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키지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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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사연을 안고 패키지여행에 모여든다. 단돈 8만 원에 대마도행 배를 탄다. 가이드의 여자친구는 그런 여행을 누가 가느냐고 비웃었지만, 그 여행에 스무 명이나 참가했다니 놀랍기도 하다. 쉬운 여정은 아닐 터, 그러기에 저마다의 사연에 의미가 있다. 암 환자, 늦은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 거기에 김석일 부자가 있다.


아무리 싸구려 여행이라지만 그래도 여행인데, 조금은 설레지 않을까? 어떤 이유로 이 여행을 선택했더라도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 특유의 설렘이 있었다. 약간의 들뜸, 가이드가 상술로 내려놓은 특산물 시장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버스의 짐칸에서 발견된 토막 난 시체로 이들의 여행은 멈춘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경찰이 출동하면서 그들의 관광버스는 범죄의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형사와 마주하며 진술을 한다. 도대체 이 살인은 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처음부터 범인과 피해자를 드러내고 시작한다. 토막 난 시체는 김석일과 함께 버스에 올랐던, 김석일의 아들 김도현이었다. 당연히 유력한 용의자는 김석일이다. 그는 휴게소에서 아들과 내린 후 사라졌다. 휴게소에 남은 가이드는 김석일의 행방을 찾지만 실패했고, 그다음 장소인 특산물 시장에서 사건이 터진 거였다. 김석일의 행방을 찾던 경찰은 곧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르는 김석일을 찾았고 체포했다. 자백은 없었지만, 김석일이 범인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도대체 아들이 얼마나 미웠으면 죽이고 토막을 내기까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조사해도 김석일은 자백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정에서 불리하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나타난 김석일의 전 아내 정지원의 등장에 그는 흥분한다. 차분하게 보이는 피해자 정지원, 그녀는 김석일에게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그와 만남을 요청한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거로 믿고 형사는 김석일과 정지원의 대면을 허락하고, 사건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기를 바란다.


형사 박상하는 정지원을 보면서 죽은 아내와 병원에 있는 아이를 떠올린다. 이유가 다를지라도 비슷한 환경에 처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정지원에게 더 눈길이 가고 그녀의 행보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자기가 봤던 불행을 정지원이 똑같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박상하는 사건에 다가갈수록 이 불행의 시작과 과정, 끝을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만 관심을 보였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건. 죽은 김도현은 평소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던 아이였다. 아버지의 분노가 아이를 향했고, 아이는 이유도 모른 채로 그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아동학대 사건을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왜 어른의 분노를 아이에게 푸는 걸까 싶어서.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행동으로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모르는 어른들의 문제를 왜 아이에게 풀려고 하느냔 말이다.


죽은 아이 김도현의 불행은 아버지 김석일과 어머니 정지원에게서 시작됐다. 아내에게 집착했던 남편, 분명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선택한 아내, 그 집착을 이기지 못해서 술과 폭력으로 아내를 다스리려 했던 남편, 참으면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결국 가해지는 폭력의 강도를 이기지 못하고 떠난 아내. 그리고 남편은 남은 아이들을 맡았다. 아이들보다 자신의 불행이 더 컸던 엄마는 아이들을 두고 떠났다. 아빠는 남은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었을까? 아니다. 평소 강한 집착과 폭력, 술에 의존하던 아빠가 하루아침에 변할 리는 없으니까. 그 폭력의 한가운데에 놓인 아이는 결국 아빠의 손에 살해되었다. 이 사건의 개요는 그러하다. 하지만...


아쉬운 장면들이 많다. 아동학대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볼 수 있는데, 그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 살릴 수 있는 아이가 죽는 경우를 떠올리게 된다. 어른들이 선택하는 자기 안위, 자기가 감당하기 어렵다며 이 관심의 당사자에서 발을 빼는 경우, 다가오는 분노의 분풀이로 아이를 향하는 시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일은 자연스럽고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면서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본능이라고 믿었지만, 그 역시 당연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불행을 감당하다 보면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감싸고 나를 보듬는 일이 먼저였다. 작가는 소설 속 두 가정에서 비롯한 아동학대를 보여주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이 당연한 것도 아니고 본능도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육아 우울증이 만든 아동학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며 시작된 아동학대. 두 가정의 끝은 참혹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였다. 아이를 낳으면 당연하게 주어지는 모성애, 부성애는 없다. 사랑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지지 못할, 부모의 자세였다.


