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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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 묻거나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 듯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어느 화두를 중심에 두고 모여 있을 때도, 세상살이 고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생각해왔다. 어쩌면 살아가는 일에 ‘왜’라는 의문 자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일까? 살아간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이유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살아가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얘기해왔던 게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더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어려울 거로 생각하지 못했고, 사실은 그 이해를 반드시 해야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어떤 것, 누구나 살아가는 이유나 방식이 똑같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나 할까.

 

내가 존재한다. 다른 사람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 나는 공원을 뛰어다니거나 언덕마루로 올라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동생의 삶에 내가 있었어! 중요한 존재였단 말이야, 개새끼들아! (225~226페이지)

 

한국에서 입양된 헬렌은 오래전에 양부모의 집을 떠나 뉴욕에서 산다. 양부모의 집에 남아 있던, 입양아인 남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녀는 양부모의 집으로 향한다. 솔직히 헬렌의 방향이 의외였다. 나는 그녀가 남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무심할 거로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의 성격이 냉정하다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떠난 양부모의 집, 그 후로 연락 한번 한 적이 없는 그녀가 남동생이 죽었다고, 그것도 입양된 아이의 죽음에 그렇게 쉽게 마음이 흔들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굳이 양부모의 집으로 향하려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남동생의 죽음에 양부모의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 왜 고요하던 그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는 시도가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건 아닐 거라고.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것만큼 따라오지 않았다. 헬렌이 마주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과 그동안 부정적인 마음으로 자리했던 양부모의 모습이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였다. 넓지만 으스스한 유령의 집 같은 느낌.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했던 벌레들과 칙칙함. 검소하다 못해 자린고비 같은 양부모의 성향에 딱 맞는 집의 분위기가 여전한 그 집에서 얼마나 머물 수 있을까 싶었지만, 헬렌은 남동생의 죽음을 밝히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단서를 하나씩 추적하면서 서른 즈음에 다다른 한 남자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그녀가 알고 있었지만 몰랐을 남동생의 모습을 하나씩 마주할 때마다 더 혼란에 빠진다.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지내왔던 걸까. 그렇게나 그곳을 떠나고 싶었던 그녀와는 달리 남동생은 그곳밖에 머물 곳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 스스로 밖으로 나와 활발한 인생을 살아가지도 못했다. 고여 있는 물처럼, 그곳에서 머문 온갖 벌레들처럼, 그 집의 방 한 칸을 벗어나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 쉽게 이해가 될 리 없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된 탐정 놀이는 의외의 과정과 결말을 맞이하면서 정리되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어느 날 마주한 진실 앞에서 드는 이런 생각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사람은 누구였지?’ 싶은 놀라움 같은 거. 그때마다 더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안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기어코 찾아낼 거로 믿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렇게 흐지부지, 그 이유로 모른 채로 잊히는 게 읽는 나도 싫었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멀리 보내지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까지 받아오면서 자랐을 한 인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 이유조차 모른다면 그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니 온전하게 보내주기 위해서라도 그 죽음의 시작과 끝을 찾아내야 했다. 그 임무를 헬렌이 수행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헬렌 역시 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언가 알지 못했던, 모른 채로 흘러왔던 남동생의 이야기가 조각을 맞춰가면서 더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동안 다 안다고 믿어왔던 남동생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좌절하는 시기에 윤리의 나침반은 흔들릴 수 있으며, 사실 극단적으로 윤리적 자세가 바뀔 수도 있다. 윤리적 자세는 콘크리트 안에 고정돼서는 안 되며, 가끔은 윤리의 나침반을 흔들 필요가 있고, 때로는 파괴해야만 한다. (165페이지)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삶을 알아간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한 실패한 삶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 그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한 삶이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듯, PC 휴지통 폴더에서 꺼낸 편지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양부모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했다. 뿌리를 찾고 싶던 그는 한국의 어머니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하지 못한 삶은 여전했으며, 그는 그 자체로 자기 인생의 만족을 느끼며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불행하지 않았다. 쓸모 있는 인간으로 남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삶을 온전히 이루고 떠났다. 그가 가장 바라는 삶이었고, 그가 이룬 삶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헬렌은 남동생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싸우듯이 얻어낸 삶의 평온은 사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삶의 완전함과 평온을 위해 투쟁하듯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누구도 삶의 그 불완전함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평온을 얻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가 가진 불안을 장착한 채로, 그녀가 애쓰면서 얻으려고 했던 평온을 내려놓으니, 그때 비로소 남동생의 삶이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준비하면서 얻은 죽음이야말로 어른의 선택이라고 믿은 남동생의 방식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불완전하고 지속하는 삶을 마주할 뿐이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이 있기도 했겠지만, 완전하게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실제에 바탕이 된 감정이 더 큰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느 순간의 기억이 기어코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게 만들었을지도, 그 순간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꺼내야 인생의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남동생 삶의 재구성을 완결할 수 없던 헬렌의 시도는 그렇게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말이 아니라 어떤 마음을 꺼내놓는 것 자체였을 테니. 남동생의 죽음으로 헤집어놓은 그의 평온을 이제 다시 다독여주리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이 사실은 아무 의미가 아닌 채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고. 그에게는 아름답다고 여긴 그의 삶이 존재했으며 사랑했다. 그것뿐이다. 그가 받아들이고, 이어왔으며, 만족했고, 스스로 꾸렸을 그 삶이 거기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미안해요'는 내가 사과를 할 때 쓰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늘 이 말을 썼는데, 사람마다 아주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사과 말이다. 미안해요, 제 실수예요, 라는 뜻일 수도 있다. 내가 널 망쳐주겠어, 나쁜 년, 이런 듯을 수도 있다. (11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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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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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까운 곳에 박물관이 생겼다. 기존에 박물관 비슷한 전시실 정도로 운영하던 곳에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한 거다. 조금씩, 그 시대의 유물과 생활 흔적을 마주하는 기분은 묘했다. '저걸로 고기를 잘랐다고? 이런 옷을 입고 살았다고? 그 시대의 무덤은 이랬구나.' 싶은 눈앞의 것들은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찾아내고 그 시대를 확인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는데, 보면 볼수록 그 시대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인간의 생활이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하나씩 찾아가는 생활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에 살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이미 문명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한 번쯤은 모험하듯 여행하듯 다녀오고 싶은 마음도 든다. 영화에서 보던 시간 여행 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이니까 가능한 설렘과 모험일 테고, 현실의 시대 발굴은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됐다.

