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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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소설이니까 가능한 설정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 말이다. 인생의 절묘한 순간에 나타나 나를 옳은 길로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나이에 미래에서 온 자식 같은 건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내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기만 했던 소중한 순간과 기회를 지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게.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으로 곧 세상과 이별할 아들이 눈앞에 있다. 다쿠미와 아내는 그 아들의 운명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도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그러다가 혼수상태처럼 빠져있는 아들 도키오의 모습을 보면서 다쿠미는 아내에게 오래전 이야기를 꺼낸다.

 

스물 세 살의 다쿠미. 오래 일하지도 못하고, 남들과 타협하며 살아갈 줄도 모른다. 그러니 인생은 언제나 어긋난 것처럼 여기게 되고, 항상 세상을 탓했다. 언제나 '큰 거 한 방'을 노래하며 인생이 뒤바뀔 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다. 일확천금은 말 그대로 우연히 찾아오는 어느 순간일 테다. 지금 다쿠미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과 노력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는 오늘도 홧김에 일을 그만둔다. 그때 그의 앞에 나타난 도키오. 어디에서 온 청년인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 다쿠미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뿐. 자연스럽게 곁을 맴돌며 도키오는 다쿠미의 일상에 스며든다. 그러다가 다쿠미의 애인 지즈루가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도키오와 다쿠미는 사라진 지즈루를 찾으러 다닌다.

 

두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찾아다니는 로드무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움만 전하지는 않는다. 다쿠미와 도키오와 다니는 그 길의 그 모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 그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고 이어져 왔는지 찾아다니는 여정이었으니까. 현재의 다쿠미는 그의 아내가 희귀병을 유전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그 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아내를 설득 시켜 결혼에 이르고,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낳기에 이른 건 모두 과거의 어느 시점에 도키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 아들이 과거의 나에게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다쿠미 부부는 믿는다. 지금 뇌신경이 죽어가면서 누워있는 이 아이라면, 분명 아버지의 흐트러진 청춘을 바로 잡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렇게 과거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 현재에 이른 이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으면서도, 혹시 나에게도 와줄 수 있는 기적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동시에 생긴다. 미래에서 온 나의 아이가, 지금의 내가 잘못 사는 것을 자꾸만 멈추게 하려고 애쓰는 일.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어서 거추장스럽고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서서히 녹아들고 동화되어 이 아이가 하는 말들에 저절로 신뢰가 생길 때 어떤 마음일까 싶다. 자꾸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든 내 인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때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방향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믿어도 좋겠지. 상대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종종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아주 먼 훗날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역시 눈앞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한 거겠지.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396페이지)

 

읽다 보면 얼핏 장르가 궁금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걸 보면 판타지답기도 하고, 다쿠미와 도키오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를 보면 감동 드라마 같기도 하다. 자기를 떠난 애인을 찾아 헤매는 걸 보면 연애소설 같기도 하지만, 지즈루와 함께 떠난 오카베를 찾기까지의 과정과 이유를 보면 추리소설 같기도 하다. 결국은 이 모든 조각이 모여 완성해가는, 한 사람이 인간다움과 세상을 배우며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별을 앞둔 아버지와 아들의 기적 같은 시간 여행에 독자가 편승해, 오늘을 사는 이유를 묻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래가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오늘 이 순간도 미래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삶의 한 조각이면서, 우리의 행복을 그리는 시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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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이동기 영어 실전동형 모의고사 Vol.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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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선재국어 한 권으로 정리하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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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딱 여동생만큼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생활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던 여동생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 그런 생각을 할 거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시’자 붙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시월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며느리의 고통 영역이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미 영화에서 보여준 김진영과 시어머니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면서 살아가기에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그 결혼생활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 고부가 보여준 것이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런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고 읽는다)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누가 봐도 ‘감히’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라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충돌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찾게 되더라.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온 부모님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173페이지)

 