"우리 가족 말이에요. 남의 눈에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싸구려 패키지 같은 그런 가족이었다고요." (304페이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가정 안의 일. 가정 폭력이나 아동학대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관심 두지 않으면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체면과 두려움, 그거 한 대 맞았다고 뭐 별일이냐는 시어머니의 시선 같은 것을 감당하기가 어렵기도 해서다. 무엇보다 흔히 말하는 남의 가정사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고민에 빠지는 일도 생긴다.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하고만 있어야 할까? 정지원이 싸구려 패키지 같은 가족이었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다. 남들 눈에 그럴싸해 보이는 가족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있으면 화목해 보이는 가정.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보이는 가정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어렵다. 아마도 작가는 이 상황을 마주하면서 겪는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만드는 이 고통의 순간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감춰지고 어떻게 마무리되어가는지를. 어떻게 그 불안과 고통을 막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독자와 나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향해가면서 정지원이 구치소에 있는 김석일을 만난다. 줄곧 차분하게 있던 정지원이 김석일에게 한마디 하는데, 그때 눈치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누가 웃게 되는지를. 반전이라면 반전인 그 부분에서 추리소설의 묘미를 느낀다. 정해연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동안 만나왔던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나 재미는 좀 덜하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준 건 좋았지만, 푹 빠져 읽고 싶었던 기대를 생각하면 김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가독성은 좋아서 금방 읽힌다. 등장인물의 사연 하나하나 듣는 것도 괜찮았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형사 박상하의 다짐이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담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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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짐을 꾸리는 일부터 낯선 곳에서 고생하던 시간이 별로라면서, 그런데도 시간이 된다면 어딘가로 움직이는 마음이 참 모순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귀찮다고 여기는 내가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던 순간이 작년 내내 계속이었다. 코로나로 변한 일상이, 처음에는 좀 견딜 수 있다고 여기던 마음이 점점 힘들어졌다. 움직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여행하고 싶어도 불가능해진 현실 앞에서 당황했다. 우울하고 슬펐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던 일상이,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도 된다면서 미루기만 했던 일들이 불가능해지니 코로나 이전의 날들이 감사했다. 별일 없이 지내던 일상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커피 한 잔의 소소한 행복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 날들이었다. 거기에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그 소소한 날들이 어떤 것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의 오늘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오늘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스쳐 보낸 일상의 단편들을 그려낸다. 어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웃지 않는 페이지가 없었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 당황해서 소리 내지 못하고 나오는 웃음. 그래, 우리 이런 맛에 웃으면서 살아왔었지 싶은 이야기에 혼자 적어놓은 일기를 보는 기분이었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이렇게 모여서 삶이 완성되는구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날들의, 평범한 날의 소박한 기록이었다. 너무 특별해서 기억하고 자랑하고 싶은 날이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순간들을 사진 찍어놓는 듯하다. 사실 지나고 보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날보다 어떤 사건이나 특별한 날이 더 잘 기억나는 건 맞다. 그러면서도 그 특별함 속에 자리한 평범한 날들이 잊히지도 않는다. 가끔 그렇게 별일 없는 날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을 채우는 시간 속에서 평범한 일상의 기억이 더 애틋하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가 이렇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듣다 보면 우리의 일상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것. 작가가 부리는 마법일지도.