 

저자는 고고학이란 학문을 경건하게 대하면서도, 그 유물들의 발굴에서 느끼는 시대의 흔적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발굴 과정에서 직접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듯 들려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며 확인하는 그 시대 삶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감정이 인간미 넘쳤다. 때로는 슬픈 현실을, 때로는 즐거운 한때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류의 과정이 그대로 담긴 흔적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 봐왔던 많은 것이 새삼 더 다르고 깊게 다가온다. 생활의 흔적들이기도 하지만, 그 흔적들의 발전은 오늘의 우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게, 구석구석 삶의 지혜들이 쌓여있다는 게 보인다. 사용하다 보니 불편한 것들은 점점 생활에 편리하게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차근차근 인류의 생활은 더욱 편하게 발전해왔을 거라는 사실의 증명 같은 거. 그러니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유물들은 단순하게 화석이나 골동품 바라보듯 신기함으로만 느끼면 안 될 것 같다. 인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이고 흔적들일 테니까.

 

 

 

고고학자를 '시간여행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유물을 찾고 과거를 경험하면서 보이는 것들에 많은 상상과 실제를 더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우리가 역사책이나 수업 시간에 간략하게 배우던 과거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색을 입힌다. 어떻게 보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20여 년의 시간을 고고학자로 활동하면서 돌아다니던 곳, 중앙아시아와 중국, 몽골과 시베리아 등의 발굴에 참여하고 거기서 발견한 유물들에서 본 것들을 말하는데 느껴지는 놀라움과 자부심 같은 게 있다. 본인이 택한 학문에 대한 존경, 경험으로 확인한 시간여행에 대한 흥미로움, 인류 역사의 흔적들이 만들어낸 현실의 모습까지 보면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을 연결한다. 특히 고고학 자료의 절반 이상이 무덤이라면서, 무덤은 죽은 이를 묻은 곳이면서 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곳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치르는 장례식 자체가 남은 이들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지만 죽은 이를 잘 보내기 위한 방식이 아닐까? 누군가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언젠가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이기도 할 듯하다.

