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옷을 갈아입고, 벗은 옷은 털어서 걸어놓거나 세탁기에 넣고, 손과 발을 씻는다. 그 후로 바로 샤워를 하거나 다른 일을 먼저 하고 씻거나 하는 약간의 순서 차이만 있다. 들어와서 손을 씻는 행위는 개인이 지켜야 하는 기본 위생 중의 하나이며, 어렵지 않게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세균이 우리 몸에 침투하지 않게 위해 방어할 수 있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세균 감염의 무서움은 이미 여러 가지 사례로 경험했다. 과거 세계사 속에서 활약하던 페스트 같은 거 말이다. 위험한 병이기에 전염을 막을 한계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깨끗한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 전염 확률을 낮췄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람과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그 힘을 발휘하는 세균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개인이 지켜야 할 기본 위생의 중요성 또한 잘 안다.

 

병을 옮기는 세균이 사람 몸에 침범했을 때 증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을 '무증상 보균자'라고 부르는데, 이 책 <위험한 요리사 메리>에서 말하는 메리 맬런이 그러하다. 아일랜드 태생의 메리는 요리사다. 뉴욕의 상류층 가정에서 일했다. 우연인지 뭔지, 메리가 일하던 집의 사람들에게 단체 장티푸스 증상이 나타났다. 당시의 질병을 조사하던 사람들은 그 집의 환경을 보고 장티푸스 발병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병이 가까이 올 수 없을 정도의 깨끗한 환경이었다. 그렇게 원인을 찾지 못한 장티푸스 사건이 희미해질 무렵, 조사관 조지 소퍼는 요리사 메리가 무증상 보균자일 것으로 의심한다. 집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생활한 메리만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메리는 소퍼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는 장티푸스에 걸린 적이 없다며 건강하다고 조사관들에게 저항했다. 소퍼의 말을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메리에 관한 더 많은 자료 수집이 필요했다. 그렇게 더 많은 조사를 하고 그동안 메리가 일했던 집들을 역으로 추적한 결과, 메리가 일했던 모든 집에서 장티푸스가 생겼고 그들 중에서는 죽은 사람도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소퍼의 말이 사실이 된 순간이다.

 

메리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장티푸스. 위험하고 전염이 되는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하고 단속해야 하는가? 사실 치료 방법을 찾아내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 건 의학의 문제다. 중요한 건 무증상 보균자인 메리를 대하는 보건 당국과 사람들의 방식이다. 메리는 자기가 병을 옮기지 않는다면서 보건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이는 보건 당국은 장티푸스 제공자 메리를 체포하고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메리의 대소변과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해보니 그녀는 장티푸스 보균자였다. 메리가 요리사로 일하던 19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는 장티푸스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티푸스에 관한 공포로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그녀는 두려운 대상이었을 터, 언론에서도 그녀를 '인간 장티푸스균'이라고 부르며 선정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얼마 후에는 메리의 실명까지 공개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누군가 학회에서 그녀의 사건을 '장티푸스 메리'라고 부르면서 널리 퍼지기도 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보건 당국은 전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메리를 단속해야 했고, 메리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를 외칠 수 없이 보건 당국의 강제 집행으로 병원에 감금되듯 입원했고, 섬에 있던 병원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장티푸스를 퍼지게 하는 그녀의 감금 같은 입원을 당연하다고 여겼고, 한쪽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주어진 인권을 강탈당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불행은 아무도 해결해주지 못했고, 누구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공중 보건이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냐 하는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없었다.

 

메리는 섬에 있는 병원에서 3년을 갇혀 살았다. 전국에 본명과 사진도 공개되었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보건 당국과 서약을 한다. 요리사 일을 그만둘 것과 그녀의 거취를 항상 보건 당국에 보고할 것. 그렇게 3년 만에 섬에서 나온 메리는 그녀의 천직인 요리사 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면서 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메리가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갔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보건 당국에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것도 멈췄고 자취를 감추기까지 했다. 보건 당국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병원에서 단체로 발생한 장티푸스 때문에 또 한 번 그녀의 인생은 감금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었던 메리는 가명으로 다시 요리사 일을 시작했고, 그녀가 일했던 병원의 사람들이 단체로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섬에 있는 병원에 수감된 메리는 23년 동안, 그녀가 죽을 때까지 섬에서 나오지 못했다.