<오늘의 인생2, 138페이지>

 

오늘의 인생 2는 그 마법의 연장선에 있다. 여전한 날들의 평범함, 그 평범함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찾아내는 삶의 기쁨인 기록이다. 거기에 작년 한 해 우리가 고통스럽게 견디던 코로나의 일상이 담겼다. 이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던 날들일 것이다.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고, 식당이나 커피점에 앉아서 먹지 못 하는 일이 생기는, 매일 브리핑하는 확진자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옆을 지나가는 누군가를 피해야 하는 공포까지.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을 지낸다. 하루하루 식사를 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날들을 이어간다. 평범하지 않은 날들 속에서 평범함을 살아간다. 작가의 일상을 또 한 번 마주하면서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세계가 이렇게 변하게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특이하면서도 그럴 수 있음을 공감한다. 겨울날의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드라이를 켜고 머리카락을 데우는(?) 일이라니. ^^ 이런 부지런함이 있을까 싶어 웃음부터 났는데, 차가웠던 머리카락이 따뜻해지면 기분이 좋다는 말에 격한 끄덕임을 보냈다. 그럴 수 있다. 차가움보다는 따뜻함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손끝에 닿는 그 느낌이 그대로 마음이 전해져온다고 생각하면, 겨울 아침의 드라이하기는 충분히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작가가 보여주는 그 간결한 선의 그림이, 많은 생각보다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그대로 담아내면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는 작가는 우리이기도 하다. 많은 일에 지친 것 같다며 차 한잔 간절하지만 아무 가게에도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품은 모습은 낯설지 않다. 주택가 어느 골목에서 나는 저녁밥 냄새에서 그리움을 찾기도 한다. 삶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 다가와서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가끔 감추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은가. 아닌 척, 괜찮은 척,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안 듣는 척하면서, 일상의 사소함에 관심 없이 살아가고 싶어지는 마음. 어쩌면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계에 속하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버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를 전한다. 작가가 전하는 일상의 가장 큰 힘은 공감일 것이다.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하루하루가 이렇게 충만할 수도 있구나 싶은 감동일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어야지 하면서 향하는 걸음이 가볍고, 차 한잔에 수다 떠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전철에서 아빠의 어깨에 기대어 자는 아들의 모습에 언젠가 기억할 오늘을 상상하고, 꽃가루를 피해 도쿄를 떠난 여행지에서의 만족감 같은 일이 일상을 반짝이게 한다.


<오늘의 인생2, 64페이지>

 

어쩌면 지나간 오늘은 붙잡을 수 없는, 지나간 하루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자기보다 어린 학생들을 마주하면서 종종 그들이 가진 젊음과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 나이여서 아름다운, 그 나이가 지나면 알게 될 순간들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언제나 그렇다. 이상하게도 인생의 많은 일은 지나고 아는 경우가 많더라. 그래서 때로는 후회가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간 날들을 떠올리며 애틋해지기도 한다.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세월이지만, 계속 이어지는 인생이기에 오늘의 인생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내일의 나를 기대하면서 사는 날들일지도.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간다.

 

휴일을 보내면서 꼬박 집 정리를 하고, 길가의 고양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갓 구워나온 빵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주문하는, 기분 전환 삼아 빨간 지갑을 사러 갔다가 그냥 나오고, 헬스장에서 영상을 보며 운동하고, 여행길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접어두는, 아무리 봐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는 작가의 이야기이기에 그 소박한 한 마디에 마음이 향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다짐하는 작가의 바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안을 안고 산다. 마음대로 만날 수 없고, 어디로든 떠나는 것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날들이다. 그런 오늘의 인생이 감사하다. 언젠가 마주할 내일, 오늘의 인생을 기억하며 애틋함에 수다의 주제로 오를지 모른다. 그때의 우리는 이랬다고, 그때의 불안은 정말 힘들었다고, 그래도 살아온 오늘이기에 소중하다고 말하면서. 울고 웃으면서 채워진 오늘의 인생이라고 말이다.

