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정은궐 작가님.

작품을 계속 쓰고계셨네요...

신간 소식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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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전쟁
이종필 지음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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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놀랄 때가 있다. 마냥 상상만 하던 것이, 영화나 소설에서 봤던 모험 같은 판타지가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봤을 때 말이다. 얼굴 보고 통화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게 영상통화가 익숙한 시대가 됐고, 미지의 곳으로 여겼던 우주를 이제는 인간이 다녀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일반인의 우주여행 시대를 열겠다고 계속 투자하고 시도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의심은, 어느 날 실현 가능성 있는 현실로 나타나곤 했다. 그러니 인간이 가진 상상력이나 생각들, 어떤 시도들은 언젠가 우리 일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 소설 역시 의도는 다를지 몰라도 인간이 이루어낸 과학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이 만들어갈 세상, 이거 정말 현실일까? 아니면 진짜 이런 시도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나?

 

놀랍네요.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불완전한 데이터를 갖고 완전한 이미지를 복원해낼 수 있다는 얘기네요?” (32페이지)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에 목이 없는 시체가 매달렸다. 누가 저지른 일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지만, 시체가 동상에 매달린 방법도 놀라웠다. 드론이 시체를 옮기고 올가미처럼 동상에, 그것도 한 번에 매달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시체를 한 번에 매달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드론이 해냈단 말인가. 사이언스이스트 기자인 하영란은 대학교수 조성환에게 연락해서 이 사실을 뉴스보다 먼저 알려준다.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누구의 짓인지 묻고 싶었던 것. 이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성환은 영란과 함께 수사팀 윤태형을 만난다. 수사하는 입장에서는 성환의 도움이 컸다. 드론에 인공지능이 장착된다면 가능하다는데, 이렇게 한 번에 시체를 매다는 것까지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더 의문이고 범행의 목적이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머리 없는 시체의 몸에는 사람 얼굴 모습을 그린, 아닌 철로 된 핀(공사 현장에서 사용하는 타카핀)으로 박은 사진이 있다. 성환은 컴퓨터로 그림을 확인하고,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하지만 그 이상 알아내는 건 무리였다. 이들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 사건을 저질렀는지 찾아야 하는 공동 목표가 생겼다. 주변의 잘 아는 이들에게 연락해서 조금씩 그 내밀한 이야기를 찾아간다.

 

인공지능의 역할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계속 궁금해지게 하는 소설이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이 사건에 개입되었고, 인류 역사에 어떤 결과물을 남길 것인지 의미심장하기도 하다. 이야기는 과학에 관계된 이들이 하나씩 들려주는 기가 막힌 과학의 발달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의 과거 역사에서 비롯된 인식의 등장이기도 하다. 과학과 역사의식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못된 역사의식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지켜보게 한다. 무엇보다 과학이 만들어낸 성과는 잘만 이용하면 긍정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인지도 높은 과학 교수 부부가 합작한, 인공지능과 양자역학을 접목한 연구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된다. 과거 복원 프로그램. 현재의 자료를 가지고 과거 어느 시점의 사실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로 현재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인데,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가능한 일일까? 무슨 일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민감하고 완벽하지 않은 일을 진행하는데 위험이 없을 수가 없다. 무언가(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무언가)는 의도하지 않은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이들이 진행한 과거 복원 프로그램은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국정원이 관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과거 복원 프로그램은 무슨 일이기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이 일의 중심에 있게 된 것일까.

 

엄청난 성능의 양자컴퓨터가 있다면 조각난 일부의 정보만으로도 나머지 필수적인 퍼즐을 재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봐야겠죠.” (96페이지)

 