 

1900년대 초반의 의학은 그 전보다 훨씬 발전했고, 현대 의학이라고 불러도 좋은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의학이 질병이나 의학에 관해 지금보다는 무지했던 시대였을 것이다.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 결과와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녀가 장티푸스 보균자라는 것이 증명되니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그녀가 무증상 보균자라는 이유로 평생 섬에 갇힌 채로 살아가야 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그녀가 공중의 보건을 이유로 격리당해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신상 정보가 만천하에 공개될 이유도 없었다. 실제로 메리 이후에 드러난 무증상 보균자들은 자유를 억압당하지도 않았고, 병원에 감금되지도 않았다. 메리처럼 수십 명의 장티푸스를 일으킨 건강한 남자 보균자들은 보호관찰 처분으로 그만이었다. 그들의 신상정보가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메리가 '최초의 여자 무증상 보균자'였다는 이유로 그녀의 인생이 다른 이들에 의해 이렇게 파괴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그녀에게 '장티푸스 메리'라고, 마녀라고 불렀다. 언론이 씌운 마녀 이미지와 공포에 한 사람의 인생이 본인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망가졌다. 타인에 의해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는 단순하게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던 메리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전염병의 공포를 말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전염병의 보균자였던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의학과 인권 중에서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문제를 꺼내놓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메리는 모두가 자기를 몰래 훔쳐보는 구경거리였다고 말했다. 보건 당국의 조사관 조지 소퍼는 그녀를 살아있는 배양관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질병의 관리와 개인의 인권이 마주하는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할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의학이냐 인권이냐 하는 문제의 답을 꺼내놓을 수가 없다. 질병의 공포를 없애주는(유배시키는) 것을 찬성하면서도, 한 개인의 삶이 공중 보건에 의해 처참히 무너져야 하는지 묻는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메리의 인생을 힘들게 했던 이들, 조사관 조지 소퍼와 조지핀 베이커 박사의 활약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메리를 생각하면 그녀의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을 만든 이들 중 한 사람일 테지만, 공중 보건의 발전과 전염병의 치료에 업적을 쌓은 이들이었다고 생각하면 현대 의학을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이니까 말이다.

 

'장티푸스 메리'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간 게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 계속 물으면서도, 공중 보건과 개인의 인권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그대로 보여주는 메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비극 뒤에서 배경처럼 자리한 여러 가지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약자인 메리에게 씌워진 굴레는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 합세하고 만들어낸 거다. 전염병에 관한 공포와 하층 계급에 대한 혐오, 거기에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반감까지 맞물려 일으킨 재앙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의 무지와 혐오에서 비롯된 이 비극은, 조용히 숨어 있다가 언제 어디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메리의 이야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격리된 병원에서조차 자기 일을 찾아서 했고, 억압된 자유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그녀의 노력은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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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속 남자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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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찾아가는 길. 버니의 등장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악의 근원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소설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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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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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루페니언. 나는 지금 처음 접한 이름이지만, 이미 2017년 인터넷을 통해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출간 계약금만 해도 어마어마했다는 후문.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사람들의 시선에 머물자마자 이슈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이 책의 소문은 총 12편이 실린 이 단편집의 표제작 때문인 듯하다. 물론 다른 작품들 역시 특이하면서도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로 시선을 끌고 있다. 여성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많은 불안한 감정을 꺼내놓기도 했다. 매체에서 접하는 여러 가지 내용이 겹쳐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종종 마주하는 어떤 일들, 감정을 그대로 소설에 옮겨놓은 것만 같다. 어쩌면 읽고 나면 왜 이렇게 비슷한가 싶어 절망에 빠질 수도 있지만, 같은 마음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다.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던 우리와 그 환경, 익숙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확인함으로써 이 시간 이후로는 달라져야 한다는 의지 같은 힘을 실어준다.