 

 

소심하게 덧붙이자면,

작가가 책 속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책들의 제목을 메모하는 즐거움도 컸다는 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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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평온을 아껴주세요 - 마인드풀tv 정민 마음챙김 안내서
정민 지음 / 비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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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들. 나에게만 찾아오는 불안의 순간은 아니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한번 그러고 지나가면 그만일 텐데, 이상하게도 무슨 고질병처럼 한번이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곤 한다.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자꾸 불안함은 커지고, 빨리 해결하지 못 하는 일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잠을 깊이 자는 건 더 어려워진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낮의 시간이 무너져 내린다. 이대로 일상을 무너뜨리고 계속 불안한 시간을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기에, 우리는 그 불안의 순간을 물리칠 방법을 생각한다. 끊임없이 이 위기를 떨치고 싶어 한다. 휴대전화에 집중하며 현실의 문제를 잊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감정의 문제를, 내가 찾아야 할 평온을 현실에서 해결해야 한다. 저자의 명상은 그런 의미로 우리를 평온하게 하기 위한, 우리의 불안을 잠재우며 일상의 불안을 떨칠 방법이 된다.

 

초등학교 때의 여름방학을 기억하시나요? 마음 놓고 쉬다가 개학일이 가까워지면 그제서야 헐레벌떡 방학 숙제를 하던 그때 말입니다. 후회와 걱정 사이를 널뛰기하듯 옮겨 다니지 않고 매 순간을 살았기에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았던, 참 좋은 나날이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본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134페이지)

 

생각을 중단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이 책은 저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문장으로 옮겨온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알던 명상을 차분하게 알려준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상으로 우리는 어떤 평온을 맞이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얼핏 명상은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명상 그 자체에 빠져들면서 내 마음의 평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아닐까 한다.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걸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명상을 굉장히 멀리 있는 것으로 여겼다. 특정한 자세로 있어야 하고, 고요하고 또 고요한 장소가 필요하며, 어디로 가서 뭘 배우는 명상의 특정 장소로 찾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옷차림도 정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명상은 그 어떤 물리적인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은 가장 편하고 가장 부담 없이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이었다.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지 않으며, 내가 가장 편한 복장으로 임하면 된다. 결가부좌(가부좌의 자세로 앉는 좌법)로 있는 것도 좋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반가부좌여도 괜찮다. 내가 편하게 앉아서 마음을 비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결가부좌를 먼저 말하는 건 그 자세가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주기 때문인데, 누구나 그 자세로 시작하는 게 쉽지는 않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더 어려운 자세이기도 하기에 그냥 의자에 앉아서 명상해도 괜찮은 거다. 자세가 불안하고 불편하면 마음을 평온은 어려워지기 때문에, 꼭 자세에 대한 강요는 의미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세를 알게 되고, 이제는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면 된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주변의 소음에 무감각해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 이렇게 되면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싶겠지만, 명상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명상은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연습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가지 못하기에 언제나 그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며 사는 게 익숙했을 텐데, 명상하면서 우리가 그 감정이나 억누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감정과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데, 이는 또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만은 없기에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존재에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외부 자극과 무관하게 맑은 마음과 머리로 매일 행복하고 상쾌하게 살아가게 하는 명상을 강조하는 게 저자의 말이다.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는 것. 내 마음의 평온으로 가는 길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면 좋지만, 그게 또 쉬운 일은 아니기에 내가 허락할 수 있는 시간에 꾸준히 하면 된다. 하루 10분이어도 좋고, 시간이 된다면 점점 명상의 시간을 늘려가면 된다. 보통 하루에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마음을 맑게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명상을 했다면, 저녁에는 오늘 하루의 돌아봄과 내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생각으로 명상을 마무리한다. 특히 1부에는 명상을 소개하고 명상 준비를 말해주면서 명상의 시작을 열었다면, 2부에서는 각 상황에 맞는 명상의 방법과 마음가짐을 언급한다. 그냥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만일 것 같았는데, 우리가 부딪히는 온갖 감정의 순간을 나누어 정리하면서 그 불안과 마음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명상을 소개한다. 통증 완화를 위한 셀프 힐링, 과거의 상처를 돌보기 위한, 원망하고 미운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 수시로 찾아오는 막연한 불안을 해소하는 나무 명상, 나를 마주하며 비우기 위한 명상 등 우리의 일상을 차지하는 거의 모든 순간의 마음을 다스린다. 결국 내 삶의 주도권이 나의 것임을 알게 하는 시간이다.

