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집이 좋은 집인가요?"

"잘 팔리는 집이요."

일 년 전,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 주변에서도 부동산에서도 똑같이 말했다. 잘 팔리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집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집을 팔고 나갈 때를 먼저 생각하고 하는 말이 우습기도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진지하게 새겨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손으로 처음 집을 구하러 다닌 때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눈 뜨고 코 베이는 시대이니 무섭기만 했다. 한참을 더 보러 다니면서는 귀찮고 힘들기까지 했다. 집값을 예상했음에도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심란하던 때였다. 이사할 때 필요한 이런저런 비용까지 생각하면 집값을 매매 가격 그대로만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큰돈이 오고가야 했으니, 결정도 신중해야 했다. 먼저 예산을 정하고 가고 싶은 동네를 몇 군데 추렸다. 그 동네의 거의 모든 집(아파트)을 보러 다닌 것 같다. 석 달의 주말을 집을 보러 다니면서 보냈다. 집을 보러 다닌 지 석 달 만에 겨우 집을 계약하고, 계약 후 거의 넉 달 만에 이사를 했다. 나에게는 첫 이사였다.


나는 한 존재를, 한 시절을 잃고 이 집에 왔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슬픔과 상실을 안고 시작되었지만 그조차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여기가 내 삶의 새로운 배경이 될 것이다. (181페이지)


사실 집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의 할 말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사하기 전 엄마와 살던 집이 내가 살던 집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이사를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 집에서, 나는 나왔고 엄마는 아직 살고 계신다. 작고 오래된 집이다. 여기를 고치고 저기를 조금씩 넓히면서 여덟 식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던 엄마의 공간이자 지금 엄마에게 남은 전부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니, 이제 더는 손댈 수 없는 낡은 집이 되었다. 길게는 1년이라는 시간을 잡고 이제는 엄마가 이사할 집을 생각하는 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울컥해지는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듣기만 했던 엄마의 시간을 상상했다. 나는 기억도 못 하던 시절, 엄마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이사 다녔다고 했다. 어떤 날을 한밤중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옮긴 적도 있단다. 내 기억에 없는 엄마의 그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전히 우리는 부자도 아니고, 가끔 생기는 큰일에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야 하는 생활이지만, 지금은 쫓기듯 이사하는 상황을 모면했으니 다행인 건가.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부자인 걸까.


대구 북성로의 첫 집은 저자의 가족이 모두 모여 살던 곳이다. 조부모와 부모, 부모의 형제들, 저자의 자매까지. 지금은 드문 구성의 가족이 그 집에 살았다. 오래전 우리가 익숙하게 생활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남편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이었고, 아내는 아이와 시부모를 돌보는 게 역할이라고 여겼던 시절. 시어머니는 아들 가진 존재로, 여자가 아닌 '시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자매는 한 방을 나누어 썼으며, 삼촌들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게 저자의 부모였다. 아버지에게는 서재가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집안의 어느 곳도 엄마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엄마의 방을 묻던 딸에게 집안 모든 곳이 엄마의 방이라고 말하는 표정이 저절로 읽혔다고 말하면 내가 오버일까. 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틈틈이 책을 읽던 저자 엄마의 시간 어디에도 엄마의 방은 없었다. 역할을 구분하고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읽히는 문장 앞에서 수시로 울컥했다. 엄마, 아내라는 이름으로 감당했을 상처의 무게가 보여서다. 어쩌면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 공간이 바로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할의 구분은 물론이고 방공호도 있던 집이라고, 중국 요릿집 회전판이 놓인 식탁이 있는 북성로의 집은 그들이 곧 이사하게 되는 수성구의 명문 빌라와 대조적이었다.


