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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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과거를 뒤로하고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는 밤.

실패보다는 희망을 말하는 밤.

누군가에게는 과오를 덮어줄 축복처럼,

위로처럼 눈송이가 내리는 밤. (5페이지)


짧은 단편 속의 이들에게 공감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 어쩌면 나와 다르지 않을 일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상처받고 아픈 시간을 보내는 상실의 감각을 드러낸다. 언제나 그 시간의 끝은 있고, 오지 말라고 밀어내고 붙잡아도 기어코 우리 앞에 다가오고야 마는 순간은 또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다. 그러다가도 문득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순간을 불러온다. 알게 모르게 잊고, 잃고 살아왔던 것들. 현실에 치여서, 겁나고 무서워서 포기하던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게 한다. 무심하고 무뎌지려 애쓰던 감각들이 되살아날 때마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가슴.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보다 하고 걸어왔는데, 어느 날 문득 멈췄을 때 비치는 지나온 시간이 인생의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기대가 생기기도 하는 나날.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더 시선이 머무는 이유다.


대학교 행정조교로 일하는 여자는 오늘의 삶이 불안하다. 언제나 꾸었던 꿈은 항상 궤도수정을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애인과의 관계도 위태롭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녀의 시간이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선뜻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도 못하는 일상. 언제까지 이런 삶이 계속될까 궁금하면서, 걱정과 근심이 앞서는 오늘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옳은 걸까? 「언제나 해피엔딩」의 주인공은 박 선생의 한 마디에 기운을 얻는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불행한 시간이 아닌 오늘 여기에 집중하며, 그래도 다른 의미가 있는 인생을 걸어가는 희망을 품는다. 그래, 괜찮겠지, 괜찮아지겠지, 나아지겠지. 우리가 오늘의 불안을 안고 살며 언제나 외우는 주문을 여기서도 본다. 어쩜 이렇게 비슷한 인생들인지, 안쓰러우면서 안도한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로받는 기분이다.


칼칼한 바람이 부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상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생각할 조금의 여유마저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생각했다. 우리로 하여금 끝내 자신의 고통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그것은. (중략) 이 세계는 사람들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고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타인에게 잔인해지도록 종용하지만, 이런 세계에 살더라도 그가 아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뿐이니까. (101~102,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공항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동안 공항에 가본 적은 없다. 「완벽한 휴가」의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공항 가까운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자주 갈 거로 여겨지지만, 그들에게 공항은 언제나 계획에만 있는 장소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던 탓일까. 그런 이들이 어느 날 공항으로 향한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함이 아닌, 말 그대로 공항에 다녀오기 위한 목적이다. 여름휴가 기간이었다. 폭염이 기승이었고 전기세를 아끼고자 에어컨도 쉽게 틀지 못한 나날. 그들은 공항에서 휴일을 지낸다. 노트북을 앞에 두고 각자의 일을 하고, 공항 안에서 음식을 먹는다. 시원한 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일이 괜찮은 것 같으면서 여자는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을 떠올린다. 기억하지 못하고 지냈던 어떤 날 속의 아빠는 그리움이자 애틋함이다. 공항에서의 휴가는 완벽한 날이었다. 비슷한 느낌으로 「어느 멋진 날」은 더운 날의 해변에서 마주친 한 남자의 시선이었다. 여자는 기혼이었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책장을 넘기던 그때 무심코 마주친 시선. 남자는 여자의 치마 밖으로 나온 발을 보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여자는 묻지 않았다. 대신, 남자와 가벼운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여자는 자기 발에 신경이 쓰인다. 은근히 설레면서 자기 발을 바라본다. 언제였던가, 자기에게 아름다움을 말해주거나 그런 시선을 보낸 사람이 있었던 게. 낯선 곳에서의 낭만 같은 느낌으로 여자는 그날을 기억한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혼자만 오래 간직하고 싶은 수줍은 추억으로 말이다.