 

3부에서 소개하는 묻고 답하기의 시간은 명상을 더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명상하면서 바뀌는 감정의 변화가 또 다른 불안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느낄 때 답을 찾게 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애쓰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을 묻기도 한다. 좋은 생각만 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얻고 싶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질투와 열등감으로 괴로운데 마음을 다잡기는 힘들고, 때로는 무기력한 일상을 어떻게 떨쳐야 하는지 묻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찾아오는 생각들에 놀라거나 저항하지 않고 호흡을 이어간다고 한다.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일어나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내면이 고요해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이어간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마음이 비워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결국은 시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자꾸 정답을 얻으려 하는 마음은 내재된 불안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나면 생각지도 못했던 자유를 얻게 되죠. 어떤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편안하게 하는지, 어떤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지를 관찰하고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정말로 평온해지는 비결입니다. (14페이지)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깨닫는 길이 명상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과 생각을 내 뜻대로 하지 못할 때 평온이 깨지는 것 같다. 그 평온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명상이라고 생각하면, 명상은 나를 안정되게 만드는 더없는 방법이리라. 무엇보다 마음을 비우고 나를 평온하게 만드는 명상에 빠져들게 하는 시간이었다. 명상이 우리 일상의 불안과 부정적인 것들을 한 번에 사라지게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명상으로 나를 비우며 일상의 안정을 찾아가려는 시도는 가능하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제까지 명상의 벽을 가졌던 이들에게 명상의 길을 열어주는 좋은 지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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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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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고 해서 더 궁금한 작품이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에 더 관심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 겐조는 해외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한다. 어렵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성장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그는 지식인이 되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고급 관료의 딸인 아내와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친정에서의 생활과 결혼 이후의 삶이 다른 것을 비교하곤 한다. 남편이 현실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내는 남편을 돈벌이에 관심 없는 괴짜로 보기도 한다. 어느 날 그에게 예전 양부가 찾아오면서 그는 과거의 망령에 시달린다. 그의 주변 사람들, 양부와 누나 형, 심지어 그의 장인까지 그에게 찾아와 경제적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그의 모든 일상은 돈과 연결되어 있었고, 아내와의 갈등도 커진다. 그렇다고 주변인의 도움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의 형편에 겨우 돈을 마련해서 그들의 요구를 해결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을까? 돈이 없어서 병원 문턱에도 못 가보고 죽은 사람이 있는 걸 보면, 돈으로 인간의 목숨까지 주관할 수 있다는 게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테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의 감정에 얽힌, 사랑과 우정, 가족과 같은 문제는 돈과 연관이 없다고, 돈으로 계산하거나 돈이 끼어들 이유가 없는 관계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 어린 시절에 돈으로 거래되는 인간관계를 경험했다. 돈 때문에 자식을 입양하고 파양하고, 다시 또 돈 때문에 파양한 자식에게 찾아오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보면 인간관계가 금전 관계에 지배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주인공 겐조는 이러한 돈이 중심이 되는 관계에서 고민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가진 삶의 방향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부자가 되는 것과 위대해지는 것 사이에서 고민한다. 사실 나는 읽으면서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위대해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자기 삶의 위대함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돈이 휘두르는 인간의 삶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듯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면 되는 일인데, 실상 현실에서 마주치는 돈 문제는 그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기억할 테지. 그러니 돈 앞에서 추해지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느니 자기 명예를 가진 삶을 누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는 자기가 추구하는 문학이나 글쓰기, 강의하는 것을 위대한 삶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난에 허덕이는 오늘이 현실인데도 그가 추구하는 삶을 바라보기만 하는 거였다. 그런 그를 보고 아내는 남편의 시원찮은 돈벌이를 한탄하고, 남편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한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가 바라는 이상향만 추구하는 남편에게 아는 어떤 관계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지. 그의 아내 역시 남편이 바라는 아내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누가 누굴 탓할 수는 없으니까.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에 어려웠던 작품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흔히 말하는 염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인간이기에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었는데, 겐조가 경험한 인간다움은 돈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내린다.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가슴이 떨리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겐조 앞에 나타난 양부나 누나, , 장인과 같은 상황이 나에게 닥친다면 나는 겐조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질 때, 누구에게 손을 벌려야만 할 때가 생긴다면 한때의 인연으로 비빌 언덕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인연을 빌려와서, 그것도 가슴에 멍을 들게 한 잔인함을 기억할 대상에게 기대야 한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건 아마도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겐조가 볼 때 누구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인생이 없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키우고 버리는 양부의 행태는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인제 와서 손을 내미는 것은 양부의 추레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학교수의 누나이면서도 문맹인 누나는 기침을 달고 살며 수다가 끊이지 않는 여자다. 불량한 남편을 생각하면 누나가 안쓰럽지만 동시에 창피하다. 두루뭉술 자존감 없이 살아가는 겐조의 형 역시 그는 한심하게 여긴다. 가진 게 많을 때는 그를 무시하는 듯하다가 사위에게 돈을 빌리러 오는 장인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다른 시선을 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나로 살며 나의 인생을 바라보지만, 타인 역시 자기 삶을 누리며 자기 모습을 본다. 각자의 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그저 그뿐이라는 진리를 얻은 건 아니었을까. 결국, 각자 자기에게 맞게 살아가며 자기 행복을 찾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 각자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의 삶에 찾아와 존중을 망각해버린 인물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기의 실제 이야기를 소설에 담으면서 자기 행복을 더 강조하게 되는 건 아니었을까 싶다. 끊기 어려운 인간관계로 비롯한 불행의 시간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게 한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건 한 개인의 문제로 머물지 않는 사회적 관습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한다. 가족이니까, 형이고 누나니까, 너를 키웠으니까, 아내의 아버지니까. 개인의 삶을 존중하기보다는 공동체이니까 강요되는 것들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개인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의 시간을 담아낸 것 같다.