수성구의 명문 빌라는 갑자기 시대가 확 바뀐 느낌이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곳, 학군 따지면서 "어디에 살아?" 하는 물음에 우쭐하며 대답할 수 있던 시절의 저자가 본의 아니게 세상을 한번 배운 때였다. 그전까지는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들 모여 살면서 부대끼고 같이 먹고 잠자는 곳이 전부였다고 생각했다면, 명문빌라에서의 시간은 집의 개념을 새로 배운 곳이 아니었을까. 집의 브랜드로 경제력을 따져가면서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게 슬픈 건지 현명한 건지 모르겠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흔하게 보던 내용인 것도 같다. 민간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사이에 둔 학교의 아이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의 차단벽, 옆 아파트의 놀이터 출입금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다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또다시 여러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보냈던 20대의 저자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던 여러 방과 원룸, 다세대주택을 거친다. 그때 봤던 가난의 흔적들, 상대적 시선의 부와 가난 그 경계를 서성이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을 쓰고 14인치 TV로 세상을 읽으며 자발적 감금 상태였던 시간은 불안의 나날이었고, 누군가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내가 그 피해자가 되지 않은 순간에 안도하는 나날이었다. 어쩌면 가난은 불안과 동의어로 다가왔던 시절인지도, 저자가 바랐던 품위 있는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던 거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58~59페이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04페이지)


여러 방을 거치며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을 뒤로 하고, 다시 혼자임을 맞이하며 구했던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집에서의 시간은 가장 의미 있어 보였다. 읽는 나에게도 뭉클한 순간이었다. 비로소 독립적인 존재로 바로 서는 어느 공간의 입구에 있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셀프 인테리어를 하며 '아등바등' 몸부림치던 순간이 만든 건,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거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집을 고치는 일이 왜 필요했을까. 다시 혼자인 공간을 만들면서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러니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삶을 시도했는지도 모르지. 그전까지의 시간이, 몇 년 동안 여러 방(집)을 거치면서 보여주고 싶은 시절이었다면, 행신동의 집은 부끄러운 기억을 묻어두고 성장하듯 발을 디딘 곳이라고 보인다. 요가와 수영을 배우고, 유럽을 여행하고 유기견을 임시 보호했다. 그전에는 시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일상을 이곳에서 채웠다. 보호하던 유기견은 반려견이 되었고, 유럽 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인연은 애인이, 남편이 되었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짝사랑의 고백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저자는 자기만의 삶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듣다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사실은 꽤 어려운 시도였다는 것을 안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꿈꾸지만 쉽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친 적이 여러 번이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쉽지도 않은 일이 되고야 마는 걸까. 몸의 불편함을 느껴서 요가나 수영을 생각한 적도 있지만, 선뜻 등록하지 못하고 학원 앞에서까지 망설이게 되는 서성임.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일이 이렇게 가벼운 발걸음일 수 있을까? 무심코 드는 의문에 답을 주는 건 저자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산이라고 여기는 집의 의미를 다르게 겪어온 저자의 경험이 삶의 다른 방향을 열어준 거라고 말이다. 내가 집을 구하면서 들은 조언처럼 잘 팔리기 위한 집이 아니라,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채워가는 시간이 준 것은 거대했다. 수많은 이사로 만들어진 집에 대한 생각이 현재 저자가 머무는 집을 채우고 있다.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조금만 걸으면 숲길이 보이는(이른바 숲세권? ^^) 곳에 터를 잡고, 일상을 보낸다. 저자가 경험한 집들이 곧 저자의 역사가 된다. 그 집들을 거치며 성장한 한 사람의 내면에 무언가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당시에는 힘들다고 여겼을 순간들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까지 거쳐 온 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의 힘을 말하고 있다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 세월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 공간들을 거치지 않았다면 다 알지 못할 지금의 다짐이나 생각 같은 거.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집 자체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할 때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오랜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이, 아빠, 엄마, 모두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주방이나 거실처럼 공동의 공간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혼자 존재하고 싶을 때 거침없이 문을 열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곳, 쏟아지는 눈물을 펑펑 쏟아낼 수 있는 곳. 그런 공간을 가진 집을 생각하면 또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좋은, 좀 더 넓은 집을 꿈꾸며 그 집에 존재할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지니까. 그런데도 저자의 이야기에 소박한 공간을 더 떠올리게 되는 건, 물리적인 부유함이 아니라 비좁은 곳에서 부대끼며 걸어온 시간이 만들어준 '나'라는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형제자매가 많아서 단 한 번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지 못한 나였는데, 언젠가 나만의 공간을 꿈꾸던 그 오랜 세월을 뒤로하고, 이제 비로소 나만의 공간이 생겼는데도 그리워지는 어떤 것들 때문에. 그러니 '나만의 방'의 문제는 물리적인 '방' 자체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두 가지 감정에 힘들었다. 그 오래되고 낡은 집에 엄마를 버려두고 온 것 같은 죄책감과 오랫동안 벗어나고 싶은 그 집에서 나온 홀가분함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먼저 생각나는 집이었다. 나의 몇십 년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사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에 우울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자의 명문빌라 시절의 대조적인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소도시의 작은 마을, 오밀조밀 모여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정겹게 느낄 수만은 없었던 시선을 먼저 배웠다. 그 집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울고 웃으며, 부대끼고 싸우면서 자랐다. 어느새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나둘 집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엄마만이 그 공간에 남았다. 자랄 때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 커서는 잠시 머물고자 했던 선택으로 물리적인 공간이었던 집은 이제 우리에게 무엇일까.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198페이지)


