. 듣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아픔은 오늘을 힘들게 한다. 외롭고, 우울하다. 삶의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무민 골짜기는 따뜻한 곳이다. 함께했을 때 그들은 즐거웠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푸근했다. 아마도 그런 기억과 기대로 다시 그곳에 모여들었을 것 같다. 나의 마음 어루만져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 그런 장소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지 않은가. 돌아가고 싶어지는 곳, 그곳에서 마주한 것들로 마음을 채우고 싶은 곳 말이다. 무민 가족은 걱정 없이 사는 듯했고, 일상이 평화로웠다. 아마 그 분위기에 스며들고 싶어서 찾아왔을 텐데, 무민 가족은 없고 집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한다. 주인 없는 집에서 언제 올지 모를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 그건 아마도 간절한 바람 같은 게 아니었을까. 무민 가족을 만나고 그들의 평화로움을 접하고 나면 다시 그들만의 세계로 돌아가도 더는 아프거나 슬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거.

 

주인 없는 집에 모인 방문객들이 같이 살아가는 모습은 편하지 않다. 각자 개성이 너무 뚜렷한 이들이 어떻게 지낼지 눈에 선하다. 고집불통에, 소심하고, 결벽증이 심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어떻게 한 공간에서 머물 수 있겠는가 싶지만, 어쩌랴, 기다리는 이가 있는 것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을. 이들의 불만은 서로가 맞지 않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 이런 기분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거, 학교 갔다가 돌아왔는데 집에 엄마가 없어서 괜히 투덜투덜, 뭔가 불안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 툴툴거리고, 자꾸만 이 방 저 방 문 열고 엄마를 불러보기도 하는, 없는 걸 알면서도 언제 올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입만 툭 내미는 거. 그들이 바라던 이는 그곳에 없고, 다른 이들과 한 공간에 머물면서 예상 밖의 일(무민 가족이 없었던 일)을 감당해내야 하는 불편함과 괜한 서운함 같은 거 말이다. '나는 아니야, 나는 달라, 그런 거 아니거든!' 이러면서 나에게 변명 같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엄마의 부재로 집이 텅 비어있던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또 그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처럼, 또 그들만의 조화를 이루면서 무민 가족이 없는 순간을 견뎌낸다. 혼자였다가 함께였다가, 각자의 뚜렷한 성격으로 서로가 맞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는 것. 그렇다면 함께 해야만 하는 순간도 인정해야 한다.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그들의 공통된 기다림을 즐겁게 보내야 한다. 그렇게 또 하나를 겪는다. 배운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벽을 세우면서도 타인과 함께 하면서 맞춰가는 스스로를 보게 된다. 이런 변화가 성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치유와 위로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무민 골짜기의 겨울은 해가 뜨지 않는다. 그 겨울의 길목에서 모인 이들의 마음도 딱 겨울이었을 것이다. 이 겨울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자, 혹은 위로받고자 찾아온 곳에서 더 혹독한 겨울을 보낼 것만 같은 상황이 두렵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견뎌내는 이들의 모습이 은근한 감동을 준다. 화창한 여름에서 대부분의 것이 소멸하는 겨울로 가는 그 과정은 겪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스산하고 춥다. 마음마저 춥다면 한파를 제대로 겪는 겨울이 되겠지. 하지만 그 겨울을 거치지 않고서는 다시 봄도, 여름도 만날 수가 없다. 무민 골짜기로 모여든 그들의 삶에서 사라진 그 무엇은, 결국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을 이렇게 배운다. 추운 계절을 겪고 따뜻한 계절로 건너가는 것처럼, 무민 가족의 힘을 받아 건너가고 싶었던 마음의 겨울은 스스로 건너가야 했던 거다.

 

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시간이자, 필요한 무엇이든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12페이지)

 

읽으면서 내내 무민 가족은 언제 등장하는지 기다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나도 모르게 도움을 줄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부족한, 사라진 것들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민 가족은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이 이야기의 메시지가 되는 듯하다. 누군가는 다시 떠나고 누군가는 아직도 기다리고.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마음이 흐르는 대로, 겪고 배운 만큼의 시간으로 또 내일을 살아간다. 다시 돌아오는 무민 가족을 만난다면, 괜히 더 반가울 것 같다. 당신들이 사라진 빈집이 마치 마법을 부린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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