 

표제작 「캣퍼슨」의 주인공 마고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대학생이다.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매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매점에 손님으로 온 로버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곧 두 사람은 데이트하고 영화를 본다. 잠깐 술을 마시고, 마고는 로버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간다. 그와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좀 더 진한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에 그와 함께 간 것이지만, 막상 옷을 벗고 있는 로버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식는다. 더는 그와 닿고 싶지 않다. 내키지 않은 그 마음을 로버트에게 설명하고 싶지만, 막상 설명도 잘되지 않을뿐더러 단순한 한 마디로 설명할 수도 없다. 그 상황에서 긴 이야기로 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마고는 자신의 지금 마음을 설명하고 그와의 관계를 그만두는 대신 그와의 섹스에 응한다. 그 후로 그와의 연락을 차단한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일이 잘못된 건 아니다. 상대와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깊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나쁜 게 아니다. 다만, 흔하게 말하는 그 ‘썸’ 이후 변화하는 감정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 다른 것 같다. 마고가 로버트에게 보인 호감이 처음 마음 그대로 머물지 못했을 경우, 솔직하게 원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여성으로 살면서 그런 표현을 얼마나 자유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어렵다. 상대와 마음을 나누면서 시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깊은 관계가 더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을 때 우리가 하는 선택은 뭐든 가능하다. 싫다고 거절하거나, 다른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금 더 만나보거나. 그런데 그 마음을 말하지 못해서 지금 상황을 잘 모면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무섭다. 아마도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발생할지 몰라서 생기는 두려움일 것이다. 상대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돌변해버리는 순간을 상상한다. 물론 그런 상상은 종종 현실에서 그대로 마주하기도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거절과 솔직함을 잘 드러낼 수 없었던 순간의 두려움은.

 

마고가 왜 로버트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지 하는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로는 로버트가 마고의 태도를 오해한 상태라면 화를 낼 수 있다는 것. ‘네가 내 집까지 같이 온 것은 섹스를 하겠다는 거였잖아? 너도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인제 와서 그냥 가겠다고?’ 마고의 마음은 그저 단순하게 로버트와 섹스를 하는 것뿐이었을까? 아니었을 거다. 그와 '마음을 나누면서' 섹스를 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막상 그의 모습을 보고 점점 사라지는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자기 의사 표현을 포기한다. 두 번째로는 공포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마고가 그와의 섹스를 목적으로 그의 집을 방문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순간 로버트가 취할 행동의 공포를 미리 그려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든다. 사람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는 게 현실이기에, 친절하고 다정한 로버트가 마고의 변한 마음을 말하는 순간 폭력적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이런 마음이 단순히 추측으로 머문 게 아니라는 건 이 이야기의 결말에 드러난다. 마치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듯이, 마고에게 원하는 게 없다고 말하면서 욕을 하는 그의 마지막 말은 끔찍했다. 우연히 술집에서 로버트를 본 마고가 왜 그렇게 숨으려고 했는지, 친구들 사이에서 없는 사람처럼 가려져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상상으로만 머물렀으면 하는 일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데이트. 설레고 즐거워야 할 단어인데, 어느 순간 우리는 데이트의 좋은 의미보다는 두려움을 같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일이 생기는 게 비극이다.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던 작품이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이다.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공주는 많은 구혼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 많은 구혼자 중에서도 공주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번번이 구혼자를 거절할 때마다 공주는 비난받았다. 최후의 통첩을 받은 공주는 그다음에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 그럭저럭 결혼생활을 유지하지만, 상대를 사랑할 수 없었던 공주는 그 마음에 병이 들어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깨진 거울로 비치는 자기 얼굴 사랑하는 사람의 다리라고 믿는 넓적다리 뼈. 현실의 강압을 견디지 못한 선택으로 평생 자기 삶의 행복을 모르고 살아온 여성의 세월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 마지막에 보이는 공주의 모습은 반전처럼 보인다. 가장 악하고 독한 사람이 되어 결국 자기 삶을 찾고야 말았으니. 왜 여성은 악녀라고 불려야만 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걸까?