저자의 문장 곳곳에서 마주했던 가족, 여자, 엄마의 공간을 생각한다. 이제 나에게 집은, 내가 새로 꾸린 이 공간에서 만들어갈 내일을 고민하는 곳이고, 엄마에게 새로 만들어줄 공간을 그리고 상상하는 곳이다. 이 집에서 당연하게 나에게 내어준 방 한 칸을 채우는 시간을 그리고 있다. 아직은 달랑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 구석구석에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할지, 나에게 또 무엇을 채워줄지 궁금하다. 여전히 게으르고 미흡한 것투성이지만,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볼 나를 그리는 일은 즐겁다. 동시에 단 한 번도 자기만의 방을 가진 적 없던 엄마의 공간을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욕심을 맘껏 부린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 시간은 기다림과 간절함, 설렘으로 채워지겠지.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시간을 상상하는 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그렇게 만들어갈 엄마와 나의 또 다른 역사를 기대한다. 엄마와 나 각자의, 엄마와 나 우리 모녀의 삶을 만들어줄 집, 방, 공간, 자리를. 너무 늦게 독립한 나의 미안함을 고백하면서, 나의 성장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한 기다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0-1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다 한 번 이상 울 거 같은 예감이 드네요~ 벌써 찡...ㅠㅠ

구단씨 2020-12-21 21:33   좋아요 2 | URL
어떻게 집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나 싶었어요.
순간순간 뭉클해지고, 가슴이 서걱거렸네요.
추천합니다. ^^

scott 2020-1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구단님,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이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이구절은 나한테 하는말 마음을 들킨것 같네요 집이라는공간 가족 그리고 시절 ,,,뭉클해지는 이야기

구단씨 2020-12-25 00:50   좋아요 1 | URL
문장이 너무 좋죠? ^^
진짜 뭉클한 부분이 많았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다시 올리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0-12-10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단씨 2020-12-17 14:4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내년에도 좋은 (수세미)작품과 좋은 일상 이야기 계속 들려주세요. ^^