조금씩 뚜껑이 열린 이 사건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치닫는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관계되어 있었고, 그들이 품은 사건의 배경은 놀랍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대, 과거 고종과 명성황후가 존재했던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몇 대에 걸친 조상과 후손들까지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인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리고 밝혀진 인공지능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는 끔찍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인간은 정말 이렇게까지 발전을 이루어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적당한 걸음으로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가는 과학의 발달을 그려보면 안 되는 것일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여러 장소는 사건의 전말과는 대조적으로 그려져서 더 안타까웠다. 이순신 동상이 있는 광화문과 그 뒤의 경복궁, 대명대학교(가상)의 인공지능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이름으로 불렸고, 종로경찰서의 수사관들과 한강을 묘사하는 문장들. 과거의 현재와 미래가 겹쳐진 공간에서 잘 어우러진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시하고 싶어도 저절로 관심이 가는 양자역학이나 인공지능, 거의 모든 것이 자동화가 되어가는 현재의 시스템, 그런데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를 확인한 기분이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았지만,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설명으로 소설을 읽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판타지와 현재의 모습을 적절하게 접목한 게 재밌기도 했고,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라는 역사와 과학의 충돌 같은 장면들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소설에서 다 보지 못한 과학의 무한한 미래는 또 다른 이야기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생긴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의 발전은 절대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을 대신하는, 아니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과학을 잘 몰라서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용어나 해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로 만나는 과학의 놀라움은 여러 가지로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과학자가 우리 사회에 지는 책임감 같은 것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고민이나 마지막 선택을 보면 저절로 느껴진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능한 상상력과 도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 바탕이 되었던 역사의식은 위험했지만, 좋은 방향으로 목적을 둔 시도는 응원하고 싶기도 하다.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역사와 사회 등 많은 시선으로 파고들기 좋은 소설이다. 조금은 더 쉽게 풀어서 들려주는 과학 서적으로도 만나고 싶은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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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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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흔이면 엄청 어른인 거 같고 대부분의 일들이 다 해결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았는데 아니었다. (6페이지)


왜 하필 마흔일까. 인생의 계단을 한번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10년이라는 간격이 있었지만, 스물 서른을 넘기고 마흔에 다가간 감정을 확인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을 거꾸로 묻고 싶기도 했다. 살면서 흔들리지 않은 때가 언제였더냐고, 그런 때가 있다면 오히려 흔들리지 않은 때를 세는 게 더 빠르겠다고. 하루를 보내면서도, 몇 년의 세월을 넘어가면서도,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작은 선택 하나를 할 때도, 갑자기 닥친 큰 문제를 해결할 때도 언제나 마음은 위태로웠다. 그저 그 순간, 오늘을 잘 건너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마흔 즈음의 흔들림은, 그냥 우리가 사는 모든 찰나의 순간이 이어져가는 거라고 느껴진다. 어차피 오늘도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고, 내일도 흔들리는 날들을 감당하면서 걸어갈 테니까 말이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작가는 마흔에 접어든 순간의 일상이 흔들림을 경험한다. 작가라고 하기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못했고, 프리랜서 작가로의 일도 그즈음 줄었다고 한다. 소박하게 꾸려가는 작은 책방 역시 현상 유지만 할 뿐이라니,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오늘이겠는가. 중학생 딸과의 관계도 잘 이어가야겠고, 저자 자신의 삶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데, 무엇 하나 완벽하게 갖춰진 것 같지도 않다.


나이 마흔. 어릴 때 들었던 마흔이란 숫자는 참 대단해 보이고 굉장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는데, 막상 자기 앞에 닥친 마흔은 아직 어른도 아니었고, 마냥 편하게 안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가까운 이가 그런 말을 하더라. 마흔이 넘으면 뭐든 다 자리 잡은 상태일 거라고, 결혼하고 직장 잘 다니고 아이 키우면서 걱정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면 될 것 같았다고. 그런데 현실은 한없이 불안하고 아직도 아이인 것만 같은 날들이라고, 적성과 다른 직장에서 버티는 나날에 '억' 소리 나는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까 봐 걱정이고. 계속 달린 것 같은데 왜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은지 모르겠다고, 죽을 때까지 자리 잡기는 잡는 거냐면서. 누구나 오늘을 살면서 느끼는 건 비슷한 것 같다. 괜찮을까 하면서 나아가고, 지치고 힘들 때마다 또 마음이 갈팡질팡 우울해지고.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도 다른 선택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 저자도 비슷하게 말하더라.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느냐고. 나도 웃으면서 그런 말 자주 했다. 다시 고3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친구 말에, 나는 그때로 돌아가도 공부를 더 열심히 잘할 것 같지는 않다고.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더 고민하고 선택하고 싶다고.