행복해지자고 결혼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차곡차곡 만들어갈 하나의 가정을 상상하고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으로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개입으로 전쟁터가 됐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모두 상처 입고 나뒹굴어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전쟁의 시작이 ‘간섭’과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같을 말을 오랫동안 해왔다. ‘간섭’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의 차이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내가 건네는 게 관심이어도 상대가 받아들일 때 간섭이라고 느끼면 그건 간섭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이 상대가 부담스럽고 과하다고 여기면 불편해진다. 그럼 나에게서 나간 관심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꾸어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게 시월드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며느리 김진영은 남편 선호빈과 함께 두 사람이 주축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두 사람은 부모의 관심 안에 있었고, 부모는 그런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 계속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며느리의 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거로 보인다. 한번 시작된 김치 건네기는 언제나 싸움과 분노의 발단이 되었고, 며느리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집안의 화장대 위치까지도 간섭하며 계속 말하는 것이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며느리 삶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며느리로 살아가는 부조리함을 말하는 게 이 책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앞서 만난 몇 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라떼’를 마시면서 강요하는 과거 여성의 삶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 때는 말이야... 시월드의 모든 말에 복종하고 며느리는 그 집안의 하녀처럼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언급하고 강요하면서 따라주지 않는 며느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왜 그 시대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잘못된 건데, 왜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갈등의 발단이 되어 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영화 〈B급 며느리〉보고 거의 두 가지 평을 내놓는다. 저런 며느리 얻으면 큰일 나겠다, 아니면 저런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거다, 뭐 이런 비슷한 의미의 말들을 꺼낸다. 사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이 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니, 영화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하지만 왜 그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그 시작을 찾고 싶었는데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그냥 인간 김진영으로 살다가 선호빈의 아내 김진영이라는 호칭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낯설고 힘들어졌다. 그녀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머물기를 바라는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없애고자,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말들은 ‘B'급으로 취급받았다. 싸우고, 절연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분노의 찌꺼기는 남아있고.

 

막장드라마만 암 유발하는 건 아닌 듯하다. 며느리와 시월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구마 한 박스 그냥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하다. 우리 엄마와 나의 올케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싶다. 엄마에게도 ‘시’자의 냄새가 풍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조금 다독거린다. 엄마에게도 딸이 다섯이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괜히 친해지려고 애쓰고,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레 질려 나가떨어진다고.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전화하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이 전화 타령하지 말고 용건 있을 때 통화하면 되는 것이라고. 적당한 관심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적당한 선을 넘는 간섭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니 조금만 무관심해지라고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의 시어머니를 보면서 느낀 건, 아들 며느리에게 관심을 넘어선 집착에 스스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당신이 돌봐주면서 길렀던 아들의 모습으로만 뿌리박혀 있으니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자기를 가두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무리하면 탈이 난다. 마음이 넘쳐도 탈이 난다.

 

과연 중간이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난 게 아닌 것 같다. 각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성숙한 관계는 ‘나를 위해 네가 변해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서서히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젖어들듯이 말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238페이지)

 

읽을수록 짠하다. 그러면서도 시원하다. 며느리니까 참아야 하는 건 없다. 하고 싶은 말 담아두기만 할 이유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 어우러진 가족이 된 일원으로 서로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투쟁하듯 이뤄낸 현재의 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진 관계의 모습을 보니 이 투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며느리 이미지가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리’라고 하면서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서로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면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일이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웹툰이나 후속작으로 그 후의 이야기까지 읽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도 다시 보게 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현실 속 이야기들이라 생생하고 또 생생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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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요? 우앗... 저는 보기도 전부터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네요.

모든 시어머니들이 ‘나는 달라, 나는 좋은 시어머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 포함해서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봤자 엄마는 시어머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단씨 님이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갈등을 일으켜야만 하는건지, 우리는 그 시작을 찾아서 부숴버려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구단씨 2020-05-13 14:04   좋아요 0 | URL
20분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답니다.
방송하게 될지 웹드라마로 보여줄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사이다 캔맥주 한잔 가져다 놓고 보고 싶은 드라마여서 기다릴 겁니다요. ^^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남자 사람 포함해서요. 남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해요.
˝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네 엄마가 더 그러더라, 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실제로 저희 엄마도 아들 며느리 있는데요. 똑같이 말씀하세요. ˝나는 안 그래, 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자꾸 말씀드리죠.
엄마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딸 가진 엄마니까 며느리 마음 많이 헤아려주시라고요.