「참담한 빛」의 어린 부부는 배 속에 아이를 품고 침몰하는 배의 뉴스를 듣는다. 처음 아이를 갖고 아이를 잘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용기는 배의 침몰 소식에 불안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희망이 기적이라는, 희망이 불처럼 번진다는 말에 또 한 번 용기를 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 세상 살아가는 걸음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다짐 같은 게 아닐까. 우리가 어떻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라며,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가는지 그 시작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 단편이었던 「아무 일도 없던 밤」처럼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을 바라보는 요양사의 시선과 대조적이다. 곧 운명할 것 같은 노인의 상태, 멀리 있는 딸들이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자 달려오고 있지만, 폭설이라는 기상이변으로 시간이 지체된다. 무심하게 환자들을 대하며 감정을 배제하고 살아온 요양사는 고요하게 누워 딸을 기다리는 듯한 노인을 보며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남편이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 몰랐다고. 남편이 돈을 벌겠다며 떠나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또 죄책감을 느꼈다고. 애틋한 부부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부부의 모양새를 하고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서로가 조금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떠난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쌓는 좋은 기회였을지도 모르지. 여자는 다시 만나게 될 남편과의 감정에 뭔가 기대하지는 않았을까?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조우할 남편과의 모습에 괜찮은 가족의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혹여 사지로 가는 남편을 붙잡지 않았던 것에 죄책감을 느낀 걸까 싶기도 하고. 우리 앞에 닥친 불행에 스스로 갖는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까? 언제 어느 때고 우리 삶에 끼어들 기회를 엿보는 불행이란 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불안과 자책과 싸워가는 게 우리 아닐까.


그녀는 허기가 져 병실에 비치된 냉장고를 뒤지다가 누군가 사놓은 딸기를 찾았다. 향긋했던 딸기는 뭉개지고 짓물러 있었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딸기의 뭉개진 부분들을 과도로 도려내고, 얼마 남지 않은 과육을 입속에 허겁지겁 집어넣었다. 딸기가 달았다. 히터를 세게 튼 병원은 창밖의 세계와 완벽히 단절된 듯이 비현실적이었다.

"오늘 밤은 죽지 말아요."

그녀가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226~227페이지, 아무 일도 없는 밤)


엄마와 딸의 여행을 그린 「비포 선라이즈」는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여행의 의도를 보는 듯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딸은 엄마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한다. 엄마가 고생하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다닐 수 있게 여행 일정을 잡은 딸은 출발하기 전부터 엄마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여행 다니면서도 서로 여행 스타일이 다른 것에 당황하며 급기야 짜증이 나기도 한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던 딸은 어느 날 숙소의 창가에 앉아 일출을 기다리는 엄마를 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해 뜨는 것을 기다리자 싶었던 엄마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행 일정에는 없던, 엄마와 숙소의 창가에 마주 앉아 부모님의 세월을 듣는 일. 아버지를 생각하며 애틋한 표정으로 부부의 젊은 날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표정에는 여행보다 더 좋았던 시간이 그대로 묻어 있다. 해 뜨는 것을 보겠다며 기다리던 엄마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고, 서서히 드러나는 해의 눈부심에 찡그리는 표정마저 행복하게 보인다. 엄마의 낭만을 이뤄주겠다고 시작한 여행은 뜻밖의 장소와 시간에서 행복한 여행이 된다. 여행의 의미가 바로 이런 거겠지. 우리가 꿈꾸는 여행도 같다. 같이 먹고 걷고 보고, 그러다가 좋은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진짜 여행인 거지.


