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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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엘 소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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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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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에 대한 치료법이 바로 이야기다. (13페이지)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여운은 계속되고 있다. 얼마나 반응이 뜨거웠으면 원작 드라마를 편성하기까지 했을까. 나도 뒤늦게 <부부의 세계>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 본방사수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저 뻔한 누군가의 불륜 이야기임에도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 주인공의 상황과 감정에 감정 이입하게 되니까! 지선우(김희애)가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불륜을 알았을 때 분노하지 않은 자 있는가? 배우자의 배신만큼이나 화가 났던 건, 이 부부의 주변 사람들이 남편의 불륜녀와 함께 여행까지 갔었다는 게 더 절망적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지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정작 아내만 모르는 남편의 불륜이 얼마나 흥미진진했을까? "만약 나라면?"이라는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선우는 복수한다. 남편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내쫓는다. 통쾌했다. 암만! 그렇게 헤어졌다고 해서 가슴 속에 파고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처받은 내 마음을 보상해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선우의 복수로 이태오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았는데, 드라마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지선우 보란 듯이 금의환향한다. 드라마의 분위기는 다시 뒤집어진다. 시청자는 놀랐고, 이태오가 어떻게 복수할지 궁금해했다. 지선우의 복수로 통쾌했던 마음은 다시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해졌다.

 

아마 이야기가 그렇게만 진행된다면 우리는 연거푸 사이다만 들이켜야 했을 것이다. 보는 내내 심장이 졸아들면서 답답했지만, 언젠가는 끝나는 게 드라마다. 이태오는 불륜녀는 행복한 듯했지만, 불륜녀는 남편과 전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커플은 헤어졌고, 이태오는 다시 거지가 된다.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뭘까? 권선징악? 도덕을 지키자?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인간이 이야기에 몰입하고 감정이입 하는 것을 '인간의 뇌'에서 찾는다. 이야기에 빠져들어 흥분하고 감정에 동요되고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에 반응하는 마음은 우리 뇌의 신경과학적 반응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구성이, 심리학자나 뇌과학자가 연구한 뇌와 너무 닮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뇌가 생각하고 현실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의 다양함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빠져드는 이야기가 탄생한다는 것. 뇌가 발견한 정보로 만든 세계를 우리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 게, 영화나 책 속 인물이 보는 세계를 똑같이 보고 경험하는 것이 같은 의미다. 그러니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은 얼마나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를 꿰뚫고 있을까.

 

우리는 머리 밖의 현실을 아무런 장애물 없이 직접 관찰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바깥'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사실 머릿속에서 구축한 현실의 재현으로, 스토리텔링 뇌에서 일어나는 창작의 결과다. (41페이지)

 

이야기는 우리가 머릿속의 저장고 안에 갇힌 채로, 영원히 고독한 환각의 우주에 갇힌 채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지만 끝내 도망칠 수 없는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문이다. 이야기는 환각 속의 환각인 셈이다. (96페이지)

 