아마도 저자는 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붙잡아줄까 하는 바람으로 걷지 않았을까 싶다. 잠깐 걸으면서 눈앞의 것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기록한다. 넘어질 것 같을 때 걷기로 한 저자의 발걸음이 여러 곳을 향하고 많은 것을 보게 했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반려견과 함께. 아름다운 이름과 꽃말을 가진 식물들, 들꽃이라 불리며 길가에 단단하게 피어 있는, 풀 같으면서도 피어있다는 것 자체가 예쁘고 고운 것들. 항상 다니던 길인 것 같은데 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나 싶어서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다. 패랭이꽃의 화려한 색을 왜 못 보고 지나치기만 했는지, 왕고들빼기꽃이 이렇게 예뻤나 싶고, 강아지풀의 꽃말은 왜 동심과 분노처럼 대조적인지, 담쟁이가 덮고 있는 저 담 너머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면서, 길에서 마주친 꽃과 풀에서 섞여 나오는 자기 이야기에 인생의 어느 부분을 되새기기도 한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마주하면서,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과 만났다. 물가에 핀다는 고마리를 보면서 고이지 않고 흘러가는 인생을 생각한다. 어떻게든 흘러가는 게 인생이겠거니 하는 마음의 긍정을 찾는다. 가슴에 뭔가 꽉 찬 것처럼 답답한 속내가 길에서 만난 작은 꽃 하나에 스르륵 풀리기도 한다. 나를 숨 가쁘게 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눈을 돌리니 주변이 보이고, 소소한 아름다움이 보이고,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흔들리는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는 듯하다. 여기저기 뿌리내린 작은 초록들은 제각각 자기의 모습 그대로 꿋꿋하게, 누가 와서 봐주지 않아도, 조금 천천히 자라도,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남은 생은 실속 있는 알밤처럼 알맞게, 매달려 있을 만큼만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행복하고 불행하다가, 적당히 얻기도 하고 내주기도 하면서, 적당히 여물어 땅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속도이자 앞으로도 쭉 유지하고 싶은 속도이고 내 꿈이다. (171페이지)


작은 것들은 작아서 더 오래 내 곁에 남는다. 크고 무거운 것들은 생의 어느 순간 버겁게 느껴져 헤어짐의 수순을 밟는다. 비싸게 돈 들여 산 옷이라도 옷장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애물단지가 되고 결국 버려지고 만다. (중략) 사람과의 관계도, 그밖의 많은 것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기 마련이다. 작은 관계, 작은 성취, 작은 성공, 작은 수고,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음악, 색깔, 향기처럼 아예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인생에 중요한 건 웅장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해서 긴밀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208페이지)



마음이 괜찮지 않은 어떤 날들은 흘러갈 거라고 위로하는 글이다. 길가에 보이는 꽃과 풀을 보면서 자기가 흘러온 시간을 반추하며 하는 이야기가 새삼 낯설지 않다. 땀 흘리면서 걷던 어느 저녁 시간이 개운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것들에서 잠시 눈 돌리는 땡땡이가 필요하다. 조금씩 천천히, 괜찮아지는 날들과 마음을 기대하면서 공감하는 문장들이다.


어제 저녁에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왜 그런지는 모르겠고, 그냥 밥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울컥하는 기분에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놀랐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유를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요즘 며칠 괜히 우울하고, 워낙 집순이인데도 반강제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되니까 그런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가득하다. 핑계지만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드니 살이 찌는 속도도 빠르다. 반년 넘게 심각한 감염병 때문에, 긴 장마에 안 나가고, 폭염에 숨이 막혀서 못 나가고, 태풍이 몰고 오는 바람이 무서워서 스스로 집안에 가두는 시간.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새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가로수 잎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꽉 막힌 속을 뚫을 수 있는 것은 문득 시선을 돌린 어느 곳에서 발견한, 소소한 것 하나에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오늘은, 마음을 묶어두는 것을 잠시 내려놓아도 좋은, 태풍이 지나간 어느 길 위를 땀 흘리면서 걸어도 좋은 하루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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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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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무심했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중략) 그러니 무표정했던 삶이 조금 환해졌달까. 무채색 세상이 유채색으로 칠해졌달까. 묵혀뒀던 오감이 자극된달까. 별것 아닌 일상조차 조금 특별해졌다. 손이 닿은 딱딱한 액정 속 디지털 세상이 아닌, 숨이 닿는 지근거리 이야기들이라서.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301~302페이지)


겪어봐야 안다. 세상일 대부분이 그렇다. 그중에 경험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게 누군가의 마음이자 살아온 시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섣부르게 꺼낼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왜냐고?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에는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다 느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이해한다는 말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고 아프고, 제도의 불편함을 느끼고, 상실의 경험을 하고, 시험에 탈락하기도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이 누군가에게 이해와 공감을 부를 수 있지만, 온전하게 같은 경험을 한 게 아니라면 제대로 알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보자면 TV 프로그램의 ‘극한직업’ 정도 되려나? 하지만 이건 직업이 아니고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기에 진지하면서도 울컥한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깨알 멘트는 웃음을 놓지 않는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감히 잘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 남았다. 내가 굳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그동안 그의 연재를 꾸준히 찾아보지 못했기에 내가 놓친 이야기가 궁금했다. 호기심만 채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에 너무 닿아있는 모습들을 알고 싶었다. 세상의 정의를 외치면서 앞에 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소심한 다짐을 더 해보면서 말이다.