딸을 만나러 프랑스에 간 아버지의 낯선 시작이 펼쳐질 「여행의 시작」, 옛 연인과 이십 년 만에 추억의 장소에서 만나는 「오직 눈 감을 때」, 첫 키스가 무섭다며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연인이 귀여워 안아주던 「우리, 키스할까?」, 불면의 밤에 눈을 뜨고 외로울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건 얼마 전에 구조한 유기견뿐인 「그 새벽의 온기」, 갑작스러운 누나의 동물원 방문이 어색했지만 언젠가 그리워질 날이 될 것 같은 「봄날의 동물원」, 여행지에서 만나 여행지에서 헤어지며 다음을 말하는 게 쓸쓸하다는 걸 알게 되는 이별의 순간 「어떤 끝」, 사랑을 위태롭게 하는 현실 속의 자기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모두의 이야기이면서 또 각자의 이야기가 될 단편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건너가는 우리가 쉽게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 그렇게 우리는 어떤 끝을 만나고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평범한 주인공들의 평범한 일상을 마주하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으면서도, 어떤 날을 살아가는 내 모습 같아서 씁쓸하기도 했다. 왜 누구나 바라는, 피해갈 수 있는 순간들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짙다. 다들 비슷하지 않나? 불행을 피해가고 싶고, 불안을 감당하기 무섭고, 행복을 기다리고. 어쩌면 그렇게 바라는 행복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당연하게 마주치는 일상 같기도 해서 무던해지고 싶은데 또 그게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순간들. 우리가 사는 수많은 오늘이 그러하더라.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하고 말했다. (155페이지, 언제나 해피엔딩)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안하고 불행한 순간들을 맞닥뜨렸을 때의 우리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지나간 어느 날을 꺼내 보며 애써 미소 짓기도 하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오직 그것만이 방법인 것처럼, 그게 최선인 것처럼. 하긴,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는 방법도 그것뿐인데. 누군가의 마음, 누군가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찾아내는 이런 위안의 방식도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소설들로 또 배운다. 오늘은 사라져버릴지 몰라도 언젠가 오늘을 기억하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또 어떤 불행과 불안의 순간에 기적 같은 희망을 바라며 오늘의 흔적을 더듬어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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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연애소설
이기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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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짧은 소설들은 어느새 너무 웃픈 사랑 이야기로 자리 잡았다. 각 이야기의 제목이 어쩜 이렇게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에 혼자 웃으면서 씁쓸해졌다. 그러다가 결국은 웃으면서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독자가 되었다. 너무나 평범한 우리네 사랑 이야기인데, 왜 각자에게는 그렇게도 특별한 사랑으로 남을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된 듯하다.


부부가 오랜 세월 함께하면서 어떻게 정이 들고 늙어갈 수 있을까 했던 궁금증에 답을 준 <어떤 별거>는 한숨과 애틋함을 동시에 불러왔다. 아내와 더는 못 살겠다며 아들에게 투정하고, 가출 같은 별거에 당당함을 부르짖는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젠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며, 싸울 때마다 별거했던 아버지의 다짐은 대단했다.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의 건강 앞에서는 그저 걱정이 앞서는 한 남자였다. 어머니 관절약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며 잊지 말고 사다 주라는 아버지의 당부. 싸우려면 지독하게 싸우고 철천지원수가 되어 욕만 해도 될 텐데, 어머니 드시는 약이 떨어져 가는 걱정은 왜 하는 것인지. 어머니는 또 어떻고. 아버지 욕을 한 바가지 하면서도 평소 화장실 못 가서 힘들어하던 아버지의 선식을 챙겨준다. 이럴 거면 왜 싸우고 왜 별거를 하신다고 하는 건지. 이런 게 사랑이고 이렇게 부부가 같이 늙어가는 건가.