 
룬샷 - 전쟁, 질병, 불황의 위기를 승리로 이끄는 설계의 힘
사피 바칼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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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의 진화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 통화만 하던 전화가 영상 통화가 되고, 손안의 작은 휴대폰 하나로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아직도 가끔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는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스마트한 세상에 살고 있고, 이 스마트한 세상을 만든 많은 순간이 룬샷이 아니었을까 싶다. 낯설고 생소한 그 단어, 룬샷(Loonshots)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발상으로 여겼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기에 생긴 말이다. 신조어이지만 사전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어이면서, 우리 미래에도 꾸준히 영향을 미칠 승리의 바탕이 될 것이다.

 

효율과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게 기존 이론이라면, 룬샷은 쓸모없는 발상으로 여기던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중점에 두고 발전시키며 성장을 이끄는 방법을 제시한다. 세계사에 한 획은 그은 많은 일이 이 방식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심장질환 사망률을 감소시킨 건, 미생물학자인 엔도 아키라가 청록색 곰팡이에서 발견한 약물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작용 때문에 일본에서 외면받았던 약물이 제약회사 머크가 가능성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출시했다. 머크가 돈을 벌게 된 건 당연했다. 누군가는 미친 아이디어라고, 위험하다고 치료 가능성을 아예 무시했던 게 누군가는 성공의 기회가 된 셈이다. 도대체 그 미친 아이디어를 본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 룬샷의 가장 쉬운 설명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들려주는 노키아의 예다. 무선 전화 시장을 개척한 노키아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키아 엔지니어 몇몇이 새로운 종류의 전화기를 만들었을 때, 기업의 지도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모두 깔끔히 묻어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가 뭐였냐고? 인터넷이 가능하고 커다란 터치스크린에 고해상도 카메라가 달린, 온라인 앱스토어가 함께하는 휴대폰이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휴대폰 말이다. 눈앞에서 성공과 돈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아이고, 사촌이 좋은 땅을 헐값에 산 것보다 더 배가 아프다. 그 땅을 내가 팔았으니...

 

균형과 소통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내부의 장벽을 극복하게 도와줄 손길이 필요하다. 어느 모세의 보좌진의 손길이 아니라,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 아이디어가 이전되는 데 힘을 너무 받거나(추상같은 명령) 힘이 부족하면(아무 지원 없음), 유망한 아이디어와 기술도 실험실에서 썩게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은 그 기술을 상실하고, 시간과의 싸움에서 질 것이며, 그 기술을 발명한 사람의 충성심을 잃게 된다. 핵심 인재는 회사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267페이지)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발상의 전환과 가능성을 믿는 것. 성공한 룬샷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런 눈을 가지지 않았을까. 지금 눈앞의 것만 보고 투자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략적인 상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를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룬샷의 성공 사례와 특징을 살펴보면 많은 이론이 바탕에 있고, 발견과 노력, '상전이(모든 것이 변화하는 순간)'에 있다. 모든 상전이는 경쟁하는 두 힘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보통은 두 가지 형태의 인센티브가 생기는데, 대략 '판돈'과 '지위' 정도가 된다. 이 상전이의 원리는 더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구조의 변화로 조직을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안정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익숙한 패턴만 바라보던 것이 좋은 것만을 아니라는 것을 상기한다.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것은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고자 한다면 아이디어는 넘쳐야 한다. 그 아이디어를 찾는 눈을 길러야 하고 발전시키고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의 길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룬샷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결과가 아닌 앞으로 마주할 결과를 더 집중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버니바 부시의 레이더는 전쟁 영웅이 아니었나 싶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심장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며 약을 만든 엔도 아키라 박사는 오늘날 심혈관질환 환자들에게 고마운 사람일 터. 디지털카메라의 발상이 의미 없다고 여겼던 폴라로이드 사의 몰락 역시 당장의 현상만 봤기 때문일 것이다. 룬샷을 무시해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도 위험하다. 누군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발견되고 발전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룬샷과 프랜차이즈(룬샷으로 탄생한 제품의 후속작 또는 업데이트 버전)는 서로가 필요하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계속되는 발전과 성장을 가져올 것이다. 룬샷 역시 제품형 룬샷과 전략형 룬샷의 균형에 귀를 기울인다. 기본적인 제품의 안정성과 기술 개발의 가능성에 '미친 아이디어'가 함께했을 때 룬샷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고 자본의 안정성을 갖춘 기업이라도 중요한 타이밍의 룬샷을 놓친다면 그 결과는 뭐, 추락이겠지.