저자가 들려주는 많은 영화와 책의 장면들로 우리가 익숙하게 마주하는 스토리텔링의 세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야기로 만나는 매력적인 인물과 스토리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뇌의 반응으로 이해하게 된다. 모든 이야기가 기승전결의 플롯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구성의 방식이 아닌 이야기 속의 인물에 집중한다. 저자는 이야기의 구성과 짜임이 아닌 인물에게 관심을 둔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독창적이고 강렬한 플롯이 인물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 인물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궁금해지는데, 그건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과 사람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모든 이야기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몰입하는 것은 뇌에서 시작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만들어진 세계, 결함 있는 자아, 극적 질문, 플롯과 결말의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에서 우리의 뇌가 머릿속에 형성하는 세계를 인식하고 변화하는지,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작품에서 무엇을 받아들이는지 보면서 설명한다. 다양한 문학작품과 여러 영화로 주인공들의 감정을 엿보게 하면서 하나의 세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어떤 변화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듣는 모든 이야기가 뭔가 변화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이어서 보여주고, 극적 질문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상처나 수수께끼의 열쇠까지 언급한다. 듣다 보면 단순하게 보이는 것들에 빠져든다고 여겼던 것이 혼란스럽다. 내가 드라마에 빠져 주인공의 복수에 감정이입하고, 소설의 주인공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에 긴장하는 게 모두 인간의 뇌가 반응하는 거라고 하니 놀랍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뇌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니, 세상에서 경험하는 많은 감정에 뇌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런 사실을 확인하거나 생각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저자의 설명으로 우리가 즐기는 이야기의 모든 설정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가 빠져있는 스토리텔링의 과학을 저자는 뇌과학적 접근으로 말한다. 이야기가 풀어놓는 호기심은 인간 뇌의 보상체계가 자극받게 한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과 비슷한 반응이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결함 있는 주인공에게 마음을 더 주기도 하고, 그런 주인공의 인생에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우리 뇌가 경험하고 쌓은 편견으로 타인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작품 속 모든 인물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의 현실과 부딪히며 이야기가 형성된다. 특히 저자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언급할 때는, 내가 읽었던 작품인데도 주인공의 행동에 온전히 이해할 수 없던 순간을 떠올렸다. 집사의 인생이 그를 가뒀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기가 이뤄놓은 가치를 흔들고 싶지 않았던 거다. 세상은 변하고 그가 세운 가치도 변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소설의 결말은 어찌 보면 다른 삶의 방향을 보여주기도 하는 듯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그가 세운 세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신념은 그를 무너지게 하는 도구로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야기는 인간 조건을 탐구한다. 극의 표면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 인물에 더 집중한다. 낯선 마음으로 떠나게 되는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인물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그 인물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극적인 싸움을 제공하는 이유는 그가 성공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결함 때문이다. (84페이지)

 

우리가 행동하고 싸우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우리의 영웅 만들기 뇌는 끊임없이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고하기를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관주의와 운명이라는 착각으로 삶의 플롯을 밀고 나간다. (234페이지)

 

 

좋은 이야기는 인간을 성장하게 만든다고 한다. 익숙했던 우리의 세계를 넘어 낯설고 새로운 세상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질문이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세계를 보여주면서 결국 나에게로 질문이 되돌아온다. 우리가 만난 이야기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게 한다. 그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질문의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고, 그 답은 다양해질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야기는 우리의 인식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저자가 언급한 문학 작품들만 봐도 긴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이유가 있다. 그들과 함께 세상을 겪게 하고 나아가게 했다. 좋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세상을 배우는 가르침을 주었고, 누군가의 상처, 행복, 고통, 고민 같은 것들을 바라보게 하면서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부른다.

 

굉장히 흥미로운 접근으로 이야기의 탄생을 말하는 이 책에 조금 더 빠져들고 싶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로 다가와서 그런지 어려운 단어가 등장해도 쉬운 설명이 된다. 우리의 뇌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뇌를 자극하면서 즐길 수 있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존재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양한 재능과 역할을 하는 그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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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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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고양이에 관해 처음 기억하는 장면은 잔혹했다. 어릴 적 저자의 아버지가 고양이들을 한쪽에 몰아놓고 총을 쐈던 일, 빠르게 번식하는 고양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택한 게 충격적이다. 그 충격이 얼마나 심했으면 15년 동안 고양이를 기르지 못했다고 말할까. 평소 인종, 성별, 계층 갈등을 날카롭게 파헤치던 저자에게도 이런 경험과 충격으로 고양이에 대해 연민을 드러낸다는 게 의외이기도 하지만, 역시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선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많은 작가(남성)가 자기만의 공간에서 함께한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는 궁금증을 안겨주기도 했다. 왜 고양이인가 하는 물음. 고양이를 향한 이들의 애정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들의 삶과 함께해올 수 있었던가. 여러 가지 반려동물이 가진 존재의 의미와 더불어 고양이만이 가지는 어떤 감정이 진정한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하는 거 아닐까 하는 호기심도 생긴다. 어쨌든, 고양이든 귀찮게 하지도 않고 그냥 옆에 있으면서 자기 존재감을 잃지 않는 것으로 자리를 지키는 듯하다. 고요한 일상의 한 장면을 그리면서 말이다.