어린아이의 수줍은 사랑 역시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독감>에서 보여준 아이들의 행동에 '어머?' 하는 시선을 보내게 된다. 우리 어렸을 적 생각도 난다. 이런 마음이 뭔지 모르겠지만, 설레고 두근거리는 기분이 좋아서 마냥 웃음이 실실 새기만 했던 표정을 기억해본다. 독감으로 결석한 딸을 찾아온 같은 반 남자아이를 보고 의아해하던 느낌도 잠시, 남자아이가 가져간 딸의 마스크에 더 기가 막힌다.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쓰던 마스크를 쓰고 싶은, 학원에 가기 싫어서 감기 걸리고 싶다지만 그 아래에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렇게 티가 나는데 말이다. ^^ 아이의 마음이 이렇게 순수한가 싶으면서도, <개만도 못한>에서는 정말 키우던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 한 남자의 처절한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나도 데려가야지!" 이런 외침은 순간적으로, 완전 진심인 거다. 연애하던 남자와 여자는 충동적으로 강아지를 한 마리 분양받는다. 같이 살면서 같이 키우고, 3년여의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연애는 끝났다. 여자는 남자에게 강아지를 두고 떠났고, 남자는 강아지를 핑계 삼아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강아지를 센터에 맡기겠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고, 강아지만 데리고 떠난다. 으잉? 이게 아닌데? 남자는 예상 밖의 전개에 황당하지만, 여자는 진심을 드러내고 사라진다. 여자는 남자를 다시 볼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강아지를 두고 협박한 남자를 정리하고자 마지막으로 나타난 거였으니. 남자는 그런 여자의 마음도 모르고 절규한다. "개는 데려가면서 나는 왜 안 데려가냐구!" 아, 역시 현실에서 확인하는 사랑의 끝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이별하고 정리하는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의 노트북>을 보고 공감한다. 헤어지고 뒤늦게 돌려받은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사라진 사진. 여자는 자기 흔적을 남기기 싫다고 남자의 노트북 안의 사진을 지웠고, 남자는 남의 물건에 왜 함부로 손을 데느냐고 화를 낸다. 누가 잘못한 걸까? 남의 물건에 손을 덴 여자? 헤어진 여자 사진을 계속 보관하고 있던 남자? 남자와 여자는 싸웠고, 남자는 여자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여자는 헤어졌고, 남자는 헤어지자고 말한 순간부터 여자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무슨 타이밍이 이러냐. 헤어지자는 말에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헤어지고 있었고, 남자는 그 말이 무슨 신호탄이라도 되듯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니. 사람 마음이 이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한 순간들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이 너무 많잖아. 언제나 어긋나고, 언제나 후회하고. 그러다가 또 다른 인연에 용기를 내기도 하는.


<식혜 같은 내 사랑>의 성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마흔여덟의 노총각이다.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하고 손자 손녀 한번 보여드리지 못해 어머니께 불효하는 게 죄송한 나날이지만, 그게 어디 그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더냐. 선을 보고 여자를 만나도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면 연락이 뚝 끊기는 게 일쑤. 어느 순간 그도 결혼을 포기하고 지금의 가족 구성원에 만족하며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여자 동창 지숙을 보고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에 지숙의 소문은 금방 퍼지고, 마치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그런 지숙이지만 성구의 마음은 지숙의 현재를 더 사랑하는 일이 최선이었고, 지숙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든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니겠나.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외치던 성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날아갔을까. 마흔여덟의 총각 성구의 사랑은 이제 시작인 걸까. 시골 마을의 어느 잔칫날을 보는 듯한 기분에 자꾸만 성구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은 건 나뿐인 건 아니겠지?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은근히 짠해 보이면서, 은근히 그 짠내에 힘을 보태주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 같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게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모습인 걸 부정할 수도 없다. 드라마나 영화 대사 같은 표현을 하고 싶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현실 속 우리 모습 아닌가. 너무 투박해서 이게 사랑이고 연애인가 싶다가도, 이런 모습마저 받아주는 이가 있어서 인연인가 싶은 마음에 안도하고. 그래서 사랑이다. 너무 유쾌하고 경쾌해서 얼핏 사랑이 아니고 코미디인가 싶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이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 조금씩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사랑으로 위로받기도 하고 사랑에 아파하기도 하면서 그 시간을 걷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쉽지 않다는 건 너무 잘 아는데, 그 쉽지 않은 일 중의 하나인 사랑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그래서 더 어렵고 알 수 없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에휴, 쉽지 않구나, 사랑도. 마치 우리 삶처럼.