겐조는 오로지 금전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 욕심을 한참 못 따라가는 유치한 잔머리를 최대한 굴리고 있는 노인을 차라리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움푹 들어간 눈을 지금 반투명 유리 덮개에 갖다 대고 연구라도 하는 것처럼 어둑신한 등불을 응시하고 있는 그가 가엾어 보였다.

그는 이렇게 늙었다.’

시마다의 평생을 압축한 듯한 한마디를 눈앞에 떠올린 겐조는 자신이 과연 어떻게 늙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신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마음엔 분명 신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만약 그 신이 그의 일생을 통찰한다면 이 탐욕스러운 노인의 일생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36~137)


원작의 제목을 풀이하면 길가의 풀이라고 하는데, 인생에서 길가의 풀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담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삶의 방향을 보고 가는데, 누구에게나 바라는 삶의 목적지가 있을 텐데, 그 길을 그대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인지도. 그 방해 요소의 대부분은 돈이겠지만, 돈을 품은 인간의 이기심이 체념과 예의를 넘어서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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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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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젊은 시절의 탐정 사와자키를 모른다. 그가 와타나베와 함께 꾸려간 탐정사무실의 분위기나 그들에게 찾아온 의뢰인들의 사정, 사건의 모습, 해결 과정에서 나올 탄식의 감동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은 만나야 할 시리즈이자 작가 하라 료의 작품들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런 기회에 50대에 들어선 사와자키를 먼저 만나게 될 줄이야.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지도 않고, 전작의 사와자키 활약을 모른다고 해도, 이 작품을 읽는 일에 큰 문제는 없다. 그저, 그의 젊은 시절 활약을 모른 채로 읽었기에 지금의 감동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아쉬움이 클 뿐이다.


150만 독자가 열광했다는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 문학, 평생 한 시리즈만 집필해왔다는 작가의 끈기를 더 눈여겨보게 하는 사와자키 시리즈. 일본 하드보일드 역사이자 전설로 새겨졌다는 시리즈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작품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 14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떤 작품이기에 그 오랜 세월을 담아내야 했는지 궁금했다. 막상 읽어보니 시리즈의 연장선이라고는 하지만, 하나의 작품으로만 만나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사와자키는 또 다른 작품으로 독자에게 다가오겠지만, 이 작품 하나의 이야기로 만나봐도 모자랄 것 없다.