 

고양이를 관찰하면서 쓴 이 책의 분위기는 고양이의 위대함 같다. 고양이를 칭찬하고 찬양하면서도, 정작 어떤 우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살면서 애정하는 존재로 보면서도, 고양이 특유의 모습을 놓치지도 않는다. 가만히 뭉게뭉게 비비적대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킨다. 포근하게 그 털을 만지고 싶다가도 그 순한 눈을 보면 배시시 웃음이 난다. 처음부터 함께였던 것처럼, 그 존재를 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치 엄마처럼 가족처럼 보듬는다. 그러면서도 고양이 각자의 성격을 한없이 너그럽게만 보지도 않았다. 어미 고양이를 보는 존경과 예쁜 아기 고양이를 보면서 아름답지만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다정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기도 했다. 정말 인간 가족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묘하면서도 웃음이 난다. 한없이 아껴주고 보살펴보는 엄마의 품을 그대로 느끼게 하고, 자식의 못된 성격을 나무라는 말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저자의 글에서 독자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인간과 고양이를 따로 두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해지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인간 세상에서 같이 존재하는 운명체로 보인다.

 

단순하게 고양이 관찰기 같은 거라면 이렇게 독자의 감정을 흔들지도 않았을 것 같다. 저자의 성장기에 봤던 장면들에서는 불행했던 유년기와 겹쳐지기도 한다. 이미 작가의 이름을 얻고 나서는 고양이를 보는 시선이 더 다양해진 것 같기도 하면서, 고양이 자체를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고 있음을 느낀다. 몸이 불편한 고양이에 관한 기억 역시 누군가의 상처를 아는 한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 단순히 동거인으로의 고양이가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함께한 이 고양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한 사람의 성장기와 비슷하게 흐르기도 한다. 어렸을 야생고양이를 봤던 장면은 치열한 삶의 현장 같기도 했다. 넘쳐나는 개체 수를 처리하고자 쏘아대는 총소리는 잔인했으며, 그 기억은 여전히 저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후에 저자가 고양이를 키우며 마음에 담았던 생각들은 그 삶의 방식에 또 다른 방향을 열기도 한다. 어느 한 가지 방법만이 존재하는 게 삶은 아니므로, 생의 모든 순간에 부딪히는 잔인하고 끔찍한 순간에도 인간은 살아가려고 애쓰는 존재라는 생각.

 

이 책에서 묘사되는 고양이의 모습들을 보면서 인간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고양이에게 친근한 모습들이 많은 건 아닐까 하는 웃음기 묻은 표정을 짓기도 하고 말이다. 고양이가 사랑하고 새끼를 낳고 키우면서 보이는 눈빛들은 마치 엄마가 아기를 낳아서 키우고 마음을 주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아끼던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겪었을 상실감도 무엇인지 너무 잘 보이더라.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으면 15년 동안 고양이를 자기 삶에 들일 생각을 못 했을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인연을 시작한 고양이들과의 시간을 보면 오히려 더 나은 관계 맺기가 아니었을까. 자기 영역을 지키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리에 고양이를 대입하여 생각하게 된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 마음으로 전해주는 온기와 응원, 삶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의외의 감정들 같은 거. 그 선을 넘을락 말락, 존중해주면서도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겪어내는 인간 세상의 단면들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읽는 동안 엄마가 키우다가 죽은 강아지가 생각이 났다. 오래전 일이다. 엄마가 키우던 강아지가 나이를 먹어 늙고 병들어 죽었다. 내 기억에는 그냥 그런 강아지가 우리 집에 있었던 것 정도였는데, 엄마는 그 죽음까지 봤단다. 요즘에 가끔 조카들이 오면 할머니에게 마당에 강아지를 키우자고 조르는데, 엄마는 그렇게 마음 주고 키우면서 보는 마지막의 죽음이 너무 싫단다. 꼭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알레르기 진단받은 건 아니지만 동물 털 날리면서 가려움이 심해지는 식구들 때문에라도 집에서 동물을 키운다는 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혹시나 한 마음에 혼자 계실 엄마가 적적하지 않게 한 마리 들여오고도 싶지만,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웬만한 마음으로는 어려운 일이기에 선뜻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겠다. 사랑을 주는 존재가 생긴다는 게 기쁜 일이지만, 마음만으로 돌봄을 완성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사람과 고양이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야기다. 특히 고양이의 세계가 내가 눈으로 봤던 찰나의 순간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게, 서로의 언어가 다르지만 교감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그러면서도 마냥 다 알 수 없는 마음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냉정하게 마음먹고 살다가도, 길에서 본 고양이를 데려오면서 4년 만에 울음소리를 듣는 그 마음이 어떤 걸까 생각해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노력이 깃드는 게 또 인간이 배워가는 세상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보면서 더듬어 보는 자기 삶의 궤적들과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증명하고 확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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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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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엄마의 꿈을 듣고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것이 희생이었음을 깨닫는다. 정아는 언제나 엄마에게 요구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키워 주고 먹여 주고 들어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니까. 이토록 일방적이기만 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정아를 찌른다. (253페이지)