글쎄, 작가의 전작 짧은 소설을 이미 만나봐서인지. '누가 봐도 이기호의 글'이라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게 가장 웃음이 나는 일이었다. 씁쓸한 시선에서도 웃음을 만들고, 찌질한 외침 속에서도 당당함을 보여주는 그만의 방식이 재미있다. 아, 세상 이렇게 살고 싶구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의 시행착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은근한 처세술을 배우는 기분도 든다. 이게 사랑이구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사랑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배움? ㅎㅎ 울고 웃는 인생사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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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황의건 지음 / 예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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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엄마의 이름은 '사메주'다. 본명이란다. 엄마의 별명이 어느 정도 유추가 된다. 옥떨메.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내가 어렸을 적에 옥씨 성을 가진 친구에게 붙여진 별명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를 왜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겠다. 단지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이름 때문에? 못생긴 외모의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써졌을 그 단어가 주인공 엄마에게도 붙여졌다. 그런데 이 무슨 모순인지, 주인공의 엄마는 누구보다도 예뻤다. 누가 봐도 예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외모의 여자에게 왜 옥떨메라는 별명이 붙여졌을까. 아마도 이름 때문이겠지? 기어이 개명까지 했건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처음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는 동안 엄마의 인생을 지배했다는 이름. 그리고 주인공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지배한 듯하다.


세 자매의 장녀인 샘. 엄마가 낳은 딸 셋은 모두 생물학적 아버지가 다르다. 그렇다면 성이 모두 다를 텐데, 무슨 일인지 엄마는 딸 셋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주었다. 사샘, 사강, 사솔. 택배 일을 하는 장녀 샘은 두 동생과 떨어져 살지만, 항상 동생들을 염려하는 맏이의 마음을 안고 산다. 동생들을 걱정하고 돌본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파도가 친다. 자식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간 엄마가 십몇 년 만에 돌아와서는 집을 팔겠다고 한다. 자식들 내팽개치고 남자 따라 미국으로 간 엄마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겨우 자식이 사는 집을 팔겠다는 건가? 이 억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해하던 중 엄마가 죽었다. 이미 병을 앓던 엄마는, 어쩌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볼 핑계를 찾던 건 아니었을까?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자식들 버리고 떠날 때는 그때의 간절함이 엄마를 휘감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몸은 병들고, 죽기 전에 한 번쯤 자식들을 보고 싶은 간절함이 또 엄마의 한국행을 만들었겠지. 그렇게 억지 쓰듯 자식들에게 돌아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간 엄마. 샘은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엄마의 자격도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알지 못하고 더더욱 믿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샘에게 엄마는 애증의 대상이다. 그리운 엄마지만 자식을 버리고 갔으며, 보란 듯이 돌아와 죽어버린 사람.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 샘은 시골 장터에서 메주를 발견하고 들고 온다. 한 번도 장을 담가본 적이 없는 그녀가 장을 담그겠다고 메주를 들고 오다니, 뜬금없다. 하지만 무언가 기대되기도 한다. 엄마를 보내고 메주로 불렸던 엄마와 같은 메주를 들고 온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렴풋이 어렸을 적 할머니가 담그던 장을 떠올린 그녀는 소중하게, 천천히 메주로 장을 담근다. 장을 담그는 것 그 자체보다, 장을 담그고 난 후가 더 어려운 나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얼마나 될까. 장을 직접 담가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무언가가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일. 가슴에 조급증이 일겠지만 참고 기다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 결과.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에 이런 기다림이 항상 필요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그녀가 엄마를 보내고 장을 담그고 난 후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한쪽에서는 장이 발효되어 가고 있고, 한쪽에서는 그녀의 일상이 무심하게 펼쳐진다. 택배 일을 하면서 변태로 생각했던 사람이 끝내 누군지 밝혀지면서 놀라웠던 일, 세 자매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감정의 문제들.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일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오늘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장이 익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스스로 성장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매라는 관계로 끈끈하게 다시 엮어가는 마음을 인정한다. 사랑 그게 뭐라고 한 인간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싶었던 그녀가 사랑을 알아간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면서, 발효되는 장이 제 역할을 다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면서 그녀는 배운다. 정성을 가득 들여 장이 맛있게 익어가게 하는 노력이, 관심이 인간의 일상에서도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인간은 성장하고 배워가고 있다고 말이다. 거기에 따스한 햇볕과 제때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기다리는 시간이 진짜 장을 만든다고.