 

사람을 무는 여자가 주인공인 「무는 여자」는 얼핏 무서우면서도 시원시원하고, 「정어리」는 딸이 생일에 비는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어쩌면 말로 감정을 다 표현하지 못한 엄마의 갈증을 대신 풀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바라본 세상의 못된 모습을 만드는 인간들을 벌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은근히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 사람의 묘한 관계를 그리는 「나쁜 아이」는 종속관계로 물들어가는 인간관계가 또 다른 모습으로 흐트러지는 과정을 그린다.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운데, 뭔가 자기가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다른 이를 대하는 자세가 바뀌는 건 아닐까 하는, 세상의 나쁜 습성을 보는 것만 같았다

 

「룩 앳 유어 게임, 걸」은 표제작 「캣퍼슨」의 분위기를 이어가는 듯하다. 열두 살 소녀 제시카는 공원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제시카에게 희대의 범죄자 찰스 맨슨의 노래를 들려주고 밤에 자기를 만나러 공원으로 오라고 한다. 제시카는 거절하지만, 계속 그 남자의 제안을 생각한다. 그러다 끝내 그 남자에게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음 날, 이웃집의 제시카 또래의 소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만난 사람과 관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웃집의 소녀가 당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혹시 자신에게 닥치지 않았을까? 그날 공원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잊히지 않아서 제시카는 경찰에 제보하고 몽타주까지 확인한다. 나중에서야 범인이 잡힌다. 제시카가 공원에서 만난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공원에서 만난 남자와 이웃집 소녀의 납치 사건은 제시카의 인생에 평생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그때 그녀 나이인 자녀들까지 두었으며 캘리포니아를 떠나 멀리 옮겨 온 이후로도 제시카는 오랫동안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쌍둥이 딸들이 그녀의 침실 옆방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동안 그녀는 창가에 서서 점점이 빛나는 무섭고 광활한 밤을 바라보면서, 문득문득 찰리가 아직도 그곳 공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79페이지 「룩 앳 유어 게임, 걸」)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아주 작은 순간이기도 하다. 한 남자를 만났거나, 어떤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나,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선택을 했을 때나... 이 책에 실린 단편 모두가 개성 있고 의미 있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자기 뜻과는 다르게 약자의 삶이 되어버린 순간이 인상적이다. 데이트 상대에게 겁을 먹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연히 만난 남자의 한 마디에 편안한 보행 한번 어려워졌으며,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악녀가 되어버리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불편하면서 기억에 남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강요되는 사회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절망스럽기도 하고, 그렇기에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이 반갑기도 하다.

 

 

제각각 자기 매력을 과시하는 12편의 이야기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현실에서 자주 보던 상황들부터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들, 인간 세계가 아닌 이야기들,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 소재나 설정이 끝까지 그 분위기를 이끌어가고야 마는 작품들이다. 입소문을 타고 그 진가를 발휘한 표제작부터 길고 짧은 다른 작품들까지 한꺼번에 만나는 재미가 있다. 어떤 작품은 너무 잘 이해가 돼서 계속 공감했고 어떤 작품은 좀 난해해서 제대로 소화를 못하기도 했지만, 다음에 어떤 작품으로 만날지 기대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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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하다
선현경 지음, 이우일 그림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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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삶을 부러워한 적은 없다. 그러면서도 잠깐씩 외출하는 기분으로 다니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짧은 시간의 여행은 기분전환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이 부부의 여행기가 낯설면서도 살짝 부러우면서도 놀랍기만 하다. 몇 주 몇 달이 아닌 몇 년의 시간을, 아주 이주한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행복을 주는지 궁금했다. 부러움은 잠시 넣어두고, 타지에서 이방인으로의 삶이 이 부부의 인생에 무엇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이우일이 쓴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을 안다. 읽어보진 않았다. 그 책의 분위기 정도를 파악했을 뿐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이어진 이번 책은 이우일의 아내 선현경이 썼다. 부부는 포틀랜드와 하와이의 시간을 이렇게 두 권의 책을 쓰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의 여행 계획에 책을 쓰는 일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일상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책으로 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오랜 시간 그리고 써왔던 그들이기에 가능한 거 아닐까? (이 부분에서 잠시 또 부러움을 꺼내 본다. 일상의 기록이 한 권의 책이 되고, 여행이라고 부르지만 잊히지 않을 추억의 한순간으로 깊게 새길 수 있었다는 거 말이다.)