 

누구나 이별한다. 세상 인연이 다 그렇다. 하지만 그 죽음을 생각하고 이별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현실에서 준비해야 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문제가 있다. 내 의지대로 명확하게 가를 수 없는 마음이 죽음에서 파생한 생각의 꼬리를 이어간다. 언젠가 이별을 마주해야 할 모든 인연이지만 그 타이밍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온도마저 다르다. 3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애인을 잃은 정아에게 엄마의 암 소식은 달랐다. 애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너무 아팠고, 3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녀는 과거의 기억에 몰두하며 산다. 그러다가 닥친 엄마의 폐암 말기 판정 소식은 그녀가 엄마의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애인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가 이제는 엄마를 '잃어가는' 이별을 걷고 있다.

 

누군가와의 이별은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정아가 기억하는 엄마의 세월은 억척스럽게 두 자매를 키워낸 엄마의 모습이었다. 식당에서 일하거나 건물의 청소를 하거나,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자매를 키운 엄마의 현재는 폐암 말기의 환자다. 자매의 보호자였던 엄마를 이제는 자매가 보호자가 되어 돌본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 일이다. 고생하며 나를 키우고 돌봤던 엄마의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순간이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엄마를 잘 돌보고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그냥 간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테지. 자매 역시 엄마의 진심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채로 기한 없는 간병인이 된다. 서울과 부산, 경주를 오가며 이어지는 간병기는, 막연하게 이별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잘 마무리하고 싶은 목표가 되어간다.

 

매번 겪는 이별이라고 해서 익숙해질 수 있을 텐가? 그냥 횟수가 늘어가고 거듭 리셋될 뿐 언제나 그 이별 앞에서 우리는 낯선 감정에 휩싸인다. 이별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겪어내야만 한다. 그게 현실이고, 그게 이별과 익숙한 우리의 자세다. 정아는 아픈 엄마 곁을 지키며 일상을 유지해나간다. 긴장했다가, 익숙했다가, 짜증 내고 투정하기도 했다가... 인간이기에 간병 앞에서 겪는 마음의 고충까지 이해해야 하지만, 바로 뒤돌아서서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다시 또 서로에게 접근하며 환자와 보호자로, 엄마와 딸로, 이 이별을 함께 준비해야 하는 자매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의 사랑을 느낀다. 미처 다 알지 못했던 엄마라는 존재를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동백도 안 졌더만 찔레꽃이 폈어요?"

"네, 올해는 나란히 폈더라고요."

"보고 싶네요."

엄마는 볼에 홍조까지 띠고 신이 났다. 그때 한의사가 질문을 바꾼다.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단순히 말을 받아 묻는 것도 같고 치밀하게 의도한 것도 같아서 정아는 조금 놀란다. 엄마는 입을 닫고 시선을 떨어뜨린다. 한의사가 단호한 말투로 거듭 묻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엄마요."

"그래요? 엄마가 보고 싶으세요?"

"네." (134~135페이지)

 