 

천재 기업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발명품을 가지고 건설한 제국이 오랫동안 건재하면 그를 둘러싼 신화가 널리 퍼진다. 그러나 정말로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 '우연의 설계자들'은 그보다 덜 화려한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어느 한 룬샷을 열렬히 지지하기보다는 많은 룬샷을 육성할 수 있는 뛰어난 구조를 만든다. 그들은 예지력 있는 혁신가라기보다 세심한 정원사에 가깝다. 그들은 룬샷과 프랜차이즈 양쪽을 모두 잘 돌보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키고 지원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79페이지)

 

기업의 입장에서 룬샷을 잡지 못한다면 망하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조금 더 크게 보자면 국가의 위상이 걸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서구 사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발견하고 이뤄놓은 기술이 다양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에게 사용되고 기억되는 과학적인 발전은 서양에서 일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이와 인쇄술, 자기나침반, 화약, 대포, 주철, 지폐 등 중국이 먼저인 것들이다. 중국은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발전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 발전을 세계로 돌리지 못했다. 그건 중국이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서 베이징, 만리장성, 대운하 등 프랜차이즈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너무 성장한 나라였기에, 중국의 지도자들은 미친 아이디어에 더는 관심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자연법칙'이 만들어낸 보다 정교한 기술, 새로운 생각들을 '과학적 방법'이라는 더 현대적인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의 발전에 바탕이 된다.

 

그저 우연히 발견된 것에서 멈추지 말아야 성공한 룬샷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룬샷 육성을 위한 설계가 중요하다. 저자는 5가지 원칙을 내세워 룬샷의 성공을 말한다. 대부분 회의적이고 불확실한,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기록 긴 시간을 이겨낼 것. 무엇이 문제인지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는 가짜 실패에 속지 말 것. 실패의 이면을 파고들어 결과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낸 의사결정의 질을 생각할 것. 룬샷을 폭발하는 조직의 시스템을 만들 것. 룬샷을 만드는 것보다 룬샷을 육성하는 정원사가 될 것. 모든 요소, 룬샷으로 성공과 실패를 이끈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룬샷을 육성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미친 아이디어는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발견과 성공시킨 그 이후가 진정한 결과물이다. 아이디어 하나가 얼마나 뻗어 나갈 수 있는지,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은 개인, 팀이나 기업, 아울러 한 나라의 통찰력과 노력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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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08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한테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 사람 많을 것 같습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사람 많았겠지요 반대로 다른 사람이 관심 갖지 않은 걸 잘 알아본 사람도 많았겠습니다 바로 앞보다는 멀리 내다봐야겠지요 중국이 먼저 만든 것들이 세계로 뻗어가지 못하다니 아쉽군요 세계가 서양 중심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는 좀 다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걸 누군가는 잡고 누군가는 놓치겠지요


희선

구단씨 2020-05-13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그런 눈을 갖고 싶어요. 기발함을 알아보는,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눈. ^^
익숙한 것이 편하고 오리지널이 주는 슬기로움이 있겠지만,
세상은 계속 진화하고 있고 인간은 또 그 변화에 어울리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