사실, 장 담그는 일 자체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장을 담그고 난 후가 더 어려운 나날의 연속인 것을 동생들은 아직 잘 몰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여다보고, 장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온갖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야만 장이 맛있게 익는다. 장은 사람이 담그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 사람은 그저 메주와 소금물을 적당한 비율로 조립하는 역할을 할 뿐, 시간이, 바람과 볕이 장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도 동생들처럼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파주댁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돈다.

"이 도가지 속에 니거미랑 이름이 똑같은 메주, 그거시 딱 드러가 있어붕께, 니거미라고 생각함서 잘 봐라잉, 알았재?" (64~65페이지)


엄마에게 자식으로써 배신당하고, 세상에 믿을 거 없다고 스스로 격리하듯 외면하면서 살아온 그녀가 점점 세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솔직하게 들려온다. 우리가 어떤 테두리 밖에서 머뭇거리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을 때, 어느 선 안으로 들어가면 삶이 더 생생해지고 즐거워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그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마음을 샘에게서 그대로 발견한다. 더불어 샘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그 변화를 만들고 있는지 그대로 확인하게 된다. 그녀의 인생과 상관없다고 여겼던 장 담그는 일 하나가 삶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이럴 수도 있을까? 장을 담그고, 장꽃이 피어나고, 간장이 발효되어 제 색깔을 내고 익어가듯, 변화되어 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지 그대로 증명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울하고 슬픈 경험으로 꽉 닫힌 마음, 사랑을 알거나 배울 기회조차 없던 시간,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을 알기 어려웠던 일들. 동생의 사랑이 힘들게만 보였던 시선이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것도 볼만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을 한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몰랐던 세상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가 좁혀져 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 그녀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타인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앎이 대단해 보였다.


장이 발효되는 과정 자체가 기적 같았다. '평범한 소금물이 메주를 만나면 일상을 초월하는 간장이라는 액체로 발효해 간다는 사실이 새삼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작가의 말처럼, 듣는 나도 너무 신기했다. 서로 전혀 다른 존재가 만나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 과정에 덧대어진 한 여인의 이야기를 본다. 장녀(長女)이자 장녀(醬女)인 샘이 걸어갈 내일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사는 그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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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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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87페이지)


아버지와의 짧은 일화로 시작한 이야기는 점점 아버지의 시간을 깊이 파고들면서 무게를 더해가고, 결국은 우리 삶이 부모에게 시작된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거리가 생기고 마음이 달라지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반드시 함께할 수 없는 상황과 생각이 있다. 자연스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면서 부모에게 독립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하면 편한데, 또 그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은 마음이라 어렵다. 하루키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시간을 듣고 읽게 된 그에게 변화는 찾아왔으리라.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에 쌓아온 경험에 녹아든 누군가의 인생을 읽음으로써, 한 인간의 이해가 커졌을 테다.


어린 시절, 단독주택에 살았던 하루키는 항상 고양이가 함께 했다. 외아들인 그에게 고양이는 형제였고, 책은 소중하고 즐거운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 한 마리를 버리러 갔다. 고양이를 담은 상자를 해변에 내려놓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고양이가 하루키 부자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는 일. 어라? 무슨 일이지? 사실 고양이를 버리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고양이를 버린다는 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음 독하게 먹고 버리고 왔는데, 웬걸. 고양이는 그들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와 마치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표정이었지 않았을까. 고양이가 어떻게 돌아왔을까 싶은 궁금증과 이상하게 안심되는 마음에 묘한 순간이었다.


고양이에 얽힌 단순하고 가벼운 이야기로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어느 시대의 역사를 한 개인의 시간으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하루키가 이렇게나 사적인 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사실 그의 작품을 몇 편 읽었지만, 하루키 자신 외의 누군가를 말하는 건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굳이 이 작품을 써야만 했던 이유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언젠가는 문장으로 정리해보겠다는 그의 오래된 다짐이 있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억과 정리가 이 책으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다. 어린 아들에서 청소년으로, 성인이 된 그에게도 아버지와 다른 의견으로 가깝지 못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 다정한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버지 돌아가실 즈음에 화해 비슷한 마음을 나누는 게 모든 시간을 정리해주는 건 아니었겠지.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간 아니었을까. 정리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온전히 담아둘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 말이다.