 

그들의 하와이 입성 이후 하나하나 들려오는 정착기가 눈물 난다. 그들의 신혼여행도 그랬겠지만,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딘가로 간다는 게 무턱대고 겁이 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와이로 가기 전 그들이 머물렀던 포틀랜드의 시간도 적응보다는 즐기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행자가 익숙한 그들이 하와이에 갔다고 해서 겁날 게 뭐가 있을까. 전과 다른 점이라면 여기서는 그들의 이동수단도 마련해야 했고, 파도에 몸을 맡기며 보드도 타야 했다는 거? ^^ 중고 직거래로 BMW 산 것은 눈물겹다. 오래됐지만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그 차가 여러 가지 고장을 드러내며 신고식을 했을 때, 팔 때는 친절하던 판매자가 이런저런 구매 후기 불만을 토로했을 때는 답변조차 하지 않을 때. 한국이나 미국이나 개인 간의 거래는 비슷한 후기를 만들 수도 있구나 했다. 그래도 나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자동차 수리점의 좋은 사람을 만나 어느 정도 고치고 사용하면서 돈 낭비를 안 하게 된 것도 하와이에서의 좋은 기억이리라.

 

계획했던 일정보다 더 늘어난 이 부부의 하와이 생활에 특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건 보디보드인데, 물을 무서워하는 내가 상상하면서 읽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 해변 근처에서 발을 담그기도 무서운데, 그곳에서 파도를 타면서 즐기는 스포츠는 어떤 즐거움을 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우일의 보드 사랑이야 이미 저자가 말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물을 즐기기 않는 것처럼 보였던 저자도 슬금슬금 그 파도타기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얼마나 좋았으면 잠깐 한국에 다녀가면서 지하실에 넣어두었던 보드를 가지고 갔겠는가. 수영복 자국 그대로 무슨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부부가 해변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다. 좋았으니까 그리했겠지. 싫어했다면 잠깐의 파도 구경으로 끝날 일일 테니까. 얼마나 좋았으면 이 해변 저 해변 투어 하듯이 찾아다니면서 보드를 즐겼을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 빠져든 파도타기는 그들의 일상을 좀 더 열정적으로 만든다. 그 파도 때문에 한국으로의 귀국 일정을 석 달이나 미루었을 정도면 알만하지 않은가. 그게 나빠 보이지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직업 특성상 오랜 시간 여행자로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석 달쯤 귀국 일정을 미룬다고 크게 어긋날 일이 없었을 테지만, 좋아하는 파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시기와 그걸 즐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을 알 것도 같아서다. 누구든 그런 거 하나쯤 있지 않을까? 이거 하나만은 꼭 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거 말이다.

 

파도를 타다 보면 엄청난 파도의 힘에 저절로 왜소함을 느낀다. 이 많은 사람들을 다 함께 들었다 놨다 하는 파도에게서 거대한 힘을 느낀다. 그리고 겸허해진다. 바다에게 잘 보이고 싶어진다. 바다에게 슬쩍 고마움과 함께 인사를 건네게 된다. (92페이지)

 

 

머무는 시간이 긴 만큼 일상의 다양함도 늘어났다. 저자는 코바늘 강좌에 가기도 하면서 그곳의 나이 든 사람들과 그곳의 분위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머무는 기간으로 따지면 여전히 이방인이고 여행자일 뿐이지만, 현지인의 삶을 이렇게 가까이서 오랫동안 흡수하기도 쉽지 않을 일이다. 우쿨렐레를 배우고, 훌라댄스에 몸을 맡기고, 맑은 공기에 푸른 바다에 눈을 뗄 수 없는 그곳이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하다. 파도를 타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맨발에 슬리퍼가 일상인 생활이 얼마나 편안함을 주었을지 상상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계산대 앞에 손님을 두고 직원끼리 잡담하면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모습, 한국에서라면 어땠을지 상상이 되는가? 그런 긴장된 상황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며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걷는 곳이 하와이였다. 그런 생활에, 모든 것을 빠르고 급하게 해결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곳의 삶이 잠시 잊히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느림의 순간이 자주 찾아와야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타지에서 지내는 것이 서울의 생활과 가장 다른 점은 유통기한이 있다는 점이다. 언젠가 끝이 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실 늘 우린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일흔 살의 생일을 맞는 엄마의 웃는 얼굴도, 나보다 작은 꼬맹이 딸과의 포옹도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순간들이다. 이곳에 살아보겠다고 왔을 때의 낯설음도, 2019년의 이곳 바다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302페이지)

 