scott 2020-12-24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서재 달인 축하 축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V 내일은 메리 크리스마스ᒄ₍⁽ˆ⁰ˆ⁾₎ᒃ♪♬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지금?'이라는 부정의 물음을 하고 싶은 일. 살면서 그런 순간 참 자주 맞이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절망과 좌절을 무기 삼아 핑계를 찾는다. 이래서 그랬던 거야, 하면서 말이다. 무너지고 힘들어지는 지금이 너무 당연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나 이렇게 힘들어하는 중이니까 좀 봐줄래?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우리는 넘어지고 절망하고 괴로울 때마다 내가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어야 할까. 어쨌든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숙제가 남았는데, 그 숙제를 다시 하기까지 얼마나 더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느냔 말이다. 고통스러운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빨리 그 바닥을 치고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뿐 만은 아닐 터. 근데 참 웃기다. 막상 그 불행의 순간을 내가 감당하고 있을 때는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요즘 며칠이 그랬는데, 이 책을 몇 페이지 넘기면서 마주한 시 한 편이 그 불행을 감당하고 바닥을 짚게 하는 듯하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에 대하여, 55페이지)


'아무리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생은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이상하게 공감된다. 그래, 바닥을 짚어야만 하는 순간이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넘어지고 싶었던 적 없고, 고통을 마주 하고 싶었던 적 없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언제나 자기 맘대로 왔다가 나한테 부딪히고야 말았던 게 바닥을 보게 하는 일들이 아니었나. 알면서도 애써 공감하려고 하지 않았던 적도 있겠지. 아니야, 세상이 나한테만 이렇게 매정한 거야,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시련이 마치 나에게만 이러는 것 같아서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용기도 내고 싶은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 불행의 끝과 바닥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바닥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그 바닥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언제나 마주치는 그 바닥은 그냥 딛고 일어서야 하는 거라고. 어찌 보면 이 말이 우리가 사는 일의 정답이 아닐까. 그 바닥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어쩌겠어. 그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까?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술 한잔, 183페이지)


이 시의 첫 구절을 읽고 웃음이 나더라. 인생과 나 사이가 무엇이라고 술 한잔 운운할까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듣고 나니 웃음과 진지함이 동시에 표정에 그려진다. 인생을 객관화해서 보다 보니 내가 인생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인생은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인생과 나의 관계에서 뭔가 손해 보는 것 같았을까? 내가 너에게 준 만큼 너도 나에게 줘야지 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러네, 세상사 뭐든 주고받기가 기본인 것 같은데, 내가 인생에 닿은 것만큼 인생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나 보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과 내가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고,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뭐든 가능한 거라고. 준 것과 받은 것을 계산하는 사이가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 사랑이 일방적일지라도 괜찮은 거. '인생에는 형식이 없고, 인생에 형식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바로 그거'(187페이지)라고 말하는 그의 깨우침이 인생의 연륜 같았다. 계속 겪고, 걸어오고, 부딪혀온 사람만이 배우는 삶의 자세 말이다.


내가 아는 저자의 시는 많지 않다. 그의 시보다는 산문을 접한 기회가 더 많았다. 이 책을 보면서 처음 알았는데, 그의 시가 노랫말이 된 게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다. 역시 좋은 글은 누구나 알아보기 마련인가 보다.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는 또 다른 영상으로 연결되어 그 감동을 이어간다. 이동원이 부른 <이별 노래>는 이 책에서 처음 보고 검색해서 들어봤다. 어떻게 이 가사에 이런 멜로디가 잘 어울리게 불렀을까 싶을 정도다. 듣다 보니 귀에 익숙했다. 정호승의 시와 연결해 생각하지 못하고 귓가에 흘리듯 들어왔던 것 같다. 그가 쓴 60여 편의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생각들이 함께 들려오니 시의 해설을 듣는 기분이다. 행간의 숨은 의미까지 들어가면서, 혹은 감정의 숨은 말들까지 엿본 느낌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이 자신의 문학을 이루는 한 몸이라고 생각한 저자가 이런 책을 바라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시를 쓰던 그 순간의 생각들을 그대로 읽히게 하고, 간직해온 추억과 경험들이 구절과 구절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반세기 동안 시를 노래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그의 시선이 애틋하다. 총 4부로 나눈 구성이 그의 인생 4편을 보는 것 같다. 동료 시인, 문학가인 스승들,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가 걸어온 시간 동안 마주한 모든 것에 관한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시 <산산조각>부터 시작해서, 법정 스님과의 인연, 시인 정채봉을 생각하는 마음, 거리를 두지 않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까지. 그의 경험과 배움과 성장은 경계와 구분 없이 자라났던 듯하다. 시와 산문에서 그의 생각과 고민,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는 감정까지 그대로 담아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그 풍경에 같이 빠져든다.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닿아있던 인생과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우연히 키우게 된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붙이는 과정이 흐뭇하고, 지인들과 함께했던 기억에 그리워하고, 부모님의 시간을 다시 새기는 모습이,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그 모든 감정을 글로 표현한 것일 뿐, 우리와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인간미가 넘쳤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가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나이, 533페이지)