저자는 평소 보고 생각했던 곳곳의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아마 그가 알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리스트 목록에는 그가 가진 기자의 시선이 담겼으리라. 누구나 바라보는 밝은 곳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이면의 곳곳을 비추고 싶은 마음. 세상의 시선 밖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공유하고 이해하면서,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까지 당연히 얹어 있다.


그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연재 때 읽고 가장 웃음이 났던 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봤다’이다. 어느 하루,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방 안에서 지냈다. 씻는 것을 생략한 것은 물론이다. 더럽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한없이 늘어지면 방바닥을 뒹굴던 우리의 모습을. 솔직히 나는 며칠 동안 밖에 안 나가면서 세수도 안 한 적이 있다. 뭔가 입에 대면 양치는 꼬박꼬박했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체험을 하는데 왜 씻어야 하는가? ㅎㅎ 사실 이 경험의 의미는 안 씻어도 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반추하며 삶에 의미가 무엇인지 조용히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살아가든,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 아니었던가. 바쁘게 달려오면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은근한 떠올림까지 저절로 이어진다. 이 체험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봤다’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면서 달려온 10대 20대 시절, 직장생활에 적응하고 결혼하면서 현실을 살아내느라 벅찼던 30대를 그리는 저자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 같다. 쉬어보자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안 하던 하루가, 가만히 쉬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을 그리게 한다. 어느 날 하루 그가 꺼놓고 지냈던 스마트폰은 그동안 놓쳤던 세상의 모습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진심까지 읽게 했다. 스마트폰에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왔던 시간이 무섭기까지 했다. 이 작은 기기 하나가 삶의 대부분을 조정하게 하다니. 놀라우면서도 겁난다. 편리하지만 무섭다. 그가 스마트폰을 꺼놓고 지낸 시간 동안 업무나 상대방의 감정에 스크래치가 났을지는 모르지만, 스마트폰 없는 하루가 그에게 준 것은 표정 있는 삶이었다.


거절과 나쁜 말 듣기가 싫어서 자꾸 움츠러드는 마음을 이기고자 스스로 거절당하기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가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내 마음을 돌봐 주려 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는 저자.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당하기 직전의 강아지 구출 작전에 참여해보고, 무연고자의 죽음을 배웅해봤으며, 24년 만에 초등학생이 되어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경험했다. 가볍게 웃으면서 보고 싶은 경험 같았지만, 그 경험의 시간 동안 느낀 것을 듣고 있노라면 하나도 가벼운 게 없었다.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이 함께했다.


노인 체험 장비를 벗은 뒤 팔이며 다리에 붉게 물든 상처들을 보고 알았다. 하루 내내 싸운 흔적이었다. 마음처럼 안 움직이는 팔과 다리를 애써 움직이려고, 굽은 허리를 곧게 펴려고, 몸은 여든 살이라는데 마음은 여전히 서른일곱 살이라 여기면서. 그렇게 세월을 거스르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노인 체험을 자처했으면서, 막상 노인이 되니 난생처럼 겪는 경험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젠가 나이들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요했던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장이 일듯 별 것 아닌 일상들이 일렁거렸다. 43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감은 그렇게 컸다. 이게 체험이 아니라, 언젠가 맞을 미래란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58페이지)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들. 그가 폐지를 줍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것. 인생이란 게 얄궂어서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들을 외계에 사는, 별나라 사람쯤으로 볼 게 아니라 이웃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45페이지)


그의 경험 대부분은 우리와 오늘을 함께 사는 이들의 시간이었다. 거리에서, 근처에서 익숙하게 봤지만, 우리가 실제 경험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노인 분장을 하고 80세 노인의 삶을 경험한 그는 나이 듦의 자연스러움과 그동안 애쓰며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진하게 느꼈으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된다. 어떤 젊음을 보내면서 맞이할 노인의 모습을 상상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마냥 다 다 잃고 내려놓은 절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 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됐다. 폐지 줍는 이의 하루를 같이 걸으며 어떤 일상인지 보기도 했다. 길에서 흔히 보이는 폐지 줍는 이들. 리어카 한가득 싣고 가는 모습이 위태로우면서도 정작 그 리어카의 뒤를 밀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삶이니, 타인이니 굳이 가까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경험한 폐지 줍는 하루는 누군가의 생활수단 전부이자,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하루이자, 아이들에게 먹여줄 음식값이 된다. 누구나 사연도 있고, 그런 삶을 가진 이유도 있다. 그 제각각의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 하루를 경험한 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해의 근처에 닿을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겼다.