그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데 특히 의아했던 건, 전쟁에 세 번이나 소집되었다는 거다.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두 번의 전쟁에 더 참전한 젊은 청년의 모습을 떠올리면 앞날이 까마득해진다. 이 전쟁이 끝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부터, 하고 싶은 게 많은 시절의 꿈을 꺼내지도 못한 슬픈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고요했던 건 아니다. 끊임없이 혼란스러웠고 부유하지 못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아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절에 입양되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파양되었고, 절을 운영하던 아버지(하루키의 할아버지)를 이어받는 일에 눈치 싸움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말년은 심한 질병으로 힘든 투병을 했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유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루키와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남처럼 살아왔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게 큰 이유일 수도 있지만, 그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는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계속 실망하게 했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순간도 편하지 않았을 마음에, 소설가로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언제나 그 완성의 빈구석에 아버지가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 언젠가 한 번은 이 이야기로 아버지와의 시간을 소환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 그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아버지의 시간 속에 자리한 참전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기억이 완전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의 기억들은 아버지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게 했다. 이제 막 입대한 초병들을 진정한 군인으로 만들겠다며 중국인 포로를 죽게 한 이야기는 끔찍했다.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아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하루키에게는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 후로도 계속되는 아버지의 참전 경험들은 어린 소년에게는 낯선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더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을 테지. 자기 길을 결정하면서 아버지와 소원해지고, 아버지와 마주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서로의 불필요한 마주침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가 언급했던 그 시간의 사건들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더는, 아직은 마주 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마음이 읽힌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기어코 한 번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이제야 들려오다니.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아프고 불편하게 했을 감정들이 이 책 속에서 많이 읽힌다.


그에게 지나간 세월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 것으로 아버지는 존재했다.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아버지 삶의 풍경들을 글로 쓰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렇게 짧은 문장과 글로 완성되었다.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말이, 치유의 방법의 하나가 어떤 생각과 기억을 글로 써보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언젠가 기억 속 아버지를 꺼내 보고 써봐야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치유의 방법을 하루키가 보여준 듯하다. 나는 아버지와 기억이라고 할 정도로 함께한 시간이 거의 없어서, 연필을 손에 쥐어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적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면 하루키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그에게 정말 다정하고 애틋한 아버지였던 것 같다. 희미하고 불완전하지만, 오랜 세월 속 아버지를 꺼내와 다시 대화하는 그의 시도가 부럽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62페이지)


누군가를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와 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바람으로, 어느 역사의 한 부분을 수정하지 않고 기록하는 방식으로 좋았던 책이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그 관계를 다독이고 정리하는 그의 이야기 자체가 고마웠던 글이다. 언젠가 나도 이 문장들처럼, 기록들처럼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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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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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나를 단단히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돌파구를 찾는다. 벗어나야지, 이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찾아야지 하고 말이다. 발버둥 치고, 애쓰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 능력 밖의 상황으로만 몰릴 때, 애써 달려왔는데도 늘 제자리의 고통만 느끼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더는 나아질 것 없는 내일이 기대되지도 않고, 내 존재감이 누구에게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절망의 끝에서 느끼게 되는 건 어떤 다짐이다. 더는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 내 존재 이유를 더는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체념한다. 단단하게 얽힌 인생의 거미줄에서 한 줄기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이 소설에서, 내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삶의 모습을 본다.