특히 4부에서 많이 들려온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와 유대감이 없던 나도 울컥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관 속에 시를 넣어드리는 마음이 뭘까. 언젠가 겪을 나의 시간에 무슨 준비를 할까 잠깐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가이기에 앞서 인간 정호승을 더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작가가 부모님을 얘기하니 나의 부모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계산해보니 내 나이가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 훌쩍 넘겼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나를 낳고, 많은 자식을 키우던 엄마의 시간과 노력을 다 알지 못한다.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고생하던 엄마를 떠올릴 뿐이다.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처럼, 나도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심정을 더 잘 알 것 같은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오랜 세월 어지럼증으로 고생하시면서 고통의 순간을 버티는 엄마를 지켜보는 것만이 엄마의 보살핌을 받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다짐과 후회가 생긴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된 여동생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돌아가시면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지금 좀 힘들지만 무리해서라도 엄마가 필요한 것들 해드리고 싶다고. 지금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강밖에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해드릴 수 있을까. 저자가 부모님을 생각하며 어떤 추억과 후회를 같이 떠올리는 걸 보면, 어떻게 해도 후회는 따라올 것 같은데. 그냥, 우리가 덜 외롭고 덜 우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면 되는 걸까...


늦은 밤, 오래된 친구와 술 한잔 나누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시간 비슷한 경험을 쌓으며 걸어온 누군가와 지나간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저자의 시와 산문에 오랜 세월을 안주 삼아서. 책 제목처럼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외로움이 더 큰 것 같다. 아직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이 일이 누가 중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한 번 트인 귀는 막히지 않고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상한 마음과 망가진 관계는 고치기 힘들다. 얼른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당신들도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137페이지)


"우퍼를 하나 살까?"

형제자매들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어디로 이사를 하여도 층간소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단독주택에 살던 나도 이제는 아파트에 살게 됐다. 신축이냐 구축이냐를 떠나서 공동주택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소음은 예상하였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각오를 했음에도, 이사한 지 한 달 정도 지내면서 우퍼를 사자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평소에도 소리에 민감했지만 남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도 층간소음 정도는 충분히 감당했던 내가, 막상 계속 머물러야 할 집이라고 생각하니 이 소음에 자꾸 예민해진다. 왜 위층 사람들은 예의를 지키지 않는 거지?


처음에는 내가 참을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뛰고 소리를 지르는 데도 그걸 말리는 어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 소음을 참을 수 없어서 화가 났던 어떤 날은 위층의 현관문 앞에까지 간 적이 있다. 혹시나 윗집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고 싶었다. 역시 나를 괴롭히는 소음의 범인은 윗집이었다. 집안의 소리가 현관문을 뚫고 계단 아래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아이를 말리는 어른의 소리는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같이 노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기본이었다. 아, 나는 이 지점에서 화가 났던 거구나. 층간소음 자체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조심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들의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있던 거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로 다투거나 살인을 했다는 뉴스가 더는 새롭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익숙한 사건·사고가 되어버렸다. 이해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그 정도 소음을 못 참고 사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층간소음은 단순히 소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하고 참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감정적인 문제가 있다. 머리로는 무조건 참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공동주택에서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으로 살고 있을까 싶어 화가 치미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다툼이 되고 물리적인 폭행이나 살인이 된다. 불안하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이 화가 폭발할지 무섭기까지 하다. 이 소설을 만나고 나는 더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1112호 여자였고, 피해자는 바로 위층 1212호에 잠시 머물던 조카였다. 모두가 층간 소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문제를 제기하며 민감하게 굴었던 건 1111호, 작은 소음도 참지 못하고 바로 더한 소음으로 보복하곤 했던 여자였다. 그러니 1112호가 가해자라고 말했을 때 다들 의아해했다. 설마 1111호를 잘못 말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1111호가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1211호와 1011호가 모두 이사를 나갔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어느 날 1111호의 여자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동안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던 걸까.