신주쿠 뒷골목의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역시 세월의 색을 입었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탐정 사와자키. 어느 날 중년의 신사가 그의 사무실을 찾는다. 은행의 지점장이라고 말하는 그의 의뢰는 은행의 어느 고객 뒷조사를 해달라는 것. 상당한 수수료를 받고 의뢰에 착수한 사와자키는 곧 뒷조사의 대상이 사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 따른 진행 상황을 의뢰인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의뢰인은 연락이 닿지 않고, 오히려 의뢰인을 만나러 간 은행에서 복면강도와 마주치는 일이 발생한다. 사와자키가 의뢰인을 만난 건 의뢰인이 처음 탐정사무실로 찾아왔던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마주하면서 그는 도대체 누구인지 모를 의뢰인의 정체를 찾아내야만 했다.


읽으면서 이 작품의 주된 사건은 무엇인가 파헤쳐야만 했다. 의뢰인은 의뢰를 맡기고 사라졌고, 갑자기 은행에 나타난 복면강도는 허무하게 붙잡혔다. 누구인지 정말 알 수 없는 이의 집에서는 욕실에서 사람이 사망한 채로 있었고, 연관도 없어 보이는 야쿠자는 그를 찾아와 귀찮게 하기까지 한다. 서로 연결될 게 없는 두 개의 상황이 그를 복잡하게 하는 것 같은데, 그건 이 소설을 읽는 나의 시선일 뿐이다. 막상 이 사건을 대하는 사와자키의 머릿속은 간단하지 않았을까? ^^ 이미 죽은 사람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그 이후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그를 뒤쫓는 야쿠자의 발자국들은 돈에 얽힌 다른 이야기를 채워간다. 그리고 그 주변에 존재하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써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를 찾고 싶은 청년의 세상살이는 사와자키를 만나면서 삶의 자세 하나를 배웠을 테지. 사와자키 역시 젊은이의 바람과 인생을 한 번 더 엿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그러면서 지나온 자기 삶을 반추하게 될지도 모르지. 어쨌든 예고 없이 찾아온 사건과 사람들에게서, 사건과 연관되었지만 사건과 상관없이도 채워가는 마음이 있었다.


굉장히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탐정 캐릭터였다. 물론 의뢰인의 맡긴 사건 해결을 위해서라면 주관적이어서도 안 되고, 탐정 개인의 감정이 담겨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이기에 보일 수 있는 어떤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사와자키는 맺고 끊는 게 분명하게 보이는 한 사람의 캐릭터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무심하게 내뱉는 한마디는 가슴에 꽂히기 일쑤였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담담하게 보고 부딪혔다. 때로는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뛰어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더라. 어떤 계산이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문장 곳곳에서 보이는 그의 활약은 정의를 바탕에 둔 그 자체였다. 꼬리를 물 듯 이어지는 사건 앞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그의 심장은 뭐로 만들어졌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야기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고, 이 시대에 휴대전화 없이 탐정 활동을 한다는 아날로그적 방식도 매력적이다.


전작에 관해 살펴보면서 이 책을 읽었다. 사와자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을 읽는데 그를 더 잘 알고 싶기도 해서다. 이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신주쿠 경찰서의 니시고리, 다지마, 야쿠자인 하시즈메, 사가라, 그가 이용하는 전화 응답 서비스의 허스키 보이스 여성, 르포라이터 나오키. 전작들에서 꾸준히 함께해온 인물들이었으리라. 이번에도 그들의 협조로 탐정 사와자키는 차분하게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그의 머릿속에 담긴 사건의 해결 방식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막상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의 철저한 계획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나 싶은. 냉소적이고 무관심해 보이던 시선까지 그의 일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 그런 것을 보다 보니 전작이 더 궁금해진다. 지금보다 젊은 시절 그의 활약은 분명 더 흥미롭고 활동적이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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