 

 

고고학 발굴에서 시간의 무게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각적인 아름다움, 색채이다. 사진이나 책은 가장 먼저 색부터 바랜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고 해도 땅속에 버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색이 잘남아 있는 유물을 발견하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된다. (117페이지)

 

지나간 것들, 죽은 이들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시대를 읽기도 하지만, 음식이나 냄새 같은 것들의 자취를 찾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기에 그 흔적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고대의 악기를 발견했을 때 어느 시대를 규정하면서도 같은 악기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니 음악의 흐름, 유행 같은 것을 찾아낸다. 사실 유행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과한 것 같긴 한데, 어떤 붐이 일어나는 것처럼 음악의 분위기나 사용하는 악기도 널리 퍼지는 것 아닐까 싶다. 구금이 고대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이 즐기던 악기였다고 했는데, 발해 유적에서도 구금이 발견된 것을 보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해 음악이 유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쉬운 것은 그 당시의 악보나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이 유행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음악의 복원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이듯이 유물의 완전한 형태를 예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렇듯 물리적인 흔적을 다 찾아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안타깝다. 어떤 향기나 음식, 맛 같은 것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우리가 먹는 건 우리 몸속에 쌓인다. 고고학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먹은 음식을 밝힌다. 거기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 수천 년 뒤에 한국의 요릿집이나 정육점 자리를 분석한다면 지금의 한국인들이 좋아했던 고기 부위와 숨겨진 식성도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작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뼈들을 부위와 종류별로 일일이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먹는 것으로 당신을 밝히겠다는 사바랭의 말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고학은 너무도 흥미로운 학문이다. 그러니 한 끼 먹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길. (159페이지)

 

토기의 바닥에 곡물의 찌꺼기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5000년 전에는 중국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걸 알아내기도 한다. 음식의 흔적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던 우려는 이렇게 뭔가를 찾아냄으로써 그 기우를 덜어낸다. 특히 보리가 섞여 있던 곡물이었음을 알았을 때는 보리가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동서의 교류가 만들어낸 곡물의 이동이라는 것까지 알아낸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방식의 '흔적 찾기' 같은데, 신기하면서도 하나하나 그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시대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고학이란 학문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싶다. 알고 싶은 것, 찾아가고 싶은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에 계속 활동하고 발굴하면서 그 흔적들을 찾아내는 희열을 느끼고 하는 거 말이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인류가 이뤄낸 삶의 지혜를 발견하면서도, 어떤 흐름으로 현재에 이르렀는지 파악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나온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찾아내고 유추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상상하는 재미까지 더해진다. 인류의 진화에 관한 욕망은 '직립보행이 목숨을 건 진화'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류의 두뇌는 더 커지고 지식을 얻으면서 동물적인 장점은 서서히 퇴화했듯이. 과거의 인류에서 시작된 인간 세상의 흐름은 앞으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흘러갈지 기대된다. 그 기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고고학이란 학문과 고고학자의 역할이 클 것 같다. 비록 고된 하루의 끝이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되는 게 소박하지만, 그 맥주 한 잔의 힘으로 또다시 인류의 흔적을 찾아가는 모험을 마다할 수 없다. ^^

 

 

어렵게 우연처럼 찾아낸 작은 흔적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확인하게 되는 것들을 마주한 것 같다.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불러오는 감정이 대단했다. 발굴에서 시작된 인류 역사를 확인하게 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으면서 고고학을 만나는 재미를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 발굴의 이야기에서는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듯하면서도, 발굴 이후의 시간 추적 같은 이야기는 신비롭다. '아, 우리가 이렇게 발전해왔구나. 인간이 이렇게 진화해왔구나. 너무 다른, 때로는 너무 비슷한 생활에 인간미가 여기서 나오는구나.' 싶은 공감과 감동까지 만든다. 유물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문화를 밝히는 과정인 고고학이, 이 책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인류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시간을 계속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즐거움을 놓치지 않았고, 하나의 학문을 알아가는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과거의 유물이 우리가 미래를 열어 가는데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거울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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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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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고양이
모자쿠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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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옆을 돌아보게 된다. 바로 옆에서 귤을 들고 계시는 엄마가 변신술을 하여 이 책 속의 고양이로 둔갑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는 없다는 확신에 자꾸만 돌아본다. 설마? 아니야. 혹시? 아닐 거야. 그래도? 의심이 가시지를 않는군, 흠...