다나카 유키노. 방화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붙잡힌 그녀는 순순히 자기 죄를 인정한다. 옛 애인의 집에 불을 지른 그녀는 그의 아내와 쌍둥이 딸, 심지어 배 속의 아이까지 죽게 했다. 그녀의 죄는 사형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제 사형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다. 선고받았을 때 그녀가 한 유일한 말은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거였다. 순간 숨이 막혔다. 자기 의지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던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과 부모를 내가 정할 수 있지 않다는 건 너무 잘 안다. 그런데도 살면서 나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이유로 내 인생을 평가받는다. 유키노에게도 그녀가 원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배경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호스티스 출신으로 열일곱 살에 그녀를 낳았다. 사생아로 자라면서 새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고, 학창시절의 범죄 이력도 있다. 현재 그녀의 죄가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혹자가 말하길 너무 당연하게 만들어질 결과였음을 시사한다. 언론과 주변에서 말하는 그녀의 삶이 이럴진대, 그녀의 죄가 경감될 리 없다.


자기 스스로 사형을 원한다며 재판의 결과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은 범죄자의 마음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는 건 당연한데, 그 죄가 꼭 사형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 그녀가 반드시 사형받아야 할 정도의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녀가 왜 그런 죄를 저질러야 했는지 가장 진실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언론에서 언급하는 그녀의 풍문이 아니라, 가장 옆에서 가장 실제 모습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성장과 환경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일의 과정 정도는 들어주어도 좋은 거 아니냐고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 많았다. 많은 이가 모르고 또 많은 이가 아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파헤치는 과정이 그녀의 사형 선고 이후로 계속 들려온다.


딱히 변명도 반성도 하지 않은 채로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유키노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장마다 유키노를 아는 이들의 조용한 진술이 시작된다. 재판 방청이 취미인 여자는 재판장에서 본 유키노의 표정과 눈빛을 말한다. 유키노의 언니 유코는 그녀와의 성장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학교 동창 리코는 유키노의 과거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기억에서 꺼낸다. 유키노의 엄마를 알았던 산부인과 의사는 유키노의 탄생을 말했으며, 옛 애인이자 방화사건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인 게이스케의 친구 사토시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유키노를 이야기한다. 카더라 통신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루머 말고, 진짜 유키노를 겪으면서 알게 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말한다. 그들의 그런 진심 어린 호소와 진실 알리기에도 유키노의 사형은 변함없었다. 그녀 스스로 삶을 이어나가고 싶은 의지가 없던 것이다. 아마 이 사건이 아니었어도 그녀는 삶을 놓을 이유를 계속 찾아다녔을 것만 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간절히 살고 싶은지 내 마음의 의지를 찾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나 오는 내일이 더는 기쁘지 않다면 얼마나 슬플까. 여러 사람이 말하는 그녀의 진실로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상처로 채워져 있을까.


나는 그녀의 삶을 더 늘려야 했다. 분명히 이 순간에도 친구들은 유키노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편지에 적힌 글에 아무 각오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순간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미래는 없다. (366페이지)


그녀는 유죄일까 무죄일까. 소설은 그녀가 죄를 인정하고 사형 선고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지만, 독자가 지켜보게 되는 건 한 여자의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파괴되어 가는지, 오늘날 사형제도가 필요한지 아닌지 묻게 한다. 그녀의 삶을 이렇게까지 만든 모든 순간의 선택을 오롯이 그녀 책임이지만, 그때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상황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누구나 다 비슷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삶의 구석구석에서 배치된 요소들은 너무 다양하고 중요한 것들이어서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다르게 그린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왜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해주는 이가 없었느냐는 거다. 비록 부모도 환경도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적어도 태어나는 순간이 성장하는 시간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다행일 것 같은데. 왜 이런 다행은 간절히 바라는 이에게 찾아오지 않는 건지.


이야기 자체도 충분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묵직한 주제까지 더해줘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사건의 전개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점점 겉에서 안으로, 유키노라는 사람의 실체에 다가간다. 그녀가 정말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들이 하나씩 털어놓지 못한 순간들을 고백하면서, 결국은 이 사건의 끝에 있는 사형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쉬지 않는다. 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범죄이지만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그래도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이 상황의 딜레마와 사회에 관해 같이 고민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누군가의 조금씩 왜곡한 진실에,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간절함이 더해진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듣고 나면 충격이다. 혹시나 하는 독자의 바람을 무시하듯 벗어난 결말에 이 소설의 무게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 결말의 여운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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