저자의 솔직한 일상을 적은 문장에 이우일의 재밌는 그림까지 더해져, 여행기로의 가벼움과 즐거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이다. 이 책이 여행 노하우나 안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어서 서운할 사람 있을까? 여행 가이드북은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 않은가. 저자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런 이야기 괜히 느긋해지고 편안해져서 읽기 좋았다. 여전히 나는 떠나는 일에 귀찮아하고 낯선 곳의 불편함이 싫어서 여행을 자주 즐기고 싶은 인간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주는 그 느낌은 계속 만나고 싶다. 포르투갈어 ‘창문하다(janealar)’에서 힌트를 얻어 새롭게 탄생한 말이라는 '하와이하다'는, 창문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의 ‘창문하다’처럼, 하와이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생각한다는 의미를 그대로 전달한다. 읽는 내내 여행과 일상 그 사이 어디쯤을 만나고 있는 기분에 많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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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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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밥상 위의 고기반찬도 밑으로 슬쩍 내려놓으면서 숨기셨는데, 염병에 걸려 죽었다던 동석이네 할머니는 67년 만에 나타나서 60억을 나눠주겠단다. 부럽다. 배가 많이 아프다. 평생 할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큰돈을 상속하겠다는 할머니라면, 나는 이 할머니의 67년 인생을 한번 들어나 보자고 할 것 같다. '할매, 어쩌다가 그 큰돈을 손에 쥐게 되셨수?'

 

외모부터 수상한 이 할머니, 정끝순. 10년 넘게 취업준비생 신분으로 살던 동석은 어느 날 나타난 할머니의 존재가 딱히 거북스럽지는 않다. 이러나저러나 집에서 없는 사람 취급당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집안의 종손이라고 미래를 걱정해주면서 이런저런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할머니가 새삼 가족 같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석의 입장이고, 동석의 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았던 배신자를 눈앞에 둔 분노에 휩싸이고, 동석의 아버지와 고모는 평생 엄마를 모르고 살았던 시절을 돌이키며 서러워한다. 갑자기 나타난 시어머니 때문에 어느 줄에 서야 하나 망설이던 동석의 엄마는 할머니의 60억 재산 소식에 냉큼 큰절을 올린다.

 

남편을 배신하고 떠난 아내, 어린 자식들을 두고 소식 한 번 묻지 않은 엄마, 가문에 먹칠하고 다른 남자랑 눈이 맞아 떠나버린 여자로 기억되는 정끝순은 등장 자체가 조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할아버지에게는 독립운동하는 이들을 밀고한 배신자로 기억되는 이였고, 아버지와 고모에게는 모성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미였고, 뼈대 있는 가문인 최씨 문중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몹쓸 년이었을 테니. 게다가 그 집안의 하녀였던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어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을 텐데, 어쩌다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사연은 뒤로하고 일본놈과 눈이 맞아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을 테다. 할아버지는 온갖 험한 말로 할머니를 욕하고 폭력까지 쓰지만, 할머니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뜯겨나가도 표정이 없다. 하거나 말거나. 자기가 이 집에 나타난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듯이. 그러면 이쯤 해서 궁금해질 것이다. 할머니는 왜 갑자기 67년 만에 나타나서 이 집안을 시끄럽게 하는 것일까? 단지 후손들에게 60억을 물려주기 위해서? 긴긴 세월 타지에서 홀로 외로움에 떨다가 지쳐서? 혹시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아서 용서라도 받으려고?

 

 

소설의 재미는 가족들이 할머니의 60억에 눈독을 들이면서부터 시작된다.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는 정치 자금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이미 가진 게 많은 고모조차도 뭔가 더 얻어낼 게 있을까 하는 욕심으로, 장기 취업준비생 동석은 할머니가 먼저 제시한 사업 자금 때문에 할머니의 편에 선다. 할아버지의 거친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구들이 돈 때문에 자기에게 알랑방귀를 뀐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는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 집안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60억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며 요절복통 최씨 집안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 할머니 은근히 화통하다. 누군가의 공격도 거뜬히 받아내며 상대를 제압한다. 말로 이길 수 있는 자 없을 것이다. 원래 이런 성격이어서 타지에서 거뜬히 살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 집을 찾아왔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에게 드러나지 않은 뭔가를 찾게 된다. 왜. 왜 할머니는 67년의 세월을 보내고 이 시점에 나타났느냔 말이다.