작가는 이 아파트의 각 호를 조심히 비추면서, 우리가 어떻게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집중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선명하게 그린다. 집은 말 그대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형식을 가졌지만, 이곳 역시 집이다. 누구나 마음 편히 쉬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공간이 나를 더 불안하게 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곳이 된다면, 우리는 이곳에 어떻게 머무를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처음, 이 소음으로 문제를 삼던 1111호 여자는 알고 보니 재혼 가정이었다. 어린 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시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와 살았다. 누구도 재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에 최선을 다했다. 아내와 엄마, 며느리 자리에서 충실했다. 예쁜 딸도 낳았다.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냉랭했고 언제나 의심했다. 그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시어머니의 냉대와 언어폭력에 여자는 아이를 낳은 지 8년이나 지난 후에 산후풍에 걸리고, 조금만 바람이 닿아도 한기를 느낀다. 그때부터 여자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친했던 위층 1211호의 소음을 느낀다. 참을 수 없었다.


옆집 1112호 여자 역시 어느 날부터 소음을 감지한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던 여자는 위층의 소음에 1111호가 복수하는 행동임을 알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에게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그러다 점점 옆집의 공격은 그녀를 향하고, 그녀도 더는 참지 않는다. 1011호의 아기 엄마는 1111호의 항의로 아기의 울음소리에 민감해진다. 아이가 우는 존재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오직 위층의 항의가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이를 돌본다. 아이가 조금만 울어도 아이에게 화를 냈다. 그러다가 점점 아이의 울음을 무기 삼아 1111호를 공격한다. 아이가 울 때마다 천장 가까이 아이를 들어 올리면서 그 소리가 위층으로 잘 들리도록 노력했다. 그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절규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우는 아이의 얼굴, 그에 반해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우는 소리에 기뻐하면서 웃는 자기 얼굴에 경악했다. 이 소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기 아기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고,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각 호의 사연을 들으면서 점점 보이는 게 있다. 언제 어느 곳이나 소음은 있었지만, 그것을 더 잘 느끼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단순히 소음의 크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사방팔방 모든 것이 연결된, 특히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상생활의 모든 소리가 여기에서 저기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움직인다. 결국 소설 속의 사람들은 가정이 파탄 나고 병을 얻기도 하지만, 그게 꼭 소리 때문은 아닐 거였다. 이미 각자의 삶에서 불안과 불화가 깊숙이 뿌리 내려 있던 상태에서 민감하게 다가오는 소음은, 이들에게 갈등을 일으키고 폭발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일이 아파트에서, 이웃들을 향했을 뿐이다. 나의 마음과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현실과 답답한 벽을 마주한 채로 마음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들. 날이 선 시어머니의 말들이 가슴에 꽂힐 때마다 쌓여가는 외로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도 도움을 청할 곳 없는 현실, 처음 하는 육아가 힘들지만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일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게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고통스러운 마음이 소음이라는 매개로 폭발하고 말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피해자라고 하지만, 언제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나만 공감하는 건 아닐 테다. 소음이 만드는 문제에 앞서 그 소음에 민감해지는 이들이 모두 집에 있던 여자들이었고, 그 여자들이 어떻게 소음에 반응하기 시작하는지 그 과정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1111호 여자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남편과 상의했다. 아니, 여자의 일방적인 토로라고 해야 하나. 남편은 언제나 좋은 사람 흉내를 내면서 아내의 고통에 방관자였다. 괜찮겠지, 좋아지겠지, 아니겠지. 남편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서 자기 역할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살았다. 층간소음 문제까지 일어나자 해결하기는커녕 위층 남자와 술 한잔하고 기분 좋게 들어와서는 아내의 예민함을 탓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던 옆집 여자 역시 무책임한 남편에 혼자 양육과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고통받았다. 이 팍팍한 일상에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옆집 여자의 소음 공격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거다. 어쩌면 이해와 공감을 보여줘야 하는 건 아파트 내의 공동생활 대상자들이 아닌, 가정에서 서로에게 보여줘야 하는 게 시작 아니었을까.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가장 보살피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가족이니까. 바로 옆에서 나를 이해 못하고 상처받는 나의 마음을 들을 줄 모르는 이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소음을 참지 못 하고 공격에 이르게 하는 행동의 발단이 되어가는 건 아니었을까 싶다. 어쩌면 나만 고통받는 것으로 느끼는 그 배신감의 이름은 외로움일지도 모르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나만 힘든 이 상황 말이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엄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가 엄마의 삶을 잡아먹었다. 나도 머지않아 그것에 먹힐 거다. 옆집 아줌마는 무슨 소리를 듣는 건지 엄마처럼 계속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112페이지)