얼마나 알고 있는가, 당신의 엄마에 대해서? 소설 속 자매는 엄마가 아픈 후로 엄마를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좋아하는 들판의 야생화는 꺾지 않을 때 가장 예쁘다는 것. 꽃이 예쁘다는 말에 당장 꺾어 와서 꽂아두고 싶은 마음이 다 표현되기도 전에 엄마의 속내를 듣는다. 그냥 두고 봤을 때 가장 아름다운 게 꽃이라고. 하나둘,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에 관해 더 알고 싶다. 엄마가 궁금하고, 엄마와 이야기하고 싶은 공통된 관심사를 위한 게 아니다. 처음에는 '엄마'라는 한 사람의 취향이나 생각에 관해 궁금하던 것이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점점 옮겨간다. 이미 한번 누군가를 잃어본 정아가, 이별 후의 시간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줄곧 죽은 애인을 놓고 살지 못했던 그녀의 시간에 이제는 엄마까지 더해질 것이기에, 그 기억에 붙들려 사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기억으로 머물게 하는 담담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보일 그 상실의 슬픔이 누군가에게 강제한 슬픔이 아니라, 그냥 내가 느끼는 슬픔 그대로 머물게 하려는 마음.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 계속 당신을 기억하고 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멈추지 않는 것. 엄마가 아픈 후에야 알게 된, 엄마와의 이별을 느리게 준비하면서 겪은 상실의 진정한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달라질 게 없는 일상과 습관, 성격까지 익숙하게 보이는 건 또 뭘까. 엄마를 잃어가면서도 엄마를 알고 싶은 마음, 그렇게 알아가는 엄마의 시간에 뭉클하고 애틋하면서도 지금 달라질 게 없다는 게 슬픈 거다. 그래서 투박하게 노력한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은 바람은 여전하지만, 매번 원래의 성격대로 무뚝뚝해지는 자신을 탓하기도 웃기다. 엄마가 아프고 엄마와의 이별이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유로 그녀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참거나 숨기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항상 엄마를 걱정시켰던 딸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모습을 정아에게 확인한다. 엄마의 아픔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현실이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녀의 삶이 존재하고 중요하니까.

 

슬픈 일을 겪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장할 수 없는 게 또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정아의 솔직한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얼마나 더 많은 이별을 경험할 우리일지 모르지만, 소설 속 자매와 엄마가 서로에게 접근하는 이별의 방식은, 투덜대는 것 같으면서도 고요하게 마음을 읽게 한다. 우리에게 이별은 필연이고,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잘 이별해야 하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실의 고통을 감당하고 겪어내는 게 최선이라는 것인지, 남은 시간 더 많이 알고 싶은 바람으로 계속 가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별하는 엄마를 궁금해하면서 정아가 알아낸 엄마의 시간은 엄마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기억에 남아 상실의 시간을 채워갈 거라는 것. 그 기억으로 슬픔을 감당하는 게 또 하나의 방식이 될 것 같다. 처음에는 어설프게 보이던 작은 딸의 모습이 점점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너무 현실적이고 생생해서 경험한 이들만이 공유하는 감정을 같았다. 엄마의 폐암 소식에 정아와 언니는 역할 분담하여 그 모든 일을 진행한다.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하고, 수술하고 항암을 하고, 재활을 위한 병원을 알아보고, 다시 또 반복하면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들이 낯설지 않았다. 가족이 아프다는 건 그런 거다. 아픈 사람 본인도 힘들지만, 그 아픔을 대처해야 하는 가족에게도 똑같이 힘든 시간이 된다. 오랜 시간 중노동을 하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일에 몇 년을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지나고 보니 알아두어서 나쁜 것 없는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런 경험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행복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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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5-28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는 것만으로도 슬프네요 이런 일은 많은 사람이 언젠가 겪을지도 모르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뭐든 소설 속 사람이 더 잘 하는 듯해요 저는 제대로 하는 게 없네요 아프지 않고 부모가 나이 들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것도 슬플 텐데, 아픈 엄마를 바라보는 건 더 마음 아프겠습니다


희선

구단씨 2020-06-01 10:32   좋아요 1 | URL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던 게, 이제와서 보니 우리가 몰랐던 엄마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했던 엄마와 다 알지 못했던 엄마가 겹치니까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그게 참 아프더라고요.
지난 주말에도 누군가의 장례식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 우리 주변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더 자주 들려오는 나이가 된 것 같아서 슬프네요.

꽃같네 2020-06-0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을 겨우 참았습니다. 이 글만 보아도 마음이 많이 아파옵니다.
썼다 지웠다, 말로 다 담아낼 수가 없네요.
후기 감사합니다. 책 꼭 읽어볼게요.

구단씨 2020-06-08 21:15   좋아요 0 | URL
‘엄마‘라는 단어가 원래... 그렇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