 

가족들의 60억 쟁탈전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돈 앞에서 냉정해질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나와 봐라.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돈이 간절한 이들이다. 미련을 못 버린 정치도 해야 하고, 번번이 낙방하는 취업을 접고 사업이라도 해야 장손의 얼굴이 서고, 이혼하고 건물 하나 받아왔지만 그것마저도 위태롭고, 하락세를 걷는 구멍가게 수준의 슈퍼마켓 수입도 불안한 이들에게 하나같이 돈이 필요하다. 거기에 고모네 식구까지 붙었으니 이 경쟁률 대입 수능시험보다 더 센 게 아닌가 싶다. 60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궁금했던 마음은, 이제 누가 할머니 마음에 들어서 할머니의 입맛대로 나뉘는 유산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무조건 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된다. 할머니의 변덕에도 태연해야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뻥을 치는 할머니의 사연과 유산에도 무던해져야 한다.

 

한편의 유쾌한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돈을 들고 나타난 할머니, 그 할머니의 돈을 차지하기 위해 할머니 눈에 들려고 발악하는 가족들. 할머니의 돈주머니는 쉽게 열리지 않고, 도대체 이 할머니가 정말 60억을 가졌는지조차 의심이 되는 상황에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그놈의 돈. 하지만 소설의 의미는 돈도 아니고, 유산 상속도 아니다. 갑자기 돌아온 할머니의 진짜 마음을 찾는 데 있다. 할머니가 진짜 60억이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할머니가 왜 해방 직전에 도망치듯 떠나가야 했는지, 타국에서 67년의 세월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듣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이 소설은 처음부터 할머니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감질나게 조금씩, 할머니의 사연이 혹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온갖 추측을 하게 만들면서도 진짜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는다. 마치 한 번 맞춰보라는 듯이 말이다. 은근히 미스터리하게 풀어가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돈을 중심으로 가족들이 보이는 표정과 태도의 변화 또한 놓치지 않는다. 각자 다들 돈에 목말라 있었으니, 어찌 돈을 돈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할머니에게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그 돈으로 이 지겨운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리. 뭐 이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동상이몽. 같은 시간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꿈을 꾸듯, 정끝순 할머니와 식구들의 60억 배 도전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된다. 그 틈틈이 할머니의 과거를 캐내려는 이들과 할머니의 사연을 들으려는 이들과 할머니와 화해하려는 이들의 눈물 어린 이야기가 섞인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역사 속 할머니의 인생이, 대물림하는 폭력의 역사를 쓰던 이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 엉킨 실이 풀리듯 하나하나 풀리는 이야기에 그들의 인생이 다시 보인다. 지난 역사에 희생당하듯 배신자의 누명을 쓴 할머니의 눈물이, 한때 사랑으로 행복했던 사람들 사이에 어느 순간 자리한 폭력의 시작, 20세기 중반에 세상을 살아가던 여자의 기구한 삶이 있었다. 그 삶의 보상이라도 받듯, 어긋나고 뒤틀렸던 인생의 한 부분을 되돌려놓기 위해 67년을 돌아온 할머니의 강한 의지가 다시 보인다. 그저 돈으로 권력을 휘두르려는 한 노인의 발악은 아니었다.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이 있었던 거다. 돈도 뭣도 의미가 없어진 세월의 끝자락에, 반드시 찾아야 할 그것을 위해 할머니는 그 먼 시간을 돌아서 우리 앞에 왔다. 누군가 숨죽이면서 하지 못한 말을 오랫동안 참았다가 쏟아놓은 느낌이다.

 

2012년 이미 초판 출간 당시에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의 판권이 모두 팔린 소설이라고 한다. 팔릴 만하다. 독특한 할머니 캐릭터에 주변 인물들 하나같이 그 독특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어떤 장면을 연상하면서 읽게 된다. 저절로 드라마나 영화를 상상하면서 읽게 된다. 물론 코미디여야 할 것이다. 웃음이 빠질 수 없는 이야기니까. ^^ 물론 눈물도 놓치면 안 된다. 서글픈 한 인생의 역사를 듣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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