 

모자쿠키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가이다. 동물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상상하다가 이런 만화까지 그리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표정은 심드렁, 간식 이외의 관심사는 없을 거로 보이는 고양이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 고양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그 걱정을 못 이겨 잔소리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 말로 통하지 않으니 표정으로라도 대화하고 싶은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고, 그저 눈빛만으로 '우리 이런 마음 나누고 있지 않니?' 하는 마음을 풀어놓는 순간을 캡처한 듯한 네 컷. 저자는 트위터 계정을 열고 이 네 컷 만화를 업로드하기 시작했고, 한 달 만에 10만 팔로어를 모으는 관심을 일으켰다. 독자들이 공감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루어낼 수 없는 팔로어 숫자 아닌가? 혹시 당신의 고양이도 이런 마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더 관심 두고 살펴보게 하는 계기까지 이뤄냈을지도 모른다.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 나조차도 이제는 길에서 마주치는 이 녀석들을 달리 보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여러 상황이 그대로 들려와서 웃음이 난다. 매일 반복하는 시행착오를 옆에서 매일 듣는 잔소리로 채우는 시간 말이다. 어질러놓고 다닌다고, 알람이 몇 번을 울리도록 일어나지 않는다고, 오늘 하겠다는 일을 계속 미룬다고,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나 숙제를 한다고, 살 뺀다더니 또 간식과 야식을 앞에 두고 있느냐고, 습관처럼 편의점에 들러 필요도 없는 것들을 사 오고, 스마트폰 중독에, 계획 없는 쇼핑에, 매사에 끈기 없이 중단하는 일들에, 제자리에 두지 않고 찾아다니는 일에, 정리하지 않아서 쌓여가는 물건들에, 언제나 작심삼일에 멈추는 운동에... 하, 이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끝이 없어서 다 말을 못 하겠다. 퉁퉁거리면서 회초리를 드는 것처럼 말하는 이 잔소리 고양이에 대꾸할 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지. 엄마가 옆에서 이렇게 잔소리하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면서 뭐라고 해도, 엄마가 미운 건 아니었잖아?! 아끼고 잘되라는 마음에 계속하는 말들이잖아. 언제까지나 옆에서 지켜봐 주고 알려줄 수 없으니까, 계속 그 자리에서 나의 부족한 것들을 채워줄 수 없으니까. 내가 혼자 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들이라는 걸 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도록 인상을 쓰고, 옆집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잔소리를 하고, 찬바람이 휙 들어오라고 창문을 활짝 열어버리는 이 겨울의 어느 날의 엄마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고로, 이 잔소리 고양이는 우리 엄마가 쓰고 있는 탈이 분명하다. 흐음...

 

 

재밌게도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는 잔소리 고양이의 가르침에 딴지를 놓는다. 조금 늦으면 어때, 간식 좀 더 먹으면 어때, 알람 좀 몇 번 더 울리면 어때, 숙제 좀 몰아서 하면 어때, 하는 말들로 옆에서 깐죽댄다. 그런데도 잔소리 고양이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츤데레 삘의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 그렇지. 그게 바로 애정이지. 암만. 까칠하고 성난 목소리로 잔소리를 넘어선 공격을 한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이면의 진심을 알아서일까. 그 잔소리가 그냥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 조금 천천히 하지 뭐, 실패했어? 다시 도전하면 되는데 뭘. 실컷 등짝 두들겨 패는 말을 쏟아내다가도 결국에는 그 마음 이해한다는 진심을 드러내고야 만다.

 

 

인간 세상에서, 더는 인간만이 교감하는 건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애완견 애완묘를 키우는 걸 보면, 인간과 다르지 않은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 고양이의 잔소리가 사랑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아니면 지금 엄마가 하는 말들이 이 고양이의 말을 녹음해서 들려준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인가는 모르겠지만.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정말 화들짝 놀란 게 있었는데, 전자레인지 안에 음식 데운다고 넣어놓고 깜빡했다가 나중에 전자레인지 사용하려고 열어보고 기함을 했다. 이미 그 안의 음식은 상해있었고, 나는 그때까지 내가 거기에 음식을 넣어두고 데우려고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고양이가 했던 잔소리와 똑같은 말을 엄마에게 들었다는 건 당연했다. 에휴... 이래서 잔소리가 필요한 걸까? ㅠㅠ

 

 

감히 고양이가 집사에게 잔소리하면 되나 싶겠지만, 읽어보니 남다른 애정을 과시하는 고양이였다. 그러니, 잔소리해도 된다. 응, 된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느낀다. 집사에게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이런 잔소리 나오지도 않는다. 애묘인들, 한 번쯤 내가 키우는 고양이의 눈빛이나 행동을 잘 지켜봐 주길 바란다. 혹시 당신이 놓치고 있는 고양이의 진심을 발견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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