새벽 5시에 시작된 환경미화원의 세계를 보았다. 눈을 감고 벚꽃축제 그 길을, 시각장애우의 세상에서 걸었다. 집배원의 하루를 같이 다니면서 왜 과로사가 그렇게 많은지 알게 되었으며, 35킬로그램 방화복을 입고 계단을 오르며 소방관을 살아봤다. 거리의 쓰레기는 당연히 환경미화원이 치우는 거라고, 소방관은 불을 끄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면 저절로 반성 모드가 되어야 할 판이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그에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굳이 길에 쓰레기를 버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버리고 쏟아내고 그냥 지나간 그 길을 깨끗하게 해주는 이들의 노고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료봉사가 아니다. 하지만 하는 일에 상응하는 대우가 주어지고 있는지 거듭 확인해봐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루였지만 직접 체험한 시간이 더욱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의 일을 이렇게 들려주는 이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나와 지금을 같이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세상을 안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삶도 지켜봐 주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


식사 후 체할 것 같아 청계천으로 향했다. 그러자 더위가 고역이었다. 섭씨 32도, 체감온도는 더 높았다. 걸은 지 5분 만에 브라에 땀이 찼다. 15분이 지나니 브라 끈과 와이어 부분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가슴골 사이에선 땀이 흘렀다. 겨울이면 따뜻하기라도 할 텐데, 여름엔 대책이 없었다. 패드 밑을 잠깐 들었더니 시원했다. 땡볕에 브라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6~17페이지)


체험한 지 사흘 만에, 브라를 결국 벗었다. 육체적인 불편함보다 더 힘든 건, 버거운 시선이었다. 누가 뭐라 안 했어도 그것만으로 무언의 족쇄였다. 그래서 여성들도 쉬이 벗을 수 없었겠구나, 절실히 깨닫게 됐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20페이지)


다양한 체험 중에서도 웃픈 몇 가지를 확인하면서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브래지어를 하는 여성의 마음을 한없이 알아주는 그가 되기를 바랐던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는 정말이지 역지사지의 대표 격이 아닐까 싶다. 브래지어 안 하는 시간의 편안함을 그가 알려주어 얼마나 고마웠던지. 특히 이 더위에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고통이다. 집안에서 브래지어 안 하고 헐렁한 티셔츠 입고 살다가, 속옷까지 갖춰 입고 나가야 해서 외출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해본 사람만 안다는 브래지어의 불편함을 남자인 저자가 생생하게 증언해주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아이 없는 남자의 하루 육아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어쩌면 그가 아이 계획을 세운다면, 하루 육아 경험 전과 다른 조금 더 괜찮은 남편과 아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루였지만 그 경험이 육아의 현장을 그대로 각인시켜줬으니까.


그의 솔직함은 ‘자소서, 진짜 솔직하게 써봤다’에서도 빛난다. 흔히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 태어나서 살아온 모습이 다 비슷한데 도대체 그 차별화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골치가 아픈 순간들. 결국 우리는 소설에 버금가는 자기소개서를 채워나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첫 번째 관문인 서류심사조차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학력 구분이 없다고 해도,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은 취업 문턱을 증명하고 있던 셈이다. 저자는 취업준비생들의 솔직한 의견을 담아 자소서를 써서 지원했고, 당연하게(?) 탈락했다. 아마 그의 서류심사가 통과했다면, 그 기업의 취업 경쟁률 더 세졌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는 어디에 지원했는지? 누구나 들어가고 싶다던 기업이 어디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우리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을 읽는 내내 곱씹게 된다. 당사자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주 작은 경험 하나로도 우리는 그 세상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경험한 하루들의 시간은 얼마나 더 귀할까. 공감은 당연했고, 누군가를 더 이해할 수 있다는 작은 걸음을 보여줬다. (사실 누군가는 온전히, 다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온갖 고생을 하며 그가 들려준 세상의 많은 이야기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몸으로 부딪쳐 해내야만 하는 일부터 사랑한다고 말하며 감정에 힘을 실어야 하는 일까지 다양한 그의 체험이 값지다. 읽는 동안 고맙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간접경험이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알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루의 경험이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보게 된 만큼만은 세상을 더 알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삶은 더 편해지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렇게 달려온 세상이 놓치고 있는 것도 분명 있을 테지. 아마도 저자가 하루의 경험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잊고 있던 어떤 것을 찾아가고 확인하는 즐거움에 감사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지만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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