그럼 내가 경험한 소음의 시작은 어디일까. 이사를 온 지 한 달여, 아마도 나는 이 공간과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 아닐까 싶다. 이사를 오기 전날부터 몸이 불편했던 게 생전 처음 대상포진을 경험했고, 그 무서운 병은 언제 어디서나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끔찍한 후유증을 남겼다. 먹는 것마다 체해서 병원과 약국의 단골이 되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따라다녔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점점 문을 열어놓기가 싫어졌다. 아파트 주차장의 소음, 놀이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파는 장사꾼의 목소리까지 온갖 소리에 짜증이 났다. 환기한다고 습관적으로 문을 열어놓긴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지니 조금씩 주변의 것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중 하나가 소리였던 듯하다. 나와 상관없는 곳에서 전달되는 소리에 시간을 빼앗기게 되고, 이렇게 된 상황 하나하나가 못마땅했던 날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선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위층의 아이들은 집에서 운동회를 하고 어른의 발망치 소리는 계속된다.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도 여전할 것이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활이 만드는 소리에 그러려니 할 것이다. 나 역시 내 생활에 적응하면서 타인의 소리가 아닌 내 삶이 만드는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 그러고도 계속되는 소음이라면 또 다른 답을 찾아야겠지. 그거 말고 찾을 수 있는 현명한 답을 아는 이가 있다면 말해줬으면 좋겠다. 누구나 경험할 이 소음에 조금은 그 고통을 덜어낼 수 있도록.


너무 생생해서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썼을까 궁금했다. 이건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읽으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욱하는 감정을 참기 힘들 정도였다. 작가의 실제 경험이 담긴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이사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결과를 보여줬다. 그게 정답은 아닐 테지만, 그 순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이사라는 건 맞지 않을까? 고요할수록 더 잘 들리는 소리는 층간소음에서 빛을 발한다. 혼자 있을 때, 그 고요함에 집중할 수 있을 때, 외로움이 그 틈을 노리고 침투할 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층간소음이 누구에게 더 예민하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느냐 하는 상황을 이렇게 소설로 확인한다. 명확한 답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문제일 때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계속 묻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생활하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상처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그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소설이다.



#현대문학 #핀시리즈 #핀소설 #월간핀리뷰대회 #한국소설

#가해자들 #정소현 #아파트 #층간소음 #외로움 #고독

#책 #문학 #소설 #한국문학 #책추천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